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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라(요한복음 11장 11~16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 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나사로의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하는 가운데 나타난 중요한 교훈과 신비로운 말씀을 보았습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일반적으로 병듦은 불행으로 여깁니다. 적어도 사랑과 병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병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능력이 없다면 모르지만 능력도 지혜도 있으신 주님께서 왜 사랑하시는 자에게 병이 있도록 하셨습니까? 왜 병이 깊어 죽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나사로는 이 집안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사실 나사로의 가정은 결손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고 오빠인 나사로와 누이동생 둘만이 살고 있습니다. 완전한 가정이랄 수 없습니다. 나사로는 두 누이동생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남편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가정의 기둥입니다. 그런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가 낱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 속에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 말씀에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잠든 것이라면 깨우지 않아도 깰 터인데 거기까지 깨우러 갈 일이 무어냐는 것입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가리켜 잠들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므로 거듭 말씀하십니다. '내가 잔다고 한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너희의 개념대로 말하면 나사로는 죽었느니라'-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3년을 동행하고도 아직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적어도 이맘때쯤이면, 예수님이 떠나실 때가 차왔으면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는 말씀에 '나사로가 죽었구나'라고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영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요한복음에는 특별히 이런 대화가 곳곳에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길으러 왔을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4)." 그랬더니 그 여인, 말귀를 못 알아듣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잠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지만 사실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잠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으신 것입니다. 죽음을 너무 쉽게, 잠깐 자다가 깨어나는 것으로 지극히 평이하게 말씀하시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을 끝으로, 모든 일의 완전한 끝으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걸핏하면 '나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죽는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은 그래도 낫습니다. 심지어는 '너 죽어라'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고 죽이고-참으로 무서운 사고방식입니다. 죽음이 모든 문제의 해결방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죽음, 아주 간단하고 손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일생을 통해 가장 귀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두 번 있지 아니한 죽음입니다. 인생의 결론이요 영원으로 향한 출발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런 죽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죽으면 좋겠습니까? 집에서 죽는 게 좋겠습니까, 병원에서 죽는 게 좋겠습니까? 여행하다가 죽는 게 좋겠습니까? 어차피 죽게 될 것, 하나의 방법을 선택해보십시오. 골라잡아 보십시오. '하나님, 저에게 이런 죽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간혹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에 죽도록 해주십시오'-장례 치를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죽음을 편안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좋아야 합니다.
우리네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큰 교회들이 있습니다. 신교건 구교건 예배당 한가운데에 묘지가 있습니다. 관이 들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냥 위에다 쌓아 놓은 곳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예배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도 그렇게 한다면 철야기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귀신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나와는 상관없는 먼 이야기로 여기고 말조차 듣기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을 좀더 친근하게 생각해보십시다. 어차피 가야 할 길입니다. 죽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죽음을 모면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죽음을 좀더 많이, 좀더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준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엘리자베드 쿠블러 와스는 '죽음의 심리학'으로 유명한 심리학자입니다. 다섯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 몇 권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쓴 책이 아주 재미있습니다.「On Death And Dying」이란 제목의 책입니다. 600명의 죽어 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심리작용을 연구한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다섯 단계를 거치고 마지막에 죽는다고 합니다.
첫째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은 며칠 남지 않았다'라고 의학적 판결을 내리면 열이면 열 모두가 부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고독을 느낍니다. 죽음의 선언을 받는 순간 '나는 혼자다'라는 외로움에 휩싸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혼자 죽습니다. 옆에 누가 있어준들 나의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의 동반자는 없습니다. 옆에서 울기는 할지언정 별도리가 없습니다.
어떤 미국사람이 한 이야기가 참으로 재미있어서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임종을 맞게 되었는데 그 아내가 옆에서 자꾸만 울더랍니다. "당신 죽으면 난 어떻게 살아갑니까"라면서 슬피 우는 것입니다.
