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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덕을 세우는 길

by 【고동엽】 2022. 10. 26.
목차

덕을 세우는 길

 

오늘의 본문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보아서 아시겠지만 본문에서 몇 번 반복하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덕을 세우라' -덕을 세우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해야 덕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덕이라고 하는 말은 좀더 큰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들 우리는 부분에서 전체, 전체에서 부분을 생각합니다. 언제든지 개인을 생각하고 전체를 생각하고, 또 전체를 생각하고 개인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전체를 기쁘게 하고, 전체의 조화를 이루고, 전체가 아름다운 관계를 이룰 때에 이것을 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 개인 하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해서는 안됩니다. 나 하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기쁜 일이요, 나에게는 기쁜 일이 되어야 덕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은 기쁘게 할 수 있는데 내게 손해가 너무 많아요. 이렇게 되어도 사실 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덕이라는 말은 크다는 뜻이에요.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전체가 기쁨을 얻고, 전체가 행복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덕입니다. 전체가 유익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이에 우리는 현대문명과 더불어 이기주의자들이 되었어요. 길에 나서보면 다들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르겠어요. 더구나 차를 운전하면서 보면 도대체가 남 생각을 안해요. 자기 생각밖에는 안해요. 이런 것을 볼 때에 참으로 덕은 멀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제가 북녘땅에 갔을 때에 그들과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오랜만에 덕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들은 덕을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 지도자가 이렇고, 우리 수령님이 이렇고……' 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말을 종합해보면 딱 세 가지 요약이 됩니다. 투철한 판단력, 위대한 지도력, 그리고 마지막이 덕성입니다. 요새 우리 남한은 선거철이 되어서 '이 분이 훌륭합니다. 이 분이 지도력이 있습니다……'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선거운동 하는 데 '이 분은 덕성이 높은 분입니다.'라는 말은 아마 못 들었을 것입니다. 덕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어느 세월인데 18세기의 얘기를 하느냐고 말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덕이 있어야 된다, 덕이 중요하다고요. 무릇 덕성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에게서 덕을 빼면 이기적인 생각밖에 남지 않아요. 그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5절로 8절에 보면 신앙생활에 대하여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이 여덟 계단의 성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믿음에 덕을"- 2단계가 벌써 덕이에요. 그러니까 나 하나만 잘 믿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가끔 보면 이 여덟 가지 계단 중에 아직 한 계단도 못 올라간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교회는 제가 이것을 강력히 주장해서 여러분이 다 덕을 이루고 있습니다마는, 어떤 교회에 가서 보면 "다같이 기도합시다"할 때에 막 와글와글 시끄럽게 기도해요.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자기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기도 못하게 만들어요. 그렇잖아요? 이게 덕이 안되는 것이에요. 또 어떤 사람은 자꾸 울어요 하도 울어서 제가 울지 말라고 그랬더니 "저는 그저 기도만 하면 이렇게 눈물이 납니다."라고 대답해요. 자기는 울어야 은혜가 된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또 울어도 아주 구슬프게 울어요. 듣기가 영 거북해요. 이것은 덕이 안되지 않습니까? 자기만 생각했지 다른 사람은 생각 안했거든요. 다같이 선을 이루어야 되는데 말이에요. 이게 덕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단계도 못 올라간 것입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성경은 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합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입니다.

덕이란 먼저 하나님 앞에 선하고, 자기 자신한테 선하고, 이웃에 대해서 선한 것, 이 세 관계가 합쳐져서 온전해질 때에 이것을 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부득불 priority,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나도 좋고 저도 좋으면 좋지요. 이것은 이상적이에요. 그러나 그럴 수 없을 때가 있어요. 둘 중에 하나를 택한다 하면, 나를 버리고 저를 택해야지요. 이게 덕입니다. 또 저도 좋고 하나님께도 좋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부득불 하나님 편을 택해야지요. 이렇게 해가면서 덕을 이루어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덕을 세우는 길을 몇 가지로 말씀하는데 아주 구체적입니다. 먼저는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15)"-이 연약하다는 말은 이렇습니다. 믿음이 약해요, 생각이 약해요, 의지가 약해요, 감정이 약해요, 여러 면으로 약한 존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미숙하다는 것이에요. 이런 사람들을 볼 때에 먼저 믿고 강하다는 사람, 믿음도 강하고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그런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그들은 약점을 감당하라, 남의 약점을 내가 감당하라, 내가 책임지라 함입니다.

