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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의 비유(마태복음 24 : 35 - 44)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다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제 주신 본문 말씀에는 도적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비유에 대한 강해를 거듭할수록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정말 예수님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았구나 하는 것과 우리도 이러한 관점으로 사물을 보고 사람을 보는 지혜를 배워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누구이든 어떤 사건 하나만을 생각하며 집착하고 있는 동안에는 여타의 다른 문제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그 사건을 다른 사건, 다른 문제에 투사시켜 비유해 보노라면 많은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보다 여유 있고 정확한 관점에서 수용하며 대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겪고 있는 사건이 아무리 절박한 것이라 하더라도"하늘아래 이러한 사건은 나만 겪는 것이니 그 누구도 내 마음은 모른다"는 생각으로 고민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며, 대신 다른 사건에 현재의 문제를 비유하고 비교해 나감으로 언젠가는 이 문제에 해결이 주어지겠지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내용이 참으로 다양하고 폭이 넓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입니다마는 비유의 특징 중 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평범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참으로 보편적인 이야기! 설사 직접 경험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충분히 납득이 갈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옛날 옛적의 해괴한 이야기나 백만인에 한 사람 정도 어쩌다 경험할까 말까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나 다 아는 것을 비유의 소재로 하여 설명하셨으며 이러한 예수님의 방법에 더욱 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내용은 누구나 다 충분히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인 것입니다.
이제 여기 이 "도적의 비유"를 두고 보아도 세상에 도적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도적을 맞아 본 일은 없다 하더라도 도적에 대한이야기는 모두가 익히 아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에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모습이나 들의 백합화등 아름다운소재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그와는 반대로 강도 만난 이야기, 무덤에 관한 이야기, 심지어는 누구나 끔찍하게 생각하는 뱀까지도 비유로 드시면서 거기에다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깊은 뜻을 담아 설명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도적이라 할 때 이것은 일단 없어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회적으로 결코 용납되어질 수 없는 존재! 그러기에 이것은 '도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물론 그 명칭까지도 존재할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도적은 분명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이 도적을 두고 "도적은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거나 혹은 "도적이라면 아예 그 이름조차도 없었어야 하는 것이다."하는 식으로 이론을 전개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도적이라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바요 익히 아는 바이기에 단지 그것을 소재로 하여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교훈을 비유로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도적에다 비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비유라지만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태연히 도적에다 비유하시고 도적이 침입하는 그 순간을 바로 예수님 자신의 재림에 비유하시면서 주고자 하시는 진리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그 중점적인 말씀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42절과 44절의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러므로" 혹은 "이러므로"하고 결론을 맺는 그 부분이 주어진 테마의 중점적인 부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는 때에 인자가 오리라!"그리고 "깨어 있어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신 이 말씀이 본문의 주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적과 같이 오리라!'는 것은 하나의 비유요 그 비유에 담긴 말씀의 의도는 현실적으로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에 대한 준비를 한다고 하여 도적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단지 도적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도적을 막기 위하여 문단속을 하며 가능한의 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도적이 염려된다고 하여 매일 밤을 잠도 자지 않고 문간에 나와 서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도난방지를 위한 기구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는데 아무튼 그저 준비할 만큼 준비하고 장치할 만큼 장치해 놓았으면, 이제는 자야하면 자고 일해야 하면 일하는 것입니다. 도적을 막아야함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해야 할 다른 일들을 잦혀놓은 채 도적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도적에 대한 예비를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 본문에서 생각해야할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보아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도적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를 위해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노아 홍수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참으로 지혜로우신 방법일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의도가 그렇게도 신중하고 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노아 홍수의 이야기에서 몇 가지 깊이 주의 하여야할 말씀들을 보게 됩니다. 이제 37절 이하의 말씀을 보게되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즉 "노아의 때와 같이!"라고 하였는가하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하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요 무서운 말씀입니까? 진정 사실이 그렇다면 그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되어 있기라도 하였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120년 전에 노아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방주를 예비토록 하셨습니다. 120년 후에 내릴 홍수! 그러나 몇월, 몇일, 몇시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아무튼 120년 후에는 홍수가 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는노아는 자기의 식구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의 구조와 크기(창 6:14-16)의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 규모가 상상을 해 보아도 굉장한 크기의 배인데 이것을 바닷가도 아닌 산에다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준비하는 12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은 노아의 식구들이 이 배를 만드느라고 일하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여러분, 그때마다 이들을 보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였겠습니까? 