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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소금의 맛(마 5:13~1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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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맛(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춰주니라. 이 같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산상보훈 중에서 지금까지 팔복을 공부했고, 오늘 13절에서 16절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한 책임이 무엇이며 이웃과는 어떤 관계인가를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곧 소금이요, 빛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소금의 위치, 빛의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그 관계성이 소금의 역할, 빛의 역할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우리 자신이 빛이고 소금이 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소금에 대해서만 생각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먼저 이 말씀이 일반 모든 성도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둘째로, 이 본문은 바로 앞에서 핍박당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하셨으므로 문맥을 연결해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면서도 세상을 떠나지 않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밖에 살지 않습니다. 산 속이나 은둔생활로써 세상으로부터 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 교회를 짓고 함께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설사 핍박이 있다해도 핍박 때문에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핍박을 받으며 삽니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듯이 여기에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부뚜막에 있는 소금이라도 그대로 두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음식 속에 넣어야 비로소 소금이 소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핍박하는 세상을 향하여 도전적으로 들어가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 것이 소금으로 상징이 된 것입니다. 소금은 기독교인의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나약하거나 피해서는 안됩니다. 직장이나 가정이나 어디서든 그리스도인이 없는 세계 속에 내가 들어가서 넘어지며 깨어지더라도 소금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적극적인 신앙 자세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소금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했는가에 대해 생각하려 합니다.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소금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책에서는 20세기에 와서 알려진 소금의 성질에다 이 말씀을 결부시켜 "소금은 폭발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니 우리들도 폭탄같이 일해야 한다"라고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남쪽에는 염전이 많이 있습니다. 그 염전 가운데는 한국화약 공장이 있는데 염전과 화약 공장이 왜 함께 있는지 필자는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 소금이 화약 만드는 원료이기 때문에 염전 한 가운데다 화약 공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쉽게 우리가 경험하는 것으로 는, 김에 소금을 발라 굽게 되면 톡톡 소금이 불에서 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폭탄입니다. 이 원리를 알고 있던 어느 분이 "성도들은 소금같이 폭탄적으로 일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나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의 소금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당시,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진 소금에 대한 개념으로 돌아가서 이해함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소금에 대한 이해에 공통점이 많습니다만 예수님 시대의 문화권 안에서 이해됨이 예수께서 의도하신 그 뜻에 보다 가깝게 접근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소금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 때 팔레스타인 근방에는 암염이 아주 흔했습니다. 요즈음은 김장철이나 장을 담글 때는 소금 값이 폭등하기도 하지만, 그 때는 대단히 값이 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하는 말씀에서 값이 싸다 하는 입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희는 세상이 다이야몬드다, 또는 사탕이다 라고 하지 않고 하필이면 소금이라고 했느냐고 의문을 가집니다만, 가장 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갈릴리 어부들은 귀족이 아니라 서민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신분을 바꾸어 제자로 삼았으니, 그들의 가슴은 부풀었습니다. 이제 메시아가 왕이 되면, 우리들도 덩달아 출세해서 귀족이 될 것이고, 그러면 팔자 한번 고치는구나 하고 들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열 두 보좌를 놓고 누가 윗자리에 앉을 것인가에 대해 명예심으로 눈이 어두워지기까지 했습니다. 출세하고자 하는 명예심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에게는 높아지고자 하는 출세욕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보석이라 하지 않고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도 제자들의 기대와는 대단히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어부요, 소금이라고 불렀습니까? 아주 평범하고 값이 없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신격화되며 높아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를 멸시하거나 천대해서는 안 됩니다. 신랑이라는 이유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 구실이 되어 귀족화 되어서도 아니 됩니다.

