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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강자를 결박하라(마가복음 3장 27절~30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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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강자를 결박하라(마가복음 32730)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 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 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하고 말씀하시는 오늘의 잠언은 일견 이해하기가 꽤 어려운 말씀인 것 같으나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꼭 어려운 말씀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귀한 종말론적 진리를, 실제적인 진리를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시는 소재는 평이하고도 다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영원까지 가는 미래지향적 통찰력을 가지고 말씀을 하십니다. 생각이 깊고 멀고 투철하셨습니다. 비유의 소재를 광범하게 두루 취하시고, 세상 이치를 잘 아셨습니다. 당시에는 신문 등의 매스컴이 있은 것도 아닌데 뉴스에도 밝으셨습니다. 추상적으로 아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셨습니다.

꽃이며 새며 바람이며 물결이며, 무릇 자연애 대한 것은 그 이치를 전부 말씀의 소재로 드실 뿐 아니라 농사일이며 고기 잡는 일이 다 말씀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특히 목자(牧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투철하게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더욱이 유대사람들이 본디부터 목양(牧羊)에는 기본적으로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목자의 일을 소재로 드시는 주님의 비유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만도 주님께서 목자와 양을 비유로 드시는 진리의 말씀이 도도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불러낸다, 목자가 앞서가면 양들이 줄줄 따라온다, 좋은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강도들은 와서 양을 해치지만 목자는 양을 사랑하여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보살피고 돌본다 --이같이 귀한 말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양을 쳐보신 분이었던가 싶어집니다.

그만큼 확실한 지식을 풍부하게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난하게 사셔서 그런지 바느질도 해보신 것 같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2:21)"와 같은 비유말씀은 바느질을 해보신 경험이 있어야 하실 수 있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드시는 비유는 종횡무진으로 다양 하신데, 이를 굳이 둘로 크게 분류해본다면 좋은 것을 소제로 드시는 경우와 나쁜 것을 소재로 드시는 경우가 있다 하겠습니다. 목자라든가 자연이라든가 하는 좋은 소재가 있는가 하면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10 : 16)"하고 징그러운 악의 상징인 뱀 같은 것을 비유의 소재로 드시기도 합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주시는 말씀으로, 이는 뱀의 간사함을 말씀하심이 아니라 위기를 당할 때에 민첩하게 깨닫고 움직이는 뱀의 지혜를 말씀하심입니다. 지혜에 관한 한 악으로부터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더욱이 '불의한 재판장'을 비유로 들어 하나님을 설명하시는 말씀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 재판관에게 가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조르고 또 조르니 이 악한 재판관이 마침내는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하고 '항복'을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하셔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십니다. , '못된 아버지'를 비유로 드셔서 하나님을 설명하시기도 합니다."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7 : 9-11)"하고 악한 아버지를 들어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나쁜 것을 비유로 드신 말씀으로 대표적인 것은 단연코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강도에다 비유하셨습니다. 하고많은 이야기 가운데서 하필이면 강도에다 비유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강도가 남의 집에 들어가면 이렇게 한다는 것도 예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강도란 그 잔인성이나 취하는 물질이 다를 수는 있어도 예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것은 그 심리와 수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가 중요한 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가 어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어찌해야 성공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첫째, 무엇을 얻을 것인지 사전에 알고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이 있는 집에 들어가야지 없는 집에 가서 무엇하겠습니까? 이 집에 숨겨놓은 금덩이가 있다. 저 집에 돈궤가 있다 하는 것을 알고 들어가야지, 수고롭게 들어가서 빈털터리로 나오게 된다면 헛일이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쫓아내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그들을 향하여 책망하십니다.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Church mouse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디 교회에는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교회에 사는 쥐는 굶어죽기 십상입니다. 이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에 강도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제사장이 못된 짓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금덩이가 많이 쌓였기에 강도가 들어간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 성전에 실제로 강도가 든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제사장의 딸이 거하는 방에 들어가서 엄청난 금덩이를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제사장은 아무 말도 없습니다. 못된 짓을 해서 모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앓고만 있을 뿐입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강도가 아무 집이나 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보 같은 강도는 아무 데나 가리지 않고 들어가겠지만 제대로 눈치 있는 강도는 사전에 조사하고, 그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둘째, 어떻게 해야 피할 수 있는지, 도망갈 구멍부터 열어놓아야 합니다. 무조건 들어가서 값비싼 물건이 있다고 집어넣다가 붙들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미리 뒷문을 열어놓고 도망갈 준비를 해놓아야지요.

