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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받은 자의 사명(누가복음 12장 41절~48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 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 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 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하시는 48절 말씀이 오늘 공부할 잠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비유말씀의 결론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무릇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관한 비유, 하나님나라에 대한 교훈은 그 전체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가리켜서 '종말론적 공동체'라고도 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하나님 앞에서 종말론적으로 사는 신앙의 사람들'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종말론적 세계관이라면 신앙적으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는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다 변하는 것입니다.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다 낡아지고 쇠하고 죽고 태어나고 합니다. 정지된 시간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시간 개념입니다. 두 번째는, 결정된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결정된 미래입니다. 스스로 원하건 원치 않건 죽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죽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났으면 죽어야 합니다. 젊었으면 늙어야 합니다. 밤이 되었으면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 내가 알거나 모르거나 원커나 원찮거나 간에 정해진 대로 이루어져나갑니다. 결정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부하고 가난하고가 상관이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것 앞에서 결정적인 일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연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철학에서나 다른 종교에서는 종종 '우연'이라는 말을 씁니다. '자연히'라는 말도 많이 씁니다. '자연히'라는 것은 참으로 애매한 말입니다.
자연은 인격이 아닙니다. 만물의 근원은 자연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자연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인격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역사관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되는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자연적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자연법칙대로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법칙을 초월한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하나님께서 경륜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종말론적) 역사의식입니다.
종말론적 시각으로 보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종말 직전의 유예기간입니다. 끝은 먼저 정해졌고 그 앞에서 이제 한시간 한시간을 세어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방학할 날을 앞에 두고,'이제 세 밤 자면 방학이다' '두 밤 자면' '한 밤 자면' 하고 손꼽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결정된 시간이 있고,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과정, 유예기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의 그 시간이 현재라는 유예기간을 바싹바싹 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유예기간이 자꾸자꾸 줄어들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 않습니까? 이런 의식을 종말론적 시간 이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시간 한시간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종말론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눈앞의 한시간 한시간이 여간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연만(年滿)한 사람에게 하루하루가 아쉽게 느껴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젊은 사람들이 있고 나이 많은 분들도 있습니다마는, 인생에 있어서 제일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스무 살 무렵까지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디 가는가, 나도 어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서 장가를 들었으면 좋겠다, 어서 시집을 갔으면 좋겠다고, 마음이 시간보다 급한 때가 스무 살까지입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넘고 보면 어느 결에 시간이 마음보다 앞서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런가 했더니 서른을 넘고 본즉 이제는 시간이 슬슬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흔에서 쉰--시간의 달음박질이 급해집니다. 쉰에서 예순--시간이 쏜살같습니다. 눈 한번 감았다 뜨면 한 주일이 후딱 가버리고 없습니다. 한 달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예순을 넘으면 이제는 하루가 새롭습니다. 하루하루가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종말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 여간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의식으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 주님 오실 날이 목전에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안 믿는 사람,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자꾸자꾸 회개해서 고쳐나가야 합니다. 뉘우침에서 그칠 것이 아니요 회개(悔改)를 해야합니다. 씻어내고 내어버리고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서둘러야 합니다. 주님 만나 뵐 시간을 생각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서둘러 해야합니다. 준비만 해서는 안됩니다. 준비는 대개 서른 다섯까지입니다. 뒤늦게까지 공부를 한다 뭘 한다 해보아야 이젠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는 가지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능력을 모아 가지고 열심히 최선의 일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일을 하되 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그 비유 가운데서 자상히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본문을 앞으로 더 거슬러 35절로 48절까지를 읽어보십시다. 먼저 '깨어라'하십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37절)"하십니다. 몽롱한 가운데에 있을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있어야 한다 하심입니다. 맑은 정신,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조심해야지요. 술 취한 상태, 죽은 것입니다. 아까운 시간을 그렇게 보낼 것이 아닌 것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멍하게 살아갈 것이 아닙니다. 낭비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데……'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각성을 하여야 합니다. 항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밤이 깊도록'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주인이 혹 이경(二更)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38절)" -이경, 삼경은 새벽입니다. 사경이 되어야 해가 뜹니다. 초저녁부터 기다려 밤이 깊어졌습니다. 그 때까지라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도 자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복이 있겠다 하십니다. 항시 깨어 있으라 하심입니다.
