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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십자가에 대한 요한의 증거(요 19:28-3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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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대한 요한의 증거(19:28-37)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 어려운 시간에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흔히 "가상칠언"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씀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은혜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23:34)라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십니다. 둘째는, 옆에 매달려 있는 강도가 죽어가면서 예수님께 부탁 내지는 증거 하는 말을 들으시고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같이 죽어 가는 강도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또한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19:26-27)고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십니다. 이상 세 마디의 말씀에서 모두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을 용서하시고, 다음에는 옆에서 죽어 가는 강도를 용납하시고 구원하셨으며, 그리고 십자가 밑에 서 있는 어머니와 제자들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이제 하나님을 쳐다봅니다. 넷째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라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원수를 생각하시고, 옆에 있는 이웃을 보셨으며, 다음에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생각하셨습니다. 이 순서에서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영적인 고통을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만인의 죄를 대신 지고 죄인으로 취급받는 시간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영적인 아픔을 겪으시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내가 목마르다"(19:28)고 육적인 아픔을 호소하십니다. 영적인 아픔이 먼저이고, 그리고 육적인 아픔입니다. 우리는 육적인 아픔이 먼저이고 영적인 아픔은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고서는 잘 잊어버립니다.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영적인 고통을 생각한단 말입니다.

건강하고 편안한 상태에서는 언제나 육적인 것에만 둘러싸여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희미합니다. 그러나, 막상 큰 일을 당하고 나면 그때서야 제 정신이 돌아와 영적인 것의 중요성을 깨닫곤 합니다.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여섯째가, "다 이루었다"(19:30)고 율법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마지막 일곱째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하는 임종기도로서 끝맺음을 하셨습니다.

이상 일곱 마디의 말씀 중에서 요한복음에서는 "목마르다""다 이루었다"는 두 마디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마디는 다른 복음서에는 찾아볼 수가 없는 귀한 말씀입니다. 아마도,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목마르다"는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목이 마르니 한 마디 하신 것이고,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가 얼마나 중요한 가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에게는 이 두 마디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이 귀중한 말씀들을 왜 빠뜨렸을까?" 하고 보충적인 의미로도 기록했고, 또한 십자가의 뜻을 더 깊이 특이하게 증언하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사도 요한의 이 의도를 생각하면서 두 마디의 말씀에 대해 좀 다른 방향에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목마르다"는 것은 육적인 고통이며, "다 이루었다"는 것은 승리의 표현입니다. 하나는 고통이요, 또 하나는 승전가로서 이 둘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도 요한의 개성 있는 의도가 엿보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이 의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과 종교와의 연관성에 대해 잠깐 생각을 돌렸으면 합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철학이 종교화되거나 종교가 철학화되는 것은 둘 다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철학과 종교가 서로 뒤범벅이 되어 하나가 되려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아니, 이천년 동안 그렇게 내려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 종교와 철학은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서로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지나왔습니다. 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철학과 종교가 결혼했다, 이혼했다 하며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결혼해서 합쳐졌을 때도 큰 문제가 일어났고, 또 헤어질 때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학이고, 이것은 종교다라고 분명히 선을 그으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불란서 출신인 니구렌(Nygren)입니다. 그의 유명한 저서 "아가페와 에로스"를 격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성서 다음가는 책이라고까지 말하고들 있습니다. 그는 이 책 한 권으로 세계 10대 철학자요, 10대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모든 신학자와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분석하여 아가페 계열과 에로스 계열로 정확하게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가페쪽은 종교요, 에로스 쪽은 철학입니다.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이 책이 가장 좋은 참고서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철학과 종교를 바로 구별해야 신앙 세계가 바로 설 수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종교가 철학화되면, 사실의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위험한 짓을 합니다. 그래서, 이해되는 부분은 이성적으로 합리화해서 소화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 등은 좋은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든지, 죽은 자가 살아났다고 하는 사실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비합리적인 것은 모두 잘라 버린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철학적인 이해가 좋은 것이로되, 이것을 제한하지 않으면 엄청난 과오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도 노스틱주의입니다. 철학이 종교화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헬라 철학입니다. 노스틱주의는 당시로 말하면, 헬라 철학의 분파인데, 이 철학은 철학으로만 있지 아니하고 종교화되어 구원 문제에까지 손을 뻗쳐 가장 바른 종교처럼 나타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는 깨닫는다라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구원한다라는 말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구원 문제를 일으키는 등 철학을 종교화했습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는 기독교로 들어와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교리를 철학화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이단입니다. 사도 요한이 역사할 그 당시에 벌써 노스틱주의가 있었으며, 이것이 계속 이어져서 기독교가 철학화하는 이단 사상이 늘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요한은 여기에 대해 변증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변증이란 설명으로, 이미 결론을 가지고 있는 설명입니다. , 이제 설명을 해서 말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려진 결론을 가지고 계속 옳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철학화된 노스틱주의가 잘못 되었음을 알고 기독교 복음을 변증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노스틱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입니다.

