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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선한 목자 비유(요한복음 10 : 1 - 18)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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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비유(요한복음 10 : 1 -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우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가운데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앞장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양과 목자에 대한 이야기는 유목민 생활에 익숙한 저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가 되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서 속에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세 가지 비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가 왕과 백성의 비유입니다. 이는 온 인류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특별히 구원받은 자와의 절대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 이세상의 왕과 같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가 아버지와 자녀의 비유입니다.

이는 성서 속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비유로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가장 절실하게 표현한 비유입니다. 세 번째 비유는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이 세 비유는 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상징한다는 점과 그 내용에 있어서 서로 통하는 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목자라고 할 때에는 먼저 세 가지 기본적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기본적인 것이란 첫째 양을 인도함입니다. 양은 순하고 착한 동물이지만 누구의 인도함이 없이는 제 길을 가지 못합니다.

이 양들은 조금만 멀리 나가도 자기 우리를 찾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하고 이 목자에 의해서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험한 골짜기를 지나 목적지에 이를 수 있도록 계속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양을 인도하는 자가 목자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목자는 양의 양식을 제공합니다. 목자는 양을 아무 곳으로나 인도하지 않습니다. 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풀을 뜯기고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물을 마시게 하여 충분한 영양을 섭취 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 목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목자는 양을 보호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사나운 짐승들이 양을 상하게 하거나 물어 가는 것에서와 도적들로부터 양을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집을 지키는 세파드(shepherd)라는 종류의 개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양을 지키는 개라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며 이 말은 곧 목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자는 일반적인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라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면 세 곳에서 이 목자에 대한 뜻을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11절과 14절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이 거듭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를 정의하여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양을 단순한 재산으로 생각하여 내 마음대로 사고 팔며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살리고 싶으면 살리면 되는 것이지 하는 생각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사랑하는 것은 그 정도의 의무가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서 마침내 양을 사랑한 나머지 때로는 목숨을 버리기까지도 하는 그런 목자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히브리서 13:20말씀에 보면 부활하신 큰 목자장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목자장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시어서 영원히 우리의 참된 목자가 되어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전서 2:25에서는 목자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교회의 감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감독들이 곧 목자이며 그 목자라는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와서는 목사로 불리워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사의 원 뜻은 목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장이란 이와 같은 목자들을 다스리는 우두머리 되는 한 목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큰 목자장이 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양이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으며 또한 감독하는 작은 목자들이 여기 저기 있겠습니다마는 이 모든 양들은 한 목자의 보호와 그의 소유 아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빌어 큰 목자장 되시는 예수님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실 때의 이 "선하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할 때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인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의 선, 즉 도덕적인 선을 말하며 종교적인 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직업적으로 좋은 목자라든가 목자 중에 보다 성실히 양을 돌보는 정도의 목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어디까지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높은 수준에서의 참된 선한 목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선한 목자는 어떠한 자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는 양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이어야 합니다.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며,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며 어떤 풀을 먹어야 건강하고 어떤 풀을 먹으면 죽는가? 또한 추위와 더위에 대한 반응은 어떠하며 그 성격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특별히 지금 양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등 그리고 양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들을 모르고는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에 앞서 양의 처지를 잘 모르고 있다면 그는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 보다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처지를 잘 알고 계심을 여러 곳에서 반복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음 두 번째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어디에 가서 풀을 뜯게 하고 어디에서 물을 먹이며 날씨가 이러니 비가 올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다는 등의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한 목자는 계절에 따른 필요를 알고 있어서 이것을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그리하여 털은 언제쯤에 팔고 겨울차비는 어떻게 하고를 미리 생각하고 준비합니다. 털을 깎는 것에 관계된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겨울동안 길게 자란 털을 봄이 되면 깍게 되겠는데 요즈음은 전기로 된 좋은 털 깍는 기계가 있어서 단숨에 깨끗이 밀어 내릴 수가 있지만 옛날에는 가위로 자르는 것이어서 듬성듬성 자를 때마다 자욱이 따로 생겨 그 모양이 참으로 볼품이 없습니다. 하지만 별 수 없이 한 마리 씩 그렇게 털을 잘라가고 있는데 늦추위를 맞아 일단 털 깍는 일을 중지를 해야만 한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지금 반쯤 깍아 내려가던 것은 반쯤 깍은 대로 두고 이미 깍은 양은 앙상한 그대로 추위를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깍지 않은 것은 깍지 않았으니 추위에 상관이 없는 터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앙상하게 깍아 버린 양도 그런대로 추위를 잘 견디고 깍지 않은 것은 물론 깍지 않았으니 문제가 없었으나 반쯤 깍기운 양은 감기가 걸려서 죽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엉거주춤한 생활 태도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깍을려면 완전히 깍아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려면 그대로 둘 것입니다. 중간에서 머뭇 머뭇하다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선한 목자는 양을 잘 알아서 털을 깍아야 할 때 깍고, 옮겨야 할 때 옮기며, 계절과 시간 환경에 따라서 미리 미리 대처하고 인도함으로 저들의 성장과 건강을 돕습니다. 야곱이 그러했듯이 언제 새끼 양이 생기고 낳는 것까지도 미리 알고 대비하는 그런 목자가 선한 목자입니다.

