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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음성 (요 10:1~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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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음성 (10: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시고 목자와 양의 관계를 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비유가 있는데, 그 중에서 신랑신부의 비유, 아버지와 탕자 아들의 비유, 그리고 오늘 내용인 목자와 양의 비유는, 가장 대표적이며 아름다운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비유란, 언제나 그 비유에서 지적되는 사물, 비유되는 형식, 비유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구분해야 합니다. 이것을 혼돈하면 끝이 아주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생각하려는 문제는, 비유가 지적하는 사물에 대해서입니다. 만약, 비유가 지적하는 사물이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의 경험 속에 없는 것이라고 하면, 그들은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양을 비유로 들어 설명했는데, 양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이면 무슨 내용인지 알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프린스톤 대학에서 공부할 때, 그 곳에는 눈이 많이 왔었습니다.

더운 지방인 인도에서 온 학생들은 얼마나 추워하는지 옆에서 보기가 딱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전 처음 보는 눈이 신기해서 목까지 솜옷으로 가리우고 눈 위에서 즐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성경에서 "눈과 같이 희리라"는 말씀을 보았지만 눈이 이렇게 하얀 줄은 몰랐다고 신기해했습니다. 눈이 아무리 희다고 해도 눈을 보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어떻게 흰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비유인 양()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는 양이라는 동물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는 성경 말씀을 번역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돼지 새끼를 보라"고 번역했다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곳 사람들은 양을 본 적이 없고, 또 양을 그대로 옮길 단어도 없을 뿐 아니라 옮겼다 해도 양이 가진 의미가 바로 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바치는 돼지가 어린양의 이미지에 가장 가깝게 이해될 수 있어서 돼지 새끼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비유가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비유의 사물이 듣는 자의 경험 속에 있는 것이어야 함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본문에서 비유하고 있는 목자와 양이 우리 문화권에 있어서는 어떠합니까? 양이 흔치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동물원에서 볼 수 있고 또 양의 가죽으로 된 소지품을 사용하기도 하며 그림책에서 구경하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친숙한 동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양을 관계지어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모르는 편에서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소설책이 아니고선 실제로 목자가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수백 마리의 양을 지키며 때로는 피곤하여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리(wolf)로부터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목자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선한 목자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실감나게 알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으로서 그들의 대부분은 양과 함께 사는 목자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이라고 하면 가장 가깝고 이해가 빠르며 실감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비유를 쓰는 목적은, 잘 모르는 자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으로 모르는 진리를 말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것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이 비유입니다. 어디까지나 알게 하기 위해서 인용한다는 말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뒤에 숨어 있는 내용을 모르게 말하는 것이 비유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우가 누구입니까? 헤롯이 간사해서 그의 별명이 여우였다고 하는데, 이 내용을 아는 자는 알아듣고, 모르는 자는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걸리거나 책잡히지는 않습니다. "헤롯에게 가서 말하라"고 했다면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되지만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 아니므로 어떤 사실을 은폐하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목자와 절도나 강도의 비유가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10:1-2). 목자는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것이고 절도나 강도는 바리새교인이나 서기관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6절에 보면 저희들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더라고, 즉 이 비유의 숨은 뜻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하게 합니다. 넓은 초원이 있고 한 가운데 목장이 있으며 이른 아침 햇살이 찬란하게 비쳐주는 목장의 아침 풍경입니다. 양들은 우리 안에서 목자를 기다리고 있고, 목자는 아침 일찍 양들을 돌보기 위해 지금 목장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양들이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밤새 춥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밤중에 이리나 사자 등 맹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우리에서 꺼내어 하루 종일 풀과 물을 먹도록 들판에 풀었다가 다시 저녁이면 우리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물론, 밤중에도 양들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어 밤새도록 맹수나 기타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다가 아침에 목자가 오면 문을 열어 줍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10:3).

문지기는 돈을 받고 일하는 삯군입니다. 밤새도록 양을 지키다가 아침에 목자가 오면 인계하는 것입니다. 양들은 빨리 들판에 나가서 물도 먹고 싶고 풀도 뜯고 싶은데, 갇혀 있으니 답답하여 목자를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목자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양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불러 밤사이에 건재함을 확인하고 앞장을 서서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이며, 반면에 선한 목자 이외에 절도도 있고 강도도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나옵니다만 14절에서,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알며, 예수님 자신은 참으로 양을 사랑하고 선하고 착한 목자로서 양을 위해서 목숨도 버리노라고 설명하십니다.

