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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사랑의 힘〈고린도전서 13장 1~7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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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고린도전서 1317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세상의 비극은 거의가 거짓과 허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일이라면 그것으로 인하여 새삼 배신감을 느끼는 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불신과 그것으로 인한 배신감 때문에 괴로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제는 믿을 수 없다'며 원망을 합니다마는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은 불신 이전에 스스로 속이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다고 생각한 것이 없으며, 없다고 하였으면 그 없는 것을 사실로 시인하여야 되겠는데, 분명 없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있다고 우기는 것은 스스로 속임입니다. 내게 제법 아는 것이 있는 줄로 알았는데 이제와 펼쳐보니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깨끗이 모른다고 했으면 좋으련만 끝까지 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고민이 떠날 날 없고 늘 불안하기만 합니다. 모든 고민의 심연에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위장이 있게 마련입니다. 허식과 위장 때문에 그 고민의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깨달았으면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솔직히 시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하고 있으니 결국 그 마음, 그 심령은 끝없이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한다고 우기고 있다면 그 심령은 깊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태가 계속되는 한 달리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사랑을 운위하고, 사랑을 한다고 하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을 안다고 하나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의 신비와 그 무궁무진한 깊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모른다'고 하는 사실을 시인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당연히 같이 산다고 하여 사랑이 있다 하겠습니까? 위하여 고생하고, 위하여 수고한다 하여 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먼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는 필생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쏟는다고 합니다마는 그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감사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합니다. 때로는 원수를 맺음으로 끝을 내는 이 엄청난 현실이 어디에 연유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현실을 놓고 묻고 싶은 것은 진정코 사랑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았느냐고 묻고 싶은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일단 사랑을 아는 것에서부터 효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사랑을 알려면 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사랑을 알아볼 길이 없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놀라운 사랑의 기쁨과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다면 그 사랑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사랑은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사랑, 병든 사랑을 진단해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사실대로 시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인함으로 비로소 필요한 새 처방을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랑의 기본적인 특징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오래 참음이요, 그 둘이 온유함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오래 참는다.' 헬라 원문은 '마크로뒤메오'인데, 그 뜻이 너무도 깊고 오묘하여 이것에 해당하는 적절한 우리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단순히 '참는다'라고 하는 표현으로는 의미의 전달이 크게 부족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참음이 아닙니다.

오래 참으면서 불평 없이 참는 것, 그리고 참는 이유를 알고 기뻐하는 참음입니다. 그러니까 찡찡거리거나 이를 갈면서 견딘다든지, 섶에 누워 쓸개를 핥으면서 원수갚을 날을 기다린다고 하는 이른바 와신상담(臥薪嘗膽)과 같은 참음도 아닌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필요에 따라 아무런 의문도 불평도 없이 기쁨으로 소화하면서 참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크로뒤메오'는 로마서 24절에서 말씀하는 바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과 같은 의미의 낱말입니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아주시고 죄인을 참아주시는 그 오랜 기다림----그것을 가리켜 '마크로뒤메오'라고 합니다. 이에 베드로후서 38절로 9절 말씀에 보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참으시는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년을 하루같이 참아주시고 하루를 천년이나 되듯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인내를 만홀히 여기지 말 것입니다.

