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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베드로후서 3장 14절~18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할 때, 의사는 자기의 온 정성과 마음과 기술을 다해서 환자를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골치아프고 손을 떼고 싶거나 돕고 싶지 않은 환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치료하는 의사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잔소리 많은 환자라고 합니다. 진찰 결과라든가, 처방이라든가, 약이라든가, 의사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습니다. 다 의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 압니다. 이런 환자는 '차라리 당신 스스로 고치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영 대하기 싫다고 합니다.
두 번째 환자는 미안한 말씀입니다 마는 학교 교사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가르쳐 버릇해서 만사를 따져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러면 이렇게 된다, 또는 공식에 의해서 모든 것을 따지는 그런 체질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이렇게 저렇게 치료를 하면, 이것 먹으면 낫느냐, 이렇게 하면 꼭 낫느냐, 왜 그러하냐, 부작용은 없느냐 합니다. 치료라는 것이 A + B는 아닙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살고 죽고가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따지니까 의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해줄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 참 골치 아픈 환자구나 할 밖에요.
세 번째 환자는 조급한 마음을 가진 환자입니다. 예를 들어 항생제 같은 약은 투여하고 나면 적어도 사흘이 지나서야 효과가 납니다.
그런데 약을 한 봉지 먹고는 왜 안 낫느냐, 아침에 치료받고는 저녁에 왜 안 낫느냐, 그리고 왜 이렇게 아프냐고 한답니다. 그래서 보따리 싸 가지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다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 만나면 아주 골치 아프고 '빨리 다른 데로 가라'하고 싶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도 본래 위장이 좋지 않아서 가끔 발작을 했습니다.
그래, 십 년 동안이나 한 의사로부터 계속 치료를 받았습니다. 위가 나빠질 때마다 그 의사에게 가서 회복하고, 또 회복하고…… 그러다가 그 방면에 더 훌륭한 의사가 있다고 듣고는 새로운 의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거기서 치료를 다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모두가 후회했습니다. '전에 치료받던 그 의사에게서, 그 병원에서 치료받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생각해보세요. 왜 이런 것입니까? 우리의 교육도,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영 순종할 줄을 모르고, 영 믿음이 없고, 만사를 조급하게 생각하고---이런 인간은 구제불능입니다. 의사도 이런 사람을 만나면 아주 골치 아파합니다.
인격 형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변화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자연적 변화가 있고, 개척적 변화가 있습니다. 보세요. 사람이 나이가 먹고 몸이 자라면 그에 따라서 지식도 자라고, 생각도 자라고, 경험도 자라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사건에 부닥치면 따로이 공부를 안 해도 알만큼은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통해서 압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공부를 통해 배워서 내 마음속에서, 내 인격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 나라에는 '신부교육'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자들, 혹은 남녀간에 서로 화끈하게 연애만 했지 결혼생활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이것은 공부가 아닙니다. 그런데 공부 안 해도 다 아는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뛰어들어서 결혼하자마자 첫날부터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래서 문제가 됩니다. 진작에 공부했어야지요. 남자가 무엇인지, 여자가 무엇인지, 둘이 산다는 게 무엇인지, 남남끼리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입니다. 성격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억 년 역사와 함께 변했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배웠고,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 배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 채로 있다가 막상 부딪히니까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이지요. '이럴 줄 몰랐다'고 말입니다. 왜 몰랐습니까? 그것도 몰랐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래서 꼭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지식이 무엇입니까? 내가 경험하지 않고, 내가 부딪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생각과 교육을 통해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몸이 먼저 가는 것은 자연적 변화요, 정신이 먼저 가는 것이 교육입니다.