둘째로, 소금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흔하게 널려있는 것이 소금입니다. 여기서 생각되는 것은, 기독교인을 만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신분이 조금만 높아도 비서가 겹겹이 있어 한번 만나려면 대단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우리 나라는 특별히 안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만 청와대 앞으로는 지나가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국에 가보면 수상관저에 문 하나 있고 그 앞이 바로 식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 곳에서 식사와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 백악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만 열면 바로 백악관 관저가 있는데, 우리 나라는 장관 공관만 해도 너무 깊숙히 들어가서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좀더 가까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나 누가 찾아도 반갑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은 교인들끼리 똘똘 뭉쳐서 우리끼리만 하는 생각을 버렸으면 합니다. 교회에서는 열심히 모이고, 세상에 나가서는 흩어져서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 깊숙히 들어가 그 속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자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끼리만 악수하고 서로 교제하는 것은 소금이 아닙니다.

셋째로, 소금은 무관심한 것입니다. 소금은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전혀 눈에 띄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남의 눈에 유별나게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어딜 가나 드러나지 않은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남이 희게 입으면 희게 입고, 검게 입으면 같이 검게 입어서, 클로즈 업 되는 것이 아니라 흡수되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넷째로 소금은 생명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 당시 아랍의 사막에서는 곳곳에 암염을 두어 그 곳을 지나가는 낙타나 양들이 소금을 먹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낙타나 양이 매일 소량이지만 소금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일부러 양들에게 소금을 먹이고 있지 않습니까? 소금은 흔하고 천하지만 생명에는 반드시 필요한 귀한 존재입니다.

이상 네 가지를 종합해서 한 마디로 표현하면 소금이란 겸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합니다. 이 겸손을 설명하기 위해서 "소금이다"했고 한편으로는 '빛이다'(다음 장에서 공부할 것이다)라고 귀한 신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극과 극으로 정 반대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두 극의 신분을 가진 것으로, 한편으로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높은 빛이요, 한편으로는 어디가 숨었는지 존재도 없는 소금입니다. 이 이중현상(doubly mate)이 바로 그리스도인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편으로는 고고하기 이를 데 없는 빛과 같은 귀한 존재인가 하면, 한편으로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소금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이제, 소금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강력한 자기 역할을 감당하는 물체입니다. 가령, 단맛이나 신맛은 차고 뜨거울 때에 그 맛의 차이가 있지만, 소금은 환경이 달라져도 맛은 그대로입니다. 즉 뜨겁건 차건 소금의 자기역할에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변치 않는 자기 맛을 가지고 환경에 관계없이 사명을 다하는 것이 소금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좀 나아지면 신자이다가, 어려워지면 하나님은 없다고 돌변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아주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새벽마다 주여, 주여 하며 부르짖다가, 사건이 해결되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한 걸음 물러서서 하나님을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변덕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차든지 분명한 태도를 원하셨습니다. 소금이야말로 그 어떤 조건에도 변치 않고 계속 소금으로써 존재하는 귀한 성질을 가진 물체입니다.

둘째로, 소금은 맛을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 가치 창조의 역할을 한단 말입니다. 맛이 없는 곳에 들어가서 제맛을 냅니다. 맛으로 가장 실감나는 예가 설렁탕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간이 맞아야 제 맛이 있지만 특히 설렁탕은 소금이 없으면 먹을 수가 없는 음식입니다. 필자는 비교적 설렁탕을 즐겨 먹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설렁탕을 잘 하는 집이란 택시기사분들이 많이 가는 집이 맛있는 집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음식에 있어서는 거의 생명과 같은 것은 음식의 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맛이 바로 소금 맛이라는 겁니다. 환경에 따라 변하는 단맛이나 신맛이 아니라 변치 않는 짠맛이란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짠맛 그 자체의 맛은 짜기만 할 뿐 별로 맛은 없습니다. 그러나 음식에 들어가면 그 음식의 본연의 맛을 낼 수 있는 중요한 촉매가 되고 있습니다. 가령 구수한 것은 더욱 구수하게, 단 것은 더욱 맛있게 달도록 그 본연의 맛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소금의 역할을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기술을 가진 자에게 신앙이 들어가면 정말 훌륭한 기술자가 되며, 힘이 센 자에게 신앙이 있으면 그 힘이 좋은 곳에 사용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유익을 줄 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기쁜 가운데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그 기쁨이 배가되고 슬픈 가운데 만나면 그 슬픔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맛을 내는 사람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기쁜 마음으로 그를 만났는데 그와 이야기하는 동안 기쁨이 없어지고, 슬픈 마음으로 만나면 그 슬픔이 더 보태어져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가진 바를 효과 있게 사용하여 본래 있던 상태에다 더욱 의미 있게 가치 있게 만드는 역할자입니다. 즉 생활에 다 액센트를 주는 자입니다.

