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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소유(누가복음 12장 13절~21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 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 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 공부할 잠언입니다. 이 잠언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소유와 물질 내지 부(富)를 주제로 하여 주신 교훈의 하나입니다.
13절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께 부탁을 드립니다. 말하자면 청(請)을 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좀 색다르고, 여느 질문과는 다르게 영 중뿔난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 찾아오는 사람들은 거의가 대체로 병 고침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거나, 율법에 대하여 여쭈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눅 20 : 22)" 따위로, 시비(是非)할 꼬투리를 잡고자 말을 거는 축들이거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때마다 그것을 계기로 귀한 진리의 말씀을 해주시곤 합니다마는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의 질문은 그러한 맥락과는 전혀 동떨어진 '해프닝'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신령한 교훈을 주시기에 바쁘셨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하기에 몹시도 분주하셨습니다. 영일(寧日) 없이 항상 그렇게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시고 남은 시간이 있을 때에는 많은 병자들을 어루만져주시고 치료해주셨습니다. 이런 총중에 웬 엉뚱한 사람 하나가 나타나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遺業)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3절)." 자기의 형에게 명령을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일종의 재판장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재판장이 아닙니다. 더구나 물건 나누어주는 재판장은 아니지요.
그 젊은이같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 유대인 사회에서는 해결사가 랍비였습니다. 노련한 랍비가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랍비들은 지혜가 있어서 어느 쪽의 마음도 상하지 않게 해결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렇고 보면 그 젊은이는 예수님의 지혜와 권세를 인정했던 것 같습니다. 유산 때문에 불화 하여 다투고 있는 형제간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청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일찍이 그 같은 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와 "우리 부부. 이혼을 할까요 같이 살까요?"하는 따위의 질문을 해온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젊은이, 형제간의 의가 나빴던 모양이라고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되는 사람이 자녀들에게 유산을 미리 나누어주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에 따르면 형이 동생의 두 배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산을 세 몫으로 나누어 그 3분의 2를 형이 가지고 3분의 1을 동생이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형은 부모를 모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젊은이의 아버지가 졸지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형이 부모를 모실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 동생 되는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형님이지만 두 몫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반반(半半)으로 나누자 했을 것이고, 형은 "무슨 소리냐. 율법이 말하지 않느냐, 내가 부모를 모시건 안 모시건 형은 형이다, 그러므로 두 몫은 내 것이다"하고 버티는 것 같아요. 시비가 될만한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게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해결되지 않고 있음입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시간은 흘러갑니다. 동생은 기어이 절반은 받아내겠다는 욕심이고 형은 3분의 1만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율법이란 어느 쪽으로든지 통하는 것입니다. 형은 형대로 자기한테 유리한 쪽을 고집하고, 동생은 동생대로 그러한 것입니다. 도대체 해결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해서 동생 되는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 젊은이, 예수님을 찾아오기 전에 랍비에게도 갔었을 것이고 재판장에게도 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안(事案)이 워낙 델리키트(delicate)한 것이라서 아무데서도 해결을 보지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지혜가 남달리 많고 능력이 크신 분이니 어떻게든지 시원하게 해결해주시지 않을까 해서 기대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두고 앞의 추리와는 다른 또 하나의 추리를 해볼 수도 있습니다. 형제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형이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동생이 봉양했습니다. 형이 장가를 못 가서인지 맏며느리가 고약했던 것인지, 아무튼 형이 제구실을 못하고 동생이 형 대신 부모를 봉양하던 중에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유산을 나누게 됩니다. 동생은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아버지는 내가 모셔왔으니 3분의 2는 내가 받아야 하오. 형님은 3분의 1만 받으시오. 법률상으로는 당신이 형이지만 부모를 모신 입장에서는 내가 형이오." 이 말도 말이 될만하거든요. 이래서 유산분배 문제를 해결보지 못하고 시비를 벌이고 다투고 하면서 오늘에까지 왔고, 이제 예수님께 하소연하러 왔다 - 이렇게 추리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어렵게 말하면 '유산'이지만 쉽게 말하면 '돈'입니다. 돈 문제입니다. 물질 문제, 재물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전념하다보니 형제간의 우애도 간데가 없어졌습니다.
동생도 없고 형도 없어요. 서로가 원수만 보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가난한 것만 같고,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손해를 입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죽이고 싶도록 미워졌고, 차라리 '저 인간'이 죽어 없어졌으면 좋을 것 같은 상황에까지 다다라 있는 것입니다.