경험이 먼저 가는 것은 물리적이고 동물적인 것이요, 지혜가 먼저 가는 것이 교육입니다. 배운 바 인격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내적 성장이 있는가 하면 외적 성장이 있습니다. 또 지식의 성장이 있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안다는 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인격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인격적 성장---personality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성품의 성장이 있습니다. 사람됨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긴 시간 동안 character의 변화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리스도의 마음---온유와 겸손과, 그리스도처럼 느끼고,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고, 그리스도처럼 기뻐하는 그런 인간성, 그런 인간, 그런 영적 존재로 성장해나가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목표는 언제나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입니다. Christ life person--거기에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은 '균형 있는 성장'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 그 자라는 모습을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가시더라." '키가 자란다'--체육, '지혜가 자란다'--지육, '하나님께 사랑스러워가시더라'--종교, '사람에게 사랑스러워가시더라'--윤리, 이렇게 네 가지 방향으로 균형 있게 성장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의 본문 14절은 말씀합니다.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샬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앞의 말씀과 문맥을 연결해보세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13, 14절)"----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바라보며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하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행복인 그런 관계로 나타나기를 힘쓰라 하심입니다. 여기서 점이라는 것은 날 때부터 생긴 것이요, 흠은 그 후에 생긴 것입니다. 점이나 흠이 있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제물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깨끗해야 합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는 평강, 바로 그러한 헌신적 존재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산 제물로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있어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18절)." 이 말씀은 문법적으로 볼 때에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오직 은혜 안에 자라가라' '그를 아는 지식 안에 자라가라'입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오직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입니다. 은혜에 대한 지식, 또 저를 아는 지식, 그 속에서 자라가라는 해석입니다. 문제는 은혜를 아는 지식입니다. 은혜 안에 진정한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성장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것은 조그마한 풀포기 하나를 가꾸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을 줄 수도 있고, 거름을 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린아이를 키워봐도 그렇습니다. 젖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기저귀를 채우고…… 이런 것을 우리가 할 수 있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앞에 온유, 겸손해야 합니다. 성장케 하시는 것 그대로가 은혜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성장만으로는 모자랍니다. 인격적 성장, 성품의 성장, 영적 성장이 필요합니다.
그실 사람에게 있어 지적 성장은 긍지 속에 있고, 영적 성장은 은혜 안에 있습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살고, 자랑을 먹고살고, 사랑을 먹고 자라납니다. 사랑을 믿지 아니하면 성장이 정지됩니다. 성장이 정지되면 죽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만큼만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어리고 유치할 때에 어떻습니까? 아주 어렸을 때에는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살면서도 흑백논리에 매여 삽니다. 그래서 칭찬을 하면 마냥 좋아하고 책망을 하편 마냥 슬퍼합니다. 또 선물을 받으면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러나 꾸중을 들으면 입이 나오고, 우울해하고, 울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매를 맞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더니 정말 나는 이 집 자식이 아니구나,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었나보다'해서는 며칠 동안을 슬퍼하고 아파합니다. 그런가하면 한번 사랑 받으면 며칠 동안을 굉장히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뻐했다, 슬퍼했다, 좋아했다, 웃었다, 울었다, 엎치락뒤치락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을 하고 철이 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 때는 칭찬을 해도 좋아하고, 꾸중을 해도 고마워하고, 매를 맞아도 감사해합니다. 내가 매맞아서 아픈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때리는 분의 마음을 생각하니까 사람되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때리는 손길을 생각하니까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이렇게 되면 그실 두 가지가 아니요, 하나입니다. 꾸중도 사랑이요 칭찬도 사랑이요, 매를 치는 것도 사랑이요 위로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성공도 실패도 다 사랑입니다. 이것이 별도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장하고 보면 다 하나로, 다 은혜로 수용되고 소화된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율법과 은혜, 이것이 다른 얘기가 아닙니다. 율법도 은혜요, 은혜도 은혜요, 계명도 사랑이요, 긍휼도 사랑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말미암았음을 알게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그것도 사랑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그것도 사랑입니다. 모든 것, 율법과 은혜, 다 사랑입니다. 율법의 깊은 뜻도, 그 많은 계명도, 그 심판까지도 다 사랑으로 소화됩니다. 이것은 높고 성숙한 인격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독일에 수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서독에서 동독으로 차를 몰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 나라처럼 산이 많지 않고 평지가 아주 많습니다. 그 넓은 평지를 고속도로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막 쏟아지더니 딱 개이면서 무지개가 생기는 것입니다. 제 생전에 그렇게 화려한 무지개는 처음 보았습니다. 대개 무지개는 한 줄만 서는데 쌍무지개가 아주 둥글게 섰습니다. 평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지르는데, 그 둥근 쌍무지개 사이로 차가 지나가는 것이 마치 무슨 아취 밑을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속도로에서 차를 멈추고 구경을 했습니다. 그 일곱 색이 아주 화려하고 영롱합니다. 사진을 찍고 싶었습니다만, 그런 장면은 180도 와이드 앵글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 렌즈를 가지고 가지 못했기에 무지개 한쪽밖에는 못 찍었습니다. 아무리 찍어보려 해도 이쪽을 찍으면 저쪽이 안나오고, 저쪽을 찍으면 이쪽이 안나오고 해서 참으로 유감이었습니다. 사진은 나오기는 잘 나왔습니다마는 그 때의 장면을 다시 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보면 무지개는 반달 모양입니다. 