들어가기 전에 미리 나올 궁리부터 하는 것입니다. 이리 들어갔다가 저리 나와야 하겠다, 앞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와야 하겠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앞문으로 들어갔다가 앞문으로 나오겠다는 강도는 미련한 강도입니다. 붙들리게 마련입니다.

세째, 늑탈한 다음에, 강도질을 한 다음에 이 물건을 어떻게 안전하게 소화하느냐를 궁리해놓아야 합니다. 금덩이를 어디에 팔아야 하느냐, 어디 가서 이것을 쓸 수 있느냐-늑탈한 후의 조치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대개 보면 어디에다 오래도록 숨겨놓았다가 몇 년쯤 지나 찾아 쓰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당장 그것을 쓰다가는 잡히고 맙니다. 미련한 강도입니다. 강도도 공부 좀 하고 해야 합니다.

강도는 잡히지 않기 위하여 복면을 합니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딱 가리고 들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강도의 수법입니다. 그리고 강도는 증거를 인멸합니다. 증거를 남기면 안됩니다. 그래서 장갑을 끼고 들어가는 것은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 다음에는 멀리 도망갑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도망가야 합니다. 집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멀리 도망가야 합니다. 이것이 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하시어 단 한마디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이것은 한 차원 높은, 상식 이상의 말씀이십니다. 어떤 집에 강도질을 하러 들어갔을 때에 식구들 가운데 아이들이나 노인들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습니다마는 장정은 그대로 두면 안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을 먼저 묶어놓은 연후에야 마음대로 마음껏 물건을 늑탈할 수 있습니다. 만일 힘있는 사람을 결박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그 강도질은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27)." 여기서 말씀하는 강도는 누구입니까? 지금 누구를 결박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강도요, 결박된 자는 마귀라고. 예수님께서 먼저 마귀의 괴수 사단을 결박해놓으신 연후에야 그 나머지 일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강도에 비유하여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은 이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해놓고, 그리고 나머지 일을 해야 합니다.

본문말씀의 문맥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깨끗하게 고쳐주십니다. 이 때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 칭송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똑같이 이 이적을 보고도 비난의 말을 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들로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3:22)"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괴수 귀신이 들리시어 작은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로 대답하십니다.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3:26)"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이 말씀에는 가정법이 쓰이고 있습니다. 사실을 놓고 가정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기 때문에 귀신의 나라는 물러갔고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임했다는 말씀이십니다.

세 번째 대답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으로 아주 형이상학적 진리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먼저 강자를 결박하고야 잔당을 멸할 수 있다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한마디로 싸움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싸움으로 설명한 성경말씀은 많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는 생명의 문제로 싸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싸움이란 생명의 문제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살아남느냐 살아남지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여 이것은 power and counter입니다. 힘의 대결이요 양자택일입니다.

여기에는 중간존재란 없습니다.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 것입니다. 전쟁입니다.

이런 싸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적인 싸움이요, 또 하나는 외적인 싸움입니다. 내적인 싸움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정욕과 교만과 게으름과 나태함과 싸우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 안에 있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격이 못되어 그 성격과 싸웁니다. 그 성격을 못 이겨 입맛도 없고 잠도 못 자고 괴로워합니다. 자기와의 싸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어쨌든 이 세상에는 자신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자기 번민과의 싸움, 자기 열등의식과의 싸움…… 이런 내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Inner fighting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세상에는 외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아는 대로 물질에 대한 싸움이 있습니다. 또한 정치적 문제, 경제적 문제, 사회적 문제, 그밖에 질병과 가난과 고통의 문제로 인한 싸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모두가 하나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누구와 싸우느냐, 둘째로 왜 싸우느냐, 세째로 승리란 무엇이냐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모르면 싸울 수도 없을 뿐더러 싸운다 해도 승리가 없습니다. 승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고…… 이것이 이긴 것입니까, 진 것입니까?