어떻게 책임질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이해해야 합니다. 저들이 아직 약한 자라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지요. 아직 어리고 미숙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그 입장으로 돌아가서 ', 그 정도에서는 그렇겠다. 처음 믿으니까 그렇겠다. 그런 환경에서는 그렇겠다'--이렇게 이해해야지요. understanding, 이해하는 것이 그 첫째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다려줘야 합니다. 너무 빨리 속단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것도 모르냐?'--이럴 수는 없어요. 아직 모르니까요.

조금있으면 알게 됩니다. '그것도 못하느냐?'-아니예요. 조금만 기다리면 그도 넉넉히 할 때가 올 거예요.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를 비판해버리겠어요? 그런고로 우리는 좀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 마음에 차지는 않지마는, 어느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지마는 우리에게 기다리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감당하는 것이에요. 또하나,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한테 실망했다. 너는 고작 그 정도밖에는 안되는구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다'-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부족한 사람이라도 또 기다리고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앞에서 내가 실망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감당할 줄 모르는 것이에요. 아직 약해서 그래요. 그럴 때에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람을 낙심시켜서는 안됩니다. 먼저는 내가 낙심하지 말아야 해요. 내가 낙심하지 않아야 그 쪽에서도 낙심을 하지 않아요. 내가 낙심했다고 하면 그 쪽은 먼저 낙심해버려요. 그런고로 우리는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할 때에 낙심하지 말 것이요, 실망시키지 말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의 장래를 믿어주고 그의 진실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또 가장 귀한 것은 그이 수준으로 돌아가서 그의 키만큼 나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당하는 것이에요. 어린아이들과 이야기 할 때에 아이의 키가 작으면 부득불 내가 허리를 굽혀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내가 쓰는 용어로 말할 수가 없어요. 나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아이는 '아빠'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도 '아빠'라고 해야 돼요. 우리 집 손자손녀들도 '할아버지'라는 말을 못해서 저한테 '하부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식구 모두가 저를 '하부지'라고 불러요. 아이가 알아듣는 말이 '하부지'니까요. 그 수준으로 돌아가서, 그 눈, 그 키로 나 자신을 낮추어야 됩니다. 이것이 감당하는 것예요. 너는 왜 이렇지 못하느냐, 왜 이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느냐?---이렇게 속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나 스스로를 저 사람과 같은 키로 낮추는 것, 이것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 13)"---나는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마는 믿음이 약해서 못먹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안먹는다 함입니다. 그실 안먹는 것이지만 못먹는 것처럼 나는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해요. 그러면 나도 안해요. 안할 뿐만 아니라 나도 못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나는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아는 척하지 않아요.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상대방이 모른다는 말이 되잖아요? 그런고로 나도 모른 척해요. 아니, 몰라요. 모르고 말아요.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상대방이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도 못하는 자인 것처럼 약해져서 사는 것이에요.

쉽게 말해서 여러분이 돈이 많아서 얼마든지 좋은 옷을 입고 번쩍번쩍하게 차리고 교회에 나올 수 있어요.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분의 수준을 맞추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 수준으로 같은 옷을 입어야지요. '내 돈주고 내가 있는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이것은 안되는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교회에 나올 때에 너무 요란스러운 다이아반지 같은 것은 안끼는 게 좋아요. 이러면 은혜가 안됩니다. 저쪽이 없잖아요? 없는 사람 편을 내가 이해해서 그와 수준을 맞추는 거예요. 이것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강한 자로서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하라-그래야 덕을 세우지 않습니까? 이것이 덕을 세우는 길이에요.