이제 세 번째는 선한 목자는 양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이리나 사자 등의 맹수로부터 보호하고 도둑으로부터 보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싸워야 하며 때로는 이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까지도 해야 하는 이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에 앞서 갈 뿐만 아니라 양을 위해 먼저 싸웁니다. 사나운 짐승들이 나타났으니 양이 먼저 죽으라며 뒤에서 슬그머니 따라가는 그런 목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범사에 앞서가는 것이 선한 목자요 더욱이 위험할수록 양을 보호하기 위해 앞서야 하는 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또한 네 번째는 선한 목자는 양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양이라고 다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병이 들고 또한 어떤 증상이 나타났을 때에는 어떻게 치료를 해야 되는가를 잘 알아서 양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양을 단순한 소유물이나 재산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됩니다. 가끔 가정에서 애완용 개를 기르는 이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돈으로 계산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외국 사람들이 개를 기르는 것을 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래서는 미장원에 데리고 가서 머리 손질을 시키는가하면 보험에 가입을 하고 마지막에는 유언까지도 남기면서 재산까지 물려주고 그러다가 죽으면 무덤 앞에 비석까지 세워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세상에는 굶어서 죽는 사람도 많은데 한갓 개에게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겠는가하고 물으면 저들은 매우 무서운 대답을 합니다. 그 대답은 자식은 키워 놓으면 배신을 하는 수가 있어도 이 개는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을 해주면 반드시 그 보답을 하거니와 비록 큰 보답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돌아서서 물지는 않는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며 돈으로 계산되어지거나 의무와 책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서 애정으로 대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런 목자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선한 목자는 양을 가르칩니다. 양이라고 다 순하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저들에게는 못되고 말썽꾸러기인 양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대열에서 이탈하여 잃어버려짐으로 목자를 괴롭힌 한 마리의 양도 선한 목자는 끝까지 나가서 그 양을 찾아옵니다. 이는 끝까지 참아주는 목자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양이 말썽을 부린다고 해서 목자와 양이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언제든지 양이 잘못된 것에 대해서 끝까지 참아주는 목자가 선한 목자입니다. 소위 어른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좀더 참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고 잘못할 때마다 비판하고 꾸중만 한다고 해서 제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저 길이 길이 참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목자와 양은 서로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고 양 또한 목자의 음성을 알기에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말입니다. 양이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을 아는 목자는 저 한눈으로 보아도 어디가 아픈 것인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고향 학교에서 기르고 있는 양 몇 마리를 당번이 되어 돌볼 때에 보면 선생님께서 소금을 조금씩 이토록 가르쳐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손바닥에 소금을 조금씩 놓고는 먹이곤 하였는데 그것을 먹고 나면 양들에게 힘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가축들이 그렇지만 양은 소금을 반드시 먹어야 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선한 목자란 양들과 마음이 통하는 가운데 저들의 형편을 잘 알아서 인도해 줌으로 마침내는 양들이 그 목자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알고 서로 통함으로 신뢰하고 그리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선한 목자된 예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지 않을 때에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분명 다정하게 들려져야 할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과 나 사이에 소통이 끊겨진 증거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려지고 나의 음성이 주님께 들려지는 통함이 있는 그것이 곧 선한 목자와 선한 양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선한 목자는 자원적인 목자입니다. 그저 적당히 일을 하고 더는 책임질 것도 예정도 없이 품값을 받고 돌아가면 되는 삯꾼이 아닙니다. 삯꾼은 일을 하다가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도망을 가버리고 말지만 목자는 결코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 부분에 보면 "스스로 버리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도 누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가 다 자원적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할 때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신세를 졌으니 그 때문에 사랑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든지 현재적인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옛날에 우리 사이가 참 좋았는데 한다거나 기왕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 산다고 하는 것은 서글픈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랑이란 부득이 해서하거나 값으로 계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은 자원적이어야 하고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를 잘 모르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그의 전부를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눈빛만 보아도 알며 몸짓만 보고도 충분히 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젖먹이 어린애를 키우는 어머니들이 하루에 열 번 거짓말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중얼거린 것뿐인데 어머니는 그 말을 다 알아듣고 통역을 합니다. 