노스틱주의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은 다 선하고,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은 다 악하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나쁜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은 좋은 것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돈을 벌고 집 짓고 하는 것 등은 속된 것으로 소위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바세계입니다. 사바세계란, 모래를 입에 넣고 씹는다는 뜻인데, 세상사는 것이 그렇다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어쨌든 정신 세계 이외에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더럽고 속되어서 허무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와 헬라 철학이 많이 통한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를 볼 때, 귀하신 하나님이 더러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보았다고 하자, "보았으면 그것은 허깨비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발자국이 있었더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멍청해서 발자국이 없었던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다니신 것이 하나의 현상으로, 보이도록 나타난 것(seeing body)이지 실제로 몸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몸처럼 보인 것뿐이지 결코 몸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노스틱주의가 기독교에 들어와 장난을 했습니다. 철학적으로 이해하려니까 십자가를 말할 때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깨비이거나 잘못 본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또한, 설사 못 박혔다 하더라도 영이 박혔으니 아플 것은 없고, 단지 그렇게 보였다고 모두를 도깨비놀음으로 만들고 만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실성과 구체성, 복음의 현실성을 다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강력히 반대하여 요한일서 4 : 1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1-3)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는 바른 신앙이요, 이것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로 이단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의 애매모호하고 과거에 대한 건망증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그 당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신성을 믿기가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더불어 생활하시는 그 모습에서 예수님의 인성은 믿을 수 있었지만, 신성을 믿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는 입장이 바뀌어 이번에는 인성을 믿기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부활을 보았고 승천하신 것을 보았으니 틀림없이 하나님이시므로 육체로 오신 것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과거라는 것은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지나간 3년이 신기하게만 느껴지고, 물위로 걸으신 예수님, 5천 명을 먹이신 사건, 나사로의 이야기 등 도무지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사람 같지가 않아 육체로 오신 그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말이라는 것이 전해지면서 점점 와전되어 덧붙이기도 하고, 과장되기도 하며, 마지막에는 "그래, 예수님 발자국이 없었어" 하는 데까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내가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요, 귀로 들은 바다"라고 사도 요한은 더 이상 허튼소리를 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육체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른 신앙이란, 언제나 예수님의 신성인 하나님 되심을 완전히 믿고, 또한 예수님의 사람 되심 인성을 완전히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른 복음적 신앙입니다. 어느쪽 하나만 강조하고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그것은 누가 주장해도 이단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은 육신이 되어"라고 이것을 주제로 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에서도 "목마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마태의 생각으로는 목마르다는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의 시각으로는 예수님의 육체를 증명하는 좋은 증거였던 것입니다. 귀신이나 허깨비가 목마르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다음 34절에서도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더니 피와 물이 나왔다고 다시 육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목마르다는 말을 할 때마다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625 직후에 어느 목사님께서 맹장에 걸렸습니다. 그 당시는 약도 별로 없고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서 수술을 하셨습니다. 사모님이 간호를 하시는데, 목사님께서 목마르다고 호소를 했습니다. 물을 주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지시가 있어 안 된다고 하자, 목사님이 화를 벌컥내며 목이 말라죽겠는데, 무슨 소리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평소에도 부인에게 상당히 무서운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겁이 나서 물을 주었고, 그 물을 마신 목사님은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기가막힌 이야기입니다.

피가 빠져나가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오는 목마름은 대단한 고통으로 따라옵니다. 예수님의 몸에서도 피가 빠지면서 오는 목마름을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사도 요한의 마음입니다. 목마르다고 하신 것을 내가 분명히 들었고, 피와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사람이 아니냐고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기 전에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느냐, 아니냐 보다는 사실이냐, 아니냐가 먼저이어야 합니다.

다음,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목마르다는 얼마나 놀라운 대조입니까?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오늘 이 시간을 목적하고, 그 하나를 위해서 지금까지 달려와서 이제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지금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위해 태어났고 십자가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룬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끌려갔다가 죽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완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승리입니다. 사랑의 승리요, 믿음의 승리요, 소망의 승리입니다. 만일에, 좀 짓궂은 생각입니다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저들을 향하여, "이놈들, 두고보자"라고 저주하셨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러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무슨 말을 남기고 갈 수 있겠습니까? 다 용서하고, 다 이루었고, 다 사랑했다 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제자들도 그대로이고, 특히 수제자의 배신까지 목격했으며, 아직도 전도해야 할 사람들이 많은데, 그대로 두고 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물량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내게 향하신 뜻, 내가 하여야 할 복음 사역에 대한 질적인 차원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완성이란, 얼마나 진실했고 끝까지 사랑했느냐에 있지, 얼마나 쟁취하고 얼마나 칭찬 받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성공하셨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 진실을 잃지는 않았는지, 또는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았는지 뒤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을 저버리고 얻었다면, 비록 얻었어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심은 당신이 그리스도로서 하여야 할 제사적인 것, 제사장적인 거룩한 역사를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과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고 예표가 사실로 나타남으로써 다 이룬 것입니다.

이제 시체를 처리할 단계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로마 사람들은 잔인해서 시체를 매달아 놓고 장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그러면, 새가 뜯어먹고, 개가 와서 핥는 비참한 현장입니다. 생명이 긴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못이 박힌 채로 일주일씩이나 꿈틀거리며 살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장례법은 해를 넘기지 아니하고 장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를 거두기를 원하자, 그들은 인심 좋게 허락을 했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옆에 있던 강도들의 다리를 꺾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9:32) 왜냐하면, 아직 그들이 죽지 않았으므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꺾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리도 꺾으려고 와서 보니 벌써 죽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고, 물과 피가 나왔던 것입니다.(19:33-34) 이것을 사도 요한은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라고 있습니다.

물과 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피는 죄를 씻는 사죄를 의미하는 것이며, 물은 세례라고 해석해 오고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이었고, 참으로 고난 당하시고, 참으로 죽으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구체성을 철학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은혜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요한의 증거는 십자가 사건의 사실성을 말하는 데 있고,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것임을 증거하는 데 있으며, 더욱 귀중한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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