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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된 자의 시험(마가복음 10장 29절~3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 비나 지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 와 자매와 모친과 지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지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1절)" 이 뜻깊은 진리의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에 참으로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으로는 네 차례입니다 마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것까지 추정을 해본다면 아마도 열 번은, 아니 백 번은 더 말씀하시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이 말씀은 그토록 중요한 잠언인 것입니다. 성경 기록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도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의 결론 부분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귀중한 말씀을 하시고 나면 맨 나중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많으니라"하고 결론을 내리시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알고 오늘의 본문을 상고할 것입니다.
결론이라는 것에는 종합적인 의미도 담겨 있지만 시행적 실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교리적 의미보다는 언제나 윤리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리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담아서 말씀합니다. 아울러 이는 경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맨 마지막에 경계하시는 말씀으로 말씀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 이를테면 마태복음 19장 30절에서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같은 마태복음 20장에서도 저 유명한 포도원 품꾼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그 결론으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십니다. 포도원에 아침 9시에 들어가 일한 사람이건 12시나 오후 3시나 5시에 들어가 일한 사람이건 구별 없이 모두가 똑같이 1데나리온씩 품삯을 받았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일한 사람에게 주는 품삯도 1데나리온이요, 뒤늦게 와서 한 시간쯤만 일한 사람에게 주는 품삯도 1데나리온인 것입니다. 이에 하루종일 일한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부당하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건 너무하다' '약속이 틀린 건 아니지만 공평하지 못하다'하고 기분 나빠합니다. 주인과 자기들과의 관계에서는 잘못된 것이 없는데도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 20:12)"하며 심기가 꼬이는 것입니다.
이에 주인은 두 가지로 재미있는 대답을 합니다. 먼저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마 20 : 13, 14)"-너하고 나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거늘 남이 얼마를 받건 웬 참견이냐, 너는 나와 약속한 것만 받아 가면 그만이 아니냐 함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 : 15)"하여,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왜 말이 많으냐,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것인데, 그것이 내 마음인데 어찌하여 너는 쓸데없는 시샘을 하는 것이냐 하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름지기 다른 사람이 받는 은혜를 질투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형평의 원칙을 내세울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어디까지나 은혜입니다. 은혜에는 비교가 통하지 않습니다. 형평성이 통하지 않고 세상적인 합리성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하십니다. 오묘한 뉘앙스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가 아침에 일찌거니 와 가지고 하루종일 일했다고 하는데, 끝내는 그렇듯 불평을 하면서 돌아가니 이것이 곧 나중 됨이 아니냐. 그러나 맨 나중에 온 사람들, 비록 한 시간밖에 일한 것이 없지만 끝내는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돌아가니 이는 너희보다 먼저 됨이 아니냐' 하심입니다. "주인이여, 내가 오늘 공치는 줄 알았는데 이같은 내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것입니까? 원 세상에…… 내가 간밤에 꿈을 잘 꾸었나,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노"-오로지 은혜이거든요.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니 불평하는 저들보다 먼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율법적으로 이해하려들지 말고 은혜 안에서 이해하려들면 이 말씀의 특별한 의미를 깨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3장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 끝에 그 결론으로 역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 13 : 30)" 하십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와 보십시다. 문맥을 거슬러 10장 17절로 보면 어느 청년 부자(富者) 율법사가 예수님 앞에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여쭙는 데서 이야기는 비롯됩니다. 이 청년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노라고 청년은 감히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다시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셨는데 이 청년,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을 합니다. 재물 포기할 마음은 없어요. 영생은 얻고 싶지만 '그 아까운' 재물을 포기하면서 얻어야 한다니 난처한 것입니다. 그래 근심띤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행복을 얻으러 왔다가 근심을 안고 돌아간 것입니다. 평안한 마음을 얻으러 왔다가 불편한 심기로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뒷모습을 측은히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절)." 부자가 천당 가기는 그토록 어렵다 하심입니다. 돈푼이나 있으니 저토록 힘들지 않느냐. 가난한 사람이라면 한결 쉬웠을 것인데 돈 있고 보면 그에 대한 애착 때문에 어지간히도 어렵겠다 하심입니다. 이 때다 하고 성급한 그 제자들이 또 좀이 쑤셔 가만있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알아주십시오'하고 나섭니다. "보소서. 우리가(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절)." 오냐, 잘하였다 하심인 듯 주님께서는 다시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을 뿐만 아니라 영생을 겸하여 얻을 것이라고, 귀중한 진리의 말씀을 하시고 오늘의 잠언말씀을 결론으로 주십니다. 앞의 청년 부자는 애초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다가 오히려 저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영생에 관심을 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과 말씀을 주고 받아본즉 사실은 영생에 대한 관심보다는 물질에 대한 애착이 더 큰 사람이라는 자기판단을 내리고 근심하여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따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따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만 것입니다.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사 말씀하시는데도 결국은 못 따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듯 비겁하고 소극적인 인간이었구나, 자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자신은 계명을 지켜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지 못하는 주제이니 어찌 계명을 지켰다고 감히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부와 영생의 문제-이는 역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 버리고 따릅니다'하고 제자들은 말합니다. 직업도 버렸습니다, 가정도 버렸습니다, 친구도 버리고, 고향도 버렸습니다, 그래놓고 이제 주님을 전적으로, 전심전력으로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무슨 보상이 있습니까 이런 말이겠지요.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책망치 않으십니다. '아직도 너희는 청산치 못한 것이 많다, 아직도 너희는 배우지 못한 것이 많다, 아직도 너희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다, 너희가 나를 따른다고 하지만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 그 동기에는 정치적인 욕심이 있고, 민족주의적인 아집이 있고, 일신의 영달을 꿈꾸는 마음도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듯 꼬집을 것이 많지만 주님께서는 자비 하시게도 그런 내색을 하시지 않습니다. 저들의 마음을 저들 자신보다도 더 소상히 읽고 계시면서도 그같은 직선적인 말씀은 비치지 않으시고, 오직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29절)"라고,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버렸느냐가 문제라고만 가르쳐주십니다.