그 다음에 성경이 가르쳐주는 말씀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 egocentric,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함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잦지 말 것이에요. 이래야 덕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 기쁨만 추구하고, 내 기쁨만 따라가려고 애쓰는 동안에 다른 사람에게 슬픔을 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을 하지 말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경우가 많아요. 내가 나 자랑하고 있어요. 그 동안에 다른 사람 정죄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잘한다고 하는 순간에 다른 사람 못한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는 것이에요. 나는 지금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다는 말밖에 안했어요. 그러나 이 말은 곧 다른 사람 못한다는 말이 되고 말잖아요? 그래서 덕을 세우려면 자기 자랑을 말 것이고,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자기 중심적인 기쁨을 추구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이 말의 뜻은 무엇이냐, 감정보다 지식을 택하라는 것이에요. 감정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sentimentalism이에요. 기분대로 살수는 없어요.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음식을 먹을 때에 사실은 입맛에 안맞아도 마음에 안맞아도 우리가 먹잖아요? 왜요? 만들어준 사람의 기분을 위해서지요.

죄송하지만 제가 요새는 전체 교인이 많으니까 다 다니지 못한다는 핑계로 전혀 심방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집은 가고 어느 집은 안가면 좀 원망할 것 같아서요. 그러다보니까 다 안가고 말아요.

어떤 장로님댁에도 심방을 가본 적이 없어요. 아무튼 옛날에 심방 많이 다닐 때에 참 어려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꾸 먹을 것을 내주는데 다 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하루에 커피를 13잔 마셨어요. 그런데 어째서 어려우냐, 그것은 이렇습니다. 돈이 많은 집에서 좋은 잔에다 커피를 내놓으면 거절해도 돼요. 그런데 아주 어려운 집에서 차를 내줍니다. 밥그릇에다 커피를 타 가지고 와요.

이런 것은 안 마시면 큰일나는 거예요. 마셔야지요. 또 방금 옆집에서 점심을 먹고 갔는데, 물러보지도 않고 어디서 막국수를 시켜왔어요.

"맛있습니다. 잡수세요"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또 같이 갔던 일행들은 음식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했냐고 집주인을 다그쳐요. 이럴 때에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괜찮아요. 밥 먹는 배가 따로 있고, 국수 먹는 배가 따로 있어요. 상관없습니다. 가져오세요." 그래가지고 이것을 가져다놓고 억지로 다 먹었어요. 혼자서 대표로 먹었어요. 그리고 나서 다음 집으로 가는 길에서 소화제를 먹어요. 그래서 소화제를 늘 가지고 다녔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덕을 이루기 위해서예요. 사실은 맛이 없어요. 그러나 맛이 있다고 해야지요.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해요. 이게 덕이에요. 웃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웃어야 해요. 남 웃을 때에 같이 웃어야지, 남 다 웃는데 가만히 있으면 이것, 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고로 감정대로 할 수는 없어요. 내 기분대로 살아서는 안돼요. 기분을 지워버리세요. 요샛말로 기분을 끄고 살아야 해요. 내 기분대로 감정 주도적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러면 덕을 이루지 못합니다. 대개 보면 감정에 민감한 사람들이 언제나 말썽이에요.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기분 나는대로 하기 때문에 결국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예요.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감정보다는 지적이어야 합니다. 깊이 생각을 해야 해요. 이게 덕이 될까 안될까, 상대방에게 이로울까 해로울까, 이래서 되는가 안되는가…… 적어도 몇 번 생각을 하고 나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게 덕을 이루는 것이에요. 지적이고 냉정해야 합니다. 지성적이어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그렇다고 지적으로 다할 수는 없지요.

보다 중요한 것은 의지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지 주도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면 기분에 내키지 않아도 해야 합니다.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면 가는 거예요. 마땅히 먹어야 하는 일이면 먹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이 되어야 덕을 이루는 것입니다. 덕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분나는대로, 생각나는대로 해가지고는 안됩니다. 의지 주도적이야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고 다짐합니다. 자고 싶을 때도 있어요.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러나 덕을 세우려면 의지로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것을 기분대로 살겠습니까? 기분대로 살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저 내생각대로 합니까? 그것은 아니예요. 하나님과 나와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부지런히 교회 봉사를 해요. 그 바쁜 가운데서도요. 출장 갔다가도 돌아와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하나님과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또 여러분이 수요일 저녁에 교회를 나옵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보면 순서지를 보고서 '목사님이 안계시는구나.

