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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의 권세(시편 37편 1절~11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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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의 권세(시편 3711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사람은 인생을 통하여 세 가지 소원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말하자면 혁명가적인 의식이라 할까요, '주여, 내게 세상을 개혁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를테면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럴 법합니다. '온 세상을 내게 주십시오' '온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내게 주시옵소서' - 주로 이러한 주제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 자신의 힘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고 조금 철이 납니다. 자신의 역부족을 알게 되니 기도의 주제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 온 세계까지는 안되겠고, 그저 집안식구들이나 주위 사람들, 그들 가운데서라도 좀 평화스럽게 살도록, 그리고 이 속에서 주님을 닮는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소원의 영역이 다소 축소되었다고 할까요.

그러다가 이윽고 노년이 됩니다. 죽을 날이 저만치 다가옵니다. 이제는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가지는 소원이 있습니다. '주여, 나 자신을 고칠 수 있는 은총을 주시옵소서'-보십시오. '나 하나를 고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트랜스포밍 셀프(transforming-sel-f) --- 나 자신을 개혁하지 못했습니다. 고쳐야 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살면서 평생을 두고 나름대로 다듬는다 해보았지마는 아직도 성격이며 생각이며 생활 속에 잘못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이여, 나 자신을 고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남은 힘을 모아 이렇게 기도하다가 필경은 자신도 다 고치지 못한 채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 앞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만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악한 자가 잘되는 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항상 주님만을 기대하고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결론을 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 --- 이 말 속에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 다 담겨 있습니다.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길 것이라고 합니다. , 요즈음처럼 땅 문제로 시끄러운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땅으로 인하여 너무도 지저분한 문제가 많습니다. 너도나도 많은 땅을 소유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내것이다'하고 쳐다보고 있으면 무엇이 뾰족하게 달라집니까? 죽을 때에 싸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땅은 마지막으로 몸을 눕힐 3평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그 땅 때문에 말도 많고 시비도 많습니다. 처처에 비난의 소리가 드높은 것입니다. 결코 당사자에게 복될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축복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땅을 지배하라'하신 것입니다. 땅을 다스려라. 땅을 지배하라, 그리고 땅의 소산을 먹으라 - 땅을 향유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모든 것을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든, 그 일은 의무가 아니다, 일한다는 것 자체가 복이고 내게만 특별히 허락해주신 특권이다 - 이렇게 여기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우리에게 주신 물질, 우리에게 주신 가정, 우리에게 주신 건강, 우리에게 주신 일 자체가 모두 특권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즐기도록 해주셨습니다. 공자님의 말씀 중에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지자불여호자 호자불여낙자(知者不如好者 好者不如樂者)' ---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성가대에서 귀한 찬송을 불러주었습니다 마는 무릇 음악도 그렇습니다. 음악을 아는 사람보다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음악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즐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가끔 음악가는 불행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직업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음악을 좋아하지도 즐겨하지도 않습니다. '밥벌이'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음악을 잃어버립니다. 음악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땅을 소유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 즐길 수 있어야만 축복이 됩니다. 화평--샬롬(shalom)을 즐기게 해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37장 전체를 읽어보면 '땅을 차지한다'라는 말이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9절에서는 "여호와를 기대(企待)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11절에서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22절에서는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29절에서는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34절에서는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은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향유케 해주십니다. 복을 주시되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않습니다. 물질을 주셨지만 그것이 걱정거리가 되면 축복이 아닙니다. 지식을 얻었는데 식자우환(識字憂患)이 되었으면 그 지식도 축복이 아닙니다. 즐겨야 합니다. 즐길 수 있도록 하실 때에 비로소 축복이 됩니다.