43절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하십니다. 깨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시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맞이하면 참으로 복이 있겠다 하심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 자고 있다면 불행이지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불행하지요.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 현장에서 주님을 맞이하면 얼마나 복이 있겠습니까? 그실 우리가 늘상 일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을 할 때도 있고 하지 않을 때도 있으며, 쉴 때도 있거든요. 그러나 그 어느 시간에 주님을 만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일하는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복이 있겠다 하심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하십니다. 나다나엘은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엎드러집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 으레 짓궂은 추리를 해보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았다는 말씀을 왜 하셨을까? 그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너는 됐다' 하신 것이지, 만일에 나다나엘이 술집에 있는 것이라서 '네가 술집에 있더구나'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야단난 일이지요. '네가 거기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면 나다나엘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하필이면 제일 자랑스러운 순간에,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한 그 시간에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내가 보았다. 기특하다. 장하다. 복 되도다' 하심이었으니 나다나엘로서는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가 어디 가서 봉사하고 있을 때에 주님 임하셔서 '내가 보았다' 하시는 것이어야 좋지, 해서는 안될 일을 남몰래 좀 하고 있는 중인데, 하필이면 그러한 때에 주님 나타나셔서 '내가 보았다' 하시는 것이라면 참으로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고 있을 때에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늘이 마지막날(종말)이라고 생각하여 그 오늘을 영원히 종말은 오지 않는다는 듯이 열심히 일하고 사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을 끝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마치 영원히 일할 수 있을 것처럼, 영원히 많은 시간이 있을 것처럼 준비하고 일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겠다 하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일하는 모습에 대하여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42 절)"라고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지혜 있고"-지혜에 대해서는 뒤의 47절에서 밝혀집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하십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아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일을 하되 모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고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하찮은 우리 인간들의 상호관계에서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나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의 처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섬기고자 할 때에는 주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부터 분별해야만 합니다. 내 뜻, 내 기분이 아니라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것부터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지 내 뜻에 주인이 맞춰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죽음입니까? 그렇다면 죽겠습니다.
가라 하십니까? 그렇다면 가겠습니다. 버리라고요? 버리겠습니다-이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주여, 내 뜻을 이루어주십시오, 혹시 주님의 뜻이 따로 있더라도 생각을 돌려서 내 뜻을 이루어주십시오-이렇게 억지만 부리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뜻을 잘 압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압니다.
그리고 '진실한 종'입니다. 진실한 종은 주인의 일을 나의 일인 것처럼 합니다. 책임성 있게 일합니다. 진실-믿음직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믿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무책임하게 일하는 법이 없습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합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내 일인 양 해야 합니다. 아니, 나의 일보다 더 소중하게 해야 합니다.
요사이, 일본과 미국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에서도 반도체(半導體)를 만들고 미국에서도 반도체를 만듭니다. 그 기술에서 원리적으로는 미국이 더 낫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사람들이 만들어낸 제품은 불량품이 100만분의 1이라는 것에 비하여 미국사람들은 아무리 잘 만들어낸다 해도 1만분의 1이 불량품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어 연구해보기도 하고, 똑같은 과정으로 똑같은 방법으로 만들어보는데도 여전히 그 같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일본계 미국사람 즉 미국에서 태어나 사는 일본사람 하나를 일본에 보내어서 연구를 해보게 했습니다. 그 사람이 일본에 가서 몇 달을 두고 연구해서 보고를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별다른 것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기계로 똑같은 과정으로 만드는데도 다르거든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한 가지를 찾아냈는데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은 일에 한창 몰두해 있다가 땡하고 퇴근시간 알리는 사이렌소리가 나면 올스톱, 일손을 딱 멈추고 나가버립니다. 일 끝났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시간이 딱 되어도 손에 만지던 것을 마저 마무리하고야 일어섭니다. 종쳤다고 해서 하던 일을 중도에 멈추지는 않습니다. 만들던 것 마저 만들고, 정리하고,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와서 손댈 것까지 챙겨놓아야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여기서 일본에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껏 연구한 것은 미국이고, 잘 만든 것은 일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일은 남의 일이다. 나는 고용되어 있는 것이다. 물건 좋건 나쁘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나는 정해진 시간만큼 일하고 월급이나 받으면 되는 것이다.' - 이런 자세이니 땡 하고 종치면 만지던 것 중도에 그냥 두고 일어서는 것이며, 다음날에 와서 다시 손을 댈 때는 이미 일손의 리듬부터가 달라져 있고, 어제와는 분위기도 기분도 다르고 보니 자연 불량품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미국 제품에 불량품이 많은 것은 그래서입니다. 일본사람들은 노동쟁의로 시위를 할 때에도 이를테면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인 경우, 숫자를 줄일지언정 불량품을 만드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일단 만들어내는 제품은 제대로 만들어낸다는 정신입니다. 노동쟁의를 할 때에 나오는 자동차 제품이 으레 불량품이고, 이것들이 국제시장에 나가니 신용이 떨어집니다. 이 신용을 회복하는 데에 10년이 걸립니다. 미국에 수출한 우리 나라 자동차의 라디에이터 안에서 걸레조각이 나온 일이 있다고 합니다. 왜 걸레가 나옵니까? '이놈의 회사 망해라'하는 심보로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야 그 회사가 지탱되겠습니까?
