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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더럽히는 것(마가복음 7장 14절~23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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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더럽히는 것(마가복음 71423)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 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 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 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 을 더럽게 하느니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오늘의 이 잠언말씀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관을 이루고 있는 기본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윤리관은 대체로 이런 원리에 입각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사람들이 빠져 있던 윤리관에 정면 도전하는 비판의 화살이었습니다. 저들의 윤리관과는 정반대 되는 의미의 교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끝내는 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나도 싶습니다. 아무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몹시도 비위에 거슬리는 도전적 교훈이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대부분의 유대사람들이 빠져 있던 윤리관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고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저들은 계율적이었습니다. 마치 메마른 법조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 가라 가지 말라, 먹어라 먹지 말라, 하고 이런 것 저런 것 가리는 것 투성이요 얽어매고 을러메는 조목(條目)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둘째는 전통(傳統)이라는 것에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뒷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조상적부터 그렇게 해왔으니까' 뜻 모르고 얽매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느 민족에고 간에 조상 적부터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미신(1)이나 속신(俗信)에 뜻 모르고 맹종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도 그런 점에서는 유난스러운 데가 있지 않습니까? 지난번 주일날은 '60년만에 처음 있는 재수좋은 날' 이었다면서요? 이게 무슨 근거를 가진 속신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날에는 서울 안에서 만도 5천 쌍이나 결혼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날을 잡았는지, 그날이 왜 좋은 날인지, 딱 부러지게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고 저렇고 그래서 좋은 날이라고 대답을 한다 한들 그것은 세상에도 어리석은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시쳇말로 '웃기는' 일입니다. 이렇게 뜻 모르고 맹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윤리관이 그러했었습니다. 그저 계율적으로 받고 전통적으로 받았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뜻도 이치도 아랑곳없습니다. 따져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따를 뿐이었습니다. 전승되는 것이요,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것이라는 이유로만 무조건 옳은 것이었습니다.

세째는, 계율적이요 전통적임으로 해서 그 윤리관은 형식적이요 외식적(外飾的)이었습니다. 속 따로 겉 따로 였습니다.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고 겉치레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소위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플러스 알파로 개재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과 다른 것이 이 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있다' '다른 민족들은 안 지키지만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 '다른 민족들은 이것을 먹지만 우리는 안 먹는다'-- 이런 식으로 타민족들을 배타적으로(exclusively) 대합니다. 이런 성향을 가리켜 'dissimulation'이라고 합니다. 좀 괜찮다 싶은 것일지라도 남이 그것을 하니까 나는 일부러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것이 좋아 보이는데도 그렇지 않은 척,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 시치미를 떼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는 다르게 살려고 합니다. 남이 검은 옷 입었으면 나는 일부러 횐 옷을 입습니다. 남이 좋아하는 음식이기에 나는 먹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이런 성향-자기네를 유별난 민족으로 생각하는 우월감 같은 것으로 해서 저들의 계율은 점점 더 까다로운 형식을 더해왔던 것입니다.

저러한 성향은 우리네 신변에서도 드물잖게 목도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옳다 그르다 판단해서가 아니라 남이 저렇게 하니까 나는 짐짓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유별나게 만들려고 합니다. 나를 높이고 귀족연(貴族然)합니다. 개별화합니다. 그리함으로 마침내는 인격 면에 결핍이 옵니다. 형식에 매이다보니 인격 면에서 있어야 할 것이 결여됩니다.

외식에 빠져들었으니 내면성이 없습니다. 내면적으로 깊은 의미는 생각지 못합니다.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신령한 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내 영혼에 관한 것, 신령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어졌습니다. 겉치레만 남았습니다. 습관적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속 사람은 어디 가고 허우대만 남았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외식뿐입니다. 단 한번도 자신의 참모습을 돌아 볼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껍데기만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얼굴 한번 붉힐 줄 모르는 채 비윗장 좋게 여상(如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참 많은 세상입니다.

본문말씀이 연유한 맥락을 살펴보면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먹는 것을" 보고 저들의 유전(遺傳)에 따른 정결의 문제로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35)" - 정결에 대한 것은 구약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3절로 21절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무엇이 깨끗하고 무엇이 부정한지, 깨끗하다면 왜 깨끗하며 더럽다면 왜 더러운지,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왜 말씀하셨는지, 왜 지켜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자상하게 일러주신 그 본뜻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그냥 따르기만 하는 외식주의로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저들의 시비를 꾸짖으십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69)" -하나님께서 저러한 계명을 주실 때에 무슨 뜻에서 주셨는지, 그 본래적 의미(original meaning)를 어찌하여 소홀히 여기느냐 하심입니다. 마침내 저들에게는 그러한 오류가 습관이 되었고, 습관이 전해지면서 문화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형식주의화하여 지키는 것 자체에만 열중하게 되고, '나는 지켰다'하고 교만하게 되고, 남은 못 지켰다고 멸시하게 되고, 나도 못 지켰다고 낙심하게 되고 -이것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냐고 꾸짖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저러한 가르치심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도 어디까지나 내 중심에 자리하는 신앙이 먼저입니다. 형식이나 계율은 그에 따르는 것이요 나중입니다. 까딱하면 우리는 자기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툭하면 낙심합니다.