예수 믿는 동기가 얼마나 순수한가-우리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볼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토록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그 소중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가 내가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나는 내 십자가를 얼마나 졌습니까? 아직도 내 십자가를 벗어놓고 돌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내 십자가가 무겁다고 더 가벼운 것으로 지겠다는 마음은 없는 것인지-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한 20여 년쯤 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제가 청년 수양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여름이었습니다. 청년들이 연극을 꾸며서 보여주는데,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촌극이었지만 저는 그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창고에 들어가 십자가를 고르고 있습니다. 큰 것 작은 것, 목걸이로 할 것 반지로 낄 수 있는 것 등을 이걸로 할까 저걸로 할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골라봅니다. 그러나 다 마땅치를 않습니다. 큰 것은 너무 무겁고, 어떤 것은 너무 거추장스럽습니다. 이것은 이래서 마땅찮고 저것은 저래서 마땅찮고…… 마침내 그 사람은 어느 십자가도 못 가지고 나와버렸다는 내용입니다. 정곡을 찌르는 상징성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혹 십자가를 가려서 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십자가는 내가 가려서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몫에 얹히는 대로 지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내가 메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다니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내게 지고 말고 할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선택권이 있지 않습니다. 주어지는 현실 속에서 내가 꿈틀거리고 반항하고 불평하고 섭섭해하고 노여워하고…… 이런 일이 어디에서 연유합니까? 내가 덜 죽어서입니다.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지 않아서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옛 세계관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아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깨끗이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원리가 그렇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된 자가 반드시 나중 된다고 못박는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된 자가 먼저 되는 법이지 왜 뒤로 간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뒤로 갈 자가 많겠다 하심입니다. 그래서 조심하라 하심입니다. 나중 된 자라고 해서 낙심할 것 없다 하심입니다. 열심히 뛰어나가면 먼저 될 수도 있다 하심입니다.
우리 교인 가운데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분인데 서점에 가서 그 동안에 나온 제 설교집 등속을 처음 것부터 다 찾아 사서 읽고, 15년에 걸치는 설교테이프도 빠짐없이 다 사려고 해요.
늦었으니 빨리 따라가야 되겠다며 '과외수업' 많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하는 것도 남달리 열심이고, 기도도 봉사도 굉장히 열심입니다. 이렇듯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의 몇 곱절 더 열심인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 되었다고 결코 낙심할 것 없습니다. 분명히 먼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 많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먼저 된 자'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봅시다. 이에는 특수한 의미가 있고 일반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수한 의미에서 볼 때, 이를테면 좀 전에 살펴본 젊은 부자 율법사가 '먼저 된 자'입니다. 이 사람이 율법도 먼저 지켰다 하고, 성경도 먼저 안다고 하며, 남보다 더 경건하고 깨끗한 사람입네 하고 먼저 되었다는 것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있는 재물 다 버리고 주님 따르라 하셨을 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축 처뜨리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나중 된 자였던 것입니다.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만큼 스스로 작아져야 하는데, 약대같이 큰 사람이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아지고 작아지려면 얼마나 고생되겠습니까? 고생 엄청나게 치러야 합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고야 모든 것을 깨끗이 부정하고, 마침내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유대사람들이 '먼저 된 자'입니다. 예수님을 남 먼저 만났습니다. 율법을 먼저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관한 한 단연코 대선배들입니다. 그렇듯 저들은 '먼저 된 자'가 분명한데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예수 믿는 유대사람들이 아주 적습니다. 미국에 있는 유대사람들 가운데는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고 예루살렘에도 꽤 있는 편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유대사람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아주 적은 것입니다. 학자들 가운데 유대사람이 많습니다. 유대 계통의 사람들로 학자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의외로 적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먼저 된 유대사람들이 나중 되고 나중 예수믿는 이방사람들로 오히려 먼저 될 자가 많지 않습니까?