본문에서는 선한 목자의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선한 목자는 문으로 정당하게 들어갑니다. , 합리적인 길을 통해서 양을 만납니다. 그러나, 절도나 강도는 양을 늑탈하러 왔으므로 뒷문이나 담을 넘어서 들어갑니다. 들어가는 입구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은, 양과 목자의 사이는 서로 믿고 순리적인 아름다운 관계이나 강도와 절도는 그 반대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선한 목자와 양은 서로 음성을 알아듣는다고 했습니다. 가정에서 키우는 짐승들은 대부분이 주인의 음성을 알아봅니다.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조건반사로서 어떤 음성이 들려온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만일에 손뼉소리가 난 다음에 개를 때렸다면 다음에 다시 손뼉치는 소리가 나면 개는 또 맞을지도 모르므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으로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반가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담을 훌쩍 뛰어넘는 소리가 난 다음에 강도가 들어왔다면 다음에는 그 소리만 나도 양들은 벌벌 떨게 되는 것입니다.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지난날의 경험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다정한 소리로 음성을 안다는 것은 존경과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 소리만 들으면 안심이 되는 것처럼 목자는 양의 음성을 알아듣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새말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며, 소위 대화가 된다는 말입니다. 서로 들을 수 있고 안다는 것은 사랑의 줄로서, 이 줄이 끊어진다면 참담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사랑의 음성이 변성되면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사랑스런 음성 그대로 들리면 평안하고 믿음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주님의 음성에 나의 생을 다 맡기고 그리고 따라갑니다. 본문에서도 양들은 목자의 음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갑니다. 그 음성을 알기 때문에 믿고 따라가는 것으로 전적인 위탁입니다. 우리는 때로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사실 마음대로 하는 것은 불안한 것입니다. 믿을 수만 있다면 누군가를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이 편합니다. 찬송가 가사대로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얼마나 좋습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내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나보다 크신 분에게 책임을 다 맡기고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따라갈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없습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 좋은 어느 분이 간증하기를 자기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면 불안하고,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더 편안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만큼 믿어야 합니다. 어디로 가든지 양이 목자를 믿는 것처럼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를 가장 실감나게 말해 준 사람은 다윗입니다. 유명한 시편 23편에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임종시에 시편 23편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또 읽어 주고 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내가 특별히 어려울 때나 마지막 순간에 한 번 더 듣고 싶은 구절이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마지막 순간에 듣기를 원하는 말씀이 시편 23편이라고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한다는 것이 결론으로써,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바로 그 시간에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대개 이 말씀을 듣고서는 편안하게 세상을 떠납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는 부족함이 없으므로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그저 믿고 따라가면, 그 분께서 잘 인도해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언제나 좋은 길로만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좋은 곳에 인도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골짜기도 넘고 비탈길도 지나야 넓은 초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짜기를 지나갈 때 힘든다고 왜 이런 곳으로 인도하느냐고 항의하겠습니까? 골짜기나 가시덤불을 지나가도 반드시 좋은 곳으로 인도할 것을 믿고 따라갑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목자를 알므로 어떤 처지나 형편에서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다정한 목자의 음성만 있으면 조금도 두려움 없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문제가 아닌 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위로를 받으며 끝까지 따라가는 순종의 모습입니다.

셋째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른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목자가 양을 대할 때, 양이 많다고 해서 한 마리쯤은 하고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난한 집에서 부잣집에 양자를 보내려고 여러 자식 중에 누구를 보낼까 생각하는데, 큰아이는 커서 안 되고, 작은아이는 작아서 안 되고, 약하면 약해서 안 되고, 건강한 아이는 건강해서 안 되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그만 두었다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식이 많다고 해서 어느 자식 하나라도 소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개인적이고 직선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 하나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개별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99마리가 있어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반드시 찾으시겠다는 귀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별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담아, 모세야, 또는 사울아, 사무엘아 하고 개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부르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 목자는 앞서서 갑니다. 양을 개별적으로 다 불러모아 놓은 다음에 목자가 앞서서 길을 인도하면 양들은 줄줄이 그 뒤를 따릅니다.

앞서가는 것이 지도자의 성격입니다. 지도자는 앞서가야 합니다. 농촌에서 동물들을 모는 것을 자세히 보면 소는 뒤에서 몰고 말은 앞에서 몰고 갑니다. 왜냐하면, 소는 뿔이 있어서 앞에서 몰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뿔에 받힐 수가 있으므로 뒤에서 몰고, 말은 뒷발로 잘 차기 때문에 앞에서 끄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도자는 언제나 앞에 서서 가야 합니다. 자기는 가지 않고 남에게만 가라고 하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내가 먼저 간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가지 않고 남에게만 가라고 하면 말이 많습니다. 말없이 내가 앞서서 봉사하면 뒤따라오게 마련입니다. 먼저 행하고 모범을 보이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봉사하시고, 봉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먼저 행하셨습니다.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너희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언제나 주도권을 가지시고 앞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목자가 먼저 간다는 것에는 아름다운 뜻이 있습니다. 만약에 갑자기 맹수들이 나타나도 먼저 당하기 위해 앞서가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은 내가 먼저 맡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목자로 대표로 나가셨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위험을 먼저 받으신 선한 목자입니다.

그리고, 강도나 절도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서 그들에게는 양들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10:5). 그들도 열심히 가르치고 인도하려 했지만, 사랑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양들은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정말, 사랑하고 위했다면 왜 따라가지 않았겠습니까?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너희들은 선한 목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난날에 그들의 음성을 통하여 양들이 찢기고 상처를 입어 손해를 보았던 경험이 있기에 따라가지 않은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를 믿고 안심하고 부지런히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비탈길이나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이유를 묻지 말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저 궁극에는 좋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가 양을 인도하고 양이 목자를 따라가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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