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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삼가라 (사도행전 15:22~35)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 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사도행전 강해 62회인 오늘의 본문에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얻은 결과를 이방사람들에게 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은 참으로 의미가 깊은 장(章)입니다. 맨처음 예루살렘 공의회가 모였습니다. 거기서 바울과 바나바가 먼저 입을 열어 소견을 개진합니다.
그 다음에 유대사람들이 그들을 고소합니다. 이어 베드로가 증거를 하고, 그리고 지난 시간에 본대로 예루살렘 교회의 제 1대 감독인 야고보가 아주 덕스럽게,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그리고 가장 요긴한 결론을 내려 줍니다. 고맙게도 야고보의 영적 권세와 권위에 모두가 순종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분분했던 것입니다마는 야고보의 말씀을 듣고 따타부타없이 옳게 여겨 '그 말이 옳다'----이렇게 전체가 일치하게 됩니다. 본래는 의견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저들이 하나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 자기 편에서 양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양보하는 것을 조금도 잘못된 것이라 여기지 않았고, 또 자기의 의견이 무너진다든가 자기의 체면이 깎인다든가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양보를 하면서 야고보의 말씀을 다같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말씀인즉 알고 보면 유대사람 같은 얘기도 아니고 바울의 얘기도 아닙니다. 바울은 바울대로 사실은 이것도 다 필요 없다고 생각할 만큼 그는 확실하게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고집이 있습니다. 식사 문화에 대한 것은 양보하고 있고 그리고 유대사람들, 특별히 바나바에 속했던 사람들의 강한 고집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인데 전적으로 양보합니다. 몇 가지로 자기네 풍속에 관계된 것을 얘기하고, 특별히 중요한 할례 문제에 대해서는 유대사람들의 문제이지 저들의 문제는 아니라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저들은 옳이 여기게 되고 마침내 양보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일치를 해야 하는 경우, 자기 의견을 다 주장하면서는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서로 양보를 해야 합니다. 적어도 한발짝씩은 물러설 때에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고 100%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전체가 아니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다 이루든지 아니면 다 버리든지--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느 경우에건 얼마간의 양보를 하면서 하나가 되는 그런 길을 모색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옳게 생각되는 의견이라 하더라도 100%로 자기 의견이 관철되리라고 생각한다면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그래가지고는 가정이고 사회고 나라고 간에 절대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면 회의는 하나마나입니다. 싸우다 맙니다.
언제나 이렇게 상당한 부분에서 양보하면서 일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것일 때에는 양보가 없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주변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화적인 문제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문제에는 한치도 양보를 할 수 없겠지마는 문화적인 문제, 생활 풍습에 대한 문제 같은 것이라면, 그런 형식적인 문제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보면 엄격히 말해서 신앙적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되게 마련입니다. 이단이 아닌 이상 하나가 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하나 못되는 대목은 언제나 문화적인 것, 풍습에 관한 것임을 잘 분간해야 됩니다. 스스로는 신앙 문제라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그런 게 아니거든요. 속에는 자기 고집, 자기 편견, 자기 우월감 같은 것들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신앙이면, 하나님 앞에 정직하다면, 얼마든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치를 우리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합의점을 찾게 되자 그 다음에는 이것을 이방 교회에 통고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듣고, 꺼림칙한 가운데서 비난을 받거나 하지 아니하고 편안하게 바른 신앙에서 자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누구라도 다시는 다른 말하지 못하게--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지는 크리드(creed)입니다. '칙령'입니다. 교리입니다.
교리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완전한대로도 교리는 필요한 것입니다. 교리를 내세울 때에 여타의 분분한 의견들이 다 사라지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 사람은 이 소리, 저 사람은 저 소리--이러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교리 선언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되는 하나의 형식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편지를 써서 모든 교회에 두루 보내면 그만일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먼저는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사람만 보낸 게 아니라 편지도 써서 보내요. 왜냐하면 말이란 와전되기 쉽거든요. 말이란 몇 사람 건너가다 보면 와전이 되기 쉽습니다. 말과 글은 참 묘한 관계에 있어요. 아시는 대로 글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의 10분의 1밖에는 글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소설가라든가 시인이라든가 하는 글의 전문가들도 50% 정도만 겨우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내가 가진 생각을 편지에다 써보겠다 하지만 얼마만큼 흡족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할말이 많은데 어떻게 다 쓰나요? 애를 써서 겨우 다 쓴다고 해도 곧대로 다 전달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10분의 1정도밖에는 글로 옮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글로 옮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그 내용과 사상이 축소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글에는 장점이 있어요. 일단 기록해놓으면 이것은 요지 부동입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나 똑같이 전해집니다. 2000년 전에도 오늘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지 못해요. 말은 설명은 길게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일시에 전달할 때에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건너가다가 빼지고 붙여지고 하는 사이에 영 딴소리로 둔갑을 하는가 하면 침소봉대 되기도 합니다. 엉뚱한 소리로 돼버리는 것입니다. 구전(口傳)과 문서(文書)---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의하여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본래 복음은 구전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록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시는 말씀을 베드로가 들었고, 야고보가 들었고, 요한이 들었습니다. 전부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증거를 합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10년, 100년 세월이 가서 이제 사도들은 다 세상을 떠나고, 사도들에게서 들은 사람들이 뒤를 이어 전하고 또 전하고, 다시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전하고…… 이렇게 2대, 3대로 내려가다 보니 와전될 가능성이 많아요. 이를 염려하여 마가가 마가복음을 씁니다. 처음으로 복음을 씁니다. 다시 마태복음이 씌어집니다. 누가복음이 씌어집니다. 또한, 요한은 나이 많았을 때에 죽기 전에, 다른 사도들은 다 죽은 다음에 맨 나중까지 살아 있다가 '나도 한번 써야 되겠다'해서 요한복음을 씁니다. 보세요. 글로 씌어지지 않습니까?