유대사람 모두가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다 유대사람이 아닙니까? 먼저 된 자로 먼저 된 사람들이 아닙니까? 또한 오늘의 본문에서 먼저 된 자라고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열두 제자가 앞에 있습니다. 먼저 된 자들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이 먼저 된 자들입니다. 나중 된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나중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베드로보다 바울이 훨씬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열두 제자의 하나가 아닌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자가 되고, 승천하여 계시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뵈었지 않습니까? 나중 된 자 스데반이 이렇듯 먼저 되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바울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많으니라."
이번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먼저 된 자'의 의미를 생각해보십시다. 일반적으로는 시간적으로 먼저 된 자가 '먼저 된 자'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에도 '먼저 된 자 가 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습 교인,' 나면서 교인 된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부모가 예수 믿었습니다. 언제부터 예수 믿었느냐고 물으면 흔히 듣는 대답에 "모태 신앙입니다"하는 '자랑'이 있습니다. 자랑일 수 없는 자랑입니다.
스스로가 모태적부터 믿었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끌려 다닌 것이지 믿은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과 믿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자랐다는 것으로 신앙이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중생(重生)의 체험이, 그런 시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없이, 이렇다할 의식도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를 들락거리느라고 세월을 보냈다면 필경은 나중 되고 맙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살아가는 도중에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이 열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독립적인 체험을 가지고 믿은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습관적이거나 문화적인 교인이 아니라 간증(干證)이 있는 교인입니다.
시간적으로 남보다 앞서 믿기 시작했다고 먼저 된 것으로, 그래서 먼저 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영적인 문제입니다.
교회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먼저 되었다고 해서 혹은 장로요 집사요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어느 쪽이 먼저일는지 모릅니다. 믿기는 수십 년 믿었다고 하는데 보아하니 안믿는 사람보다도 못해요. 먼저 된 자 같으나 그실은 아주 나중 되었어요. 언제고 뼈아프게 회개하고 돌아올 때가 있겠지만 그게 언제일는지는 미지(未知)입니다. 그래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가하면 또한 형식적으로 '먼저 된 자'가 있습니다. 제도나 형식상으로 먼저 된 것을 '믿는다'고 자처합니다. 자신도 오르는 사이에 신앙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주일날이면 형식적으로는 으레 교회에 나옵니다. 으레 모임에 참여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좇아다닐 뿐입니다. 이같은 사람들은 그 속에 깊은 감격이 없습니다. 언젠가 미국에서 있은 일입니다. 어느 신학대학에 한국의 어느 신학대학 학장의 아들이 유학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스스로도 목사였는데 한번은 미국인 친구 하나가 그에게 "당신 예수 믿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 대답이 난센스입니다. "나, 목사의 아들이오." 미국인 친구는 적이 불쾌해져서 다시 묻습니다. "예수 믿는 것하고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다시 묻겠는데, 당신 기독교인이오?" 제대로 된 질문입니다.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해야 할 질문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직분도 있고, 엄연한 교인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묻건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깊이 생각해볼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먼저 되었으나 내용적으로는 나중인 교인이 있고 형식적으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교인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먼저 깊이 된 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심각한 말씀입니다.