셋째로, 소금은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도 생선을 소금에 절여 먹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 중에서는 절인 음식의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가끔 돼지고기 값의 파동이 심해 문제되기도 합니다만 돼지고기를 고기 그대로 먹는 일이 많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요즈음 육가공품이 많아 햄의 종류가 다양합니다만 아직도 더 많이 개발해야 돼지고기 값이 조정됩니다. 중국사람들은 돼지고기를 그대로 절여서 보관했다가 우리들의 김치처럼 겨울내내 조금씩 꺼내서 먹는 생활 습관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주로 생선은 절여서 먹지만 돼지고기 절이는 풍습은 없습니다. 아무튼 소금은 방부제로서 모든 음식에 들어가 썩는 것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도 어느 곳에 가든지 그가 머무는 곳에서는 썩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건 속에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방부제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출세나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적당히 함께 넘어가면 나도 망하고 국가도 망합니다. 바라기는 믿는 사람 앞에서는 죄를 지을 수 없도록 소금의 역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소금이란 어떻게 해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첫째 소금은 자기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녹아 없어집니다.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 변화입니다. 자신은 녹아져서 그 형체가 전혀 없어집니다. 만약 소금이 자기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자기 구실을 못합니다. 아주 완전히 녹아 없어져야 소금이 소금 되는 것입니다. 가령, 가정을 구원하고 싶습니까?라는 존재가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내가 살고 내 명예가 살고 내 지위가 살고 보전되는 한 결코 사건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금이 아니니까요. 녹지 않고 그대로 굴러가는 소금은 쓸모없는 소금입니다. 녹아서 형체가 완전히 변화하는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야 소금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봉사희생사랑 다 좋습니다만 내가 녹아지는 일이 없다면 그 모두가 헛것입니다. 나의 물질에 손해가 될까, 또는 명예나 건강에 해가 될까 하고 몸을 도사리고 있는 동안에는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단 말입니다. 내가 녹아 없어져야만 제대로의 역할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소금으로 선택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자 마자 갈대아 우르 지방인 이방 땅으로 보냈습니다.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이방으로 보내진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은 선민권을 자랑하며 똘똘 뭉쳐서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녹지 않는 소금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들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을 때, 그들을 쳐서 나라를 없이하고 각 곳에 흩어져 그대로 묻혀 살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녹아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녹도록 내 형체를 없이 하신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소금은 절대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설탕은 혹시 없어도 됩니다만 소금이란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존재는 어떻습니까? 절대로 필요한 존재가 되고 있습니까? 누군가가 비유하기를, 쓸데없는 사람을 양복의 소매 끝에 있는 단추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소매 끝에 있는 단추는 정말 있으나 마나한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절대로 필요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가령, 직장에서도 당신은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앓는 치아처럼 어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맛을 잃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짜야 소금이지, 짜지 않으면 소금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은 짜지 않은 소금이 있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 의해 밟힌다고, 실제로 맛을 잃은 소금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바다물을 말려서 소금을 얻는 곳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우리와는 달리 암염이 많습니다. , 소금기둥들이 있는데 비가 오면 소금이 자연히 흘러내려 나중에는 소금이 다 빠지고 바위만 남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실감나는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어제까지는 소금바위여서 집으로 가져왔는데 비를 맞아 소금 맛이 빠져버리면 아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맛이 소금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에게서 소금 맛이 빠지면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힌다는 말입니까?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답지 못하면 세상 사람에게도 추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답게 소금의 제 맛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맛없는 사회를 맛있게 하고, 의미 없는 사회를 의미 있게 하고, 목표를 잃은 세대들에게 목표를 찾아주어, 썩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썩는 것을 막는 방부제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대하여 소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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