주고받는 말이 없는 것 같아도 어머니만은 아는 것이란 말입니다. 모르면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무능해도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알면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자원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부를 알면서 항상 도와주고 위해주며 마지막에는 필요하다면 생명까지도 바쳐주는 그런 의미의 자원적인 목자의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소중한 것은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위험을 당하면 삯꾼은 도망을 가지만 선한 목자는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양을 버려 둔 채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 목자에게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이라도 찾아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목자는 양의 아픔에 동참을 합니다. 이리하여 양은 목자를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에게는 길을 인도할 책임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책임도 집니다. 이와 같이 무거운 책임을 지고 다하는 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그 때문에 목자와 양들이 지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글들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저 멀리 초원을 찾아나간 양과 목자가 사람도 없는 곳에서 며칠씩, 혹은 몇 달씩 함께 지내게 되면 이제는 단순한 동물과 사람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또한 목자는 양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베두인(Bedouin)이라 하여 현대의 이 밝은 문명을 주위에 두고도 수천년 동안 내려온 원시적인 유목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저들은 그저 천막을 치고 다니면서 평생을 양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리고 나와 나의 아들도 이렇게 양과 더불어 살면서 양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목자와 양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들 서로는 하나가 되어서 신뢰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시며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선한 목자이니 너희도 선한 양이 되어다오 하시는 부탁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내가 너희를 이렇게 알고 사랑하면 너희가 나를 믿고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와야 될 것이 아니겠느냐? 가는 길이 험하든 순탄하든 간에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와야 될 것이 아니냐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명한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리빙스턴이 16년 동안 아프리카의 정글 속에서 고독과 싸우면서 선교를 하다가 잠시 귀국을 하여 지내는 중 글레스고우 대학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에 한 학생이 리빙스턴에게 그렇게 고생스럽고 고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16년 동안을 살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이 질문을 받은 리빙스턴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기를 주님의 두 마디 약속이 나로 하여금 불평 없이 찬송을 부르며 16년 동안을 무사히 지내게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약속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겠다"(14:18)는 말씀이며 두 번째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는 이 두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하나의 착한 양으로서 평안하게 지낸 한 신앙인의 고백인줄로 압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하신 한 분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목자에 속한 전부가 다 하나의 양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한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양의 무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착하고 순한 양이 되고 주인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양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이런 것에 대한 통계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마는 서양 사람들의 통계에 의하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일 많이 읽는 성경이 시편 23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임종이 가까운 분들에게 이 말씀을 읽어드리며 환자의 주위에 남아 있는 분들께 환자가 힘들어할 때마다 계속 이 말씀을 읽어드리라는 부탁을 하고 나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 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 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입니까? 이것은 양이 목자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이것은 선한 목자의 품에 편안히 안긴 한 마리 양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제 우리는 당장에 숨이 거두어지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간다하더라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고 또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는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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