이번에는 안나가야지'합니다. 이러면 덕을 세우지 못해요. 누가 설교를 하면 어떻습니까? 이 날은 하나님과 나와 약속한 것이에요. 나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은 날이 흐리니 그렇고, 오늘은 누가 설교를 하니까 그렇고, 오늘은 기분이 그렇고, 오늘은 우울하니까 그렇고…… 이래가지고 될 것이 뭐가 있겠어요? 이러면 덕을 세우지 못해요. 이것은 덕성이 없는 여자예요. 이것은 덕성이 없는 남자예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덕이란 굉장히 의지 주도적이에요. 의지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에요. 그러고보면 사랑도 의지예요. 기분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예요. 사랑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사랑하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또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래야 덕을 이룬다 하는 것이에요. sentimentali-sm는 덕을 세우지 못해요. 바로 의지 주도적으로 살아갈 때에 덕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먼저 다른 사람의 유익, 다른 사람의 기쁨을 생각합니다. 그를 위해서 내가 봉사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경은 "이웃을 기쁘게 하되(2)"라고 말씀합니다. 나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치 않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한다 함입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요.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음식 만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먹어요. 맛있게 먹어요. 누가 어떤 옷을 사다주었다면 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 참 좋습니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옷을 받자마자 "이런 것은 왜 사왔어?"-이러면 절대 안되는 것이지요. 가끔 보면 그런 경우가 있어요. 무엇을 사가지고 집에 들어갔을 때에 ", 어떻게 이런 것을 사가지고 왔습니까?"하고 반기면 참 좋겠는데 "돈 없애고 그건 왜 사왔어?"-이러면 정말 싫습니다. 영 질색이에요. 다시 사오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이게 바로 자기만 생각한 거예요. 덕을 이루지 못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웃을 기쁘게 하되"-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까, 항상 그 생각을 해야지요.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마 부부간에 이것을 무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무슨 말을 하면 남편이(아내가) 좋아하더라, 하고 알지요? 그래서 좀 좋게 대해주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떤 여자 집사님이 이런 말을 합디다. "그렇게 칭찬해주고 인정해주었더니 점점 기고만장해지고 버릇이 나빠져서 못쓰겠어요.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그래, 제가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 "자기 남편 기뻐하는 것이 그렇듯 질투가 납니까? 그러면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안그렇습니까?" 내 남편이 기뻐한다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어요? 바로 그런 마음이 덕을 이루는 것이에요.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하는 그것이 하나의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바로 덕성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프로야구팀의 감독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선수들을 가르칠 때, 선수들을 지도할 때에도 잘 못하는 것만 자꾸 지적하면 그가 점점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하는 점을 칭찬해주면 점점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인데도 순서를 바꾸어 이야기하면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는 거예요. 들어보세요.

