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새와 백합화(마태복음 6 : 25 - 34)

by 【고동엽】 2024. 3. 19.

 

처음 되돌아가기

새와 백합화(마태복음 6 : 25 -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나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에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이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제 우리는 대자연을 비유로 하여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그 깊은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을 매우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자연을 하나의 비유로 보시고 그것을 통하여 말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상태의 완전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한 마리 새를 보고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한 송이의 꽃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또한 그래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의 눈이 그만 다 어두워지고 감각이 무디어졌어요. 이제는 영성이 너무도 둔해져서 보아도 보이지를 않고, 들어도 들리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보아도 아주 크게 잘못 보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아예 다른 측면에서 보고 병리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 송이의 백합화를 보면서도 요즈음 사람들은 먼저 경제성으로 보아 '저 백합꽃 한 송이는 얼마짜리인데'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나는 새를 보아도 '저것 한 마리 잡으면 한끼 잘 먹겠다'는 식으로 생각들을 한단 말입니다. 이처럼 매사를 경제적으로만 생각하고 또한 그 생각하는 의도 자체가 흐려져 있기 때문에 본래적인 깊은 뜻, 그 중요한 의미를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연을 하나의 말씀의 교과서로 보시는 깨끗한 심령과 그러한 관점을 가지시고 그 안목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참으로 주의 깊게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저 공중의 새를 보라! 그리고 생각해 보라! 들에 핀 한 송이의 백합화를 보라! 또한 생각해 보라!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하늘을 보라! 산을 보라! 물을 보라! 는 등등 무엇이든지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 흔히 말하는 신학적 용어로는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중생하지 못한 자, 혹은 타락한 인생으로서는 영적 감각이 무디어져서 보아도, 들어도 알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된, 구원받은 심령으로 볼 때에는 이 보이는 모든 것과 들리는 그 모두가 다 주님의 말씀으로 들린다는 말입니다.

