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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2)(롬1:16~17)
로마서의 총 주제가 바로 오늘의 본문인 16, 1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주로 17절을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6절)"--이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복음이란 뭐냐, 복음은 구원하시는 능력이다'라고 성경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복음은 능력이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 계율도 아니다, 이것은 상식도 아니다, 이것은 철학도 아니다, 오로지 복음은 능력이다, 함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받고,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는 순간에 어떤 능력을 체험할 수 있어야 됩니다. 바로 그 능력, 그 복음의 능력을 매일매일 체험함으로써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은 성경말씀을 외우고… 그런 얘기가 아니예요. 복음의 능력성을 매일매일 체험하면서 사는,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울적했다가도 십자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걱정에 매였다가도 가벼워집니다. 또, 미운 마음이 들었다가도 복음을 생각하면 그 순간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집니다. 갑갑하고, 괴롭고, 외롭고, 심지어는 내가 쓸모 없다고 생각했다가도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는 순간에 아니다, 나는 너무나 소중하다, 하고 돌이키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나는 버려졌나보다, 저주받았나보다, 구제불능인가보다, 하고 절망하다가도 십자가를 생각하는 순간에 구체적으로 지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밝아집니다. 나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존재다, 하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래서 생명력이 솟아오릅니다. 복음의 능력--이래서 병도 낫고, 힘도 나고, 창의력도 생기고 하는 것이에요. 복음을 능력으로 받는 복음의 능력적 성격,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17절에서 보게 되는 말씀은 복음은 의롭다 하는 능력이다, 복음은 구원하시는 능력이면서 동시에 의롭다 하는, 그러한 능력이 여기에 있다 하는 것입니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절)"--구약의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호 데 디카이오스 에크 피스테오스 제세타이'--대단히 귀한 요절입니다.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문법적으로 두 갈래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자세히 생각해보세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니다. 문제는 '의인'입니다. '의인'--'디카이오스'가 문제인데, 의인이라면 어떤 의인이냐 할 때,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라고 번역할 수 있고, 또 다르게는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과 같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라는 말씀이 '제세타이' 곧 '살리라'하는 동사에 가서 붙느냐, 아니면 '디카이오스' 곧 '의인'이라는 명사에 가서 붙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17절 말씀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이렇게도 해석이 되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렇게도 해석이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산다, 하게 되면 ontological 한, 곧 존재론적인 해석이 됩니다. 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하게 되면 이것은 살아가는 데에 있어 믿음으로 산다, 하는 말씀이 되거든요. 곧 윤리적인 해석이 됩니다. 윤리적 교훈이 됩니다. 윤리적이냐, 존재론적이냐--그렇게 해석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읽기로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지만 특별히 개혁파에서는 이 말씀을 산다는 데에 역점을 두어 믿음으로 산다, 라고 해석하기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에다 역점을 둡니다. 윤리적 의인이 아니고, 도덕적 의인이 아니고, 이 세상사는 행위에 있어서 의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 그는 산다'하는 교리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 쪽에 더 많이 치중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생각하려고도 하고 달리도 여러 가지로 생각합니다마는, 오늘의 본문말씀의 맥락으로 보면 결국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고, 그래서 그 사람은 살 수 있다, 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으며, 그 같은 의인은 믿음으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의 구원론을 놓고 보면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두 요절을 신약적 생명인 양 소중히 여깁니다. 그래서 가끔 신학 하는 사람들끼리 이런 농담도 합니다. "만일 구약에 이 두 요절이 없었다면 바울은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되기는, 멍청해졌지." 