고통이란 깊은 마음의 아픔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육체의 아픔이 진정한 고통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몸이 아픈 것과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몸이 병들거나 아플 때에는 그냥 아프다고 하며, 마음이 아플 때에는 슬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슬픔이라는 것은 몹시 괴로운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인간적인 괴로움이 지나치면 오해의 산실이 되며, 분노가 되고, 발작하여 마지막에 가서는 원수 맺는 일과 폭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잡한 사회적인 폭력의 문제와 증오의 문제는 결국은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이 없음으로 온유하지 못하고, 사랑이 없음으로 참지 못해서 이러한 발작증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통이란 참기를 원치 않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진정 참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괴로움이라면 그것은 결코 고통이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참기를 거부하는 괴로움, 그것을 우리는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고통의 의미를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고야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왜 이러한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그 의미를 알게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의 결과를 믿게 합니다. 오늘 내게 있는 이 고난으로 인하여 이후에 주어질 최종 승리, 마지막 결실을 바라보며 그것을 믿게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지지 않고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의 수고 다음에 주어지는 마지막 열매를 확실히 믿습니다. 그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수고는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만일 어느 순간에라도 그를 위해 하는 수고가 지겹고 힘들게 느껴지거든, 자신의 사랑을 다시 한번 진단해보십시오. 이제 사랑이 식었고, 사랑이 병들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은 고통의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진실로 사랑할 때에 이 고통의 의미는 점점 개발되어 새로운 느낌과 깨달음을 얻게 합니다. 그 결과 값진 고통의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고통 자체를 감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신성한 아가페의 사랑을 가리켜 어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기쁨으로 나를 내어주는 자유로운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나를 내어주는 자유로운 능력----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귀한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함에는 물질이 풍족함으로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외적인 조건이 바꾸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의 내 처지를 무엇무엇 때문이라며 이런저런 말로 핑계와 원인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그 무엇으로도 핑계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내가 나를 괴롭히는 어느 한 사람을 몹시도 미워하던 차에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내 마음이 시원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가 미워해서 죽었나보다 싶어서 더욱 마음이 괴로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로 인해 고통 하는 그 마음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괴롭히는 대상이나 환경의 변화에 있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참된 사랑이 솟아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그 누구도 아무 것도 자유 할 수 없습니다. 가난하던 자가 부해졌다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외적인 변화도 내 마음에 필요한 진정한 자유를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나로 하여금 절망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허무로부터, 미움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참된 기쁨을 줄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의 힘, 그 자유로운 능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는 고통 당하는 수고를 더욱 의미 있게, 기쁨으로 감당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조건도 없고 보상도 없습니다. 이는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것이 곧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어 친히 사람으로 오셨고, 죄인이 되셨으며, 마침내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십자가 사랑에 진정한 사랑의 뿌리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에 많은 여인들이 슬피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향해 돌아보시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담긴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참혹한 고통의 절정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사랑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라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끝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만일 십자가 위에서 하신 그 일곱 말씀 중에 "어디 두고보자 이놈들!"하시고 운명하셨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사랑함으로써 고난의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고난은 일생동안 치러도 남는 것은 원망과 불평일 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자유롭고, 사랑함으로써 그 창조적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로마서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내어 버려 두셨다는 기록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두셨으니"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인한 희생에는 한계가 없지만 사랑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계를 넘어설 때에 거기에는 다시 더 용서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 사랑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랑은 오래 참는다'라고 하는 말은 죄를 용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랑은 결코 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만 악을 선으로 바꾸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희생을 지불하면서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에는 절대로 낙심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긍정적이요 적극적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볼 때면 어떤 경우에라도 실망은 없습니다. 언제나 이 사랑 너머에 있는 저 밝은 아침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인내의 가치를 알고 사랑은 인내의 가치를 창조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실망이라는 말을 하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너무 초조해하고 조급해합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오래 참습니다. 참고 또 참습니다.

중앙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젊은 선교사 조지 애틀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있는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대로 쏘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당기면 끝날 일인데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이 마을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인 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가 믿으려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습니다.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 발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 인내함이 결코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는 저 앞을 바라보기 때문이며 인내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사랑은 언제까지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밝은 면을, 그리고 저 미래를 보며 기뻐합니다.

여기 인내를 위한 아름다운 기도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우리를 인내로운 자가 되게 하시어 예의에 벗어나는 말이나 가혹한 대답이 입밖에 나오려 할 때에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하나님! 우리를 인내로운 자 되게 하시어 필요한 때에 즐겨 양보하고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우리를 인내로운 자 되게 하시어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의 마음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이끄는 주의 자비에 몸을 맡기며 차분한 마음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인내로운 자 되게 하여 주십시오.

어떤 어려운 일 앞에서도 주님의 자비의 힘 의지하고 극복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인내로운 자 되게 하시어 이웃의 결점을 억지로 고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참고 견디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우리를 인내로운 자 되게 하시어 이웃과 사귀는 것이 어려울 때에도 평화와 미소를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갈보리 산 위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주님의 인내와 하나님의 세계의 구원을 위해 인내롭게 스스로를 바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여러분!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내 주위의 그 어떤 사람이 변화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문제는 내 마음이 변화되고, 내 마음속에 진정한 사랑을 심는 일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이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사랑으로 기쁨 중에 참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열매를 거두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기도의 응답은 사랑으로 통합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과 내 사랑의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시는 그 사랑의 현장이요 절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랑을 내 마음에 심어 그 사랑 안에서 살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음이 변화하고 사람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제는 오래 참을 수 있고 그래서 온유합니다. 마침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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