자꾸만 그러니까 그 남편 죽어가면서까지 한마디합니다. '걱정할 것 없소. 당신도 곧 죽게 될 거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를 위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조금 먼저 가고 조금 나중 갈 뿐입니다. 죽음-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입니다. 고독합니다. 모든 것이 끊어져나가는 무서운 고독을 그 무엇보다 먼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분노(anger)입니다. 분노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Why me?'가 바로 그것입니다. 죽어야 할 사람 많은데 하필이면 왜 내가 죽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늙은 사람도 많고 죄인도 많고… 아무튼 나보다 먼저 죽어야 할 사람들은 죽지 않고 왜 내가 죽어야 합니까, 내가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합니까, 원망을 한다고 합니다.
셋째 단계는 흥정(bargain)입니다. 살 길이 없을까 찾아봅니다. 있는 재산 다 줄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는 등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다 쓸데없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좀더 살아볼 수 없을까 해서 타협하자고 드는 것입니다.
넷째 단계는 체념입니다. 허무한 생각이 듭니다. '다 쓸데없구나' '의학이 발달하였다고는 하지만 내 병 하나 못 고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돈 벌어놓은 것도 소용없습니다. 명예도, 옆에서 울고 있는 자식들도 다 소용없습니다. 허무합니다. 깊은 허무 속에 체념하게 됩니다.
마지막 단계로. 이제는 수락(acceptance)하게 됩니다. 미완성이요, 잘못한 것 많은 인생입니다. 정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이제 남은 시간을 생각합니다. 짧은 이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비로소 나의 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죽음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마디로 죽음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Why me?'가 아니라 'Me too.'입니다. 왜 내가 죽느냐가 아니라 나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의인이건 악인이건. 부유하건 가난하건 죽음 앞에서는 모두 평등합니다. 공평합니다. 만일에 부자는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은 일찍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더구나 재산 얼마 이상이면 죽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더욱 억울한 일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다 죽는 것인데 굳이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보편성을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 딸아이가 아기를 낳으려고 진통으로 고생고생하고 있을 때에 제가 이런 말로 위로했습니다. '세계의 인구 절반이 너와 같은 고생을 한다'라는 것입니다. 여자는 누구나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나만이 겪는 고난이 아니요 세계 인구 절반이 겪는 고난입니다. 또 하나 '너 자신도 이런 산고를 통하여 세상에 태어났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죽음에 관한 한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에 예외란 없습니다.
성경은 계속하여 안식을 말씀합니다. 죽음은 안식입니다. 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도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13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고를 그치고 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루종일 일하고 저녁에 잠드는 것이 바로 죽음의 연습입니다. 안식의 연습입니다. 의식이 없어지기에 잠은 죽음입니다. 여러분, 잠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깊은 잠을 자는 사람에게는 서너 시간 잔 것이 겨우 5분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깊은 잠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편안히 쉬는 것입니다. 안식입니다. 우리가 일만 계속하고 쉬지를 않는다고 해봅시다. 얼마나 고단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생길을 다 간 다음에 쉬게 됩니다. 깊은 안식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시적이요 임시적입니다. 내내 이토록 잠들어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잠들었다가 깨는 것입니다.
죽음은 자기 완성입니다. 평생동안 살아온 모든 삶을 결론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중요합니다. 죄송스런 이야기올시다마는 개처럼 죽으면 사람이라 못합니다. 사람답게 죽어야 합니다. 그가 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든 간에 마지막에 가서 순교하면 그는 일생을 순교적으로 산 것이 됩니다. 순교자가 됩니다. 마지막에 나라를 위해서 죽으면 순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마지막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을 귀히 여겨야합니다. 자기 완성의 시간인 것입니다.