아닌게 아니라 여기에 목숨을 걸거든요. 구약적인 이 두 요절--참 중요한 두 요절인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에다 뿌리를 박고, 그리고 그의 신학 체계를 세웁니다. 그 하나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는 하박국 2장 4절이고, 또 하나는 바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하는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그는 이 두 요절을 아주 중요하게, 아주 완전히 물고 늘어져요.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에요. 그는 바로 이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예수를 믿고, 예수께로서 사명을 받고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구약의 이 두 요절에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그 맥락에서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에서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브라함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다, 하는 말이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기시고'-아브라함, 그는 휘청휘청하면서 실수 많이 했습니다. 그걸 책망하기로 들자면 아브라함은 구원받지 못해요.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 좋은 점인즉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그는 믿었어요. 자기 처지, 자기 부족함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아요. '네가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하시니까 '알았습니다'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제가 일찍이 듣고 믿고 지내다가 그만 실수하여 서자도 하나 만들었고, 이렇게 저렇게 다른 실수도 많이 했는데요'라고 한마디하거나 혹은 '글쎄요. 아들을 주신다고 하시지만 제가 받을 자격이 있나요? 이미 약속을 제 스스로 깼는데요. 저는 무자격한데요'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고 다만 '알았습니다'할 뿐으로 좌우지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사람이었어요. '사라가 이미 단산했는데요. 벌써 그 때가 언젠데요? 우리가 지금 각방 쓰고 사는 지도 오래되었어요. 이제 그 늙고 말라빠진 여자한테서 어떻게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택도 없어요'할 수도 있겠으나 그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아멘"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북녘사람들의 말로 한다면 '전폭적으로 접수'하는 것이 됩니다. '전폭적으로'--이게 믿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의를 인정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하나만 딱 보시고 과거를 물으시지 않으세요. 잘못을 물으시지 않으세요. 실수도 보시지 않으세요. 하나님께서 과연 아들을 주셨어요. 아브라함은 아들을 받았어요. 로마서 4, 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 일을 두고 마치 부활신앙과 같다고 했어요. 그렇게 연결지어나가고 있어요. 대단히 중요한 점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뒤에 공부하게 됩니다마는 아무튼 바울은 이 사건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롭다함을 얻는 교리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박국 얘기는 어떻습니까? 하박국 선지가 지금 계시를 받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어요. 많은 죄를 지었어요. 도대체 아무리 봐도 계시 받는 자의 눈으로 볼 때에 구제 받을 수 없어요.
그 많은 죄, 그 많은 우상, 그 많은 불 신앙, 그 많은 도덕적 타락, 그 많은 종교적 타락을 볼 때에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진노하신다, 라고 말씀하시니까 '알았습니다' 할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종말이 있다. 그리고 약속이 있다. 저 앞에 구원이 있다.' 그럴 때에 하박국은 '믿습니다'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심판도 있습니다. 당연히 죽어 마땅합니다. 망해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하시니 종말이 있고, 때가 오면 이루리라하신 메시야를 이해합니다. '구원이 있을 것이다. 그런고로 기다리라'--그럴 때에 그는 외칩니다. '옳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오직 믿음으로만 살아요. 이것은 주님의 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 믿음이에요. 상황을 보는 것도 아니고, 자기자신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하시니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함입니다. 이 두 가지 맥락에서 봅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복음적 응답입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가 가져야 될 right response, 바른 응답이라는 말씀입니다. 정확한 응답이에요.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17절)"-아주 귀한 말씀이에요. '에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믿음에서 나와서 또 믿음에로, from the faith to the faith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간다는 것이에요.
