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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속이지 말라(6장 6~10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 구구절절이 뜻을 깊이 살펴보면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실제적이며, 우리가 그 진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근본적인 교리가 줄거리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은 사람이 마땅히 갖출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어떠한 목적으로, 어떻게 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살아가느냐-그 의인의 생활윤리를 말씀합니다. 특히 6절의 말씀은 독립된 구절로 보입니다. 앞뒤의 문맥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말씀 역시 '좋은 씨를 심으라' '좋은 종자를 심으라' 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7절 이하의 말씀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6절에서는 함께 나누는 생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좋은 일을 함께 더불어 나누는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해석방법과 통속적인 해석방법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이 본문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2천 년에 걸쳐 많은 주의 종들은 교역자와 교인의 관계로 이것을 해석해 왔습니다. 우리는 교인으로서 교역자로부터 영적인 말씀을 받게 됩니다. 신령한 양식을 얻습니다. 교역자를 우리는 목사, 목자라고 합니다마는 가톨릭에서는 신부라고 합니다. 신부는 우리가 번역한 말이며 영어 혹은 다른 말로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교역자를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로부터 태어나고. 그가 전해준 말씀에 따라서 내가 자라며, 그에게 징계를 받고 칭찬을 받고 격려와 위로를 받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도 그의 마지막 훈계를 들으면서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영적으로 볼 때, 단연코 아버지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4:15~16)"-사도 바울의 부성애적 심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교역자냐 교인이냐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교역자의 위치가 참으로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제가 지금 교역자입니다마는 한편으로는 저에게도 저의 교역자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제게 가르침을 주신 어른들이 제 앞에 많이 계십니다.
이런 관계 안에서 우리는 교역자와 교인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는 세 가지의 복을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부모를 잘 만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스승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교인으로 치면 교역자를 잘 만나는 것입니다. 좋은 교역자를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리고 셋째가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편을, 남자는 아내를 잘 만나야 합니다. 처음부터 잘못되어 빗나가기 시작하면 평생토록 큰일입니다. 이상이 세 가지의 복입니다. 특히 교역자는 내게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내 영생의 문제를 좌우하는 귀한 말씀을 내가 그로부터 받아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나를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내가 어떤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나를 가르치는 자,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돈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물질과 함께 삽니다. 때문에 교인은 교역자에 대해서 물질적 부양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 즉 교인과 교역자가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Calvin)은 이 관계를 해석하는 가운데 아주 극단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번 들어둘 필요가 있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단의 사자들에게는 호화롭게 대우하지만 하나님의 사자들은 대우하지 않는다." 하늘의 보배를 주는 자들에게 썩을 물질로도 대우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물론 대우받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대우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귀중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리스의 파사데나라는 곳에 '웨스트민스터 가든'이라고 하는 양로원이 있습니다. 이 양로원은 은퇴한 선교사들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살 수 있도록 세워진 것입니다. 들어가면 앞쪽에 부부가 함께 살 수 있도록 지어진 단독주택들이 눈에 뜁니다. 그 다음 구역에는 기숙사가 있습니다. 아래층에는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위층은 전부 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음 건물은 병실입니다. 여기에는 간호원실이 딸려 있습니다. 결국 이곳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 양로원이 생긴 유래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지금부터 약 100년전쯤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뉴욕의 어느 공원을 지나가다 마침 기침을 하면서 쓰러져 있는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이사람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넵니다. "당신은 누구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나는 중국에 선교사로 가 있다 돌아온 아무개입니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집도 가족도 없습니까?" "은퇴하고나서 이렇게 남은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처럼 버려진 사람들이 그밖에도 많을 것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는 몇 사람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번 중국인 실업가였습니다. 그가 100만 불을 내놓았습니다. 100년 전의 100만 불이라면 꽤 큰돈입니다. 그 100만 불이 기금이 되어서 지금의 웨스트민스터 가든이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이 양로원은 아시아에 파견되었던 선교사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합니다. 자리가 남아야만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게 됩니다. 아시아에 파견되었다가 은퇴해서 돌아간 선교사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던 선교사 중에도 그곳에 살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분들을 그곳에서 만납니다. 저는 미국에 가게 되면 위로차 방문을 하곤 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100만 불을 참으로 좋은 일에 썼습니다. 평생을 선교사로 타국에서 살다가 은퇴해서 돌아왔는데 막상 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인 실업가는 그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가 좋은 것을 함께하는 좋은 예가 됩니다.
