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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심판(요 5:19~2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본문의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편지를 쓴 사도 요한의 상황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요한이 이 편지를 쓴 시기는 예수께서 말씀을 하신지 약 60-70년 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옮겼다기 보다는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남아 있던 말씀들로써, 수십년 동안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한 내용이다라고 생각되는 말씀만을 선별해서 기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나 행하신 기적을 다 기록하자면 천지간에 그 기록을 둘 곳이 없을 것이다"라고 사도 요한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고 많은 기적을 행하셨나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며 동시에 요한 자신이 중요한 말씀만을 골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썼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행적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음은 이미 수차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 특히 13,14,15장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긴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는 내용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불렀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등으로 삼으셨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은 대단히 분해했습니다. 우리들도 기도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 아버지라고 쉽게 부르는데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가 쉽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소중한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여기서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 됨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뜻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와 은총으로 살며 하나님의 기업을 누린다는 의미에서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다는 의미에서의 아들 됨입니다. 아들이라는 글자는 같지만 같은 의미의 아들이 아닌, 언어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신 뜻은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개념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불렀다는 의미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같다는 의미로 이해를 했기에 화가 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되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하나되었다는 사실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계시론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본 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본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다음 6장에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아버지를 본 자는 나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계시적 의미에서 내가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국민학교 교사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자기 학생들을 통해서 그 부모의 성격은 물론 심지어는 얼굴 모습까지 상상이 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 망신 시키지 않으려면 만사에 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으니까요. 가만히 보면 걷는 모습이나 말하는 모습까지 닮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보면 그 부모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계시적인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으며, 내 음성을 들은 자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다, 즉 내가 하나님의 계시자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자임을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됨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모든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요 5:20), 한 마디로 비밀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이시고 또 본다는 말씀으로 완전히 하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의 마음이요,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뜻과 생각이 하나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음,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함으로 하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심으로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격과 인격을 하나로 만듭니다. 사랑하고 보면 내 마음이 그의 마음이 되고,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그가 아프면 나도 함께 아프고 그가 기쁘면 나도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가 슬픔에 젖어 있는데 나의 느낌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이 둘로 나눠지지 않으므로,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요 그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인 것입니다. 또한 사랑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아무리 비밀을 지키려고 결심해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심으로 아들에게 다 보이셨다는, 즉 완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사랑 안에서 완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됨을 말씀하십니다.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므로, 완전히 순종할 때 하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는 같은 운명으로서 순종하지 않으면 둘이 되고 나누어지는 것으로 완전한 하나의 운명임을 설명하십니다.
다음 심판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리시는 것처럼 나로 하여금 사람을 살리게 했고, 그리고 심판을 맡기셨으므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1-22).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는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이제는 제 2의 창조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룹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재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짐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시 회복한다는 뜻으로,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고 살리시는 일이 하나요, 또 심판하시는 일이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심판하셨는데 이제는 종말적으로 그리스도께 심판권을 맡기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그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선했느냐 악했느냐, 십계명을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가 아니라 오직 하나,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 하는 그리스도가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 죄사함을 받고 믿지 않으면 죄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므로 죄가 더 플러스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가졌던 죄가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심판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고, 믿지 않으므로 이제는 나 혼자서 죄인된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가 심판의 기준이 되고 심판주가 되심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고 예수를 공경하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3). 오래 전에 국민학교 3학년 아이들이 담임 선생님 댁을 방문하면서 선생님의 아들의 선물을 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아이들의 지혜에 놀랐습니다. 이 선물은 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그들의 지혜였습니다. 아들을 기쁘게함으로 결국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즉 부자지간의 기쁨이 하나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동생을 칭찬하면 형은 좋아하지 않지만 아들을 칭찬하면 아버지는 좋아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영접하면 아버지를 영접한 것이고 아들에게 순종하면 아버지께 순종함이 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공경치 않고 욕을 돌리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되며 하나님께 욕을 돌린 것이 됩니다.
다음 24절에서는 생명과 사망의 기준이 나타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 구절은 우리가 마지막 숨질 때까지 붙들고 있어야 하는 귀중한 말씀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생명으로 옮겼다" 벌써 얻었고 옮겼다고 과거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말을 듣고 믿는다, 즉 듣는 일과 믿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관계이고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관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듣는 마음이요, 믿는 마음입니다. 흔히 세상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첫째가 듣는 것이며, 둘째가 믿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끔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식들의 말을 믿어 주지 않습니다. 아흔 아홉 번을 속았더라도 마지막 한 번에 다시 기대를 갖고 믿어 주어야 합니다. 속지 않아야 똑똑한 어머니인양 착각하기도 하지만, 어머니만은 끝까지 아들을 믿어 줘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며 믿는 것은 곧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생에 이른다는 것은, 말씀을 들음으로 그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 믿음으로 그 믿는 내용이 나를 다스리게 되어 순종하게 하며, 순종하게 한 성령이 곧 나의 인격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영생을 얻었다고 과거사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생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시간적으로만 풀이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내용과 질을 말하는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무섭던 진노의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불편한 관계가 편안한 관계로, 두려운 관계가 이제 안위의 관계로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관계가 영생으로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뿐 아니라 이웃과 나와의 관계도 사랑의 관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영생을 사는 사람은 자기도 사랑합니다. 자기애를 모르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남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동반 자살로 아이들을 죽이고 자기도 죽는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 사랑이 기초되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중한 자기애를 가진 자는 물질과도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영생을 사는 사람은 물질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 중에 특히 시간은 대단히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는 시간을 주셨기에 일하고 쉴 수 있으며 내일이라는 시간에 기대를 가지고 소중한 오늘을 보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기본인 것입니다.
다음 사망이란 듣는 마음이 없는 두려운 관계로써, 느낌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생각이 없어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집의 노예, 거짓의 노예,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변명만 하게 됩니다. 죄를 짓고도 교만하며 당당하여 회개할 마음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감옥 안에 있는 죄인들은 자신들은 작은 죄인으로서 감옥에 있고 정말 큰 죄인은 감옥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재수가 없어서 감옥에 들어왔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으므로 회개할 마음은 제쳐두고 변명만 있는 것입니다. 사실 변명하는 마음은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 때부터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변명을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돌리느라고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분명히 죽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끝난 것입니다. 그 죽음은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 제발 잘못했습니다"라고 회개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아니, 회개를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망입니다. 따먹는 순간, 벌써 그 때 죽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회개가 없습니다. 얼마나 죄를 지었느냐 아니냐 보다는 회개가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죽었느냐 살았느냐 하는 문제는 의인이냐 악인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냐 겸손하냐, 회개를 하느냐 안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심정, 즉 완악하고 교만하고 변명하여 하나님과의 진노의 관계에서, 이제 회개하고 돌아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영생의 관계로 바꾸어 놓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6). 이제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곧 이 때라는 것은 예수께서 오셨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말씀이 전파되고 성령이 감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감화해 주실 바로 이 때 바로 지금,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만약 들리지 않는다면 죽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무서운 심판은 말씀이 들리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 종말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이미 죽은 자도 심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둘다 죽은 자들이 듣는다는 것이며, 또 현세적으로도 종말론적으로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들어서 순종하면 영생에 이르고 순종하지 아니하면 심판에 이르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심판의 기준이요 심판주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함을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영접함과 함께 성령과 말씀이 그를 지배하는 영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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