동시에 죽음은 도덕성을 가집니다. 죽음과 함께 그 일생을 심판받아서 한 사람은 영생에로, 한 사람은 영원한 사망에로 각각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심판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심판성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꼼짝못하고 일생 살아온 것을 평가받아야 할, 냉정하게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아야 할 그 시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Churchill, Winston) 경이 죽어 런던에 있는 성 바오로 교회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장례식을 거행할 때에 나팔수가 종탑 위에서 나팔을 두 번 불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국장(國葬)같은 경우에는 군인들이 예포를 쏩니다. 총을 쏘기도 하고 대포를 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나팔을 불었는데, 첫 번째 분 나팔은 취침 나팔이었다고 합니다. 고이 잠들라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분 나팔은 기상 나팔이었다고 합니다. 일어나라고 부는 것이 기상 나팔입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이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에 기상 나팔을 마지막으로 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 세상을 다 마치고 완성하고 결론짓고 매듭짓고,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출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에서 죽음을 가리켜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도 그리하셨습니다. 죽었다고 아우성치고 우는데 예수님은 그 집에 들어서시면서 '울지 마라, 아이가 잔다'하셨습니다. 보시지도 않고 잔다고 하십니다. '죽었는데 잔다고 하시네'라면서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예수님께는 죽음이 아닙니다. 다시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숨이 넘어가건 맥박이 멎건 문제되지 않습니다. 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잠이기에 일단 안식이요 또한 깰 것입니다. 잠이기에 깨우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넘어 깨우는 자, 그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11절에 보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날에 나팔소리와 함께 오셔서 모든 성도들을 깨우실 것입니다.
15절에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이라는 말씀이 특별히 그러합니다. 이 말은 만약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다시 살리고 싶었더라도 마르다와 마리아의 극성에 아마도 그렇게는 안되었을 것입니다. 죽기 전에 고쳐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사로가 죽을 수도,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지연된 것을 기뻐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으로는 잠깐만에 되어지는 일입니다. 죽었을 당장에는 온 집안 식구들이 울고불고 야단이었을 것입니다 마는 한 나흘 지나 장례까지 치르고 나니 슬픔과 괴로움이 그런 대로 잊혀져갑니다. 고통이란 사실상 잠시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쁨 또한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은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17절)." 아무리 고통을 당한들 죽을 때까지입니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결국 잠시잠깐의 고난뿐입니다.
이제 약속된 구원을 전제로 하고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실 것입니다. 분명히 살리실 생각이 있습니다. 나사로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려고 합니다. 어차피 살리실 것인데, 기왕 병들바에야 아주 못고칠 병이 나을 것이고 또 죽었다고 하더라도 죽은 한두 시간 후에 살리시기보다야 나흘 후에 살리시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아예 한달 후에 살리셨더라면 오히려 좋을 뻔했습니다. 마지막을 행복하게 아름답게 맺을 수만 있다면 고통의 그 과정은 길수록 어려울수록 좋은 것입니다. 마지막, 종말론적인 약속만 분명하다면 이 지연이 별문제되지 않습니다.
요즘의 여러분들에게는 너무 구체적인 실례가 되겠습니다. 아이들이 대학입시에서 떨어졌습니다. 재수를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입니다. 재수, 삼수, 아니 사수라도 하여 입학한다는 보장만 있으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또 낙방할까봐 문제입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재수해서 꼭 들어간다는 보장만 있으면 삼, 사수인들 어떻습니까?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일진대, 나사로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분명할진대,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한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병이 깊은 것, 죽은 것, 죽어 나흘이 지난 것, 썩어서 냄새나는 것이 모두 잘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오히려 기뻐하십니다. 사람들은 나흘 동안에 울고불고 했을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원망 깨나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쁨과 그들의 슬픔을 한번 비교해보십시다. 얼마나 거리가 있습니까? 아이러니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저 앞을 내다보시고 기뻐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물론 집안에는 원망과 슬픔, 탄식만이 가득합니다. 뒤에 원망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나가 맞으면서 무어라고 합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라면서 대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덧붙여 투덜거렸을는지도 모릅니다. '오시라고 사람까지 보냈는데 어찌 속히 안오시고 이제야 오셨습니까?'-뻔한 이야기입니다. 마르다가 정말로 그랬는지 속으로 그랬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이런 말까지 했을 것 같습니다. '안 오실 것이면 그렇다고 말씀이나 하실 것이지 공연히 죽지 않을 병이라는 말씀은 왜 하십니까? 