그러구러 가문도 욕되게 만들었습니다. 유산 가지고 형제 사이가 망가졌으니 망신이요 죽은 부모에게 욕을 돌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아랑곳없습니다. 오직 재물에 대한 욕심만으로 눈에 핏발이 서 있을 뿐입니다. 부모고 형제고 이웃이고 가문이고 다 안중에 없어졌습니다. 마침내는 저렇듯 남의 힘까지 빌리려듭니다. 예수님의 힘을 빌리려고까지 혈안이 되었습니다. 재물과 소유, 돈, 그리고 이기적인 행복의 노예가 될 때에 사람은 이렇게까지 추해지는 것입니다. 내 이익밖에 생각하는 것이 없습니다. 상대방 생각은 조금도 해주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어디 본문에서만 보는 일입니까? 오늘의 우리네 세상에서도 돈 때문에 부부 사이가 나빠지는 집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형제 사이가 원수같이 되어버린 집도 있습니다. 두루 살펴보면. 돈으로 해서 사람의 격이 얼마나 초라해집니까? 얼마나 추해집니까? 그로 해서 세상이 얼마나 탁해지고 복잡해집니까? 전설이 하나 생각납니다.
솔로몬 성전을 지을 때에 얽힌 두 가지의 전설이 있는데, 성전이 자리한 그 터가 모리아 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그곳이라고 하는 전설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렇습니다.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일찍이 장가를 가서 어느덧 슬하에 여러 명의 자녀도 있으나 동생은 미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두 아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형제는 저마다 분배받은 땅에 열심히 농사를 지었고, 저마다 그 소출(所出)을 쌓아두었습니다. 넉넉하게 땋여 있는 곡식단을 보고 동생은 생각합니다. '자. 나는 혼자 사는 처지라 이렇게 많이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형네는 식구가 많으니 그 소출로는 혹 일년 양식하기에 모자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생은 아무도 보지 않은 야음을 타 자기 곡식단을 형네 밭으로 옮겨다놓았습니다.
한편, 형은 형대로 '나는 마누라도 있고 아이들도 있는데 저 동생은 혼자 사니 얼마나 외로울꼬? 녀석의 재물이라도 많이 모아야 장가도 들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뭘 좀 주려고 해도 녀석은 도무지 받지를 않으니 이번에는 몰래 갖다주어야 되겠다'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형은 자기네 곡식단을 밤새껏 날라 동생네 밭에다 옮겨놓았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밭에 나가보니 곡식단이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밤새껏 그렇게 옮겨놓았는데 여기 그대로 있다니, 거 참 이상하다?' 형도 이렇게 생각하고 동생도 자기 밭에 여전히 높직하게 쌓여 있는 곡식단을 보고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날 밤에 형제는 저마다 지난밤에와 똑같이 되풀이했습니다. 동생은 자기 곡식단을 형네 밭에 옮겨놓았고, 형은 자기네 곡식단을 동생네 밭에 옮겨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마침내는 서로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웬놈이냐?" 어둠 속에서 똑같이 서로를 보고 소리칩니다. 그러다가 확인을 해보니 동생이고 형이 아닙니까? "왜 이런 짓을 했느냐?" "형님네는 식구가 많지 않습니까?" "너는 장가도 들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니 부지런히 모아야 되지 않느냐?"-이렇게들 시비를 하던 형제는 급기야 서로 얼싸안고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져서 임금의 귀에까지 들려왔고, 임금은 무릎을 치면서 명합니다. "그 형제의 밭이야말로 보배로운 땅이로다. 그 땅에다 성전을 지으렷다!" 솔로몬 성전터가 바로 그 밭이라고 하는 전설입니다.
여러분, 저토록 아름다운 형제간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형제는 어떻습니까? 참 못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하니 고약하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말을 들으시고 직접적으로는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알았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높은 차원에서 교훈을 주실 뿐입니다. 간단하게 말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 너는 얼마, 나는 얼마 하고 따지는 탐심을 물리치면 해결될 것이다 하심입니다. 정확한 대답이요, 정곡을 찌르심입니다. 탐심이 있는 한은 제아무리 공평하게 나눈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칼로 자르듯이 정확하게 분배하도록 판결해준다 해도 저들의 마음에 욕심이 살아 있는 한은 저들에게 만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양쪽 다 불만일 뿐입니다. 해결의 길은 탐심을 버리는 길밖에 없습니다. 요즘에 보니까 더 가지고 덜 가지고 하는 문제로 해서 어지간히들 투쟁합디다마는 투쟁의 결과 가지고 만족하는 것 보았습니까? 불만은 여전합니다. 그 마음에 응어리진 것들은 여전해요. 끝없는 욕심은 끝없는 불행을 낳을 따름입니다.
'탐심(貪心)'이 무엇입니까? 헬라말로는 '프레온렉시아'라고 하는 이 '탐심'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프레온'은 영어의 'more'에, '렉시아'는 영어의 'have'에 해당합니다. 즉 '프레온렉시아'는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마음'이 됩니다. 이것이 곧 '탐심'입니다.