추측컨대 미친 할아버지 아니면 정신 나간 할아버지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배를 만들려면 바닷가에서 만들어야지 어쩌자고 산에서 만들면서, 그것도 하루 이틀 아니면 한달 두 달이지 자그마치 120년 동안의 허구한 날을 배만 만들고 있었으니 그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일단 홍수가 나고 보니 이제는 노아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였으며 진작 어리석은 사람은 노아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비웃어 왔던 그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저들이 홍수가 나는 그날까지 계속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했다는 것이지 홍수의 예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노아가 분명히 말했고 또한 이에 대한 대비로 방주를 만들고 있는 것을 120년 동안이나 보아왔지만 저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으니 모르게 되고 모르다 보니 비난했으며 사실에 있어서는 오히려 멸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홍수가 나고 보니 상황은 바뀌어 노아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노아의 말을 믿지 않던 저들은 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멸망을 하고만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을 도적의 비유와 비교해 볼 때 도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도적이 온다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고 대처하는 자에게는 굳이 '도적같이'라는 것이 따로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살전 5:2, 4)에서 밝히 말하기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는 것은 사실이나 믿는 자들에게는 결코 도적같이 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왜냐하면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도적이 아닌 손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적이라는 것은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맞게되는 여기에서 결국 도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준비가 없었으므로 갑자기 오는 것처럼 되어졌지만 사실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니요, 예고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믿지를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지식이 성립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하면 망한다'는 그 말을 믿지 않는 자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죽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그 한 마디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뜻을 거역하면 망한다고 하는말을 들었을 때 "그렇지"하고 내가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으로 그 말씀이내 지식으로 성립이 됩니다. 그러나 "그 망하는 것이 어떻다는 말이요? 계속 죄만 짓고도 잘만 살든데"하고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지식이 성립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는 죽을 때 가서야 믿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실예로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진주만 폭격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주일 아침 일본의 비행기가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하여 그야말로 쑥밭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 지경이 되었느냐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당시 레이더를 지켜보고 있던 병사가 그 레이더망에 많은 비행기가 떠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수상하여 즉시 본부에 연락을 취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본부의 상사가 대답하기를 "아마도 네가 잘못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아군이 지금 비행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 동안 "쾅"하고 터지고 말았으니 이제는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수많은 군인이 하루 아침에 죽어나가고 미해군의 그 많은 배가 침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곧 태평양전쟁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경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며, 그러다가는 망할 때 가서는 몰랐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코 도적과 같이 왔거나 온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예고는 있었습니다마는 믿지 않는 자, 그리하여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또한 언제나 도적같이 임하는 것입니다. 슈퍼 스타라고 하는 영화에 보면 목을 매달아 죽은가롯 유다의 혼령이 돌아다니면서 슬피 우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야말로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잡아 넘겨주었으며,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그는 마음이 너무도 괴롭고 아파서 이제는 회개를 하려고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입니다마는 그 사후의 혼령이 슬피 울면서읊조리는 가사가 뭐냐하면 "와이 디즌트 텔 미(why didn't tell me)" 즉"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하지만 조용히생각해 보면 진정 하신 말씀이 없었더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와같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의 기록에 의하면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는가 하면 가롯 유다가 직접 예수님을 향하여 "내니이까?"라고 물었을 때에는 직선적으로 "네가 말하였도다"하고 대답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여러 번 경고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물론 끝까지 반항을 하더니 이제 와서 하는 소리가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니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네들 가정에서도 보면 학교 다니는 자녀들이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에 일찍 깨워달라는 부탁을 하고 잤음에도 막상 새벽이 되어 깨우려 들면 제대로 일어나기는커녕 벌써 깨우느냐며 아주 싸우려고 듭니다. 그러다가 늦게 일어난 다음에는 왜 안 깨웠느냐며 야단을 하고는 하는데 똑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충분하게 경고는 왔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한 두번 받은 것도 아닌데 끝내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쾅"하고 완전히 터진 다음에 와서야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을 하고 있으니 일은 이미 다 끝난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미련한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더욱 심각한 말씀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40절과 41절의 말씀을 보게 되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실로 얼마나 심각한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믿음을 준비하고 등불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자기의 일을 해 나갑니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한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 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사람,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갈 사람, 이렇게 그 길이 엄연히 다름에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구분 없이 함께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우리들의 신앙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에 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데도 한 사람은 은혜를 받고 한 사람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한 사람은 감격스러운 눈물을 흘리는데 한 사람은 왜 그런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 합니다. 웃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함께 웃을 때에는 나도 같이 웃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남들은 하나 같이 웃고 있음에도 팔을 모으고 얼굴이 굳어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감격해 하고 은혜 받는 것을 옆에 앉아 오히려 이상히 생각하는 사람! 