또 있습니다. 동기가 순수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한 채로 세월만 많이 홀려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도 참신앙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기도 한번 해본 적이 없습니다.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오늘의 잠언말씀은 이같이 형식적인 교인을 향하여 주시는 경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먼저 되었다는 말과 나중 되었다는 말의 유래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된 자'라니, 정말로 먼저 되어서 '가르치는' 사람입니까? '나중 된 자'라니, 어디까지나 배우는 사람이라서 나중 된 자입니까? 선생은 먼저 된 자요 제자는 나중 된 자라는 것입니까?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 가르치는 자가 먼저 된 자요 가르침 받는 자는 나중 된 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인데 문제가 있어요. 문제가 있는데도 먼저 믿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인도하고 가르치고 합니다. 전도다 구역 예배다 봉사다 하고 많은 일에 애를 써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을 위하여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먼저 된 자, 가르치는 자에게 있는 시험인 것입니다. 말로는 그럴싸하게 가르치는데 자신은 실천을 하지 않아요. 남에게는 기도하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내 경건을 위하여, 내 영혼을 위하여 묵상하면서 읽는 것이 아니라 남 가르치는 것 준비하느라고 읽습니다. 무릇 가르치는 사람들, 모름지기 조심할 것입니다. 잘못하다가는 가르치는 선생만 남고 교인이 없어집니다. 성경을 잃어버립니다. 참된 의미의 성경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내 영혼을 위하여 보는 성경이 없으니까요. 많이 잘못되는 일입니다. 내 영혼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의 시간은 없고, 가만히 보면 남 들으라는 기도뿐입니다. 남의 귀에 들리는 것만 의식하여 기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위한 기도가 없다면 하릴없이 나중 되고 맙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 가르치는 자가 된다는 것이 때로는 명색 '선생'이라는 허깨비만 남고 내실을 잃고 말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너희는 남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남을 가르치되 먼저 너희 자신을 가르쳐라, 남에게 말하기 전에 너희 자신에게 말하라. 남에게 기도하라고 말하기 전에 너희가 먼저 기도하라, 남에게 성경 읽으라고 말하기 전에 너희가 먼저 너희 자신을 위하여 성경을 읽어라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일 한다 어쩐다 하고 잘 돌아다니다가 정작 정말로 중요한 자신 위한 경건을 잃고 맙니다. 명상의 시간도 없고 기도의 시간도 없어요. 고요히 자신의 영혼을 짚어가면서 성경을 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헛된 모양 잡느라고 바삐 돌아가다가 내 영혼이 고갈됩니다. 메말라집니다. 그에 따라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러니 남을 가르치려고 나서는 사람은 모름지기 조심하라 하심입니다. 너희로부터 배우게 된 사람, 나중 된 사람인데도 너희보다 먼저 되는 일이 많을 거라고 하심입니다.
네 번째로, 교만에 대한 경계요 안주(安住), 안일에 대한 경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합니다. 이만하면 되었겠지 하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 : 12)." 이만하면 되겠거니, 이만하면 괜찮겠거니, 이만하면 믿음이 있는 것이거니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먼저 되었다는 교만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먼저 된 것은 형식뿐이요, 시간적으로일 뿐입니다. 내적으로 영적으로 질적으로는 아닙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식적인 것에 매이지 않고 항상 내실을 기해야 합니다. 신령상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된 자로 나중 될 자가 많으니까요. 항상 조심할 것입니다. 안주, 안일은 금물입니다.
'내가 아침에 두 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날은 마귀가 이긴다'라고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어제도 기도했고 그 전날도 기도했습니다. 그랬다고 오늘 기도하지 않는다면 오늘 시험을 이기지 못합니다. 신앙인으로 늘 조심할 것이 이것입니다. 어젯밤에 기도하지 않았으면 오늘은 무능한 교인이 됩니다. 어제 이러이러했다. 옛날에 어찌어찌했다 다 소용없습니다. 먼저 됐다는 것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다섯 번째로, '먼저'와 '나중'에 특권이 없습니다. 먼저 된 자로도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도 먼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 저마다 먼저 되려고 애씁니다. 열두 제자였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도 모자라서 우편에 앉겠다 좌편에 앉겠다 하고 신경전을 벌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르치십니다. 먼저 되느냐 나중 되느냐는 별것 아니니 잊어 버리라 하십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없애라 하십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오래 믿은 사람인데 물에 물 탄 듯한가 하면 뒤에 믿은 사람인데 열심히 믿다가 순교하는 수 있습니다. 마치 세상에 올 때는 순서대로 왔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젊은 사람이 먼저 가기도 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나중에 가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신앙에도 '먼저'와 '나중'에 특권이 없습니다.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시는 대로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모든 인물 -허물없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특권 있는 사람 없고 귀족 따로 없습니다.
다 같은 보통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고 있는 것이지 특별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너무도 솔직합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허물쯤 덮어둘 수도 있을 법한데, 봐줄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부족함과 허물을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노출한 채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 귀족 없습니다. 먼저 된 자 특별하지 않고 나중 된 자 특별하지 않습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드라마틱한 예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에 그 옆에 달린 강도 하나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함으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고 예수님께 구원을 받습니다. 그 강도가 몇 시간이나 예수를 믿었습니까? 그런데 이 강도의 경우를 보고 '나도 젊었을 때는 실컷 놀다가. 죽기 한 시간 전에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딱합니다. 그 강도, 누구보다도 나중 된 사람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천당 갔습니다. 나중 된 자로 먼저 된 자의 제1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신앙 문제에 관한 한 귀족 없고 특권 없고 특별한 사람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습니다. 먼저다 나중이다,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큰 방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먼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계속 먼저 되십시오. 나중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얼마든지 먼저 될 수 있습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결코 낙심할 것 없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선후는 생각하지 말고 누구나 그 중심에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제자, 하나님 기뻐하시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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