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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하나님1(사도행전 2 : 37 ~ 4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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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하나님1(사도행전 2 : 37 42)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성령을 믿사오며

 

사도신경을 세 단계로 나눌 때, 첫단계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요, 둘째 단계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아들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난 시간까지 공부하였습니다. 이어 셋째 단계로 오늘 이후로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성령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교제 같은 것은 모두 성령을 믿음으로써 자연히 뒤따릅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에는 사도신경 외에도 중요한 고백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2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각 교회가 그 나름으로 고백을 만들어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고백'이며 '니케아 신조'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며 장로교 12신조가 다 깊이 알고 보면 그 골격은 같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그 골자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니, 복잡하고 어려운데 꼭 그렇게 믿어야 되는 것입니까?" 가끔 이러한 질문을 받습니다마는,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라니 삼위가 하나요 하나가 삼위라는 것을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일개 사람으로, 일개 성인으로, 일개 선생님으로, 일개 의사로, 혹은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만 믿고 만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적어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계시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이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되기 쉽습니다.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두 갈래의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이성주의(理性主義)요 그 하나는 신비주의(神秘主義)입니다. 이 두 개의 함정이 항상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함정에 빠지는 일이 없이 가운데로 똑바로 걸어가야만 바른 신앙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성주의에 빠져서도 안되고 신비주의에 빠져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이성주의에 대하여 생각해보십시다. 이성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은 이성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성을 가졌습니다. 이성(reason)은 사람에게 주어진 기능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기능입니다. 이성이 없다면 우리는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성에는 크게 두 가지의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추리적 기능이요, 하나는 비판적 기능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추리적 기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추리적 기능을 가졌기에 '이 일은 이렇게 될 것이다' '저 일은 저렇게 될 것이다'라고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은 인간만이 가지는 특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에잇, 일이 이 모양으로 틀어졌으니 차라리 일찍 죽어버리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살은 문화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야만인은 자살을 하지 않습니다. 동물도 자살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미리 생각해서 기쁘기도 하고 미리 생각해서 절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성에는 비판적 기능이 있습니다. 판단하고 비평하는 기능입니다.

