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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하나님2(마태복음 16 : 13 ~ 20)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거룩한 공회와…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라고,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에 이어 교회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과 교회의 관계입니다. 성령과 교회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성령이 떠난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를 날카롭게 판단할 때, 교회가 가져야 할 절대조건 둘을 듭니다. 그 하나가 말씀이요, 그 둘이 성령입니다. 어떠한 연유로든 이 둘의 하나라도 빠졌다면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말씀이 있어야 하고 성령이 함께 하여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말씀이 선포되기 위하여 교회라고 하는 기구가 있어야 하며,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을 전도자라 하고, 말씀을 전도하기 위하여 필요한 기구를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말씀과 성령 안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간혹 교회를 사람들이 모여서 교제하는 곳으로, 성도들이 모여서 친교 하는 곳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구제기관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교회에 와서 도와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안되겠다고 하면 교회가 대체 뭐하는 곳이냐고 대듭니다. 그럴 때에 저는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줍니다.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닙니다. 물론 구제를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친교도 나눕니다. 그러나 교회의 근본은 말씀과 성령입니다. 말씀의 선포 기관으로, 말씀이 전파되기 위하여 교회라는 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성령이 함께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객관적 계시의 방편'으로 전도자와 교회라는 기구가 필요하고, '주관적 계시의 방편'으로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말씀의 전파를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사람과 만남의 관계를 이루셨습니다. 대화적 관계를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역사 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 다시 성령으로 현존하시면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그 기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 속에서 말씀이 재성육신(再成肉身--reincarnation)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회'인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고 성령이 없다면 교회는 아무 의미도 없게 됩니다. 늘 말씀과 성령이 교회와 함께 하여야 합니다.
'거룩한 공회'라고 하였습니다. 영어 사도신경에는 'Holy Catholic Church'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틴어 원문은 '상타 에클레시아 가톨리카(Sancta Ecclesia Catholica)'입니다. 카톨릭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영어 사도신경에서는 카톨릭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마는, 우리말 사도신경에서는 카톨릭이라고 하면 의미의 혼동이 있을 것 같아 '거룩한 공회'로 번역하였습니다. 사도신경 원문 그대로 하면 거룩한 카톨릭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카톨릭'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거룩'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거룩'은 구별됨을 뜻합니다. '무조건 구별'이 아니라 하나님 쪽으로의 구별입니다. 세상에 있으나 하나님께 속했고, 땅에 있으나 하늘에 속했다-교회는 이렇게 구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소속된 것이 아닙니다. 많은 날 가운데 하나님께로 구별해놓은 날이 주일입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입니다. 그리고 '집' 가운데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구별해놓은 집이 성전(聖殿)입니다. 간혹 교회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해오는 분이 있습니다. 예컨대 유명한 음악가인데 교회를 빌려서 음악회를 하겠다나요? 그러나 안될 말입니다. 제아무리 세계적인 음악가라 해도 안됩니다. 교회는 거룩한 집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는 다른 일로 쓰일 수 없습니다. 제가 순교라도 한 다음에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살아 있는 한은 딴 일로 쓰이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구별된 집--성전이기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 드리는 곳으로만 쓰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구별해놓은 집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구별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다음으로 '가톨리카' 곧 '카톨릭'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날은 '가톨릭'하면 대개 로마 카톨릭 교회를 생각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키는 전형적인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마는 본디는 이 말이 로마 카톨릭 교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가톨리카'는 영어로 'general' 'universal' 곧 우주적,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며 세계적인 하나의 교회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이 말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정학적 측면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교회에는 지정학적 요소가 깃들어 있습니다. 국가나 민족, 또는 문화적 성향에 따라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나라에 따라 한국교회, 일본교회, 미국교회로 나누어지고, 같은 나라에서도 서울교회, 부산교회, 수원교회로 갈라지지 않습니까? 또한, 교인들의 취향이나 직업에 따라 연예인교회, 체육인교회, 의사교회로 구분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교회가 각양각색으로 나누어졌다고 '우리 교회만이 교회'라는 식의 편협한 사고에 치우치지 않고, 우주적인 하나의 교회로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민족적, 지정학적 개념을 초월한 하나의 교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오직 하나의 교회, 우주적인 교회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교회, 우주적인 교회, 세계적인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가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둘째로, 특별히 개신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서울교회, 부산교회, 수원교회 하는 식의, 특정한 지역에 모이는 신앙의 공동체, 곧 눈으로 보아 구별되는 교회요,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령한 교회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교회는 믿는 자 개개인으로, 그리스도께 속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 마는, 지금 이 아래층이 다 차게 모였는데, 제가 보기에는 저녁예배로서는 오늘이 가장 많이 나온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봅시다. 과연 여기 모인 사람 모두가 참교인일까요? 의문스럽습니다. 주일이면 전국의 교회마다에 많은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눈으로 그들을 살펴보신다면 과연 그 중의 얼마나가 '참교회'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육신으로는 교회에 나와 앉아 있지만 그 중에는 예배드리러 나왔다기보다도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나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그 심령이 속해있고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신령한 지체 된, 참 그리스도인이 그 가운데 얼마나 있을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신령한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말하자면 불가시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만 교회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참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우리 교회는 옳고 저 교회는 잘못됐다느니 어떻다느니 하고 피상적으로만 판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오직 그리스도 당신만이 아십니다. 간혹 천주교회에 나가도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질문을 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우문(愚問)입니다. 누구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문제는 어느 교회에 나가느냐가 아니라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교회가 완전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우주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신령한 교회, 완전한 교회, 하나의 교회를 믿습니다.