통속적인 해석으로 보면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 사이에 바른 관계를 이루라는 의미가 됩니다. '좋은 것'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아가도이스'는 물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내가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 가르치는 자를 어떻게 대할까?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요즘은 스승도 제자도, 선배도 후배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제자가 되었으면 스승에 대해서 바른 관계를 이루어야 하며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하라'의 '코이노네오'라는 말은 '코이노니아'의 동사입니다. fellowship-특별히 대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만큼, 가까운 친구를 대하는 만큼으로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즐거울 때는 함께 즐겁게, 내가 따뜻할 때는 그도 따뜻하게, 내가 편안할 때는 그도 편안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스승은 배가 고파서 길거리를 헤매는데 제자라는 작자가 출세했다고 호의호식한다면 말이나 됩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나를 가르친 스승은 집도 없이 끼니거리를 찾아 거리를 헤맵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그에게서 지식을 얻은 나는 지나치게 사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가르침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시골에 있는 교역자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장학금을 주시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장학금을 맡겨주십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내 자녀의 학비가 필요하다면 저 농촌에 있는 교역자의 자녀도 학비가 필요합니다. 내 자녀에게 연필이 필요하다면 가난하게 사는, 오직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만 사는 교역자들의 자녀에게도 연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때로 내 자녀들을 위해서라면 지나친 낭비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를 가르친 자에 대해서는 소홀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하라 하십니다.
10절에 보면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마지막에 못박아놓았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할 때에 해외 선교를 한다, 남의 나라 돕는다, 문둥병 환자 돕는다 하며 떠들곤 합니다.
하지만 우선 내 가까운 이웃에서부터 선을 행합시다. 믿는 자들에게 먼저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 한 구절을 덧붙였다면 아마도 '너를 가르치는 자에게 먼저 할지니라'라고 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서로 좋은 것을 함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한 일은 자꾸 멀리 생각하려고 듭니다마는 좀더 가까운 곳에서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함께하라-쌍무적인 의무를 말합니다. 받기만 하면 안됩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합니다. 또 주기만 해서도 안됩니다.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래서 주고받는 일이란 참으로 아름다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됩니다.
다음으로 7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상고해봅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 말씀에 이어서 좋은 것을 심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종자와 열매는 같은 것입니다. 질적으로 같습니다. 콩을 심었으면 반드시 콩이 열립니다. 이것이 첫째 원리입니다. 둘째 원리는 시차입니다.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둡니다. 오늘 심어 오늘 거둘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가을에 심고 봄에 거두기도 하며 심은 지 10년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 것도 있습니다. 셋째 원리는 행동하면서 무던히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꾸준하게 땀을 흘리고 수고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연한 진리를 놓고 속는 일이 있습니다. 또 속이는 일도 있습니다. 먼저 이웃을 속이려고 듭니다. 악한 것을 심어놓고 선한 것을 거두려고 합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 속기도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속아버리고 맙니다. 자기 속에 그토록 악한 면이 있는 줄 몰랐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는 목사님의 부인이 몸도 약한데 자녀들이 다섯이나 되어서 몹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럴 즈음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인 넷째 다섯째 자녀가 외갓집에 간다고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 탈영한 군인이 터뜨린 수류탄에 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사고를 당하고 나자 무엇으로도 그 부인은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비록 목사님의 부인이지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원망이 심하여 아무도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는 그러한 행동이 교인들에게까지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 가까운 친지 한 분이 그 부인의 원성을 딱 잘라놓았습니다.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 집에 와서 보니까 넷째 다섯째가 떠들고 싸우고 말썽 좀 피운다고 하여 귀찮아하는 것 같더라. 그럴 때마다 너는 '괜히 태어나서 남 고생시킨다'며 투덜거리더구나. 태어나서 속썩인다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냐?" 