어떤 믿음에서 어떤 믿음으로냐--아브라함이 믿는 믿음, 하박국이 믿었던 믿음, 이것은 예표적이고 상징적인 것이에요. 온전한 믿음이 아니에요. 그림자 같은 믿음이에요. 그런 구약적 믿음에서 이제는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는 신약적인 믿음으로, 상징적인 믿음에서 실제적 믿음으로, 예표적 믿음에서 성취된 믿음으로-이것을 말씀함입니다. 또, 낮은 믿음에서 높은 믿음으로, 그림자 믿음에서 본체적 믿음으로, 소극적 믿음에서 이제는 복종적인 믿음으로, 고백적 믿음에서 이제는 헌신하는 믿음으로, 억지로 순종하던 믿음에서 행복한 믿음으로, 미래 지향적 믿음에서 이제는 현재적인 믿음으로-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 믿음에 두 가지 성격이 있거든요. 이제는 확실한 믿음, 매일매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복음을 현재적으로 사는 그런 믿음에로 이끌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말씀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만은 잘 소화해주시기 바랍니다. 칭의(稱義) 곧 의롭다 함을 얻었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오', 영어로는 'justify'입니다. 이것은 동사입니다. 이 동사가 신약성경에 14번 나옵니다. 그리고 '디카이오쉬네'--이 말은 '의롭다 함을 얻었다'의 '의롭다 함'이라고 하는 명사입니다. 이 명사는 52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동사, 명사를 합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씀이 신약성경에 66번 나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6장 11절과, 디도서 3장 7절의 두 번만 빼고 나머지 64번이 전부 로마서, 갈라디아서에만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없어요. 또 공동서신에도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그 길고 긴 사도 바울의 많은 편지 중에서도 이 두 곳 외에는 없어요.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교리가 참 중요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Polemic term이다'라고. 즉, 바울의 변증적 용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을 놓고, 그것과의 관계에서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쓰일 때에 이 용어가 효율적이었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유대사람의 방법이요, 구약적 방법이요, 법적 방법입니다. 법적 관계로 복음을 설명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적절한 용어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구약을 신약화하면서 설명하는 것이요. 신약적 교리를 구약적 교리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쓰이는 용어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하는 특수한 용어입니다. 이 말은 대체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있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두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실 때에 '나를 믿으면 의롭다 함을 얻는다'라고 하신 일이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셨어요.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 말씀을 구약적으로, 법적으로 설명하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로다(요 3:16)"---'영생을 얻는다'하는 말씀을 로마서에서는 똑같이 말씀하지 않아요. '의롭다 함을 얻는다'--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구약적 맥락에 익숙한 사람에게, 혹은 법적 관계에서 법적 개념에 익숙한 사람에게 잘 쓰이는 용어입니다. 그 점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로마에 있는 유대사람들, 또 로마사람들을 보면 유대사람들은 율법을 잘 알고, 로마사람들은 법을 잘 알아요. 그런고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다같이 복음을 법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잘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용어가 쓰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만 말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재판정에서 재판장이 선언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아무리 이 사람이 죄인이다, 죄인이 아니다 하고 변론이 많을지라도 마지막에 판사가 무죄라고 선언하고 "땅땅" 치면 무죄입니다. 그 순간 무죄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나 같습니다. 정죄함이 없느니라--이것은 법적 관계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이 말씀을 우리가 한문으로 '이신득의(以信得義)'라고 합니다. 혹은 칭의, 득의,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디카이오오'라고 하는 헬라원문의 뜻은 독특합니다. 결코 의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예요. 이제부터 의인이라는 말이 아니예요.
문제는 의로 취급한다, 의로 간주한다, 의인으로 인정해준다, 의인이라고 부른다, 혹은 의롭다 하여 의인으로 영접한다--그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될 것이 있어요. 여기에 이중성격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요, 죄인인 동시에 의인입니다. 사실 나는 분명히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의인으로 여겨주십니다. 그러면 의인이에요. 신앙 안에서는 내가 의인이지만 내가 나 자신을 볼 때에는 죄인이에요. 이 두 가지 신분이 항상 함께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의인이요, 동시에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쳐다보면 의인이요, 자신을 생각하면 죄인입니다. 이 관계는 아주 대단히 실존적 관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었다고 의인이 되어버렸다고 착각해서는 안돼요. 그게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어서 그렇게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인의 관계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관계성이 바꾸어졌다는 뜻입니다.