교회를 뜻하는 라틴어 '에클레시아'는 배경상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용어란 어떤 용어든지 그 배경은 단편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용어를 빌어서 우리네 개념으로 사용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으로 돌아가서 보면 '에클레시아'는 이스라엘사람들의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회당을 중심으로 모이는 이스라엘사람들의 공동체가 '에클레시아'입니다. 또하나, 헬라적 배경에서는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헬라사람들은 그 당시 민주정치를 했습니다. 의결하기 위한 대표들의 모임이 '에클레시아'였습니다. '에크'는 '~로부터'라는 말이요, '칼레오'는 '부른다'라는 말입니다. 곧 뽑힌 사람들이 모인 곳, 부름 받아서 뽑힌 사람들이 모인 곳,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회 비슷한 것입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공회' 또는 '의회'가 되겠습니다.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특수하게 뽑힌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그래서 헬라적 개념의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발전한 것입니다. 결국 선택(히브리적 개념)되고 선발(헬라적 개념)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공회, 이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한 공회'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령한 공동체'라고 고백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셨기에 그 지체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머리가 있고 손과 발이 있어 각각 맡은 바 기능을 다함으로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듯이 교회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다양한 지체가 저마다의 기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마다 선교, 봉사, 구제 등의 다양한 기능을 가지지만 머리가 하나이듯 교회는 하나입니다. 또한 이들 하나, 하나의 교회가 다시 지체를 이루어 우주적인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데, 역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합니다. 이러한 지체는 성경에 나타난 것만 보아도 갈라디아교회,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등 여러 교회가 있었습니다. 나아가 오늘날은 세계적으로 수많은 교회들이 산재하여 또한 지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 지체적 교회는 지정학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도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로, 유대인 교회에도 헬라파 교회와 히브리파 교회로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화적 배경이라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그 장벽을 넘어서기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같은 유대 민족이라 해도 히브리말 하는 사람들과 헬라말 하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예배드리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부득이 따로따로 모여서 예배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사도행전에 이 문제로 헬라파 유대인들이 불평을 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에 이미 문화적으로 다양한 교회 구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문화적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이 교회 저 교회로 구분이 생기게 된 것은 말씀의 소통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어쩔 수없는 일이었습니다. 가끔 저는 외국에서 다녀가는 분들이나 외국에 나가 목회 하시는 목사님들로부터 부탁을 받습니다. "목사님, 소망교회에서 설교 좀 하게 해주세요." "유명한 목사님이 계신데 설교할 기회를 만들어주세요." 저는 거절합니다. 통역해야 하는 설교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통역을 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언어의 소통이란 상대방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외국사람이 우리에 대하여 무엇을 알겠습니까? 우리의 언어를 모를 뿐더러 우리의 사상을 전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할 때가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광고나 인사 정도라면 모르지만 설교는 불가하다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제가 강단에 외국사람을 잘 세우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언어의 소통이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몇 해 동안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와서 설교를 하려 해도 예사로 힘이 드는 게 아닙니다. 