오늘 여기 주신 말씀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한 마리의 새를 통하여, 한 송이의 백합화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주제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 다음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 한 마리까지도 사랑하는데 하물며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내가 저 들풀에 지나지 않는 백합화도 저렇게 아름다운 꽃으로 키우는데 내가 어찌 너희를 옷 입히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특별히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볼 줄 아는 거기에까지 우리의 심령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우리의 심령이 그만큼 순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가 어떤 기회에 달나라에 다녀온 어윈(Irwin)대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가 하는 말이 달나라에 도착하여 지구를 보고 우주를 이렇게 보니 그저 하나님의 품안에 폭 안긴 것 같은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 밖에서 보는 이 지구의 그 아름다운 세계! 다른 모든 별들 중에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별들 중에서 제일 곱고 아름다운 것을 우리 인간에게 주셨구나 하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풀 한 포기라도 우연한 것이 아니며 돌멩이 하나라도 그냥 지나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자연을 비유로 들어서 우리에게 신앙적이고도 윤리적인 교훈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 중에 매우 귀중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이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성이란 한 마디로 쉽게 말하면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한다고 할 때에 우리는 대략 몇 가지의 영역에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그 중 하나가 추리적인 기능입니다. 그래서 이쪽에서 보지 못한 저편을 미루어 생각하고, 마치 장기를 두는 사람이 몇 수 앞을 내다보듯이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는 저런 일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추리를 하게 되는, 그러한 기능을 가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비판의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 분석하는 능력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에도 이것이 크다, 작다, 아니면 비싸다, 싸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 속에 사랑이 있다 없다, 아니면 정성의 유무를 이야기 하게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선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선물이란 것이 통하지를 않는 것이요, 아무리 갖다 주어도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생각의 차이에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잘못 되기 시작하여 타락하고 불 신앙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의심이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는 매사를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되니 이제는 의심이 생기고 그 의심이 자꾸만 꼬리를 물고 확대되어 갑니다. 그러기에 저녁에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두고도 생각하기를 그저 무슨 일이 생겨서 늦게 오는가 보구나 하고 기다리면 좋겠는데, 이것을 걱정하기 시작하면 오다가 자동차 사고라도 난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얼마나 다쳤을까? 혹은 죽지나 않았나? 만약 잘못 되었으면 나는 이 애들하고 어떻게 살지? 하고서는 다음, 다음 일들까지 별별 좋지 못한 생각을 다 하고 앉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도 괜찮아요. 게다가 믿음이 없으면 또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어디로 샜나? 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는 언젠가 온 전화가 어쩐지 좀 수상하더라는 것에서부터 자꾸만 의심쩍은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이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면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인데 나쁜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걱정하지요, 의심하지요, 번민하지요, 그러다가 실망하고 절망하면 마지막에는 정신병 아니면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사람이 사람된 특권은 생각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이 근심의 소질로 바꾸어져 불신앙적인 생각으로 기울어질 때 거기에는 엄청난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염려한다는 말은 헬라 원문으로는 '메림나테'라고 하는데 그 뜻은 생각한다, 관심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어떤 생각이냐 하면 걱정과 염려하는 쪽으로 좋지 않게 기울어지는 생각을 가르쳐 "염려"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원 뜻은 생각이라는 말이지만 나쁜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생각을 나쁜 방향이나 불 신앙적인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편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고 해석할 것이지 그렇게 나쁜 방향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번민하게 되고 나아가 생각이 흐려지면 이상하게도 이 염려가 사람을 노예화시킵니다. 그래서는 자꾸만 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이 염려라고 하는 것도 사람을 노예화해서 우리로 하여금 근심이라는 우상을 섬기게 합니다. 그 결과, 나쁜 생각의 발전은 깊은 함정으로 빠져들게 되며, 마침내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렇게 외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문제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에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인데 종래 그러지를 못하고 오히려 자꾸만 어두운 생각으로 빠져들고 있으니 어떻게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우리가 불행한 일을 당했다면 보다 어려웠던 과거나,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계속 한 방향으로만 빠져들어 갑니다. 그 길 외에도 얼마든지 생각할 방향이 있건만 이상하게도 꼭 그 한 방향, 불행한 쪽으로만 생각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근심이요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시작하면 이제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아요. 과거에 받은 은혜도 간 데 없고, 하나님과의 약속도 앞에 있는 하늘 나라도 보이지 않아요. 그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꼭 한 가지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 무엇이 우선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보다 중요한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 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 또 하나는 양심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학교 점수는 좀 나빠도 괜찮으니 양심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에서 자존심을 갖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또 한 가지 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성품입니다. 점수 한 점 두 점 더 따는 것, 그것 때문에 친구 집 방의 불이 언제 꺼지고 켜지는가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시기 질투하고, 남을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의 성품이 되어진다면 그가 아무리 공부를 잘한들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그까짓 점수 몇 점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좋은 성품, 건강 다 없애고 신앙까지 다 팔아먹는단 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할 때에 그것은 생명이지요. 그런데 이 생명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생각할 때에는 생명은 하나님께만 있다 즉,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중심을 먼저 끄집어내어 놓고 그 다음에 무엇이나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머지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사는 날까지 사는 것이지 달리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걱정이 되어질 때마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재산이 다 없어졌어도 온 식구가 건강하면 행복한 줄 아셔야 합니다. 물질이야 본래부터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 아닙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좀 병들어도 좋아요. 믿음이 있으면 더 좋은 것인데, 그 믿음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와 같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걱정이 대개 어디서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해 보면 단순히 오늘 먹을 것을 먹기 말라, 혹은 오늘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더 잘 먹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저 사느냐? 죽느냐?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더 잘 먹으려고 몸에 해로운 것까지 먹게 된단 말입니다. 향락을 위해서 생명과 건강은 무시한 채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하는 일에까지 기울어져 잘못 먹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더 잘 먹으려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축재(蓄財)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미 오늘은 먹었고 아직은 먹을 것이 있어요. 그런데 내일이 문제고, 내년 또 그 다음은 무엇을 먹을까 하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한때 우리 사회에서도 심심찮게 있었던 "사재기"같은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쓰다 보면 그것도 언젠가는 다 떨어지고 말 것인데 말입니다. 어차피 오늘 떨어지나 한 달 후에 떨어지나 없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다른 사람이나 나나 똑같이 떨어지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좋으련만 다른 사람은 못 쓸 때 나는 써야겠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바로 걱정거리입니다.