무심히 입을 뻥긋하면 남을 비판합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니 조심 할 것입니다. 지켜야 할 것의 본뜻, 본래적인 뜻을 바로 알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옛날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외경(外經) 마카베오서에 보면 예루살렘에 쳐들어온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사람들을 박해하는데, 보통으로 잔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일부러 유대사람들이 싫어하는 돼지를 잡아다놓고 제사를 지내기까지 했습니다. 유대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모독이 없었습니다. 제사라는 것을 지낸 다음에는 유대사람들을 붙잡아다놓고 강제로 돼지고기를 먹이는데, 먹으면 살려주고 안 먹겠다고 버티면 가차없이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사람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대사람이라는 이유로 잡혀왔습니다. 큰 곤욕을 치른 끝에 그들도 돼지고기 먹기를 강요당했습니다.

일곱 형제 앞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일곱 형제는 모두가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저들은 먼저 그 어머니와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첫째아들을 처형합니다. 혀를 자르고 사지를 자른 다음에 산채로 불에 구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둘째아들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했습니다. 둘째아들은 거부했습니다. 저들은 둘째아들의 머리가죽을 벗기고 죽였습니다. 셋째 아들도 그렇게 죽어가고 네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가 차례차례 갖은 방법으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련의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는 놀랍게도 낯빛 한번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들들을 하나하나 격려하면서 자랑스러워하고 흐뭇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일곱 형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나는 감옥에서 손을 씻지 못하고 음식을 먹기보다는 차라리 굶기를 바랐다'라고 말했습니다. 잘한 일입니까, 잘못한 일입니까? 손을 씻고 먹으라는 율법이 있는 것은 우선 위생을 위해서요 나아가서는 항상 깨끗이 하는 마음으로 살라시는 상징적 의미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율법적으로 계율적으로 전승적으로 받아들인 나머지 손을 씻지 않고 먹을 바에는 차라리 굶어죽겠다고 하는 것이니 얼마나 답답한 형식주의입니까? 마카베오 시대에 뒤이어 온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사람들은 먹을 것과 안 먹을 것을 엄격히 가렸습니다. 돼지고기는 물론이고 쥐고기, 뱀고기, 토끼고기, 낙타고기,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 낙지, 오징어, 문어 같은 것이 다 못 먹을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왜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는 알 것 없고 다만 먹지 말라고 했으니 죽어도 안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그런 계율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109절로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곧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베드로가 그 환상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고넬료의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사람이요 유대사람들이 더럽게 여기는 사람인데 천사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를 모시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맞아! 먹으라고 하셨지.' 그래서 따라나섭니다. 규례를 어기고 이방사람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당시의 유대사람으로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방사람의 집에 들어가고, 그 집에 유숙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유대사람으로서는 전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늘로부터 들은 음성이 있기 때문에 그 같은 규례를 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마침내 이방으로 향하는 선교적 사역의 출발이 됩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 아닙니까? 오늘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inside)으로 더러운 것과 겉(Outside)으로 더러운 것, 속과 겉의 어느 쪽이 중요하냐, 물론 속이 중요하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속은 변변치 못하면서 옷치레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 것입니다. 하루하루 주름살도 자꾸 늘어가고 있으니 대충대충 입고 살 것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니 물경 삼백오십만 원짜리 옷을 사 입는, 정신나간 사람들이 있어요. 너무도 야단스럽습니다. 서양사람들 보면 남이 입던 중고 옷도 잘 사 입는데 우리네 사람들은 꼭 새것이라야 성에 차는가봅니다. 옷 까다롭게 입는 것으로는 아마도 세계적일 것입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까? 속은 별로 깨끗지 못하면서도 겉은 되게 깨끗 하려고 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관심을 안으로 돌려야 합니다. 내용 있고 내실적인 것에 치우칠 것입니다. "얼굴만 젊었다고 몸도 젊었다더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어보았습니다. 얼굴만 자꾸 맛사지 한다고 몸이 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에 너무 시간을 버려서는 못씁니다. 그런 시간은 속을 깨끗이 하는 데 쓸 것입니다. 그릇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릇의 겉과 속,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속이 중요합니다. 속이 깨끗해야 합니다. 겉이야 좀 더러우면 어떻습니까? 내용은 속에 있습니다. 더러운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인격이요 마음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흑백논리에 빠지지 말 것입니다. 갔다 안 갔다, 먹었다 안 먹었다 하는 것이 대수가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예배 마치고 돌아 갈 때에 인사를 주고 받다보면 제가 여러 가지로 인사를 받습니다.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많이 깨달았습니다"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젊은이들의 인사법은 가끔가다 이상한 데가 있어요. "목사님. 설교 좋았어요"하는가 하면 "목사님, 욕보셨어요"라는 인사까지 있습디다. 욕보았다고 하면 어떻고 은혜 받았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I don't care. 중요한 것은 그 마음씨입니다. 말은 '욕보았다'고 하지만 그 속은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니 고마운 것입니다. 수고했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웃 사람이 아랫 사람 보고 심부름을 시킬 때도 "가겠습니다"하면 가는 것이지만 "가요, !"하고 볼멘 소리한다면 그게 간다는 것이겠습니까?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개를 보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을 하는데 퉁명스럽게 말하면 팩하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미워한다"라고 말을 하는데도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말한다면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고 좋아합니다. 음성이 높으냐 낮으냐, 눈빛이 사나우냐 부드러우냐에 따라서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지 말의 내용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선할 때에는 "이 문둥아!" 해도 정이 통합니다.

