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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데살로니가전서 5:12-2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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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데살로니가전서 5:12-2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행실이 좋지 못한 어떤 사람이 기성복을 파는 양복점에 들어가 바지 하나를 입어보고 사는 척 하다가 돈을 내지 않고 그냥 나와 버렸습니다. 양복점 주인이 뒤따라 나와서 이 사람을 잡으려고 했지만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마침 경찰이 있기에 도움을 청해서 경찰이 그 도둑놈을 뒤쫓아가며 그 자리에 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도망자는 계속 달리기만 했기에 하는 수 없이 경찰은 총을 꺼내어 쏘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아무래도 위를 쏘면 도둑이 죽겠기에 총을 아래로 겨누었더니 어느새 주인이 달려와서 총을 위로 겨누라고 했답니다. 아래를 보고 총을 쏘면 자기 바지가 상할 것을 염려하였을 뿐 그 사람의 목숨이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두고 사는 곳,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 것인지에 의해 그 사람의 사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다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생각의 거점은 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추구하고 또 어떤 이는 저것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이 있는 것입니다. 돈만 아는 사람을 우리는 유물론자이며 육체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는 향락주의자라고 말합니다. 남이야 죽든 살든 자기의 이익만 보겠다는 사람은 이기주의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야 어떻게 됐든 부모님의 마음만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합니다.

항상 부모님께로만 마음을 두는 사람은 효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이것을 제일 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잘살든 못 살든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보통 두 가지로 생각하는데 하나는 추상적인 것이요, 또 하나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추상적인 것으로는 진리, 의의, 사랑, 화평, 공의, 희생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할 때,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등 복잡한 문제로서 정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때로는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디까지가 공의이며 어디까지가 틀리는 것인지 어려운 것입니다.

또 보편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은 대개 모든 인류가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온 인류를 향해서 또는 온 역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만 문제는 나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나 개인이 오늘 이 시간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할 때는 참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은 이 시간에 무엇 때문에 나왔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나와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런 구체적이며 순간 순간 나 자신이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 뜻은 주도적이요, 창조적이며,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고로 예외 없이 반드시 성취되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3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를 낳을 때 그 아이에 대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에 합당한 양육도 못하고 또 원하는 결과를 얻기란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소원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가 커서 이렇게 되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에 그치기 쉽지만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주도적이며 창조적이고 효과적이기에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 능력과 지혜와 사랑 안에서 반드시 그 분의 뜻하시는 바를 이루신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궁극에는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찾게 됩니다. 내 뜻과 그의 뜻이 다르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 뜻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언젠가는 내 스스로 내 뜻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뜻과 반대되는 내 뜻을 언젠가는 부인되고 말살되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다시 결론을 내리면 내 뜻을 그의 뜻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내 뜻을 고집한 다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는데 이대로 살지 않고 반대로 살겠다고 해도 언젠가는 완전히 손을 들고 후회하며 눈물 흘리고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벌써 돌아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탕자도 결국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과 정력을 낭비했습니까? 그런고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뜻과 내 뜻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 뜻을 그의 뜻에 맞추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알면서 그것과 반대로 사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언젠가는 탕자와 같이 거지처럼 불쌍하게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돌아올 때도 좀더 빨리 지혜롭게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굴복시켜야 하겠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의 사랑 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로 보증하신 사랑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은 결코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 계명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것들입니다. 때로는 이해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매를 맞는 자식이 어떤 경우에 부모에게 불평하고 심한 경우에는 아주 배반까지 하지만 다 착각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부모이든 다 자식을 사랑하며, 이 사랑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해되든 아니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절대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 보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으므로 어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고로 이 하나님의 크고 신비로운 사랑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신의 자녀들이 어떤 자녀가 되었으면 하고 원하십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셨습니까? 아니나 자신부터 돌아가 봅시다. 나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계십니까? 그저 집 하나 장만하는 것입니까? 이런 것은 제쳐놓고 정말로 내 인격의 이상이 무엇이며 또 이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혹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상도 없는 사람에게 무슨 현실을 기대하겠습니까? 고로 우리에겐 이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이상이 꼭 있어야 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목회학을 강의한 다음에 졸업반 학생에게 시험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목사다 되어서 어떤 목사라는 말을 듣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학생들이 고전하며 답을 썼습니다. 마지막에 한 학생이 끝까지 앉아 있다가 답안지를 내며 하는 말이 "무엇이 정답입니까?"하고 물어 왔습니다. "네가 지금 대학을 마치고 신학에 와서 3년을 공부했고 이제 머지 않아 곧 목사가 될 것인데 어떤 목사가 되기를 바랐는지 벌써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랬더니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어떤 것을 답으로 써야 합니까?"하고 한심한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무슨 말을 쓴 것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 단 두 줄 이상 쓴 것도 낙제다."라고 잘라 대답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난 평생 이런 목사가 되고 싶다라는 것은 벌써 생각했어야 했고 답은 한 줄이면 됩니다. 뭘 복잡하게 쓸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 내가 일생을 통해서 양보할 수 없는 나의 이상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분명해야 합니다. 요한 31:4에 보면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하는 말씀이 있는데 옳은 말씀입니다.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은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소리가 나지 않으면 종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복은 소유함으로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복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서로 으르렁대고 싸우며 시기하면서 눈물이 있으면 무슨 행복입니까? 행복이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하나, 부하나, 실패하나, 성공하나 상관없이 무조건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합쳐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 없는 기쁨은 참 기쁨이 될 수 없고, 기쁨 없이 감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 이 세 가지가 합쳐져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서 소고할 때도 그들이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참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깊이 생각하고 저 미래를 생각하며 근본을 생각하는 겸손한 지혜가 있어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참 기쁨은 얻는 것도 아니요, 소유하는 것도 아니요, 빼앗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는 것이요.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애통의 눈물 뒤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죄를 지었던 사람이 회개하고, 그 모든 맺혔던 것을 다 풀어헤치고 깨끗한 마음으로 통회하며 눈물을 흘릴 때 그 다음에 오는 기쁨, 이 기쁨이 참 기쁨입니다.