단 몇 해를 설교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과 어떻게 쉽사리 소통이 되겠습니까? 요즘은 중고등학교 학생들끼리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등학생인 형과 중학생인 아우가 이야기를 하는데 형이 하는 말을 아우가 알아듣지 못합니다.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랬더니 아우도 시인을 합니다. "사실 형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런 세상입니다. 영어도 불어도 아닌, 같은 우리말을 하는데도 소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사 소통은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소통이 잘되는 쪽으로 규합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동질규합의 원리(homogeneous unit principle)'라고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같은 문화권끼리 모이려는 경향을 일컫는 말입니다. 예전에는 지정학적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서울교회, 부산교회, 을지로교회, 남대문교회, 새문안교회…… 하는 것이 지정학적 구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교회를 '압구정교회'라 하지 않고 '소망교회'라 한 것은 제가 이러한 점을 착안해서입니다. 이제 지명은 떠난 지 오래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동대문에서도 수색에서도 교인들이 오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해답은 간단합니다. 동질성을 찾아서 모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차원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와서 말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보니 예배를 드리기 전에 손뼉을 치면서 가스펠송을 부릅디다. 소망교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 보입디까?" "좋던데요." "그렇다면 그 교회로 가시지요." 그런 사람은 말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손뼉치고 싶으면 손뼉치는 데로 함께 모일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교회에서는 안됩니다. 어느 교회는 아예 북까지 갖다놓았습디다 마는, 그 또한 말릴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예배당에서 북을 치면 시끄럽지 않소?"라고 말하면 당장에 "성경에 보면 북을 치라고 했습니다"라고 대꾸할 것입니다. 누가 감히 말리겠습니까?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말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고 획일적으로 볼 것이 아닙니다. 학술적인 용어로는 '이문화(異文化;subculture)'라고 합니다. 문화적으로 생각 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가 지닌 문화적 배경이 다릅니다.
이를테면 무당기가 있는 사람에게는 좀 시끄러운 편이 좋습니다.
그래야 정신이 들지 조용하면 졸려서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 소위 '그리스도교파'라고 하는 교파가 있는데 같은 '그리스도교파' 안에서도 또 둘로 나뉩니다. '악기파'와 '비악기파'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비악기파에서는 무조건 악기를 배제합니다. 피아노도 오르간도 안됩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뚱땅거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조용하게 예배드립니다.
반면에 악기파는 음악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피아노를 놓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 경우, 과연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다 같은 하나님의 교회요, 우주적인 교회요, 신령한 교회입니다. 다만 말씀의 소통 방법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 교회에서는 영어로 설교하고, 저 교회에서는 일본어로 설교하고, 또 다른 교회에서는 중국어로 설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만에 가보면 잘 나타납니다. 아시는 대로 대만은 20퍼센트가 중국 본토 사람들이고, 80퍼센트가 원주민입니다. 본토 사람과 원주민의 언어가 다릅니다. 그래서 같은 중국사람이지만 그들이 모이는 교회에 따라 한쪽에서는 본토말로 설교하고, 한쪽에서는 대만말로 설교를 합니다. 섞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웬 교회가 이리도 많으냐고 말합니다마는, 한 건물에 교회가 둘이면 어떻습니까? 하나는 중국교회요 하나는 한국교회인데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문화가 다르기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의 예배당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바로 옆 건물의 교회에서 북 치는 소리가 들려와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유리문을 세 겹으로 했는데도 여전히 들려옵니다. 제가 설교하는 중에도 바로 뒤에서 들려옵니다.