추리할 줄 아는 기능과 비판할 줄 아는 기능은 분명히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기능을 무제한 발동시켜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추리를 하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를 넘어서는 안됩니다. 비판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비판할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잘못입니다. 가령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합당하면 하나님을 믿고,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엄청난 잘못인 것입니다. 이성주의에 빠지면 이성이 왕이 되어 모든 것이 그 수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내 눈으로 보아야 믿겠다, 내 손으로 만져보아야 믿겠다, 내 손으로 만져보지 못했고 내 눈으로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 믿는 것이야 제 마음이겠습니다 마는 없다고 단정해버려서는 안됩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고 내가 보지 못했고 내가 알지 못해도 있는 것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렇거늘 내가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부정해버린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의 능력은 제한을 받아야 합니다. 간혹 우리는 이성에 입각해서 성경을 보려고 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비판적으로 이해해야 할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일단 믿고 들어가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믿고 나서 이성을 발동시키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믿음이 없이 이성부터 발동시키면 의심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성의 능력을 제한하면서, 믿음 위에 서서 성경을 이해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성주의에 빠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성경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능입니다 마는 어디까지나 한계를 두고 따라야 합니다. 파스칼은 이성주의를 경계하여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신앙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성주의에 빠지면 인본주의가 됩니다. 내가 중심이 되고 맙니다. 엄히 경계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신비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신비주의란 신비적 체험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병 고침을 받고, 내가 병을 고쳐주고, 내가 환상을 보고, 내가 계시를 받고 해야만 되는 것으로 믿는 자세입니다. 내가 받지 못하고 내가 환상으로 보지 못한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역시 내가 주인이 되는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이 신비주의입니다. '신비'와 신비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얻은 신비적 체험만을 소중히 여기고 믿으니 당연히 내가 주인이 되는 인본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주의와 신비주의는 둘 다 인본주의입니다. 내가 주인이요, 인간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중심을 두고 있어야 합니까?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믿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딱부러지게 말했습니다. 'Let God be God.'-'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시해주시는 길을 따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믿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야 받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마음 문을 열어주셔야 비로소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신앙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믿는 바른 신앙입니다. 우리는 행여라도 인본주의에 기울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서도 결코 신비주의에 빠지지 말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해답은 간단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합니다. 성령의 별칭이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에서 떠나 성령을 이해하려들면, 좀 외람된 말씀입니다 마는 성령이 '귀신'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믿는 것이지 도깨비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신비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능력을 우리는 부인합니다. 도깨비 장난도, 귀신의 오묘한 짓도, 설령 귀신이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해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살 것입니다. 불치의 병을 고치다니 참 대단하구나, 놀랍게도 방언을 하는구나, 신통하게도 알아맞히는구나----성령을 이렇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그런 일만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신비주의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한편, 우리는 문화사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성령을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성경에 나오는 어떤 용어를 대할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려듭니다. 성경의 어떤 문맥이나 낱말을 그 원전이 씌어지던 당시의 그쪽의 문화적 배경에 근거를 두고 파악하기보다는 나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쪽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습관적으로 파악하려 하는 데서 엉뚱한 방향으로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에도 우리 한국 교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래로 전통적으로 생각해오던 '하눌님'을 생각하고, '하늘'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 속에 전통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미신적인 개념의 '하눌님' 내지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네 문화적 배경에서 탈피하지 못한 나머지 그러한 혼동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큰 문제인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으면서 마음으로는 귀신을 그리고 있대서야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성령'도 지금은 성령이라고 합니다마는 옛날에는 성신(聖神)이라고 했습니다. 옛사람들이 성신이라고 한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존재, 곧 불가사의하고 초인간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신이니 영이니 하는 것과 인간의 관계를 미신적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신들렸다' '신접했다' '신 내렸다' '신 씌었다'라고 하는 말들이 모두 '귀신'이니 '신명'이니 하는 미신적 개념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신접한다'는 것은 신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엑스타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비적 경험의 극치입니다. 사람이 신접하는 순간에는 우선 자아의식이 희미해집니다. 본디 가졌던 생각이 다 없어집니다. 제정신이 빠져나갑니다. 이른바 신들린 상태에서 귀신이 지시하는 대로합니다.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린다던가 입에 거품을 문다든가 눈동자가 괴이하게 돌아간다던가 몸을 부들부들 떤다든가 갑자기 쿵하고 나자빠진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런 현상이 소위 접신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령도 이러한 개념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저러한 '접신' 현상이 나타나야만 성령을 받은 줄로 압니다. 여기에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신비주의'에 빠지고 보면 한번이라도 정신이 흐려지고 이상한 말을 하고 기이한 행동을 해본 사람이라야 잘 믿는 사람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좋은 신자가 아닌 것으로 보게 됩니다. 성령을 접신의 개념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생기는 어리석음입니다. 성령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접신적 개념에서 성령을 설명한 데가 없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집니다. 정욕에 이끌렸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전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되고 알게 됩니다.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해지고 순종하게 됩니다. 정욕에 매여 인색하던 사람이 남에게 봉사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기에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적 성품으로 바꾸어집니다. 이러한 성령을 접신 현상으로 파악하게 된 것은 우리네의 샤머니즘적 문화 전통이 아직도 우리의 의식을 붙들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에서 벗어나 비무속화(deshamanization)되지 않는 한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마는 '성령론' 한 가지를 두고도 여간 시끄러운게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이토록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진 것은 성령 받았다는 것과 '접신'을 혼동한 데서도 크게 비롯되었다 하겠습니다. 모름지기 '성령'에 대한 오해에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어떻게 되는지, 이를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을 주셔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생명의 변화이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는 현상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선물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통속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화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라 할 자가 없다고까지 말씀했습니다. 간혹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닌 것이 한 20년 되는데, 요즘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보니 저는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한 모양입디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왜 이런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성령 받는다는 것을 별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이 믿어지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 하심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주를 영접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며, 마침내 내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중생의 역사입니다.

둘째로, 성령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해주십니다. 이스라엘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이야기입니다 마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것이기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아들을 등에 업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친구를 만났습니다. 반가운 나머지 인사를 나누는데 그 친구는 몹시도 짓궂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등에 업은 아이는 누군가?" "내 아들일세." 이만하면 됐으련만, 이 사람, 뒤로 돌아가서 아이한테 확인을 합니다. "너를 업고 가는 사람이 네 아버지냐?"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니오." 아버지는 기가 막혀서 아들을 내려놓습니다. "야 이놈아, 내가 네 아버지가 아니라니 무슨 소리냐?" "당신이 어떻게 내 아버지예요?" 아들은 증거를 대보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업어주지 않느냐? 또 먹여주지 않느냐?" "업어주었다고 아버지예요? 먹여주었다고 아버지예요?" "그래, 그건 그렇구나." 참으로 난처해졌습니다. 이쯤 되고 보면 '아버지'임을 증거 할 수 있는 이는 어머니뿐입니다. 어머니만은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해 줄 수 있는 이는 성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문서에는 성령을 '어머니의 영'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말은 위로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되지만 더욱 중요한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 해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 심을 증거 해주는 이가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 잘 믿고 혼자 성령 받았다고 자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교회에 하루 빠졌더니 저주받았나보다' 하고, 사업이 좀 잘된다 싶으면 '십일조 냈더니 복받았나보다' 하고, 날마다 축복과 저주의 긴장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날마다 죽었다 살았다 합니다. 하루는 감사하고 하루는 벌벌 떠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 못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는 의심이 없습니다.