죽지 않을 병이라 하여 그런가 했더니 죽었지 뭡니까?' 참으로 원망스럽습니다. 할말이 많습니다마는 예수님 앞이라 조심스러워서 그 정도로만 말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뒤에는 분명 긴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생각해보면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길고도 깊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애처로웠지만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이 합동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낼 터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를 믿게 하려 함이라"-너희의 믿음을 위해서는 이 사건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정이 너무 많으셔서 만일 그 자리에 계셨더라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요청에 못 이겨 나사로를 죽을 때까지 내버려두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멀리 계셨던 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 선물을 주시는 방법은 'delay and deep death'------지연D쵹TXT9하는 일이요 깊은 고난입니다. 이를 통하여 믿음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받는 자의 입장에서도 쉽게 받을 수가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얻은 소중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다같이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정도는 각기 다 다릅니다. 적은 믿음 큰 믿음, 희미한 믿음 확실한 믿음-갖가지입니다. 그러면 누가 큰 믿음을 가졌겠습니까? 해답은 간단합니다. 남보다 눈물겨운 사정을 더 많이 체험한 사람이요, 남보다 어려움을 더 많이 겪은 사람이요, 남보다 뼈아픈 고통을 겪으면서 그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남보다 위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노라-너희 믿음을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 잘 하시는 분이요, 성경 해석을 잘하시는 분이요, 능력을 나타내시는 분이요, 병 고치시는 분이요, 바다를 고요케 하시는 희한한 분이라는 그 정도였을 것입니다. 죽었다가도 사는, 곧 죽음으로부터 살리신다는 믿음-부활 신앙, 이 위대한 믿음은 이 사건이 아니고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사건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언젠가는 분명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 년 후에 주시면 누가 하나님이 주셨다고 여기겠습니까? 우리가 둘 다 건강한데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백 세에 가서 주니 기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서른 살에 낳건 여든 살에 낳건 백 세에 낳건 기적은 매한가지입니다. 생명의 탄생은 모두 기적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야박해져서 백 세에 낳았다 하니 기적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마흔 한 살에 저를 낳았습니다. 10년간을 단산했다가 낳아서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10년간을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스물 다섯에 결혼해서 스물 여섯에 낳으면 누가 기적이라고 하겠습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마는 알고 보면 전부가 기적입니다. 그러면 기적의 기 적성, 그 기적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언제가 되겠습니까? 시쳇말로 '화끈한' 체험을 한 뒤에 라야 깨닫게 됩니다. 드라마틱한 사건에 부닥쳐야만 깨닫지 보통 사건, 평이한 사건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죽어 썩어진 것이 오히려 잘되었다고 하십니다. 다시 살려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썩어진 시체를 다시 살려내는 큰 기적을 보여야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예수가 그리스도요 메시야요 부활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25, 26절에서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를 믿느냐, 부활신앙을 믿느냐-여기에 아멘 하려면 썩어진 시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아야만 합니다. 죽어서 썩어진 시체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죽음이 전제되어야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16절에 가면 도마의 말이 나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합니다. 도마, 참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핍박이 따르는 것을 엄연히 보았습니다. 위험하므로 '가지 맙시다'하고 예수님을 저지하여야 할 터인데, 그 말은 차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잠들었다, 아니, 죽었다, 깨우러 가자-도대체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습니다. 하여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한 것입니다. 이 사람 좋은 사람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게 많습니다. 가자는 건지 오라는 건지, 잠들었다고 하다가는 다시 죽었다고 하지를 않나-알 수는 없지만 충성하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가운데 충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다고 하니 무조건 가자는 것입니다. 좀은 만용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마는 좋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잠들었는지 죽었는지, 깨우는 것인지 살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좌우간 예수님과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마음입니다. 저는 이 도마의 마음이 참 좋습니다. 너무 아는 것이 많아서 말썽이 되는 세상입니다. 알고서 가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알겠다는 것입니까? 대충 알아두십시다. 불확실한 가운데서도 먼저 예수와 함께이어야 합니다. 살건 죽건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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