그러나 저는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옳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은혜가 되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말릴 필요가 없습니다마는, 다만 남도 좀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흔히 한 건물에 교회가 두셋 있는 것을 보면 으레 한마디씩 합니다마는 열 개라면 어떻습니까? 비판할 것이 없습니다.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닙니다. 문화적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헬라파 유대사람들의 교회니 히브리파 유대사람들의 교회니 하는 것이나 갈라디아교회, 로마교회, 빌립보교회로, 이렇듯 여럿으로 나누어진 것도 모두 말씀의 소통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함에서였습니다. 그래서 맥가브란(McGavran)의 유명한 선교 원리가 있습니다. 'A man likes to be a Christian without crossing any barrier(사람은 어떠한 문화적 장벽도 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되도록이면 장벽을 넘지 않으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예수 믿기를 원하지 영어로 고쳐서 예수 믿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복 입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양복 입어야 교회에 나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에 문제가 되지 않는 한 그 복음의 소통을 가능케 하고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나아가 '교파'라는 것을 생각해보십시다. 교파에 대해서는 참으로 말이 많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믿음을 얻은 지성인들은 이 문제를 겸손하게 소화하는데 교회에 안나오는 지성인들 가운데 이것을 문제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교파가 많습니까? 도대체 몇 개나 됩니까?" "장로교에만 한 180여 개 됩니다." 입을 딱 벌립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나쁘게 보면 협소한 민족주의 때문이요, 서로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이요,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영웅'이 되고자 하거나 스스로 중심이 되고자 하여 잘못된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긍정적 면에서 볼 때,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문제는 아닙니다. 이미 설명드린대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과 개신교를 대비해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교리적인 문제가 얽혀 있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본산은 이탈리아요, 루터교의 본산은 독일입니다.
라틴 문화가 기울고 독일 문화가 번성하면서 독일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이탈리아 문화권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였기에 루터교가 발생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가톨릭은 라틴 계통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라틴 계통의 문화권에 가톨릭은 서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루터교가 있습니다. 루터교는 교인의 96퍼센트가 게르만 민족입니다. 다시 말해서 독일계입니다. 독일계가 아니면서 루터교를 믿는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담이지만, 제가 루터교의 목사님보고 아예 이름까지 바꾸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영국을 보면 귀족은 성공회요, 서민은 감리교입니다. 미국의 경우는 혼합되어 있어서 참 재미있습니다. 미국에는 네 개의 거리에 네 가지 교회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장로교회가 다투는 일없이 '사이좋게' 모여 있습니다. 섞이지도 않습니다. 아예 족보가 다른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다릅니다. 한쪽은 라틴계요, 한쪽은 독일계입니다. 또 한쪽은 영국계이면서 귀족이요, 다른 한쪽은 영국계이면서 서민입니다. 장로교는 다시 스코틀란드계, 네덜란드계, 스위스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전제로 '교파'라고 하는 기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에 이토록 많은 교파가 있게 된 것은 선교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교파가 이렇듯 많은 것은 아무래도 좀 부끄러운 일이기는 합니다. 아직도 비선교 국가의 때를 벗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훌훌 털어 버리고 '한국기독교'라고 하나로 묶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말이 많아질 이유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선교의 다양성이나 교회 구조의 다양성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아닙니다. 복음 선교를 효과 있게 하기 위하여 여러 교파도 필요했다고 긍정적인 눈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교회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착하기 이전, 구약의 세계를 보면 교회의 예표(例表)가 많이 나타납니다. 교회의 그러한 예표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선 노아의 방주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모두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방주에 들어간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전신입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신령한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힘입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 방주에 들어와야 합니다.
둘째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성전에서는 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자복하고 죄사함받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의 예배에는 참회의 기도가 있고 사죄의 확인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사성(祭祀性)입니다. 우리가 제물로 양과 염소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똑 같은 의미로 자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죄사함을 받는 속죄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이스라엘사람들의 회당입니다. 그 구조와 그 예배 의식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예배당 짓는 것이라든가 예배 의식, 찬송, 모든 것이 회당 예배의 방법을 조금 고쳐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선포입니다. 말씀이 보전되고, 말씀이 강론되는 곳입니다.
넷째로, 광야교회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머물렀습니다. 가나안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육체적으로나 물리적으로는 출애굽을 했지만 정신적으로 출애굽하지 못한 사람들의 정신적 출애굽을 완성시키는 곳이 이 광야교회입니다. 옛 버릇을 고치는 곳입니다. 아직도 믿기 전의 버릇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말씀으로 훈련받아 고쳐나가는 데가 교회입니다. 그런가하면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서 지키게 될 그 완전한 율법을 미리 받아서 익히는 곳입니다. 십계명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익히게 하셨습니다. 훈련하게 하셨습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법을 먼저 배우고 생활 속에 익혀나가도록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결국 우리는 교회를 선교적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간혹 선교와 교회는 무관하다 하여 교회를 떠나서 선교를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8절)." 베드로의 인격과 신앙고백을 토대로 당신의 교회를 베드로가 세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음부(陰府)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신령한 교회, 이 고백적 교회, 이 거룩한 교회를 항상 새롭게 고백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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