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06일] 생명을 선택하라(신 30:15~20)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Rh8pB05Z4z4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30장 15절로 20절 말씀이 되겠습니다. 구약성경 310년에 있습니다. 구약성경 310년 신명기 30장 15절부터 봉독하게 됩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봉독할 때에 다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노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아멘.
바스카우트에 의해 '선택의 기술'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너무 많은 것들이 있는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선택해야 될지, 이 선택을 바로 할 수 있는 진심도 중요하고 의도도 중요하고 기술도 중요합니다.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물건 하나를 선택하는 데 따라서 내 생활이 달라지지요. 내가 배우자를 한 번 선택하는 데 따라서 내 운명이 바뀝니다. 네 직업에 대해서도 그렇고, 순간순간 우리는 많은 것을 선택하고 살지만은 이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인 것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우리 오늘 사회는 과잉 사회다. 그리고 앞선 선택을 함으로 문제가 있다. 선택에 대한 깊은 생각도 있어야 하고, 선택했으면 책임을 져야 되는데, 너무 넓은 세상에서 선택의 여유가 너무 많아서 그만 우리가 선택을 바로 할 수가 없게 됐다. 마치 여러분 백화점에 한 번 가보세요. 물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대체 내가 지금 뭘 사러 왔습니까? 심지어 내가 사러 갔던 것도 잊어버리고 이것 보고 저것 보다가 그만 엉뚱한 거 사 가지고 왔어요. 그뿐만 아니에요. 사 가지고 왔으면 그걸 내가 사용해야 되잖아요. 그냥 처박아 놓았어요. 여러분 집에 가보세요. 아직 보따리도 열지 아니한 물건들이 많아요. 그건 선택의 자유를 잘못 사용한 것이죠.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선택, 많은 물건은 이거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 조작만 해도 안 되고 낭비해도 안 되고 이거 소중한 거 아닙니까? 선택했으면 바로 사용해야지. 또 지식, 그 많은 지식 공부해 가지고 그다음에 뭘 했다는 얘기입니까? 이것 또한 잘못된 것이고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입니다. 인간관계에 이런 사람도 만날 수 있고 저런 사람도 만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교제에 있어서 하나하나 책임 있게 선택하고 책임 있게 관계를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마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선택했으면 책임을 져라. 또 선택을 했으면 하나를 선택할 때 열을 버려야 되거든요. 선택만 하고 버리는 쪽을 잊어버렸으면 그 선택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선택했으면 나머지는 과감하게 버려야 되고 잊어야 됩니다. 여러분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샀어요. 사 가지고 왔어요. 이거 내가 선택한 거예요. 갖다 놓고 이제는 이것을 소중히 여겨야 되는데 웬걸요? 하루 종일 "그때 그걸 살 걸", "아, 그때 그것이 더 좋았는데" 하고 생각하는 동안에 지금 내가 가지고 온 이 물건에 대한 소중함을 잊어버려요. 이런 멍청한 짓도 있습니까? 내 손에 있는 것이 소중한 건데, 이게 바로 책임성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선택했으면 선택한 바를 잘 지키고 소중하게 간직할 뿐만 아니라 그걸 응용할 줄도 알아야 되고 생산적으로 써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나머지 일을 잊어버려야 돼요. 내가 선택한 것 외의 일을 과감하게 끊어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고귀함은 그 선택할 수 있는 지식, 능력, 기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에게 말씀하십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 엄청난 복음이 있습니다. "네가 살고 죽는 것 네가 결정해라. 네 운명은 네가 결정해라" 그런 순간이에요. 따 먹으면 죽고, 안 먹으면 사는 거예요. 그러므로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지라는 엄청난 존엄성, 그러한 존귀한 우리의 의식, 영적 존재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해요. "아니, 에덴동산에 그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으면 따 먹지 못하게 울타리를 치든지, 아니, 거기 절대 근접하지 못하게 했으면 무사할 걸 왜 따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그런 기회와 자유를 주어 놓고 이렇게 인간을 어렵게 만들었냐?" 그게요. 바로 그 속에 인간은 존재의 존엄성이 있는 거예요.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그러한 고귀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잘 알지 않습니까? 동물은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저 강한 본능대로 사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사자는 풀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니 음식이라는 건 동물을 잡아먹게 되잖아요. 사자가 살기 위해서는 고기만 먹어야 돼요. 본능이에요. 사자를 보고 "너 왜 약한 동물을 잡아먹느냐" 말할 수 없고요. "왜 풀을 먹지 않느냐" 심판할 수 없죠. 왜요? 동물은 본능대로 가는 거니까, 본능대로 사는 자유만 있으니까 말입니다.