부인은 두 번 다시 그런 소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신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한번은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몹시 침울해하는 부인에게 제가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남편이 속을 썩이고 독수공방시킬 때에 혹시라도 과부가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소?" 그랬더니 오히려 한 수 더 뜹니다. '차 사고라도 나서 죽어버려라'하고 생각했답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이러한 독기를 품고 저주를 했는데, 이제 와서 죽었다고 슬퍼할 것이 있습니까?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로 심고 생각으로 심고 행동으로 심고, 거기에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의젓하고 선한 척하지만, 어느 사이에 내 안에 있는 악이 벌써 독을 뿜고 악의 씨를 뿌려놓았습니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소원 성취한 것 아닙니까? 일은 이미 벌어졌는데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그런고로 스스로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아이들이 가출했다고 저를 찾아와서 울고불고하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나가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제가 물어봅니다. 부모의 백이면 백이 모두 그런 말을 자녀들에게 수없이 했다고 합니다. 말한 대로 소원 성취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든 말든 집 나가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괜히 태어나서 말썽이라는 말은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합니다. 꿈에라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심은 것은 되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언제였든 내가 심은 것입니다. 내 마음에 심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말로 행동으로 심어놓았습니다. 그것이 지금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은 오히려 덜 억울합니다. 내가 나에게 속는 것, 이것은 실망이요 절망입니다. 좀 더 나아가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속이려고 듭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이처럼 평범한 진리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7절)"라고 말씀합니다. '만홀히 여긴다'는 말은 원문에서 '고개를 쳐든다'는 뜻입니다마는 여기서는 '콧방귀를 뀐다' '코를 씰룩거리면서 비웃는다'라는 뜻입니다. '흥'하고 비웃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콧방귀를 뀌며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 내가 당하는 현실을 놓고서 내가 심은 게 아니라고 우깁니다. 과거의 모든 행동이 이제와 열매 맺은 것이 아니라고 잡아뗍니다. 지금 내가 받은 대우가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심히 억울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내가 악한 씨를 심으면서 앞으로 이 씨가 싹이 터 이삭이 나고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아무리 내가 나쁜 일을 해도 이것이 내게 다시 돌아오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부정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업신이녀김을 받지 않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과거에 심은 것은 오늘 거두게 하시고, 오늘 심은 것은 내일 거두게 하십니다. 또 내일 심은 것, 이 금세에서 심은 것은 내세에서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 5~6)"-선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사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축복을 수천 대까지 주고, 악을 심어놓으면 삼사 대까지 거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십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하는 그 진리를 반드시 보여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절)"-두 가지의 종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심든지 염려하지 말고 부지런히 심으라고 하십니다. 성장도 염려하지 말고 추수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점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음악도 시시한 것은 듣지 맙시다. 그림도 좋지 않은 것은 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일본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신문에도 잠깐 보도되었지만 일본에서는 며칠 동안 저녁 방송에 보도되었습니다. 23세의 청년이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 어린이 네 명을 차례로 유괴하여 죽인 사건입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시체를 토막내어 상자에 넣은 다음 어린이들의 집으로 부쳤다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이 소포를 받고 상자를 열었을 때의 충격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러한 엽기적(獵奇的) 사건이 무려 1년 반 동안이나 경찰을 조롱했습니다. 결국 잡히고 말았는데 그 후 범인의 집을 조사해보니 음란 폭력 비디오테이프가 무려 2천여 개나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매우 내성적인 사람으로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밤낮으로 그런 것만 보았던 것입니다. 나쁜 것만 자꾸 정신속에 심었습니다. 그 열매가 마침내 범죄로 나타난 것입니다. 듣는 것이 심는 것이요, 보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며, 마음에 두는 것이 모두 심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쁜 것을 자꾸 심었으니 나쁜 것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공산당들은 꿈을 꾸어도 공산주의 꿈을 꾸라고 한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야말로 꿈을 꾸어도 기독교인다운 꿈을 꾸어야 한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수상한 꿈을 꾸고 허황된 꿈을 꾸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잠을 잤기에 그런 꿈을 꿉니까? 