여러분, 도대체 승리란 무엇입니까? 최고의 승리는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싸울 뻔했으나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나아가 화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승리입니다. 그런가하면 승리한 것 같으나 불의에 빠졌습니다. 의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진 것입니다. 반면에 다 잃어버린 것 같으나 진리를 지켰습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이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갔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결국 그는 승리한 것입니다. 믿음을 지켰다면 죽어도 승리한 것입니다. 종교를 지키고 겸손을 지키고 선을 지키고 진리를 지켰다면, 그것은 승리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을 보십시오. 그것 뺏느라고 죄 많이 지었습니다. 못할 짓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패한 것입니다. 이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요새 고3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하여 공부하느라 무척 애씁니다.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치러서 합격을 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양심의 가책을 받는 학생이 많습니다. 가끔 제게 와서 상담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시험치를 때에 커닝을 했다고, 만일 커닝을 안 했더라면 자기는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고백하며 괴로워합니다. 이 학생 합격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이 일로 일생동안 고민을 할 것입니다. 분명 그것은 실패입니다.

떨어져도 좋다는 자세로 정정당당하게 치르는 시험,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런데 못할 짓 다하고,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하고, 도대체 어쩌자는 것입니까? 그것이 무슨 승리요, 무슨 영광입니까? 싸움이란 누구와 싸우는 것이며 왜 싸우는 것인지를. 나아가 그 다음에 있을 승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른 채 싸우면 승리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은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싸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 : 12)." 찬송가 393우리들의 싸울 것은의 가사에도 싸움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의 싸울 것은 육체 아니요, 마귀 권세 힘써 싸워 깨쳐버리고 죽을 영혼 살릴 것일세……' 우리싸움의 대상은 물질도 혈육도 아닌, 마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단과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는 것이지 죄인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싸우는 것입니다.

세상을 주관하는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죄와 악과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저는 가끔 권투경기를 보는데 참 재미있습디다. 서로 치고 박고 할 때에 보면 꼭 죽일 것 같습니다. 코피가 흐르는데도 때립니다. 얼굴이 찢어져 상처가 났는데도 때립니다. 쓰러졌다 일어났는데도 때립니다. 그렇게 꼭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땡 하고 종소리만 울리면 서로 끌어안습니다. 도대체 누구하고 싸운 것입니까? 이 싸움의 성격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fair play입니다. 미워서 때리는 것도 아니요, 죽이려고 때리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앞에 굴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졌다'라고 시인하는 말을 듣기 위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도 무슨 싸움을 하든지 땡 하면 그만둘 줄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서로 총과 대포를 겨누고 싸우다가도 적이 손을 번쩍 들고 항복하면 싸움을 그칩니다. 부상당해서 절룩거리면 아무리 원수라지만 데려다 치료를 해줍니다. 과연 이것이 누구와 싸우는 싸움입니까? 바로 원수의 마음에 있는 악의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적의만 버리면 다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미워할 것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펼 당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한 번은 바르트부르그에 위폐된 적도 있었습니다. 루터는 그곳에 기거하면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중요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늘 유혹의 그림자가, 사단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마다 그 마귀와 싸우기 위하여 잉크병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가 기거하던 방의 벽에는 잉크자국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루터는 다소 다혈질이기는 했으나, 자신이 누구와 더불어 싸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싸워야 할 대상은 마귀입니다. 이 점을 확실히 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이 싸움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듯 치열한 싸움은 하되 누구와 더불어 싸우는지, 왜 싸우는지, 승리가 무엇인지를 똑바로 알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승리란 무엇입니까? 사단을 이기는 것이 승리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싸움에는 부분적인 싸움이 있고 국부적인 싸움이 있는 반면에 전면적인 싸움도 있습니다. 나아가 최종 싸움도 있습니다. 마지막 싸움이 이 세상 끝에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역사 하신 것은 마귀를 축출하는 싸움이었습니다. 미련한 사람을 지혜롭게 하시고, 마귀에 붙들린 사람으로부터 마귀를 내쫓으시어 깨끗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 싸움은 영토전이요 주권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마귀에 붙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마귀가 붙들고 있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마귀를 내쫓으시고 그를 지배하십니다. 이것은 주권을 놓고 하는 싸움입니다.