한 선수가 ball control을 잘 못해요. 그래서 "자네는 왜 볼 컨트롤이 그 모양인가? 공은 빠르게 던지면서 말이야"-이렇게 말하면 점점 못한답니다. 그런데 "참 훌륭해. 자네 참 공이 빠르구만. 이제 볼 컨트롤까지 제대로 한다면 참 좋겠는걸"-그러면 잘한대요. 볼 컨트롤은 잘 못해요. 공은 빨라요. 그런데 어느 쪽을 먼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에요. "자네는 볼 컨트롤을 잘 못해. 왜 그 모양인가? 공은 절 던지면서……" 이렇게 말해 가지고는 안되더라는 것이에요. "자네 공은 참 빠르구만. 그 빠른 공에 컨트롤까지만 잘하면 훌륭하겠는데" 하니까 잘되더라는 것이에요. 상대방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기쁘게 하고야 무엇이 되는 것이에요. 더구나 여러분이 가정에서 아이들한테 공부하라고 합니다. 이럴 때에도 기분이 나야 아이가 공부하는 것 아니겠어요? 자꾸 쥐어박아서 징징 울려놓고는 무슨 공부를 하라는 거예요? 제대로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기분이 나야지요. 상대방을 기쁘게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할까, 연구를 해야 해요. 또 연구할 것도 없어요. 다 알잖아요? 알면서도 실천을 안해요. 상대방이 기쁜 것이 배가 아픈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덕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덕 있는 사람은 나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기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은 이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model이 있어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3)"-전적으로 자기 기쁨은 배제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는 비방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생각해보세요. 그는 높은 덕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인 만들기 위하여 자기는 죄인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가 죽었어요. 더 할 말이 있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 그리스도를 믿어요. 그런데 어째서 나 기쁘기 위해서 남의 기쁨을 죽이느냐 그 말입니다. 나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이것이 잘못입니다.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정말 기분이 중요해요. 감정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으로 주고 받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상대방의 인격, 상대방의 감정,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그것을 위해서라면 내가 무슨 희생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덕을 이루는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나(4)" 성경을 읽어보면 여기에 많은 사례들이 나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inspired case work, case study가 많습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많은 사건들이 있어요. 이 많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이런 사람의 이야기, 저런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보노라면 그 속에서 우리는 힘을 얻게 됩니다. 덕을 배우게 됩니다. 보세요. 우리가 성경에서 의인의 고난을 보지 않습니까? 욥이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이렇듯 성경에서 고난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봅니다. 그리고 끝까지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이 성취된 사람들을 봅니다. 아주 끈질긴, 혹은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산 이야기들을 봅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래오래 참았는가 하는 그 무서운 인내를 성경에서 봅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자꾸 읽어나가노라면 분명합니다. 믿음이 생겨요. 소망이 생겨요, 사랑이 생겨요, 그리고 덕이 생깁니다. 덕 있는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래서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에요. 열심히 공부하고 성경 이야기들을 자꾸 듣다보면 어느 사이에 내가 성경에 나타난 인물, 성경이 지향하는 그러한 사람으로 성숙되고 덕 있는 사람으로 키워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소망과 안위를 얻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5)"-하나님께서 뜻을 같게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뜻이 하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받아들이게 되고, 하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여주신다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가능케 해주십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세요. 성경을 읽어 가는 동안에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감동하사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덕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세요. 부지런히 성경을 보아나가노라면 이제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로 덕 있는 사람되게 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뜻이 하나되게, 그렇게 만들어주신다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의 힘으로 이것을 가능케 한다 하십니다.

그 결과로 본문 7절은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서로 받으라-서로 수용하라는 말이에요. 이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접하신 것처럼 서로 영접하라 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접하신 것처럼 영접한다면, 세상에 영접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용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서로서로 받으라-이것은 죄인을 향하신 사랑이요, 창조적 사랑이요, 능동적 사랑이요, 대속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진리, 이 사랑의 뜻, 이 사랑의 의지로 서로 받으라-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정신여고에 선교 찬양팀이 있습니다. 이 팀의 인원은 전체 13명이에요. 그런데 어디 가서 연주만 끝나면 학생들이 너도나도 마이크로 버스로 막 달려갑니다. 서로가 그 버스를 타는 것이에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늘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교장 선생님이 좀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너희들은 버스 탈 때에 왜 그렇게 뛰어가느냐? 왜들 그렇게 소란을 떠느냐?" 그러나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의 말인즉 이렇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이 버스는 12인승입니다. 그런데 학생은 15명이에요. 어쩔 수 없이 세 사람은 자리에 앉지 못하지요. 그런데 먼저 탄 사람이 의자에 앉고 나머지 뒤에 탄 사람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들은 자기가 먼저 가서 서 있으려고 뛰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이 자리에 앉게 되지요." 그 이야기를 들은 교장선생님은 너무도 감동을 했습니다. 그래, 어려운 가운데서도 버스를 15인승으로 바꾸어주었다고 합니다. 보세요. 어떻게 하면 남을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하면 남에게 좋은 자리를 내어주고 내가 참을까?-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선교 찬양 대원답지요?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어디서 나온 마음이겠습니까? 모름지기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찬양하는 자의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의 마음에는 이러한 행동이 따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이는 모든 찬양에 대한 얘기입니다. 찬송과 소망이에요. 하나님께서 기쁨과 평강을 충만케 하십니다. 소망이 기쁨을 주고 소망이 충만할 때에 이 같이 덕 있는 사람이 됩니다. 실망하는 사람, 절망하는 사람, 자기 절망에 빠진 사람은 절대 남에게 덕을 끼칠 수 없습니다. 소망으로 충만 할 때에, 내 마음에 평강이 충만할 때에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수용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고, 참을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덕을 끼치는, 덕을 세우는 그런 인격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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