저는 언젠가 멕시코에 갔다가 기가 막힌 장면을 하나 보았습니다. 거기 철새가 있는데요. 그 철새도 많지만 중요한 건 나비입니다. 나비, 조그만 나비인데 노란 나비인데요. 수백만 마리가 그냥 그 숲에서 저렇게 구름처럼 떼 지어 놀고 있어요. 왜요? 이 나비가 멕시코에서 떠나서 하루 아침에 캐나다까지 날아간답니다. 캐나다까지 날아간다는 거예요. 이게 가다가 쉬어가면서 날아가서 그걸 연구하느라고 두 사람이 일생 동안 했는데도 아직 해답을 얻지 못했다. 이거 신비로운 거예요. 이 나비가 여기서 멕시코까지 어떻게 날아갈 수 있느냐? 또 그다음 해에 다시 돌아온대요. 이거는 본능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예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노예는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노예가 사람을 죽여도 죄가 되질 않습니다. 왜요? 그는 자유가 없으니까. 누군가가 이렇게 하라고 명령했으니까. 이겁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책임질 일을 나에게 전가하고 "나는 책임이 없다" 한다면 그건 인격을 포기하는 겁니다. 사람 됨을 포기하는 상태에 오는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이 뭐냐? 가장 위험한 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럴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할까요? 그 순간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는 순간 인간된 존엄성을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인간임을 부정하는 시간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선택의 여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능력도 있고 지혜도 있습니다.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변명입니다. 그걸 빌미로 "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할까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거는 인간의 인간됨을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전혀 자유가 없이 본능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유물사관 아닙니까? 공산주의 철학의 근본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선택의 책임을 지는 책임자로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들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이 관계가 인간 실존입니다. 멸망하는 자는 언제나 "선택이 없다"고 변명합니다. "선택이 없었다"고 자기 변명을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게 아닙니다.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뭡니까? 끝까지 내 마음에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서부터 자유함의 본능으로 사랑함으로 그 속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책임 내가 지고, 다른 사람의 책임도 내가 집니다. 그게 아가페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환경과 몸에 대해서 "내게는 자유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말을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요새 젊은이들의 세계에 번지는 유행어 같은 말이 있습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본능에 충실하라." "본능에 충실하라."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그리고 책임을 안 지는 겁니다. 여러분, 선택권은 참으로 소중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책임지는 인간, 그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라. 생명을 선택하라." 가만히 생각하면 넌센스 같은 말이에요. 아니, 죽고 싶은 동물이 어디 있어요?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생명을 선택하라"니, 이 얼마나 넌센스 같은 얘기입니까? 그러나 아시겠지만, 보세요. 살기를 원하면서 죽음의 운명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아요. 살기를 원하면서 죽을 짓만 하는 거예요. 살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면 죽는다는 길을 걷고 있어요. 이게 인간의 모순이 아니겠어요?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라."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는 얘기에요. 또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 그것이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다. 생명을 선택하려면 이제는 하나를 선택했으니 나머지는 버려야 됩니다. 버려야 할 것은 우상을 버려야지요, 불신을 버려야지요, 교만을 버려야지요, 거짓을 버려야지요, 게으름을 버려야죠. 생명을 선택하면 생명과 관계되지 못한 것, 생명에 방해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됩니다. 