그러므로 흑백논리로 볼 것이 아닙니다. 먹었다고 죄이고 안 먹었다고 죄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양이 함정에 빠졌는데도 안식일이므로 건져주지 말아야 합니까? 사람이 죽어 가는 데도 안식일이라고 병원에 데려가지 말아야 합니까? 그래놓고 나는 안식일 거룩하게 지켰다고 할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 보니까 주일성수 한답시고 가게문 닫아버리고 놀러 갑디다. 교회에 나왔다고 해서 꼭 주일성수 한 것도 아닙니다. 친구 만나러 나왔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왔느냐 안나왔느냐 하고 흑백논리로 따질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여유가 있으셨습니다. 시쳇말로 자유주의적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까다롭게 형식을 고집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럽다는 것과 더럽힌다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십니다. 사람을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하십니다. 더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입을 열면 더러운 말이 나오고, 이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들어, 입으로 들어가는 술은 괜찮고 담배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니 더럽다고 희한하게 해석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아무튼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나쁜 생각, 나쁜 마음은 자신도 더럽히고 남도 더럽힙니다. 내 속의 나쁜 것이 남에게 감염되는 것입니다. 음란한 사람과 자꾸 만나면 내가 음란해집니다. 욕심 많은 사람과 어울리다보면 나도 욕심 많아집니다. 못된 사람과 어울리다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나도 못돼지고 맙니다. 나의 쓸데없는 말 한마디가 많은 사람의 신앙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입 조심할 것입니다.

착한 사람, 신실한 사람, 의로운 사람, 은혜로운 사람이 입을 열면 찬송이 나오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고, 은혜롭게 합니다. 근심걱정 가득한 사람이 입을 열면 남까지 어둡게 만듭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123)"라고 예수님께서 조목조목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요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있는 중요한 원리 세 가지를 생각해볼 것입니다. 첫째, 음식은 영혼과 상관이 없습니다. 음식 깨끗하게 먹는다고 해서 영혼까지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손발 깨끗이 씻는다고 해서 마음도 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옛날 전도사일 볼 때에 교회학교 학생들 가르치느라고 여러 가지 자료를 뒤지고 책도 많이 보았는데, 어떤 동화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거짓말을 해놓고 마음이 자못 괴로웠습니다. 이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하겠는데 닦아낼 수가 없어요. 생각 끝에 그 아이는 비눗물을 만들어 마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눗물을 마신다고 마음이 깨끗하게 씻어지는 것입니까? 음식과 영혼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영혼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둘째, 모든 음식은 정결합니다. 음식이란 믿음으로 먹으면 다 좋은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먹으면 다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언제나 감사함으로 먹을 것입니다. 그러면 유익한 것입니다.

셋째는 마음입니다. 언제나 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항상 마음을 깨끗이 하고, 더럽혀지지 않도록 각성하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정결한 마음에서 정결한 행위가 나오고 정결한 분위기가 풍겨납니다. 내 마음이 은혜롭고 기쁘면 자연히 옷도 정결히 입게 됩니다. 생활분위기도 깨끗하게 만듭니다. 분위기를 깨끗이 해야 그에 따라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옷을 깨끗이 입어야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깨끗한 곳에 처한다고 내 심령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속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본적인 것은 마음입니다. 형식적인 것을 통해서 내 마음과 인격을 정결케 할 길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절도 없이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외모가 더러워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깊은 관심을 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에 두어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라야 하나님을 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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