꿈은 잠재의식이므로 잘못된 꿈을 꾸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던 것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행동으로 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신령한 것, 영적인 것, 영원한 것에 늘 관심이 있어야 됩니다. 좋은 이야기, 좋은 일을 마음에 심어나가면 아름다운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농부가 되려면 몇 가지의 주의사항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선한 일을 조금 해놓고 당장 열매가 있기를 기다리지는 맙시다. 어느 목사님이 제게 해준 이야기입니다. 한 교우가 그 목사님께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장사가 잘 안됩니다." "그래요? 왜 안될까요?" "그걸 제가 알겠습니까? 저는 목사님 말씀대로 십일조를 다 바쳤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면 창고가 넘치게 주신다고 했는데 아무리 바쳐도 안된다고 항의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물어보았답니다. "몇 년이나 바쳤습니까?" "몇 번 바쳤습니다." 십일조 서너 번 갖다바치고 그 다음날로 장사 안된다고 원망이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던히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선행을 절대로 부도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내 이름으로 주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선행은 절대 부도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은행에 둔 것이 없어집니다. 하나님 앞에 저축한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조급히 생각하여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에게 갚아주시는 시기와 방법과 장소는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내가 갑이라는 사람에게 주고 갑으로부터 다시 받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갑에게 주고 을에게서 받습니다. 동에 주고 서에 가서 받습니다. 어딘가에 심어 놓으면 그 어딘가에서 거두게 됨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 : 25)"-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부지런히 심어놓으면 후손들이 결코 배고프지 않습니다. 제가 효도하는 마음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저는 이북에서 부모를 떠나 피난 내려올 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제 손에는 성경책 한 권만이 달랑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배고팠던 적이 없었습니다. 재벌도 부자도 아니지만 재벌보다 더 넉넉하게 잘 쓰고 잘삽니다. 이는 모두 내가 선해서가 아니라 조상덕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는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밥도 달라고 오고 쌀도 달라고 옵니다.
끼니 때 오면 대개 밥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쌀을 내줍니다. 어떤 때는 어머니께서 쌀을 내어 제게 갖다주라고 시키십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 쌀을 넣어준 기억이 많습니다. 어머니께서 손수 쌀을 내어서 갖다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그럴 때는 며느리로서 시어머니 눈치를 살피느라 많이 주지 못하고 조금 내줍니다. 그러면 할머니께서 보고 계시다가 "그렇게 조금 주면 되느냐, 더 갖다줘라"하고 나무라십니다. 이렇게 하여 다시 더 내다주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기왕에 주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후하게 주어야 합니다. 또 저희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하신 유언 중 하나가 '내가 죽거든 일주일 동안 거지 잔치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셨을 때에 소를 잡아 일주일을 두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을 모두 불러 대접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하여 가난을 다 구제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인색하게 굴지 말고 부지런히 베풀어 보십시오. 내가 지금 부지런히 심어놓으면 내 후손이 절대로 걸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를 가서든지 귀인을 만날 것입니다. 굶지 않고 잘살 것입니다. 복 받지 못할 짓만 하면서 복 달라고 비는 사람처럼 답답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못 받아도 좋습니다. 꾸준히 뿌리고 심으십시오. 언젠가는 거두게 됩니다. 내가 아니면 내 후손이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땅에서 못 거두면 하늘에서 거둘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낙심하지 맙시다.
다음으로 '피곤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지쳤다고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라는 말입니다. 중단하지 말고 행동을 계속하라, 주춤하지 말라, 줄이지 말라-그러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정하신 때에 거두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하여 말씀합니다.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10절)"-선한 일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할 기회가 와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좋은 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기회가 지나간 다음에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할 것이요 농사 짓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심어 가꾸면 때가 이르러 거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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