말로 전해지는 것과 글로 전해지는 것이 합칠 때에 가장 바른 증거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말로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글만 가지고도 부족합니다. 이것은 엄연한 이치입니다. 자, 이제 예루살렘교회에서 결정이 났어요. 결정된 것을 말로 전하라 하면 그만일 것 같지만 글로 써서 보냈어요. 그래야 확실하니까요. 글만 보낸 것도 아니고 바울과 바나바까지 보냈어요. 그 글 가지고 가서 말하라고 사람도 보낸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치가 있어요. 사람을 보내고도 또 하나 걱정이 있어요. 아주 신중히 하고 있습니다. 가는 사람들이 당자들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사안(事案)과 직접 관계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그들의 말씀에 편견이 개입될 수도 있고 듣는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들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해서 제3자인 증인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유다와 실라가 그들입니다. 예루살렘공회에서 파송되는 사람들입니다. 증인 두 사람입니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전하는 것은 아무래도 완전치 못한 법입니다. 그래서 유다와 실라를 함께 보내어 바울이 설명을 하고, 유다가 옆에서 증거를 하고 하는 것이지요. 가능한 한 예루살렘교회에서 의논되었던 바 본뜻이 가감 없이 전해지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시시때때로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어떤 의견을 전하고자 할 때에는 사람도 가야 되고, 글도 가야 되고, 증인도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완전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세 가지 수단을 다 동원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거기서 이루어졌던 분위기를 잠깐동안 전하고 있어요. 본문에 보니 결정된 사실은 29절뿐입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이것뿐입니다. 딱 한 줄뿐인데, 그러나 그렇지 않았어요. 이 말을 하기 위하여 그 때에 이루어졌던 분위기를 함께 말씀하고 있어요. 이렇게 하는 것이 곧 interpretation입니다. 결론 한마디를 딱 잘라 전하면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할는지 몰라요. 말이란 말하는 편에서 할말 해버린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듣는 편에서 어떻게 듣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가끔 괴로운 시간, 곤욕을 치를 때가 있어요. 낮 예배 끝난 다음에 저기 나가 서 있을 때입니다. 나가는 분들이 인사를 하게 되는데, 주로 외국에서 오신 분들은 우리 교회의 분위기를 잘 모르니까 나가다가 악수를 하고는 "저는 미국 어디에서 왔는데요…… 한마디하겠습니다"하고 판을 벌여요. 자기 말고도 나가면서 인사하려는 사람이 많은데 나를 붙들고 늘어지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 때이면 어쩔 수 없이 저는 "선생님이 말씀할 수는 있지만 나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합니다. 내 마음이 지금 한창 분주한데 그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귀에 들어옵니까?
무릇 말이란 분위기를 봐가면서 해야지 덮어놓고 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주 아름다운 것이 있어요. 예루살렘교회에서 결정한 그것만 한 줄로 딱 써서 보내준 것이 아니예요. 결정될 때에 이루어졌던 분위기를 함께 말로 전하고 있어요.
그 분위기 전하는 말과 '칙령'을 합쳐서 들을 때에야 듣는 사람들이 그 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24절)"----벌써 너희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니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말입니다. 애당초 문제 자체가 제기될 것이 아니었으나 문제가 되었으니 문제로 삼으라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사실 이런 것들이 문제될 게 없는데, 애당초 문제될 것도 아닌데 우리 믿는 사람간에 이건 된다 저건 안 된다, 이건 먹으라 저건 먹지 마라 하고 얘기할 필요가 없거늘 일이 그렇게 되어서 문제가 되었으니 문제를 삼은 것이다, 하고 상황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본문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을 높이 추천해요. 훌륭한 분들이라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바나바와 바울은 어차피 이방에 가서 복음을 전할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그 이방인들에게로 간 편지 속에 바나바와 바울을 높이 추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괴상하지요? 추천하는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운명을 아끼지 않는 충성된 사람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다, 라고 강조하고 있으니 이 또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편지를 보내면서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이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하고 추천했다면 그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이 사람의 말을 잘 들으시오--이런 내용이 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요.