'땅을 차지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옛날 개념으로 돌아가 이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옛날에는 행정이 소도시 단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소도시마다 그 도시의 왕이 다스렸습니다. 교통수단이 좋지 않고 통신수단도 없는 때여서 큰 나라를 한 곳에서 다스릴 재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분봉왕(分封王)이 중앙의 왕이 내어준 지역을 다스려야 했던 것입니다. 분봉왕은 고을의 원님, 즉 고을의 왕입니다. 그들 위의 왕, 왕위의 왕, 나랏님이 계셨습니다. 왕 위의 왕, 나랏님의 개념에서 이해를 해봅시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어느 지역, 어느 한계 안에서 우리에게 왕권을 주십니다. 가정을 주시고, 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공장도 기업도 주십니다. 여기에서 왕으로 다스린다.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소유의 개념으로보다는 주권적인 개념, 유업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스린다' - '야라쉬'라는 이 말은 왕권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왕권을 주십니까? 온유한 자에게 주십니다. 구약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온유한 자가 누구인지를 한번 살펴보십시다. 온유한 자의 제 1호는 바로 모세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12:3)"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온천하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그렇게 칭찬하셨는데 모세는 혈기도 부리고 가끔 실수도 합니다. 이러한데도 모세가 온유한가? 문제는 그 말씀을 들은 바로 그 때가 중요한 것입니다. 모세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누나인 미리암이 모세보다 연상이어서 그런지 모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비난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구스 여자를 첩으로 삼을 수가 있느냐'하고 거침없이 비난합니다. 모세는 이 비난을 참습니다. 미리암의 비난에 대꾸하지 않고 잘 참았던 것은 아마도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워하지 않고 참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참 온유하다'고 하시며 모세 편을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미리암을 치십니다. 비난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참는 모세 그를 온유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온유하며(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의 특성이 온유라고 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온유하게 만들며 사랑하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은 온유해집니다. 가만히 보면 시어머니들이 새며느리를 맞고 기분 상해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당당하던 아들이 여자로 해서 바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못마땅해서 며느리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자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온유해집니다. 부드러워집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23절에 보면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온유해 집니다. 자연히 온유해 집니다. 성령의 열매가 인격을 온유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복을 열거하시는 중에 이번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라고.

우리는 종종 온유의 개념을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온유(溫柔)''온순(溫順)'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능동적이요 온순은 수동적입니다. 온유는 연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기 때문에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강하고 자신이 있기 때문에, 또는 충만하기 때문에 여유가 생기고 부드러워지는 것, 그것이 온유입니다. 영어의 미크니스(meekness)나 헬라어의 '프라우테이스'라는 말은 이 온유의 의미를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물리적으로는 진통제에 쓰이기도 합니다. 아프고 쑤시다가도 진통제를 맞으면 통증이 사라지고 아주 부드럽게 되지 않습니까? 바람으로 말하면 거친 바람이 아니고 미풍과 같이 조용히 불어 사람의 마음과 기분을 평안하게 만드는 바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길이 잘 들여진 망아지와 같이 길들여진 동물들을 표현할 때에도 사용됩니다.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비겁해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온유의 개념을 다시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중용(中庸)'의 뜻이 있습니다. 극단(extreme)이면 온유가 아닙니다. 온유란 언제나 중용을 취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문제되는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흑백논리, 폭력, 갈등, 조급함, 원한 - 이러한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전부 극단적입니다. 좀더 온유하게, 좀더 부드럽게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온유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따뜻한 온(), 부드러울 유(),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극단은 피해야 합니다. 말이 너무 거칠고 행동이 폭력적이며 끝까지 나갔기 때문에 잘못된 줄을 알면서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멈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내친걸음으로 그냥 내딛다가 마지막에 부러지는 것을 봅니다. 강한 자는 꺾이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중용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유의 두 번째 의미는 셀프 컨트롤(self-control) - 자제(自制)입니다. 내 마음을 다스리고 제어(制御)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 자기 통제가 가능하게 될 때에 온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방종과 분노, 증오로부터 자기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함입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강함, 그 위에 온유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온유는 '겸손'이라는 말로도 통합니다. 온유와 겸손은 쌍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손바닥의 안팎과 같습니다. 겸손이란 스스로 낮추는 마음이요, 온유는 스스로 높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 겸손이란 소극적인 마음이요, 온유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 비교해보십시다. 억울하게 욕을 먹었습니다. 그럴 때에 잘 참고 견디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빙그레 웃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또 억울하게 매를 맞는다고 합시다. 매를 맞으면서 내 잘못과 허물을 뉘우치고 그 매를 감수하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매를 맞는 순간, 억울하게 매를 맞는 아픔을 생각하기 전에 자기를 억울하게 때리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당신, 지금 실수하고 있소. 이렇게 때려놓고 어떻게 수습할 것이오?' '언젠가는 후회하고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텐데……' 자기를 때리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빙그레 웃습니다. 