곧 원수 되었던 관계가 이제는 사랑의 관계로, 자녀의 관계로, 미웠던 사람이 이제는 사랑하는 관계로 되고, 혹은 죄인이 이제는 친구의 관계로, 멀어졌던 관계가 이제는 화해의 관계로 바꾸어졌다, 하는 관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이에 대한 법적 선언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사랑 받는 자요, 이제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로마서 8장에서는 "양자(養子)"라고 하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양자'라고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나 스스로는 분명히 이 집 자녀가 아니예요. 그러나 저 어른들이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면 아들이지요. 유산도 내게 돌아와요. 당당한 아들이에요. 실제로는 진짜 아들이 아니예요. 저분이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그만큼 나는 사랑 받는 입장에서 아들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아들의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시쳇말로 '친권조사'라도 한다면 아들이 아니예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이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내가 수락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아들을 데려다가 '이는 내 아들이다'하고 양자로 삼았습니다. 비록 나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그 아들이 자기를 아들로 삼아준 것을 감사하고 있으면 되겠는데, 이걸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리고는 항상 생각하기를 '난 이 집 아들이 아니야'합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아요? 그리고 집을 나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이제 그는 내 아들이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분명히 아들이 아니지만 나를 키워준 부모가 아들이라고 불렀으면, 그리고 호적에 올렸으면 나는 이제 아들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에요. 오히려 더 감사해야지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나를 아들로 삼았으니 얼마나 감사하냐'--이렇게 생각을 해야지, 어느 한순간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야'--이렇게 되면 그는 이제 문제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새는 이런 얘기를 해요. 양자를 데려 올 때, 흔히들 갓난아이를 데려다가 진짜 아들인 것처럼 속입니다.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배도 한 번 만져가면서 아이 낳은 척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 사실을 나중에 아이가 커서 알았어요. 자, 이러면 문제아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어쩌다 한번 손찌검이라도 하면 속으로 '맞아, 내가 주워온 아이니까 때리는 거야'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심리학에서는 '처음부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그런데 아들이다'--이렇게 키우라는 거예요. 계모가 전처 자식 키울 때에도 어머니 노릇하지 말라고 그래요. 그래봤자 안된대요. 어머니 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위선이거든요. '내가 너를 낳은 부모보다 더 잘해준다. 나는 진짜 어머니나 마찬가지다. 아니, 더 좋은 어머니다'--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나는 계모다. 너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렇게 키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됐어요. 이렇게 될 때에 사실은 더 고마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나를 이렇게 사랑해줬으니까 더 고마운 것 아니예요? 생각할수록 더 고마운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 받아들이고 말끝마다 '나는 이 집 자식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를 함부로 다루지. 용돈도 많이 안주고, 집에 가면 야단치고…' 이렇게 자꾸 겉돌게 되면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자식도 아니지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엄청난 사랑을 받아들여도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믿음으로 접수함으로써만 비로소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더 감사하지요.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이 모습 이대로, 날마다 쓰러지는 이런 존재를 하나님께서 이렇듯 사랑해주시는구나, 너무도 감사하다--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17절)"--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곧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 십자가에 계시되었다 함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어요. 그 진노가 오다가 거기에서 머물렀어요. 나는 그 우산 밑에서 구원을 받았어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생각해보세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내가 얼마나 죄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참으로 죽을 죄인입니다. 