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K자료 1,910편

보혜사의 약속(요 14:12-17)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보혜사의 약속(14:12-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니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본문의 이해를 위해 14장 연결 부문부터 간략하게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전날 밤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고하셨고, 제자들은 몹시 근심했습니다. 이 때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안심시키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과 영원한 집이 약속되어 있음은 우리들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다음은, 빌립이 하나님을 보고 싶다고 질문했고,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즉 신앙의 현재성과 아버지의 구체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귀중한 예언과 약속, 그리고 축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언제나 그 말씀 자체가 진리요, 약속이요,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보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4 : 12)고 미래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같이 예언이요 약속이며 허락으로써 우리는 이미 응답을 받아 놓은 것입니다. 마치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처럼, 구하기만 하면 주시겠다는 약속과 허락이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허락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신 일이므로 약속 자체가 곧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진리요, 예언이요, 약속이며, 허락이요, 그리고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은 거짓과 위선으로 장래를 약속할 수 없는 말들이 많습니다. 축하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 축하가 진정으로 하는 것인지 인사치레로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자체가 약속과 허락과 능력을 동반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세 가지 허락과 약속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나의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다"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에게 너희도 할 것이다라는 것은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허락이요 큰 축복인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으므로, 받는 사람에게는 굉장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14:13)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함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고용하셔서 그들 안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시행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했을 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6-18)고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께서 일하시고자 함을 볼 수 있습니다. 높은 차원에서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째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는 약속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우선 믿어야 하고, 주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시행하시려면 우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하며, 그리고 계명을 지키게 되려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 조건 안에 들어갈 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는 말씀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일, 또는 더 큰 일을 하겠다는 말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유하면, 예수님은 생명이 되는 씨앗이요, 사람은 물주고 가꾸고, 그리고 거두는 심부름꾼입니다. 그러므로, 가꾸는 자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종자 자체는 변경할 수 없으므로, 생명의 역사, 즉 근원적인 역사가 아닙니다. 다음은 생명을 자라게 하는 역사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꾸는 자의 것은 물량적인 것에 비해, 씨앗은 질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큰 일을 하리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누구의 죄를 위해 대신 죽거나 속죄함을 베풀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슈바이쳐 박사는 아프리카에서 그들을 위해 평생을 바쳐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예수는 하나의 모델이요 스승이었을 뿐, 구주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기도했고 예수님을 알지만 그는 예수처럼 살아보겠다고, 즉 또 하나의 예수가 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슈바이쳐가 기독교인이라고 보다는 불교인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어떠한 희생과 봉사를 하더라도 그 희생과 봉사가 예수처럼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어떤 희생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의 제사처럼 될 수는 없단 말입니다. 십자가의 귀중한 역사를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예수께서는 근본적이고 질적인 생명적인 역사를 이루셨고, 우리는 다만 그에 대한 양적인 역사로서 형식적인 역사요 계승적인 역사만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실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껏해야 오천 명을 놓고 설교하셨는데, 나는 수만 명을 놓고 설교하니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씩 병을 고치셨지만 나는 한꺼번에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을 고치니 예수보다 큰 일을 했다는 오만불손한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했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행하리라"는 말을 겸손하게 받아야 합니다.

, 내가(예수님) 전도했으니 너희도 전도할 것이요, 내가 봉사했으니 너희도 봉사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량적으로 따진다면 분명히 예수님보다 베드로가 더 큰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하실 때는 3천 명이 회개하기는커녕 5천 명이 모였다가 떡만 먹고 헤어졌습니다만, 베드로가 설교할 때는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으니 더 큰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역사가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난 것뿐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너희가 더 큰 일들을 하리라, 즉 더 많은 일, 더 효과적인 일들을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것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주를 달았습니다.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심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 승천하는 역사가 있은 후에라야 큰 일이 이루어지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근본적인 일로 씨앗, 즉 생명이 이루어지겠고 이것을 가꾸고 거두는 역사는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일행을 바라보면 적은 무리에다 가룟 유다같은 인물이 있었으니, 숫자적으로는 한심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도 다 도망갔으니 이래 가지고서야 앞으로 무슨 일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33년간의 역사는 대단히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전도사업이 온 세계에 확장되어 오늘날의 기독교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정말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 것처럼 너희를 통해서 이 복음을 더 크게 전하겠고, 내가 말씀을 가르친 것처럼 너희가 더 크게 가르치겠고, 내가 병을 고친 것처럼 너희도 병을 고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요새는 "병을 고친다"라는 표현을 다소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의과대학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병을 관리한다"(manage)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병은 그 자신의 건강의 힘이 병균을 이기고, 몸의 허약함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병균과 싸워서 사람이 조금씩이라도 이기면 사는 것이고, 지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이기게끔(힘이 모자랄 때) 도와주는 것이 약물이며 수술입니다. 자를 것은 과감하게 잘라내고 꿰매어 놓으면 붙는 것은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붙습니다. 심줄이 이어지고 핏줄이 연결되며 살갗이 다시 소생하는 것은 의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단 말입니다. 의사는 단지 약한 부분을 조금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약을 아무리 넣어도, 수술을 기가 막히게 하더라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힘이 없는 그 단계에 이르면 약을 소화할 능력이 없고 수술을 견딜힘이 없으니 약이나 주사가 무슨 소용입니까? 결국 약은 스스로 이기는데 조금 도와줄 뿐입니다. 여기에 또한 플라스 알파가 있는데 그것은 심리적인 것입니다. 정신 자세가 병을 낫게 하는데 75%나 차지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문둥병도 60%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밝은 마음과 약과 의사에 대한 신뢰와, 살고자 하는 의욕,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병을 이기는 것입니다.