필요한 것을 더 가지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분수에 넘치도록 더 가지겠다는 마음입니다. 자족(自足)이 없는 마음입니다.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라고 디모데전서 6장 6절에서 바울도 말씀합니다. 무엇을 가졌건 만족하고, 내가 가진 것이 제일 좋은 줄 알고 귀한 줄 알고 충분한 줄 알고 살아가는 삶이 은혜스러운 삶이요, 그렇게 살아간다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고 말씀함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늘 복 받지 못했다고 원망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내게 복은 안 주신다고, 돈을 안 주신다고 불만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족하는 마음이 없으면 예수 제대로 못 믿습니다. 자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 곧 탐심입니다. 다른 말로는 소유욕입니다. 목적 없는 소유욕입니다. 무엇 때문에 더 가져야 합니까? 사람이 쓰는 것에는 한도가 있습니다. 무한정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거늘 목적도 없이, 다 쓸 수도 없으면서 무제한으로 가지겠다고들 합니다.
한계를 모르는 소유욕-이것이 '탐심'입니다. 저는 선교를 위하여 할 일이 참 많습니다. 학교도 있어야 하겠고 군복음화도 해야 하겠고…… 그런데 돈이 없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가끔가다 부자(富者)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나이 많은, 한 일흔 살쯤 되는 노인인데 가진 돈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제가 부자가 못돼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저 같아서는 가진 것 다 내놓겠는데 그렇지를 않아요. 죽을 때까지도 다 쓰지도 못할 것을 손에서 안 놓더군요. 부자가 되면 사람이 이렇게들 되는 것인지, 저로서는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한계를 모르는 소유욕입니다.
소유에는 사회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 혼자만 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굶는 사람이 곁에 있는데 나만 배부르게 먹는다고 몸이 편할 것입니까? 마음이 편할 것입니까? 다같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회성을 모르는 욕심 - 이것이 탐심입니다.
그리고 소유에는 도덕성이 있습니다. 바르게 벌고 바르게 써야 합니다. 다른 사람 망가뜨리든 말든 아편장사를 해서라도 돈만 벌면 된다-될 말이 아닙니다. 정당하게 벌고 정당하게 가져야 합니다.
요즘 들어 세계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분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충분하게 주셨습니다. 인구 50억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앞으로 인구가 지금의 20배가 넘는다 해도 괜찮다고 하더군요. 얼마든지 먹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분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루과이 협정'이 무엇이겠습니까? 잉여농산물을 다른 나라에 떠넘기자는 것입니다. 남아도는 농산물이 문제입니다. 그 많은 쌀이 남고 남아서 쌓아놓고 썩이고 있어요. 이 잉여농산물 때문에 큰일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이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치지도외로 하더라도 보십시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캐나다, 호주, 심지어는 중국, 영국까지도 식량이 남아돕니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식량 없어서 하루 평균 삼만 명씩 굶어죽습니다.
굶어죽는 사람만 일년에 삼백만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굶어서 생기는 합병증으로 죽는 사람까지 치자면 그 세배가 됩니다. 결국 먹을 것이 없어서 일 년에 천만 명이 죽는 셈이 됩니다. 여러분, 파키스탄이나 아프리카 등지를 보십시오. 식량 없어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기가 막힐 정도로 끔찍하고 불쌍합니다. 이렇듯 한쪽에서는 굶어죽고, 다른 한쪽에서는 잉여농산물의 처리 때문에 다른 나라까지 협박해가며 수출하려고 하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 편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고 뭐라 하실 것 같습니까? "내가 충분히 줬는데 서로 나누어 먹으면 될 것을. 혹은 너무 많이 가졌고, 혹은 하나도 가지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꼴이냐?"라고 호통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먹어서 병들어 죽고, 어떤 사람은 너무 못 먹어서 굶어 삐쩍 말라 고생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요지경 속입니까? 왜 이 모양입니까? 우리 나라에서 비대하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날씬하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사람들을 보면 너무 살이 쪄서 어떻게나 큰지 비행기 좌석에도 제대로 앉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왜 이렇습니까? 분명히 분배에 문제가 있습니다. 분배가 잘못되었습니다. 탐욕 때문입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그 이상은 필요 없다고 내놓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하실 말씀이 많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더해주랴?" 내가 너희들에게 넘치도록 넉넉하게 주었는데도 모자란단 말이냐 물으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만 바로 세우면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만 평화롭게 가지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입니까? 탐심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 하고, 못 가진 자는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을 정도로 어렵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생명과 소유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이라고 한마디로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일용할 양식-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한계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 이상은 못 먹습니다. 아무리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습니다. 하긴 옛날 로마사람들은 대단한 미식가, 대식가들인지라 식도에 손가락을 넣어 음식물을 토해내고 다시 먹곤 했답니다.
그런데 요즘의 우리 젊은이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이런 죄악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더 먹으려고 발버둥쳐봐도 한계는 있습니다. 그 이상 절대로 먹지 못합니다. 그 이상 소유하지 못합니다.