참으로 성령 받은 사람을 한번 보십시다. 교회에 나와서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만 또 실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당신의 딸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랑해주셔야지 별수 있나요.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자신만만한 사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추호도 의심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벌벌 떨면서 늘 쫓기는 듯이 살아서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확신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자신이 만만해집니다. 근본이 이러하고 보면 자녀가 어떤 자녀인가 하는 문제만 남습니다.

우등생이냐 열등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다같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에는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내가 열등생이라 해도 천국 가는 것에 대하여는 의심을 가질 것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에 틀림이 없는데, 내가 조금 잘못되었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다시는 안 본다'하고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거늘 하물며 이제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믿고 회개하는데 왜 나를 버리시겠습니까? 이러한 확신 가운데서 자신만만하게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또한 그렇게 되도록 성령께서 역사 하십니다.

셋째로,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관계에서 이웃 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도록 역사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저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를 볼 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봅니다. 저 사람을 볼 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 사람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교제, 성도의 교제를 가지게 됩니다.

넷째로, 성령은 우리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을 가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을 내가 사랑해야 합니다. 비록 전쟁이 있고 질병이 있고 고난이 있을지라도 이곳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에서 이제는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도 아름답고 신비스럽고 소중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비가와도 감사하고 바람이 불어도 감사합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자의 세계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입니다.

다섯째로, 성령은 우리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생활을 거룩한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내 생활에 변화가 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관과 함께 우리의 생활에 변화가 옵니다. 마치 입맛이 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는 저것만 입맛에 맞았는데 이제는 이것저것 다 입맛에 맞습니다.

전에는 단것만 좋아했는데 이제는 신 것도 좋고 쓴 것도 좋아합니다. 입맛 변하는 것처럼 오묘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의 모든 성향이 달라집니다. 전에 아름다웠던 것이 이제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좋은 집만 보면 '나는 언제가야 저런 집에서 살아보나' 했는데 이제는 좋은 집도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장례식을 치러야 할 집이 아닙니까? 값비싼 물건에도 욕심이 나지 않습니다.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도 어디서 다이아반지를 보았다 하면 못 참고 빚을 내서라도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좋아 보이고 귀해 보였는데 성령을 받고 나서는 아름답게도 귀하게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손에 넣어도 마음에 별 기쁨이 없다고 합니다. 좋은 옷 해 입으려고 애쓸 것 없습니다. 저는 제가 입기보다 남이 입은 것을 즐기는 취미를 가졌습니다. 내가 입으면 들여다보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처음 입어볼 때에나 거울 한번 볼 뿐 제 옷 입은 모양새를 늘 보지 못합니다. 옷을 잘 갈아입지 않는 버릇도 있습니다. 갈아입으라고 성화를 해도 잘 안 갈아입습니다. 아무렇게나 입으면 어떻습니까? 내가 볼 옷도 아니니, 그저 편한 것이면 족합니다. 대강 입어두면 아무 데나 앉았다 일어나기에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 입는 것보다 남이 입은 것을 보는 재미가 더 좋습니다. '그 옷 참 보기 좋네.' '옷걸이가 괜찮구만.' 옷이라는 것은 반드시 내가 입어야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남이 입은 것을 보는 재미도 괜찮습니다. 꼭 내가 가져야 될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먹는 것도 좋지만 남을 먹이고, 그가 맛있게 먹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재미도 괜찮은 것입니다. 감투도 그렇습니다. 꼭 내가 쓸 것이 아닙니다. 남이 쓰는 감투가 보기 좋습니다. 모름지기 우리의 성향이 이런 쪽으로 좀 바꾸어져야 하겠습니다. 옛날에 좇던 것이 좋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도둑질로 전과 6범인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잡힐 줄 알면서 왜 번번이 도둑질을 하는 거요?" "목사님, 누군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하나요? 길을 걸어가는데 담장 너머로 좋은 물건이 훤히 보입니다. 버스를 타고 보면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 몇십만 원이 들여다보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저도 모르게 손이 슬그머니 가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돈이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다행입니다. 우리네는 내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몰라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들은 남의 물건도 그토록 훤히 보인다고 합니다. 눈이 병입니다. 막을 길이 없습니다. 못 말립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화(聖化:sanctification)하십니다. 하나둘 고쳐주십니다. 성령은 나로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여섯째, 성령은 증거의 영으로 역사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으면 복음을 증거 하게 됩니다. 불쌍히 여기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내 발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얼마 안 있으면 우리 교회 헌당식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헌당식에 무엇을 하고자 하십니까? 물론 헌당식을 위하여 필요한 헌금을 해야 하겠습니다마는,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물을 하나씩 가지고 나오십시다. 그 예물은 바로 전도의 열매입니다. 한 사람씩 전도해서 그 한 사람을 헌당하는 날에 나의 예물로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부터 점을 찍어놓고 기도했다가 전도하십시다. 보아하니 열심히 전도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핑계가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당이 좁아서 앉을 자리도 모자라는데 무슨 전도냐?' 이런 걱정도 하는 모양인데 괜찮습니다. 제가 몇 번으로 나누어서 설교를 하든 그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전도만 하십시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을 위하여 열심히 전도하십시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 일 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스스로 놀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은 것도 기적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귀중한 역사 또한 성령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이라고 말할 때에 오순절만을 떠올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령은 구약에도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대체로 보아 복음서에 나오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한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역사를 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역사는 증거의 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만방에 증거 되었는가?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성령이 사도들을 고용해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서신은 성령의 역사가 이방 문화권 속에서 어떠한 문제를 일으켰는가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길게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만 한마디로 성령의 역사는 마술적 역사가 아닙니다. 자동적 역사도 아닙니다.