특별히 믿음 중에는 죄사함을 받은 믿음이 중요합니다. 병에 걸리면 반드시 겸하여 고통이 따르는데, 상처가 아픈 것은 동물적인 고통이며, 마음이 아픈 것은 도덕적인 고통으로 인간적인 고통입니다. , 죄책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혈구가 죽어버려 병을 이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죄사함의 기쁨을 얻게 된다면 그 순간에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고 병을 이기는 힘을 얻습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 안에서 자기존재 가치를 발견하면 더 빨리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환자를 보시는 순간, "네 죄를 사함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죄의 문제가 먼저였습니다. 사죄의 기쁨이 있을 때 병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병이 낫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정신병과 육체의 병을 죄의 문제와 동일시 하신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죄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병이 낫는 기적이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죽어야 할 사람은 죽겠지만 병 낫는 기적, 즉 건강의 기적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육체적으로 오는 병은 어찌할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 오는 병은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가 하신 일을 우리가 할 수 있고 또한 더 크게 하는데는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이란 특정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로 다른 사람을 돕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믿으면 누구나 예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누구나 기적이 있고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역사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믿음 안에서만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전에는 너희와 함께 역사했지만 이제는 내가 너희를 통해서 역사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병을 고쳐도 주님이 나를 통해 고치신 것이고 말씀을 전해도 주님이 나를 통해서 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어떤 귀한 역사를 이루어도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셨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천국 문이 닫힌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주여! 주여! 문을 여소서. 내가 주의 이름으로 병 고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나이다" 하며 주의 이름으로 무엇 무엇을 했다고 소리지르며 천국 문을 두드립니다. 그때 안에서 "나는 너를 모른다"는 주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천국 입구에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리가 없고, 사실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고 귀신을 내 쫓았습니다. 그런데, 천국 문은 열리지 않고 주님은 모른다고 하십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다고 하는 것을 내세워서는 천국 문을 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이 부르짖는 제목의 열쇠로는 천국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으로 고쳤으면 주님이 고치신 것이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으면 주님이 하신 일인데 그것을 가지고 와서 무엇을 했다고 천국 문을 열어달라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내가 했다는 자만과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신 것이므로 누구도 이 일에 대해 교만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시행하리라"는 것은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구하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즉 구하는 일이 허락되어 있고 주실 것임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버지께로 가시므로 우리와 함께 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너희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를 바꾸어 말하면,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쳤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너무 놀라서 모여들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왜 이 일을 기어이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이 걷게 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12-13)고 자기들을 주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원래 베드로가 조금 우쭐대기를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내가 이 권능을 행했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신 것이니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똑바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변변치 않는 기적을 행하면서 자꾸 자기만 쳐다보라는 사람들이 있어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시행할 것이니 다만 너희들은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째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 : 15)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 : 34에 보면,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의 계명이 사랑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는 말은 사랑하게 되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하게 되리라는 말은 사랑의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하게 되리라, 즉 원수도 사랑하고 미운 사람도 사랑하고 배신당하면서도 사랑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단 여기에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사랑하게 되리라"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우선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이웃사랑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원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외롭다 하시는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이요, 약속있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미쳤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조건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예수님만 열심히 사랑하면 사랑의 채널이 연결되어 미운 사람,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뿌리인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사랑의 힘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필자는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반드시 권고하기를 사랑은 일생의 과제이니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다음은 위의 세 가지 약속을 가능케 하는 큰 약속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4:16), 보혜사란 위로자요 변호자요 해석자 됨을 말합니다. 보혜사의 원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파라'"곁으로"라는 뜻이고, '클레토스'"부른다"라는 뜻으로 합치면 "곁으로 부른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 옆에 한 인격자가 계시어 위로하고 변호하고 해석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정교육 방식을 살펴보면, 보혜사의 성격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는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주로 아버지가 매를 듭니다. 책망할 때는 반드시 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식을 때리고 방을 나가시면, 다음에는 어머니가 들어오시어 위로합니다. 네가 잘못했으니 맞았지만 때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너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가르치며, 사랑하기 때문에 때렸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지금은 이 매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크면 다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여러 가지로 자녀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보혜사의 역할이 바로 이 어머니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매를 맞을 때, 성령이 오시어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어 맞는 것이다. 지금은 실패하는 것 같지만 이 실패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는 증거다. 저 십자가를 보라"고 십자가 안에서 징계를 해석해주고 변호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항상 내 편에서 나를 도와주고 변호해 주는 보혜사입니다. 본문에 보면 "또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 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는 또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별명이 보혜사입니다. 보혜사가 와서 우리를 위로해 주고 변호해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행하게 되고,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혜사가 이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시면서 약속하신 이것은 벌써 그대로 이루어져 오늘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이 항상 함께 계시며 말씀과 성령 안에서 우리는 귀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