어쩌자고 다들 은혜 받는 시간에 주시는 바 은혜는 받지 못하고 그처럼 비뚤어진 마음이 되어 돌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고 불쌍한 처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예배당 안에서도 그럴진대 더욱이 일반사회의 같은 직장에서 둘이 일을 하는데 한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 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사람으로 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겉으로는 똑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똑같이 있는 것 같으나그 종말론적인 운명은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서 듣지만 어떤 사람은 은혜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예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 누구도 달리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 자신도 어떤 날은 은혜를 받는가 하면 어떤 날은 전혀 들려지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끔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길에 "목사님, 오늘 말씀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하고 인사를 받습니다마는 그럴 때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허구한날 말씀을 전하는 저로서는 어느 때라고 하여 특별히 잘 전하는 말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그 분이 은혜 받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못 받는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같은 자리, 같은 직장에서, 그리고 같은 시간에, 같은 말씀을 듣는다하여 같은 은혜를 받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설사한 평생을 같이 살았다 하더라도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종내 구원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 의미상에 있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마 25 : 1-12)와 매우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 의하면 신랑을 맞이할 열 명의 처녀 중 다섯 처녀는 등불과 기름을 함께 준비하였으나 나머지 다섯 처녀는 등불만 준비하고 기름은 준비치 않았다가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우선 당장에는 똑같은 등불을 들었으므로 그 겉모양이야 다를 것이 없지만 속에는 있어야할 기름이 있고 없고 하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똑같이 보입니다.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비롯하여 봉사한다며 열심히 따라 다니는 것 등 밖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똑같습니다. 그런데 하나에게는 기름이 없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열 처녀 비유에서 더욱 재미있는 것은 "신랑이 더디오므로 다 졸며 잘쌔"(마 25 : 5)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이 처녀들이 등불을 들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름과 등불을 준비해 놓고서는 졸려서 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는 잤으나 준비를 하고 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준비도 하지 않고 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피곤하면 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리라하여 대문 밖에 서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결국은 각자의 일을 하며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겠습니다마는 문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가 있은 후에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해야할 공부를 먼저 하고 노는 학생이 있는 것에 반해 놀기부터 먼저 한 후에 공부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쓰는 것도 보아도 어떤 사람은 벌어서 쓰고 남는 것으로 쓰지만 또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없음에도 앞으로 벌 셈치고 미리, 그것도 꾸어다가 다 써버리는 것을 봅니다. 이 얼마나 미련한 처사입니까?
언제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준비할 것을 다한 후에 다른 일도 하고 놀기도 해야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준비해야할 가장 귀중한 것은 잊어버린 채 즐기고 노는 것부터 먼저 하고 자기 생각부터 먼저 해나가는 것이라면 그런 이후의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 것이 되겠습니까?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도적같이 오리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언제 오실런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러므로 또한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시험이 되는 것은 '도적은 오지 않는다' '도적은 없다' 아니면 '도적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 집은 오지 않는다' 혹은 '오늘은 안 온다'고 하는 생각의 잘못입니다. 적어도 도적을 생각할 때이면 '도적은 언제든지 올 수가 있다' 아니 그보다도 '오늘 저녁에 올 수도 있다' '아직은 단 한번의 도둑도 맞아본 일이 없지만 그러나 오늘 저녁에 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문단속을 잘 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도적 맞지 않는 팔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전에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누구도, 단 한번의 죽어본 경험을 갖지 않았지만 예외 없이 죽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는다는 것을 모르고있을 뿐이지 죽음이라는 사실은 어쩔 수 없이 있는 것이며 그리고 너 나 없이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적같이 어느 경험에 올런지 모른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준비하고 있어라' 여러분! 여기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주님께서는 반드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시지 않았지만, 그것은 조금 지연되고 있을 뿐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도 오실 수 있다고 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씨의 재미있는 일화를 생각해 봅니다. 한번은 우찌무라 간조씨가 두 자녀에게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들이"지금 2천년이 될 때까지 오시지 않았는데 정말 오실까요?"하고 반문을 해 옵니다. 그래서는 "암, 오신다"하고서는 좀 더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내 학교 갈 시간이 되어 집을 나가려고 하는데 날씨가 흐린 것이 비가 올 것만 같습니다. 그 때문에 두 아이가 다투게 되는데 이제 한 아이는 오늘은 비가 안 올 것이니 나는 우산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하고 다른 한 아이는 비가 올 것 같으니 우산을 가지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이때야말로 참 좋은 기회라는 생각으로 "날이 흐렸구나, 지금 우산을 가지고 가면 조금 불편은 하겠지만 비가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도로 가지고 오면 되고, 이렇게 날이 흐렸으니 만일 비가 온다면 우산 가진 것이 얼마나 좋겠니? 이제 조금 편한 것이 좋은지 아니면 안전한 것이 좋은지를 말해 보라"고 하여 우산을 가져가기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저녁에라도 주님이 오신다면, 혹은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하는 생각으로 회개할 것 회개하고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여 잠자리에 들었다고 하십시다. 다시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일어난 것으로 좋지만 만약 못 일어나면 그 모습 그대로 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크게 시험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꼭 회개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반드시 진실해야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일 하겠다. 다음부터, 내년부터 하고 미루어 나가는 동안에 어느 사이에 타성이 생겨 이제는 주님의 재림마져 멀리 잊혀져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오십니다. 비록 내가 생각한 때에 오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의 오심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언제나 오늘이 주님께서 오시는 날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으며,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결코 도적같이 오시지 않을 것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살전 5 :4). 그러나 믿지 않는 자 에게는 도적같이 오리라!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치 않는 때에 인자가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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