신실성이 문제입니다. 신실 --- 주인의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책임의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성실하게, 나의 일인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시간 떼우고 월급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안될 일입니다. 그리하여 이즈음에는 생산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이기 전에 인간의 문제, 인간성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비뚤어지고는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신실한 종'이 누구이겠습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책임성 있게 나의 일인 것처럼 일하는 종, 청지기 된 의식을 가진 종을 이름입니다. 청지기의식을 가지면 능력과 지혜를 다할 뿐더러 생산적으로 역사 하게 됩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자"라고 말씀합니다. 지혜 있고 신실한 종은 자기도 일하고 남도 일하게 만듭니다. 일하는 분위기를 만듭니다. 저만 잘났다고 떠들지 않습니다. 양식을 나누어주고 분위기를 조정, 격려해서 다른 사람들도 기분 좋게 일하도록 할 줄 압니다. 이렇게 일하는 중에 주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은 복이 있겠다고 하십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48절)"-본문말씀의 결론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과연 많이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면 주인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많이 받는 것이요, 모르고 행하는 사람이 적게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알았느냐 몰랐느냐-지식이 문제입니다. 많이 알았느냐 적게 알았느냐, 분명하게 알았느냐 희미하게 알았느냐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많이 아는 사람의 책임이 큽니다. 그만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공부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다. 공부를 많이 했으면 당연히 일도 많이 해야 합니다. 공부는 많이 해놓고 그 지식을 썩혀버린다면, 그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 동안에 들인 수고가 얼마요 들인 돈이 얼마입니까? 그렇게 많이 공부하고서 그것을 하나도 써먹지 않고 공부를 전혀 안한 사람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엄청난 낭비가 없습니다. '대학, 이라는 것이 장가가고 시집가기 위한 간판입니까? 모름지기 공부한 것은 써먹어야 합니다. 공부한 것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
노래로써 교회에 봉사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루는 그분에게 "수고가 많으십니다"했더니 그분 대답이 이렇습니다. "사실은 제가 음악대학을 나왔거든요. 그런데 써먹을 일이 한번도 없었어요.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으면 제가 어디 가서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방송국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유명한 것도 아니고, 그런 기회조차도 없고…… 기회만 있다면 저는 하루에 열 번이라도 노래를 불러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회가 없어요. 교회밖에는 없습니다." 사실 그분은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노래를 부르러 교회에 나왔다가 교인이 된 것입니다. 본인의 간증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노래를 부를 장소가 없어서 교회에 나왔다가 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많이 알았으면 그만큼 많이 일해야 합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많이 받았다고 하는 것은 지식을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측면에서도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명적 측면에서도 많이 아는 사람은 그만큼 책임이 큽니다. 무지한 사람은 책임이 적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행치 아니한 사람은 적게 맞을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사람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은 알았으니 책임이 크고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래 믿었고, 성경공부 많이 했고, 기도 많이 했고, 주님의 뜻을 많이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것을 찾으려고 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많이 받은 자라는 것은 능력을 의미합니다. 할 수 있는 자, 할 수 없는 자 - 능력의 문제입니다. 자유를 가진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것을 안 한다면 큰 죄가 됩니다. 반면에 할 수 없어서 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감옥에 갇힘으로 자유가 없는 사람을 보십시다. 감옥에 갇힌 사람을 두고 주일날 교회에 안나왔다고 책망하겠습니까? 몸이 아파서 입원한 사람을 주일날 교회에 안나왔다고 책벌 하겠습니까? 누가 나무라겠습니까? 그러나 자유가 있는데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은 것은 분명 큰 죄가 됩니다.