또한 일치 가결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분분히 다투는 일이 있었지마는 그 분분했던 변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일치가결 했노라--그것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의를 해서 오래 떠들었어요. 떠들 수 있지요. 회의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분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결론이 났다 하면 딴소리 할 것 없습니다. 딴소리가 있으면 안됩니다. "이러 이렇게 결정됐습니다"라는 말만 해야 합니다. 많이 싸웠다느니 누가 이렇게 말하고 누구는 저렇게 말했다느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 건축할 때에도 당회에서, 제직회에서 다 결정했어요. "가하면 '예'하시요"해서 만장일치로 결정했어요. 그렇게 결정이 난 이상 딴소리는 없어야 되는데 나중에 보니 말이 많아요. 누가 반대했다느니 누가 어떻게 했다느니…… 쓸데없는 소리는 왜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누가 무슨 주장을 했건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정되었으면 끝난 것입니다. 만장일치로 결정했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젠 아무 말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나타나 있어요. 상당히 여러 시간동안 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단 결정이 난 마당에서는 분명히 일치가결 하였노라 하고 끝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든지 그렇습니다. 의견이 분분할 수 있습니다. 열띤 토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나타난 다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누구는 극심하게 반대했고, 누구는 지지했고…… 이런 소리 절대로 새서는 안됩니다. 기억에 남아도 안됩니다. 이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니 금하는 게 네 가지 있어요. 이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으니 넘어가는데, 여기서 "성령과 우리는"하고 말씀한 것이 중요해요. 성령과 우리는 일치가결 했고, 성령과 우리는 이것을 동의한다--적어도 이것을 동의함에 있어서는 성령이 함께 하시고 기도가 함께 했고,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통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이 교회의 교회됨의 본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다음에, 본문의 29절에 가서 보면, 역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스스로 삼가면----여기에 상당한 자율성이 있어요. 이 자율법으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원래 율법이라고 하면 율법이 있고, 율법에 대한 해석이 있고, 율법의 적용이 있게 마련입니다. 무릇 법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법이 있고, 법 해석이 있고, 법 적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법 자체도 중요하지마는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또한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새는 심지어 헌법 재판도 하지 않습니까?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적용하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법을 놓고 검사는 이렇게 적용하고 변호사는 저렇게 적용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스스로 삼가면"----자율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사람들은 십계명을 바로 지키자고 무려 613가지의 부칙을 만들었는데 저들이 말하기를 천사가 가르쳐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전설을 가진 부칙 613가지를 저들은 다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놓고 저들은 스스로 지켰다고 교만하고, 못 지켰다고 멸시하고 했습니다. 많이 잘못된 일이었지요. 그리스도의 율법을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당시의 종교지도자들하고 자꾸 충돌하셨는데 내용인즉 주로 율법에 대한 해석 때문이었습니다. 다 같은 율법을 가지고 있는데 해석이 달라요. 유대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로를 세우겠다는 데 목적이 있었어요.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보다는 사람 앞에 자랑하려는 데에 큰 목적이 있어요. '나는 이것을 지켰다'--이것을 자기 의로, 자기 자랑으로 삼으려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 다 무시합니다. 예수님의 율법관은 언제나 본질로 돌아갑니다. 본래 이 계명을 왜 만들었느냐--하십니다. 그리고 계명은 전부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해석해야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이것이 율법의 전부다. 이렇게 해석하십니다. 율법 지켜 가지고 천당 가지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지켜야 한다, 억지로 지키고, 벌벌 떨면서 지키고, 저주받을까봐 지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율법관은 그러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안식일을 놓고 볼 때에도 유대사람들은 안식일을 지켜 가지고 복 받으려 하고, 지켰다고 자랑하고 못 지켰다고 비난하고 했어요.
그것도 못 지킬까봐 벌벌 떨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느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안식일을 주었느냐--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편히 쉬고 시들어진 영혼이 소생함을 받고, 새로운 용기를 얻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거저 복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랑으로 지키고, 감사로 지키고, 자발적으로 지킬 것이지 이것을 안 지키면 벌받을 것인데, 주일을 안 지켰더니 감기 걸렸네 합니다. "십일조 안 바쳤으니까 사업이 망했지"-이런 식으로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율법관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사람들의 율법관과 달라서 늘 충돌이 되었지요.