대체로 이런류의 생각을 하다 보니 다들 걱정이 많은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을 공동체적으로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 배고파할 때 나도 배고프고,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나도 그 어려움을 당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나만 면하겠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보면 환란날의 괴로움이나 고통에 대한 염려 같은 것이 아니라 나만 면하려고 하는 생각에서 많은 양식을 저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어리석은 부자처럼 걱정거리가 많은 것입니다. 대체로 보면 없는 사람은 그렇게 걱정을 많이 하지 않는데 사실은 언제나 많이 가진 사람이 걱정거리가 더 많아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정신병에 걸리는 확률이 적은데 비해 부자는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인 말씀으로 음식과 목숨, 몸과 의복을 비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음식보다는 목숨이 중요하지 않느냐? 또한 의복보다는 몸이 중요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음식이 있어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음식보다 목숨이 중하고, 의복보다 몸이 중하다고 하셨다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곧 몸의 건강이나 몸을 이롭게 하는 면은 생각하지 않고 우선 즐기거나 예쁘게만 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해를 입거나 다치게 되는 경우 같은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조금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저는 여자들이 추운 겨울에 얇은 스타킹을 신고 나서는 것을 보면 참 안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농담 삼아 춥지 않느냐 물어보기라도 하면 춥지 않다고 합니다마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추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본래 의복이란 몸을 덥게 하고 피부를 보호하며, 편리하자고 입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따뜻하고 편리한 다음에, 그리고 멋도 자랑도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예쁘게 보이겠다고 몸을 해롭게 해가면서까지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옛날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러기에 몸을 위해서 의복이 있음을 생각하셨을 터인데도 이를 바꾸어서 의복보다는 몸이 중하지 않느냐?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의복을 위한 몸이 되었으니 이야기가 달라진 것이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숨을 위하여 음식을 먹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음식을 위해 몸이 존재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예수님께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다. 그리고 그 목숨을 위해서 필요한 정도의 음식이면 족할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을 욕심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저 얼어죽지 않을 만큼 입었으면 될 것이지 더 잘 입고, 다 입지도 못하면서 쌓아 놓으려니 걱정이란 말입니다. 또한 음식도 먹을 만큼 먹고 일용할 양식이면 족한데 이것을 기어이 쌓아 두고 먹겠다니 이 모두가 다 고생이요, 걱정이란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더 중요하냐?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실제적인 말씀은 "너희가 그렇게 걱정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걱정이 효력이 있는 것이겠느냐?"는 겁니다. 실로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염려처럼 무용, 무익한 것이 없습니다. 먼저는 자기 기분 나쁘지요, 다른 사람 기분 나쁘지요, 일 안되지요, 정신 몽롱해지지요, 건강 잃어버리지요,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는 말이 누구는 걱정을 하고 싶어서 하느냐? 걱정이 되니까 한다는 것인데 이는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만사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걱정도 해 버릇하면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자꾸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생각하는 제 생의 조그만 철학 중의 하나가 문제를 문제시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내 스스로 자꾸만 문제시하다보니 문제가 되는 것이지 내가 문제시하지 않는데 어떻게 문제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어쨌든 근심 걱정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극히 제한된 인생을 삽니다. 제한된 능력으로 살고, 제한된 지혜로 삽니다. 따라서 우리의 걱정이라는 것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특별히 학생들 중에서도 입시를 치루고 나서 걱정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미 다 지나간 일, 이제 사실대로 나타날 터인데 지금 와서 마음졸이며 걱정해서 어쩌자는 이야기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고 어떻게 실수라도 해서 점수가 바뀌게 해 달라며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저 지나간 것은 모두 다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지금, 여기의 나를 받아들여 깨끗하게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와서 남들이 뭐라고 할까에 신경 쓸 것이 아닙니다. 부끄럽고 창피한 것은 진작에 했어야지 오늘에 와서 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원인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것을 붙들고 이러고 저러고 할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제 더 생각할 것이 없어요. 걱정하지 말잔 말입니다. 그 걱정을 떼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걱정을 떼어버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참으로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가 그렇고, 겸손히 그렇듯이 십자가 앞에 다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앞에 내 인간의 전부를 위탁해 버려야 합니다. 쓸데없는 근심! 전혀 무효한 걱정! 이젠 근심할 시간이 있으면 기도를 할지언정 근심은 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말씀으로 "공중의 새를 보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는 참새와 산비둘기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잡새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새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내셨으니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동물들 중 간혹 어떤 것은 조금씩 쌓아 놓고 먹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마는 대부분의 동물들, 특별히 새 같은 것은 그날 그날 돌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주워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 사람은 더 귀하지 않느냐? 새에 비한다면 사람이야 얼마나 귀한 존재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 한 마리도 저렇게 먹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먹이시지 않을 것 같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살아 온 지난날도 다 그랬지를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걱정한 것만 손해 본 것이지 아무런 소용도 없는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 신앙이란 말입니다.