그러나 로켓트를 타고 대기 밖으로 올라가 저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무지개는 그실 둥글다고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발을 땅에 붙이고 바라보면 반달 모양이요, 반밖에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둥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렸을 적 그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부분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은혜에 사는 사람은 전체적으로 봅니다. 유치한 사람은 평면적으로 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입체적으로 봅니다. 어렸을 때에는 현재에 집착하여 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영원한 빛 안에서 봅니다. 또한 유치한 사람은 물리적으로 보고 성숙한 사람은 인격적으로 봅니다. 좀더 성숙한 사람은 영적으로 봅니다. 신령한 세계에서 보면 모두가 은혜요, 모두가 성공이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기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오직 은혜 안에 자라가라, 그를 아는 지식 안에 자라가라'--심령은 이 은혜 안에서만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활발하게, 건강하게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윌링턴이라는 영국의 해군제독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해군제독에게 골치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병사 하나가 상습적으로 탈영을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 있어서 탈영은 사형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병사는 붙잡아서 감옥에 넣어두면 또 탈영하고, 붙잡아두면 또 탈영하고…… 사고뭉치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놓아두다가는 영국 해군의 기강이 무너지겠기에 마침내 군법대로 사형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윌링턴 제독은 병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가르치고 싶었다. 제대로 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너에게 채찍을 들기도 하고, 처벌을 하기도 하고, 강제로 노동을 시키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가르치기도 하고, 갖은 노력을 다 했는데도 안 되는구나. 그런고로 너는 사형이다." 그 때에 옆에 있던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제독님, 제독님께서는 저 병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았다고 하셨는데, 단 한 가지 안 해보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제독은 곰곰 생각하더니 맞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병사를 무죄석방,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병사가 그 때부터 좋은 청년이 되더랍니다. 사람은 은혜 안에서만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랑을 느낄 때에만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창의력도 생깁니다, 지혜도 생깁니다, 몸도 건강합니다. 은혜와 사랑-그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15절)"--우리가 하나님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래 참으심, 주님께서 곧 재림하셔야겠는데 재림을 연기하고 계실 때에 우리는 답답해합니다. 왜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입니까? 왜 불의한 사람에게 속는 것입니까? 왜 착한 사람들에게 이런 고통이 있습니까? 주여, 빨리 재림하옵소서--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내 구원이 되고 여러분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모순이 있다고 원망하지 맙시다. 주의 오래 참으심, 이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또 한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저'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말씀함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는 성경 속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성경을 보는데, 전체적으로 보는 법이 없고 꼭 한 절씩만 봅니다. 성경을 보기는 봐야겠기에 꼭 한 구절씩만 보는데 아무 데나 점치듯이 딱 펼쳐 봅니다. '예수께서 가시니라'--그래, 나도 가야지, '예수께서 주무시니라'--나도 주무셔야지,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성경을 딱 펴놓고 보았더니 마태복음 27장 5절이 나왔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영 찝찝한 기분이 든 이 청년은 아무래도 한 절을 더 봐야겠다 싶어 또다시 성경을 펴보았더니 누가복음 10장 37절이 나왔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더 황당해진 청년은 다시 한번 성경을 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요한복음 13장 27절이 나왔습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여러분, 성경을 통합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깊은 뜻을 봅시다. 창세기를 보든, 잠언을 보든, 시편을 보든, 마가복음을 보든, 어디서나 우리는 예수님을 뵈어야 됩니다.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뵙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성장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자라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나이 90세가 넘은 한 유명한 사진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많은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난 72년 동안 사진작가로 크게 활약을 했는데 그 많은 작품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좋은 작품이 어느 것입니까?" 사진작가는 서슴지 않고 대답합니다. "내일 아침에 찍을 사진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생각은 미래에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비행기를 타십니까? 저는 비행기를 타면, 타자마자 선행지의 시간으로 시계를 고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지금 서울은 몇 시겠다, 서울에서 지금 누가 잠들었겠다, 지금 깨고 있겠다'--그런 생각은 왜 합니까? 저는 시간을 선행지의 시간으로 맞춰놓고 '그곳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겠다, 나를 데리러 나오겠다'--그런 생각을 합니다. 타자마자 그렇게 합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항상 우리의 생각은 저 미래에 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나 현재에서 뭉개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 사람의 입장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옛날에는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이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모름지기 어른스럽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강철왕 카네기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묘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졌다고 합니다. '여기에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잘 활용하여 크게 성공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 얼마나 멋진 얘기입니까? 그 한 사람이 똑똑하고 잘났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랑이 있고 덕이 있기에 자기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을 잘 활용해서 성공한 사람이 여기에 잠들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얘기입니까?
이 무더위에 여러분이 고생합니다. 많은 고난과 함께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저 앞에 있어야 합니다. 짜증내지 마세요. 오직 은혜, 그리고 은혜 안에, 그 은혜의 지식 안에 오늘도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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