여유로움과 부드러움, 이것이 온유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며 인격의 힘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스데반의 경우를 봅시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천사의 그것과 같으며,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하나님이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억울하게 죽는다고 하는 아픔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죄를 지어놓고 자자손손이 얼마나 큰 멸망을 당합니까? 얼마나 무서운 저주를 받습니까? 그 앞날을 바라보면서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겸손이라는 말은 사람에게 쓰는 용어요, 온유는 하나님께 까지도 쓰는 성품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겸손하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시고 선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시는 온유하신 하나님 - 하나님의 성품에까지 있는 귀한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어느 아버지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니다. 그 아버지는 의사이고 교회의 장로님이었습니다. 그 아들 또한 의과대학을 나왔는데, 결혼하기 전에 아이까지 있는 술집 여자와 동거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극구 말렸지만 아들은 '저런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하며 만사를 제치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1년이 넘도록 돌아오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속이 상한 아버지는 애를 쓸 만큼 쓰다가 마지막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서 수습해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아들을 불러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직접 사는 곳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형편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저를 찾아왔습니다. 돈이 떨어져서 먹고 살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 점심때가 되어서 식사를 같이 하려고 식당으로 올라가는데 그만 그의 아버지와 맞닥뜨리고 말았습니다. 집나간 아들을 1년만에 보는 아버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안경 벗어!"하고 아버지가 소리를 지릅디다. 위험하니까 안경은 벗겨놓고 때리려 했던 것입니다. 역시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안경 벗어!'하고 재차 소리를 지르는데 제가 얼른 가로막아 진정을 시켰습니다. 다른 쪽으로 간 그의 아버지는 분을 삭이느라 애를 쓰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들을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가 식사를 마쳤습니다. 내려와서 돈을 내려고 보니 아버지가 이미 계산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을 붙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이다" --- 거기서 아들이 마음을 돌렸습니다. 회개하고 미국 가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아버지는 온유한 아버지입니다. 할말 다 하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온유란 여유가 많습니다. 또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온유한 선지자 존 칼뱅이라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칼뱅 선생은 극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마는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거기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칼뱅 선생은 젊었을 때에 조용하게 공부할 생각으로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가던 중 제네바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월리엄 파렐(William Farel)과 아는 교인들에게 붙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 제네바를 바로잡아주십시오' --- 간절히 요청합니다. 칼뱅 선생은 결국 공부할 것을 중단하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열심히 일합니다. 일주일에 세 번이 아니라 하루에 세 번씩 설교를 했습니다. 정치가로, 종교개혁자로, 목사로, 제네바를 위해 정성을 다했습니다. 너무도 진실하게 힘써 일하다보니 부작용이 많았습니다. 3년 후 제네바 의회가 공식으로 추방 명령을 내립니다. 추방당한 그는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스트라스부르에 가서 조용히 연구생활을 했습니다. 칼뱅 선생이 떠나자 제네바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의회는 다시 그를 모셔와야 되겠다는 결정을 하고 제발 와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럴 때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안가겠습니다. 그러나 칼뱅 선생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야지요' 하고 받아들입니다. '언제는 내쫓더니 이제는 다시 오라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서슴없이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평생토록 복음을 전하고 오늘의 제네바를 만든 것입니다. 세계의 낙원 제네바는 칼뱅 선생의 힘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칼뱅의 그런 마음을 온유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분대로 사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멀리 내다보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조용히 여유 있게 순종합니다. 순종 자체를 즐깁니다. 이것이 온유의 힘, 온유의 권세인 것입니다. '종교적인 믿음을 저버려서 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없다' -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이 그의 저서한 영혼을 추구하는 현대인(Modern Man In Search Of A Soul)에서 한 말입니다. 자신의 종교 인생관을 되찾지 않고 치료받은 사람이 없다 -- 수천 명을 상대로 연구한 뒤에 한 말입니다. 병의 원인, 인격 파탄의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교만이요, 이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은 온유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만을 기뻐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하나님만을 참아 기다립니다. 오래오래 기다립니다. 행악하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 잘되는 것도 질투하지 않습니다. 분노하지 않습니다. 신앙적 온유를 가진 사람 --- 그에게 땅을 주시고, 그를 높여주시고, 그에게 왕권을 주십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요 현실적 진리입니다. 동물세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포악한 동물의 세계는 멸종됩니다. 온유한 동물만이 천지를 돕습니다.

가정에서건 사회에서건 직장에서건 강한 사람은 부러지게 마련입니다. 마지막으로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부부싸움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보나마나 목소리 높은 사람이 진 것입니다. 온유한 자, 끝까지 웃는 자가 이긴 것입니다.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라 --- 풍부한 샬롬으로 즐기리라고 말씀합니다. 평강의 약속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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