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는 여러분 스스로가 잘 아실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네가 살았으면…… 나는 살만큼 살았는데, 나보다도 어린 네가 먼저 죽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평소 주일 학교를 열심히 다니고 믿음이 좋던 그 아이가 빙그레 웃으면서 "할아버지, 그렇지 않아요. 저는 조금도 섭섭하지 않아요. 어른들이 그러시는데 세상엔 죄악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큰 죄를 짓기 전에 이렇게 일찍 갈 수 있으니 저는 복된 사람이지요. 더욱이 저는 친구들을 12명이나 교회로 인도했거든요. 그러니까 1년에 1명씩 인도한 것이 아닙니까? 장로님은 72명을 인도하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아이, 비록 잠깐 왔다 가지만 1년에 1명씩 인도한 셈이니 얼마나 복된 생이었습니까? 그 아이가 이어서 묻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주일도 교회에 빠진 적이 없어요.
장로님은 72년 동안 교회에 빠진 날이 한번도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시간이 짧다면 그만큼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도 적습니다. 그러나 그 주신 시간이 길다면, 오래 살았다면 주님께서는 그만큼 많은 것을 주셨기에 당연히 많은 것을 찾으십니다. 큰 책임을 물으십니다.
나아가 많이 받았다는 것은 직책을 의미합니다. 남의 수하에 있는 종이냐, 남을 주관할 수 있는 청지기냐 --- 이것이 문제입니다. 청지기는 주인과 종 사이에 있는, 매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타율성을 지닌 반면에 상당한 자율성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명령을 따른다는 점에 있어서는 타율적이지만, 자기 수하에 있는 종들에게 일을 시키고 그들을 부리면서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자율적입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위치입니다. 이렇듯 주인, 청지기, 종…… 그들 나름대로 다 맡은 분야가 있습니다. 너는 이 일을 맡아서 하는 반장이니 이만큼만 책임을 져라, 너는 저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니 저만큼만 책임을 져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그 책임을 맡겨놓으십니다.
많이 받은 자 - 이것은 지위를 말하는 것이요, 직책과 지위와 지도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여럿입니까? 그만큼 책임이 무거워집니다. 자녀가 내 밑에 있으니 내 책임이 아닙니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까? 그것이 다 내 책임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다 내 책임입니다. 그만큼 나는 받은 것이 많습니다. 이렇듯 많이 받았으니 이제는 주님 앞에 많이 드려야 합니다. 많이 내놓아야 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그 지도력, 그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우리는 다 지위가 있고 위치가 있습니다. 백부장이 말한 것처럼 나도 남의 수하에 있고, 내 수하에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고, 내 수하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 하나에 따라서 좌우될 사람이 많습니다. 나 하나가 잘못될 때에 다 쓰러집니다. 낙심합니다.
나 하나가 굳건하게 설 때에 전부가 굳게 설 수 있습니다. 내 지도력, 내 지위, 내 직책, 내 직장- 이것이 모두 내가 받은 바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은 아주 막중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고, 사람들을 도와서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분위기를 만들어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하나가 쓰러진다면 덩달아 많은 사람이 쓰러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라고.
특별히 오늘 이 시간에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은사입니다.
내가 네게 영적인 은사를 많이 주었으니, 이제는 네게서 많이 찾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듭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특별히 하나님께서 내게 계시의 영을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분명히 내게 남보다 더 많은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도 마땅히 크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사도 바울에게 많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41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말씀 가운데 대답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것이다. 너는 많이 받았으니, 네게는 많이 찾을 것이다" 하십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오늘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보십시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충성 되라,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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