비둘기가 마술사의 주문에 따라 나타났다가 주문에 따라 사라지는 것처럼 성령을 받자마자 사람이 확 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술적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동적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인격적 역사입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어,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로해주는 것처럼, 때로 책망하시고 권면하시고 위로하시고 슬퍼하시고 탄식하시기도 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셔서 항상 인격적으로 역사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기 시작하면 마침내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물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물에 들어갔습니다 마는, 깊이 들어가면 물이 나를 뜨게 합니다. 이제는 물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성령 받는 것은 술 취하는 것과 비슷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술을 마십니다. 그러나 한두 잔 마시게 되면 이제 술이 술을 마십니다. 급기야는 술이 사람을 마셔버립니다. 성령이 우리와 그렇게 함께 하십니다. 처음에는 내가 내 의지대로 순종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를 주관하십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5:22, 23).

지금까지 말씀드린 성령의 역할을 잘 요약해주는 성령의 별명이 요한복음 141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곧 보혜사(保惠師)성령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보혜사란 위로자요 변호자요 해석자입니다. 보혜사의 헬라원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파라''곁으로'라는 뜻이요, '클레토스''부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는 '곁으로 부른다'라는 의미입니다. 옆에 한 인격자가 계시어 위로하고 변호하고 해석해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정교육 방식을 살펴보면, 보혜사의 성격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스라엘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에 주로 아버지가 매를 듭니다. 책망할 때에는 반드시 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식을 때리고 방을 나가면 어머니가 들어와 위로합니다. 네가 잘못을 해서 맞았지만 '때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너보다 더 아프다'는 것을 가르치고, 사랑하기 때문에 때렸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크면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자녀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보혜사의 역할이 바로 이 어머니들과 같은 역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를 맞을 때에 성령이 오시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어 때리는 것이다. 지금은 실패하는 것 같지만 이 실패가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다. 저 십자가를 보라.' 십자가 안에서 징계를 해석해주고 변호해주고 위로해줍니다. 항상 내 편에서 나를 도와주고 변호해주시는 자, 곧 보혜사입니다. 16절 말씀 가운데 "또 다른 보혜사"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당신께서 보혜사 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 또 다른 보혜사 곧 성령으로 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별명이 보혜사입니다. 보혜사가 와서 우리를 위로해주고 변호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행하게 되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혜사가 이 일을 가능케 합니다.

주님께서 가시면서 약속하신 이것은 이미 그대로 이루어져 오늘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귀한 역사를 이루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믿사오며"----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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