지난번 마닐라에 갔을 때에 그곳 영부인이 거하던 침실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침대가 2인용 보통 침대보다 3배나 컸습니다. 왜 이렇게 침대가 큰지, 부부싸움 하기에는 안성맞춤이겠다 싶더군요.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큰 침대를 놔봤댔자 내가 누워 자는 자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내 크기 만큼밖에 더 하겠어요. 그러니 큰 침대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두 방을 차지해봤댔자 어차피 내가 자는 곳은 한 방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방에 걸쳐서 자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한계라는 것입니다. 그 한계 이상은 소유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문제라고 하면 먼저 건강을 생각합니다. 건강과 소유, 이것은 별개입니다. 여러분, 돈 많은 사람은 건강하고 가난한 사람은 병들고 한답디까? 그렇지 않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병원에 더 자주 다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건강합니다. 이렇듯 건강과 소유는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건강하겠다고 좋은 것만 먹고, 위생시설을 갖추고, 까다롭게 따지고 하지만 남 먼저 갑니다. 소용없습니다.
또한 수명과 소유도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북녘에 계신 분들을 보십시오. 지금 북한은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식량도 모자랍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곳 사람들이 오히려 장수를 합니다. 북에 계셨던 저희 어머니도 94세까지 사셨다니 장수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계셨던 저희 어머니의 오빠 되시는 분은 그렇게 오래 사시지 못했습니다. 수명과 소유는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잘먹는다고, 많이 가졌다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세계적으로 건강 장수하는 마을이 셋 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을 조사해보니 공통된 점이 하나 있더랍니다.
우리 보통사람들은 하루 2,500칼로리를 섭취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2,000칼로리에도 못 미치는 1,800칼로리 정도를 섭취한다고 합니다. 적게 먹고 오래 사는 것이지요. 그곳에서 70, 80세는 소년 축에 든다고 하니까요.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잘살고 잘먹고 하는 것과 수명과는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나아가 행복과 소유와는 더더욱 관계가 없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요, 적게 가졌다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하면 건강하고 장수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소유와 생명은 무관하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말씀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8)." 그렇습니다. 어차피 일용할 양식이요, 하나님께서 계속 주시는 것입니다. 몇십 년 전에 농사지은 것을 가지고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해마다 지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 가지려고 하는 이 탐심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소유에 앞서 소유의 참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도대체 가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재산이란 내 이름으로 등기했다는 것밖에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유가 무엇입니까? 이 산이 내 산이라고 해서 지고 다닐 수나 있나요. 단지 내 것이라고 등기된 것에 불과합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식의 한계만큼 소유합니다. 내가 내 뜻을 알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내 정신으로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누구 것인지를 알아야 완전한 내 소유인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른다면 내 이름으로 되었다 해도 내 소유는 아닙니다. 또한 사용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있어도 자동차를 운전할 줄 모르면 그것은 내 차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피아노가 있어도 피아노를 칠 줄 모르면 그것은 내 피아노가 아닙니다. 그 피아노는 칠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집에 심방을 갔더니 아주 좋은 재봉틀이 있더군요. 컴퓨터가 내장되어 있는 최상품이었습니다. 제가 슬그머니 주인에게 "이 재봉틀 다룰 줄 아십니까?"라고 물어보았더니 전혀 모른다고 합디다. 그렇다면 이 재봉틀이 그 사람의 소유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내 것인 줄 착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쓸 줄 아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진 것만큼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는 행복을 줍니다. 곧 행복을 주는 것만큼만 그 소유가 내 것입니다. 그런데 소유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서 근심이 되고 걱정이 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그 소유는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만 원 가졌다가 일만이천 원 가지면 이천 원 더 가진 것만큼 행복합니다. 그러나 일만 원 가졌다가 십만 원쯤 가지게 되면 마음속에 걱정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도둑맞을까봐 걱정이고, 십만 원이 구만 원 될까봐 걱정입니다. 이 때부터 이미 그 소유는 내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어디까지나 애초에 만 원까지만이 내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근심 없이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한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까지만이 내 것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 소유는 내 인격의 한계만큼 내 것입니다. 소유로 인하여, 물질로 인하여 교만해지면 그 소유는 이제 내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때까지, 성숙의 한계까지입니다. 내가 노예가 됨이 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정도가 내 것입니다. 그 정도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 때부터 그 물질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도덕성에 있고, 영성(靈性)에 있고, 믿음에 있고, 경건에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결코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라고 야고보서 4장 15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코 행복이 소유에 있다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평화도 건강도 생명도 잃어가면서 소유의 노예, 탐심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또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하십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또 내가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6-21절)." 자기 중심적이요 현세 중심적이요 세속중심적이요 향락중심적인 탐심---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음성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생각을 모아보십시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다고 엄히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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