네 대신 내가 죽는다 하셨으니까 그만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지요. 또 하나, 주님께서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하심입니다. 대신 희생을 지불하셨어요. 그 속에는 하나님의 의가 그대로 계시되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의가 희생적 사랑으로 나타났어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계시되었어요. 그런고로 이제는 그 진노가 내게는 없어요. 이제는 두려워할 것도 없어요.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약하고, 자격이 없고…' 그런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자격은 거기서 다 지불했어요. 값을 다 지불해버렸어요. 그런고로 나는 그 사랑을 깨닫는 순간, 그대로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그 밖의 다른 말은 있을 수 없어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로 그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돼요. 받아들여야 돼요. 그럴 때에 내 신분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만히 보니까 참으로 사랑 받을 사람인데 못 받는 사람이 있고, 사랑 받을 것 같지 않은데 사랑 받는 사람이 있습디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부인은 재주도 많고, 얼굴도 예쁘고, 상냥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하고 한데 남편사랑을 못 받아요. 가만히 보면 남편은 밖으로 돌아다녀요. 그러니까 가정이 어려워져요. 그런가하면, 좀 미안한 말씀이지만 저런 사람도 시집갈 수 있었나 싶은 사람이 왜 있지 않습니까? 참 용케 시집갔다 할만큼 좀 그렇게 생긴 사람이 있어요. 이렇다할 재주도 가진 게 없어요. 말하는 것도 그저 그래요. 뭐든지 다 시원치 않아요. 그런데 남편의 사랑을 아주 많이 받아요. 전적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아요. 그 남편이 화장실 앞에서 핸드백 들고 부인을 기다려요. 얼마나 부인을 사랑하는지 몰라요. 대체 왜 그럴까, 하고 제가 30년을 연구해봤어요. 연구해본즉 이러합디다. 똑똑하고 예쁜 사람들은 항상 율법적 관계를 가져요. '내가 너 같은 놈하고 살다니, 뭐가 잘못돼 가지고 이렇게 됐지?' 그래가지고 항상 불만이에요. 또 '나는 무엇이든 잘하고 똑똑한데 남편한테 사랑을 못 받는다.' 그래가지고 노상 짜증만 냅니다. 그런가하면, 조금 변변치 못한 사람은 남편한테 항상 감지덕지하고 살아요. '그저 사흘에 한 번만 들어와도 고맙지'하며 남편의 귀가시간이 늦고 안 늦고는 생각도 안해요. 집에 들어와 주는 것만도 고마운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고 사니까 사랑을 받더라고요. 다른 이유 없어요. 나 자신은 부족해요. 그러나 남편이 나를 사랑한다 하니까 그 사랑이 고마운 것밖에 없어요. 너무너무 고마운 거예요.
제가 이번에 터키에 가서 보니까 아랍 여자들이 금팔찌를 많이 낍디다. 한쪽 팔에 20개도 껴요. 가게에 가니까 금팔찌를 수백 개씩 죽 걸어놓고 팔아요. 왜 이렇게 팔찌를 많이 낄까, 저는 궁금했어요. 그래 알아봤더니, 그곳은 일부다처제가 아닙니까? 한 집에 부인이 셋도 되고 넷도 됩니다. 그런데 남편이 특별히 아내에게 사랑을 느낄 때마다 팔찌를 하나씩 사준대요. 그러니까 이걸 많이 끼고 있으면 나는 이만큼 사랑을 받는다, 하는 것이지요. 사랑 받는 것에 대한 확인이에요. 표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줄 알고 팔찌 끼세요. 자기가 사서 끼
는 것은 맹추 에요. 뿐만 아니라, 어쩌다가 남편이 아내가 보기 싫어서 '너 나가라'하게 되면 이 팔찌만 가지고 나갈 수 있대요. 이것만이 아내가 가진 재산이랍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중한 것이에요.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몇 개씩은 다 가지고 있답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에 나타났어요. 대신 죽으셨어요. 보혈을 흘리시고, 값을 지불하셨어요. 이것을 보는 순간, 내가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그게 믿음이에요.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순간에 나는 새로운 존재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각할수록 감사합니다. 죄가 생각나면 바로 또 감사가 따라와요. 부족한 것을 느끼는 순간 또 감사하게 돼요.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셨으니까요.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는 의,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살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박국처럼 말입니다. 믿음이란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사건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서 생각해보니까 내가 부족해도, 허물이 많아도, 넘어지고 실수해도 이 사랑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돼요. 더 확실하게 느껴지니까요. 그런고로 믿음 안에서는 내 존재가 소중해요.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내가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부족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점점 더 감사해요. 점점 더 깊이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를 감사해요. 그래서 동시에 죄인이고, 동시에 의인이라고 하는 이 관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믿음으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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