바울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아예 모든 것이 비 금욕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이 비 계율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이 비 의식적이어야 한다, 종교 의식에 매여서는 안된다-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비 금욕, 비 의식은 바울 윤리의 기본 철학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자발적이고 자율적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재벌 교인 와너메이커는 1833년부터 1922년까지 살았던 '백화점 왕'이지요. 미국에 많은 백화점을 열고 이끌었던 이 사람은 대통령의 간청으로 체신부 장관까지 지낸 적도 있습니다. 아주 바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일날이면 교회에 나가서 교회학교 반사(反射)도 했습니다. 교회학교 교장도 지냈습니다.
그가 한 말에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주일날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는 것은 본업이고 일주일 동안 일하는 것은 부업이다." 그가 사업 시작한 지도 60년이 되어 기념식을 할 때에 많은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해서 성공한 것 같습니까? 성공한 비결을 말해주세요"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바쁘게 사는 것이오." 모름지기 게을러도 안되고 즐겁지 않아도 안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킴에 있어서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믿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어요. 용서를 받았으니 마땅히 용서를 해야 합니다. 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으니 백 데나리온쯤은 나도 탕감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용서받고 용서하고, 사랑 받았으니 사랑하고--당연한 일입니다. 기독교 윤리를 통틀어 한마디로 말하자면 '마땅한 윤리'라고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될 강한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예요. 자율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어요.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할 수밖에요. 엄청난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할 수밖에요. 믿음이 있으니 우리는 믿음에 합당하게 살아야지요. 사랑이 있으니 사랑에 합당하게 살아야지요. 소망이 있으니 소망에 합당하게 살아야지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간단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습니다.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당연히 겸손하고, 당연히 온유하고, 당연히 사랑하고, 당연히 희생할 것이지요. 수고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감히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이게 바로 기독교윤리입니다. 철학자 칸트도 말했습니다. 명령된 것을 지킨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명령되지 않아도 지킬 수 있어야 신앙인이다." 그래요. 우리가 언제 무서워서 법을 지키는 겁니까?
어떤 기독교인이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빨간 신호가 났는데도 지나갔어요. 공교롭게도 순경은 그 사람이 기독교인인 것을 알아요. 차를 멈추게 하고 그 사람에게 빨간 신호 못 보았느냐고 따졌어요. "보았지요. 빨간 신호는 보았는데 당신이 서 있는 것은 못 보았소"하고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빨간 신호면 서야지 순경이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입니까? '자율적으로'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지키는 것입니까?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말씀합니다. 자율적으로-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해석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 20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또, 고린도전서 6장 15절에 보면,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는지를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를 꼭 법적으로 따져야 하겠습니까?
우스운 얘기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어떤 교회에 나갔는데 교인들의 3분 1이 담배를 피워요. 목사 부인도 담배를 피워요. 그게 말썽이 되어, 어떻게 안 피우게 할까 하고 하루는 저녁에 강연회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담배가 해롭다는 강연이었습니다. 그런데 먹혀들지 않아요. 한 교인은 저한테 물어요. "한국에서는 교인들이 담배 안 피운다는데 왜 안 피웁니까?" 그래 농담으로 대답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콧구멍을 굴뚝으로 만들 수 없잖아?" 그랬더니 그 사람은 대답을 더 고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자유를 하찮은 담배한테 빼앗길 수 없어서지요." 아주 멋진 말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 피우고 싶어서 피우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이미 피워 냄새나서, 그것이 싫어서 또 피우는 것입니다. 어느 사이에 비참한 노예가 되어 가지고 사방으로 구박받고 있어요.
전에 한번 베를린에 가봤더니 비행사 응접실이 전부 '금연'입디다.
다만 한쪽 구석에 유리로 감방 같은 것을 만들어놓았는데 담배 피우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 뽁뽁 빨고 있어요. 원숭이가 따로 없다 싶습디다. 아주 불쌍해 보여요. 천덕꾸러기예요. 할 수 없이 피우는 것이라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창조주가 주신 고귀한 자유를 하찮은 담배한테 빼앗길 수 없다---자율적인 것입니다. 혹자는 성경 어디에 담배 피우지 말라고 했느냐 합니다. 멍청한 교인이지요. 어느 구절에, 몇 절에 있어야 하나요? 없어도 상관없어요.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이것 하나면 충분하지 남 기분 나쁘게 만들 것 없지 않습니까? 스스로 삼가는 게 자율입니다. 스스로 성숙한가운데서 알아하세요.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해석하고, 스스로 적용하고, 그리고 이제 사랑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본에는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아 삼가면 잘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든 모름지기 우리는 스스로 삼가, 자율적으로 지킬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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