이제 또한 예수님께서는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백합화냐? 이와 같은 백합화의 그 아름다움도 하나님께서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 귀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어찌 입히시지 아니 하겠느냐? 그러니 그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날씨가 추우면 자꾸만 옷을 껴 입습니다마는 또 하나 벗으면 벗은 대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춥다고 해서 자꾸만 껴입는 것도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 주 미국 나성에 가서 한 열흘 지내보았는데 갈 때에는 이곳 날씨가 추운지라 코트를 입고 갔습니다마는 가서 내리자마자 그곳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모르겠어요. 거기는 겨울이 없이 영상 15, 20도의 더운 날씨가 보통인데 아무리 추워도 영상 5도는 되는 추위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그만큼만 추우면 밍크 오바를 입고 나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번에도 가서 주최하시는 분들을 보니 모두 다 감기가 걸려서는 콜록거리며 다니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야 추우니까 감기가 걸려도 이유가 있지만 춥지도 않은 그 곳에서 왜 감기가 걸리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더운 데서는 더운 대로 감기가 걸리며 추운데서는 추운 대로 감기가 걸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춥지 않으면 걸리지 않을 것 같아도 그게 그렇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감기 걸릴 사람은 아무 곳에 갔다 놓아도 걸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사실 사람의 적응력이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약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약한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은 결국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결핍되었거나 아니면 믿음이 병들었을 경우, 그렇게 되면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참새를 보면서 너의 믿음을 점검하라! 백합화를 보면서 너는 무엇을 믿고 사느냐고 한번 물어 봐라! 우린 언제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결코 사람을 믿고 사는 것이 사람이 아닙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러분 혹 남편을 믿고 사십니까? 아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믿으니까 남편을 믿는 것이지요. 한번은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인데 제 사무실로 찾아 와서는 자기 아내를 좀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 아내가 이 교회에 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는데 이제 자기는 사우디로 일하러 떠나야 하는 처지에서 생각하니 혼자 두고 가는 자기 아내를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다 좀 맡기고 교회 생활을 잘 할 수 있었으면 좀 더 믿음이 가겠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는데 "믿기는 누구를 믿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를 믿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누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으니 남편도 믿고 아내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부모도 자식도 믿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잠자면 죽은 것 같고 나가면 사고 날 것만 같으니, 이렇게 걱정하기로 들면 한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백합화를 통해서 그리고 새를 보면서 믿음을 든든히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근본이 하나님께 있고, 또 어느 때인가는 하나님께로 돌아 갈 것입니다. 따라서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세요. 창공을 날던 참새 한 마리가 죽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한 것이었을 터이니(10 : 29)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은 우리 믿는 사람은 적어도 두 가지 걱정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인데 그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이요, 다른 하나는 저주받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이제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무엇 때문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 살려 주세요"하는 그런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으로 더 오래 살아야 할런지 아니면 오늘 지금 가게 될 것인지, 그것조차도 우리는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 깨끗이 맡겨 놓고 그리고 마음놓고 사는 겁니다. 바로 며칠 전(86. 1. 28) 우리는 우주선 챌린저호가 폭파되었다는 엄청난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1138분에 쏘아 올린 거대한 작품 챌린저호가 불과 몇 분 후에 폭파되고 말았습니다. 요즈음은 컴퓨터라면 무엇이든지 해결이 잘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마는 그 많은 컴퓨터를 다 동원해서 정확하게 한다고 했으나 결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그것이 폭발이 되었다면 그 동안에 가고 온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렇다면 이는 요행히 무사했던 것이란 말입니다. 왜냐 하면 그것들도 완벽했던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언젠가 잡지에서 본 것인데 불과 60%의 가능성을 가지고 추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40%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언제나 모험을 가지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사실 사람의 지혜란 이렇게 우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위탁하고 사는 겁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타고 있던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자 이에 놀란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당황해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8 : 36)하시며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을 향해 물위로 걸어오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14:31)고 하십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갈 때에는 물위로 곧장 걸어가더니 바람을 보고는 점점 빠져 들어갑니다. 왜 의심하느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절대로 의심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살아 계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인도, 이 모두에 대해 적은 의심도 갖지 마십시다. 우리의 삶 전부를 그 안에서 소화하세요. 그리하여 무슨 일을 당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이것이 내 죄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며 또한 죽을까 하는 걱정도 하지 마세요. 이제 우리에겐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 방향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태 복음 168절에서도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며 계속 책망하고 계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믿으라고 믿으라고 재촉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믿으시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제 배에서 풍랑을 만나게 되자 함께 타고 있던 제자들은 불안에 떨며 죽겠다고 야단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고물에 누워 베개를 베신 채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4 : 38). 이는 이 배에 파선되거나 뒤집혀질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다하기까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질없는 염려는 하지 말아야 하고 이제는 하나님만을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3절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우리는 이것을 먼저 구하십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도 걱정을 하지 않아야 그 일이 잘되어 나가는 것이지 자꾸만 걱정을 하게 되면 될 일도 잘 안 될 겁니다. 이와 같이 염려라고 하는 것은 소극적인 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적극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에 비로소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신령한 것에 마음을 두어 그 방향으로 계속하여 생각을 몰고 나가노라면 마침내 그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아직도 무거운 염려의 멍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십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가 모든 염려로부터 벗어나 한 마리의 새를 보고 한 포기의 들풀을 보아 거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으며 내가 너를 사랑하며, 내가 너를 보호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확인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어질 때에 참으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