버리지 않고는 참 선택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예수를 따를 수 있어요. 아니, 예수를 따르면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양손에 떡을 쥔 것처럼 둘 다 가지려고 하면 안 되지요. 버려야지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우스운 얘기가 있지요. 어떤 사람이 물어보기를 "밥을 먹겠냐, 떡을 먹겠냐, 술을 먹겠냐?" 그랬더니, 그러니까 하는 말이 "술에 밥 말아" 달라. 그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만... 생명을 선택하기 위해서 생명에 방해되는 것을 버려야 돼요. 여러분 잘 알고 경험하셨지요? 젊었을 때 학교 다니면서 공부할 때, 자,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데 공부하려면 놀지 못하지요. 책상에 앉아 있으려면 밖에 나가지 못하죠. 내가 생명을 선택하는 순간 생명에 방해되는 것을 과감하게 끊고 버려야 된단 말이야. 이걸 못 버리면... 그런데 중요한 건 있어요. 여기서 버려서 얻는 게 아니고 얻어서 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공부가 재미있어요. 공부가 감사해요.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이냐? 공부하는 시간을 스스로 감사하고 즐기고 있으면 이제 밖에 나가 놀 것도 없고 뭐 필요할 게 없어요. 그런데 책상에 앉아 가지고 밖에 나가 노는 생각만 계속하고 있다면 그건 참 불행하죠. 그건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공부 자체를 즐겨야지요. 그걸 행복하게 또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그 공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귀중한 말씀을 우리가 여기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약속하십니다. "생명을 선택하라. 생명을 선택하라." 그리고 "내 말을 들으라. 순종하라." 오다온 말이 감추어져 있어요. "그러면 네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 이 말 아시겠습니까? "나를 선택하라. 내가 네 운명을 책임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했으면 이제 하나님이 책임지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말씀을 따랐으면 부모님이 책임지는 거죠. "진리를 따르라. 그러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할 것이다." 이건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선택하라. 네 운명을 내가 책임진다." "영생을 선택하라.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를 놓고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세요." 그건 내 마음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생명을 선택합니다. 영생을 선택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마음속에 새로운 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다가 체포될 때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대답하십니다. 얼마나 중요합니까? 십자가가 빌라도도, 가야바도 아니에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십자가요. 그렇게 받아들이고 보니까 이게 아들의 아가페,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가 내게 주는 잔이니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하면서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을 선택한 겁니다.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순간입니다. 인천에서 제가 목회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판유리 공장이라고 하는 큰 유리 공장이 있었어요. 근데 그때가 이상하게 돼서 목사님이 그 공장에 사장이 되어서 [음악] 은혜스럽게 이렇게 공장을 운영하고 이제 그런 때인데, 목사님이 어떤 때 한 번 그 사장 되시는 분이 목사님을 불쌍히 여겨서 채용한 경우예요. 키가 조금의 목장밖에 안 되는 난쟁이, 특별히 키가 작아서 아무리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사람이 예수를 잘 믿어요. 열심히 교회 나온 사람이니까 불쌍히 여겨서 또 사랑해서 귀히 보고 직장일을 시켜줬어요. 이 조그마한 사람이 알아서 일을 하는 거예요. 열심히 일을 하고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놓고 점심을 먹는데 아,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거기 거기도 역시 그 공장이니까 좀 불량배들이 있거든요. 깡패들이 또 와 가지고 발로 툭툭 차면서 "야 이 난쟁이야. 이 꼬마야. 무슨 일을 하겠다고 여기에 왔냐? 네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겠냐? 이 공장에서 왜 쓸데없이 너 같은 것도 이 공장에 들어와 있느냐" 이러고 자꾸 괴롭히는 거예요. 그때 이 난쟁이가 한 말이 유명합니다. "이놈들아, 너희들이 난쟁이라고 나를 괴롭히지마는 이런 조롱을 들으면서도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어요. 어떤 경우에도 우리 마음은 자유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자유합니다. 