이러한 국부적이요 부분적인 전쟁이 계속되어나가다가,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큰 전쟁이 이루어집니다. 마귀의 괴수 사단을 결박하는 시간입니다. 큰 전쟁이 거기서 끝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18년 동안 귀신에 붙들려 있는 여자를 고쳐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13:16)."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사단에게 붙들려 있는 사람을 풀어주시는 역사를 행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최종 싸움인 십자가에서 승리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기로 승리하셨느니라(2:15)."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힘없이 죽으신 것 같으나, 그실 이것은 마귀를 결박하는 사건이요 시간인 것입니다. 마귀가 자기 할 짓을 다한 것 같으나, 그실 예수님께서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시고 만백성을 사랑하시어 의를 이룸으로써 하나님 앞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귀가 결박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마치 어떤 집에 강도가 들어 그 집에서 제일 강한 자를 결박해놓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지금 이 세상에 오시어, 이 세상을 주관하는 악의 대표자를 결박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사건입니다.

현대의 전쟁은 무기싸움이요 기술싸움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한다면 옛날의 전쟁은 육박전. 곧 대장과 대장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입니다. 산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서로 진을 치고 전쟁을 할 때입니다.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나 되고 손에는 베틀채 같은 창을 들고 블레셋의 대장 골리앗이 매일같이 나타나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하고 큰소리를 칩니다. 이 말을 들은 사울과 이스라엘 병사들은 모두 놀라 크게 두려워할 뿐 누구도 감히 나서지를 못합니다. 이 때에 양치기 소년 다윗이 막대기와 매끄러운 돌 다섯 개와 물매만을 가진 채 골리앗과 싸우겠노라고 나섭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나섭니다. 이렇듯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여호와를 의지하였기에 다윗은 돌 하나로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시켜 이길 수 있었습니다. 결국 대장을 잃은 블레셋의 군인들은 혼비백산 도망가고 전세는 다시 뒤집히고 맙니다. 바로 이것이 대장과 대장의 싸움입니다. 대장만 잘 만나면 뒤만 쫓아도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시원찮은 대장을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대장과 대장의 싸움은 십자가사건에서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강한 자를 결박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잔병처리의 문제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첫째, 그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은 이미 끝났습니다. 상대편의 대장을 결박해놓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잔병처리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 승리의 의미를 똑바로 알고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최후 승리가 눈앞에 있습니다. 종말론적 승리가 눈앞에 있습니다. 지금의 전쟁은 잔여전쟁이요 국부전입니다. 잔당을 소멸하는 전쟁이요 패잔병을 처리하는 전쟁입니다. 승리는 이미 온 것이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밀고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강한 자를 결박해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나머지 졸개들만 처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교회가 치르고 있는 싸움입니다.

세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넉넉히 이깁니다. 누구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 : 4)" -승리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길까 질까를 놓고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이미 이겼고 앞으로도 이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강한 자를 결박해놓으셨다는 사실과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것입니다. 승리는 교회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믿고 싸우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승리를 이미 보장받고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6 : 1317)" --이렇듯 무장하고 싸우면 이기게끔 보장되어 있다고,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고 말씀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떠나는 날에 이 승리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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