첩첩이 비밀을 쌓아놓은 데는 기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 으르렁대고 시기 질투 속에서 파티를 연다고 기쁨이 있겠습니까? 애통하는 자, 진정한 회개 뒤에 오는 이 환희, 이 기쁨이야말로 참된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기뻐하라,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이 말은 햇빛도 들지 않은 축축한 감옥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에게 말한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희락의 복음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어두운 그림자는 전혀 없습니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감옥 속에서 찬송을 부르며 기뻐하며 기쁨을 권고한 것입니다. 절대 희락, 절대적인 기쁨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하나님과의 만남이 기도입니다. 구하기 전에 아신다고 하셨는데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하고 아쉬운 자가 구하는 것이지 구하라고 권고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나 구하라는 말처럼 중요한 복음은 없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 어머니들도 어린 아이들이 어릴 때 "엄마, 엄마"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좀 크면 "어머니" 하다가 시집을 가면 "어머님" 합니다. 어머님 소리는 일변에 한 번 듣기가 어렵기에 엄마라고 부를 때가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때 어머니를 불러야 합니까? 제가 아는 교수 한 분은 섭섭하게도 아들이 불량했습니다. 아들은 칼을 들고 어머니에게 집을 팔아 달라고 대들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아들을 둔 그 어머니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 아들은 병도 안 걸려요, 다리가 부러져서라도 병원에 입원해 진정으로 어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어봤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언제 부릅니까? 간사한 인간들은 도대체 하나님을 부를 줄 모릅니다. 같은 기도를 해도 죽을 지경이 되어야 겨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기를 원하시며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 앞에 나오고 하나님을 만나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기도하라! 그것이 내 뜻이다, 내 이름을 불러라! 그러면 내가 주마. 얼마나 좋습니까? 같은 기도라도 진실한 기도이어야 합니다.

! 기도 안 하는 자에게 기도하게 하는 묘약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기도하게 만들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끊임없이 기도를 하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돈 몇 푼 생기면 기도를 끊습니다. 하던 기도도 멈춥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원한다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축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자에게 감사하게 하고,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 은혜를 알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저는 목회 25년 동안 배운 것이 많습니다. 교우들 중에 건강에 대한 감사 헌금을 하는데 이것은 병원에서 퇴원할 때입니다. 항상 건강할 때 건강에 대해 감사하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건강에 대해 감사하게 만들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건강에 대한 고마움을 알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선택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끔 서양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 그들은 우리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아침 식사에 보통 계란 후라이를 먹는데 접시에 묻은 기름을 빵 조각으로 깨끗이 닦아 먹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또 좀 심한 사람은 접시를 들고 아예 혀로 핥아먹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독일인에게 물어 봤습니다. 그 분 대답은 그들이 2차 대전 때 치즈 한 조각 가지고 일주일을 먹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어려웠던지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 접시에 묻은 기름 한 방울도 소홀히 할 수가 없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대할 때마다 감사하고 좋은 음식, 나쁜 음식 가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요즈음 음식 귀한 줄 모르고 버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범사에 감사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원하고 계십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잘살고 못 사는 것에 대해 흥미 없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기뻐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즘 30년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얼마나 반가운지 온 국민이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았다면 싸우고 헤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30년이나 헤어져 있다가 이제 만나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 감격으로 일생을 살았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어떤 분은 이 감격 이대로 지금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기도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너희가 기뻐하는 것, 너희가 기도하는 것, 너희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것을 내가 너희에게 주려 하고 이것을 가르치려 하고 이것을 너희들이 듣도록 원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런 사람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기도 : 감사할 줄 모르고 은혜를 모르는 저희들에게 오늘도 은혜 베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보다 더 겸손하게 하시고, 보다 더 진실하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성장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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