그런고로 자기를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요. 이 자유, 이 선택은 영원한 겁니다. 우리는 이 영적 자유, 무한한 자유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순종하는 자에게 말합니다. "영생을 선택하라. 생명을 선택하라." 주는 대답하십니다. "그러면 네 생명은 내가 책임진다." 영생의 길로 말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라. 그러면 내가 네 책임을 진다." 여러분, 양은 목자를 따릅니다. 양이 목자를 따르면 목자는 양을 책임집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나 자신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택하심을 알고 주의 택하심에 응답하고 주님을 선택할 때 그 운명은 주님이 책임을 지는 거예요. 순간순간 "생명을 선택하라", "영생을 선택하라"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또 선택한 대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이 책임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도 저희들을 주의 집으로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넓고 이 시간도 갈 곳도 많고 할 일도 많지만은 모든 것을 저버리고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할 수 있는 거룩한 예배자의 길을 선택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원컨대 일생을 통해서 생명을 선택하고 영생의 길을 선택하고 주의 말씀을 선택해서 온전히 주의 사랑을 받고 주의 보호함을 받고 주의 보증을 받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요약: 신명기 30장 말씀과 '선택의 기술'에 대한 설교
제시해 주신 글은 신명기 30장 15-20절 말씀을 봉독하고, 이 말씀을 중심으로 **'선택의 중요성'과 '생명을 선택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1. 📖 봉독 말씀: 신명기 30장 15-20절 (생명과 복 vs. 사망과 화)
- 선택의 제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생명과 복 그리고 **사망과 화(저주)**를 두셨음을 선언하십니다.
- 생명과 복의 길 (순종):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 규례,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 결과: 생존하고 번성하며, 차지할 땅에서 복을 받을 것입니다.
- 사망과 화의 길 (불순종):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않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 결과: 반드시 망할 것이며, 차지할 땅에서 날이 길지 못할 것입니다.
- 궁극적인 명령: 하늘과 땅을 증거 삼아,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청종하며, 그를 의지하라) 하십니다.
- 이유: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장수이시기 때문입니다.
2. 💡 설교 주제: 선택의 기술과 인간의 존엄성
설교자는 '바스카우트'의 '선택의 기술'이라는 책을 언급하며, 선택의 중요성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강조합니다.
1. 선택의 중요성과 책임
- 선택의 영향력: 물건 하나, 배우자, 직업 등 우리의 선택에 따라 생활과 운명이 달라지지만, 그 중요성을 종종 잊습니다.
- 과잉 사회의 문제: 현대 사회는 **'과잉 사회'**로, 너무 많은 선택의 여유 때문에 오히려 올바른 선택을 하기 어렵고, 선택 후에도 책임을 지지 않거나 후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 백화점에서 엉뚱한 물건 구매, 미사용 물건 방치).
- 책임지는 선택의 태도:
- 물건/지식/인간관계: 선택했으면 책임 있게 사용하고 관계를 지켜야 합니다.
- '버림의 용기': 하나를 선택했으면 나머지는 과감하게 버리고 잊어야 합니다. 이미 선택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버린 것을 아쉬워하면 현재의 소중함을 잃습니다.
- 선택한 것의 활용: 선택한 바를 잘 지키고 소중히 간직하며, 응용하고 생산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2. 선택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
- 에덴동산의 교훈: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금지하신 것은 "네가 살고 죽는 것을 네가 결정해라"는 엄청난 존엄성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선택하고 그 책임을 지는 고귀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 동물과의 차이: 동물은 본능대로 살 뿐,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예: 사자는 고기만 먹음, 캐나다-멕시코 나비의 이동)
- 가장 위험한 변명: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행위이며, 유물사관/공산주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위험한 태도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 사랑의 본질: 진정한 사랑은 내 마음에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며, 아가페는 다른 사람의 책임까지 내가 지는 것입니다.
- '본능에 충실하라'는 유행어의 위험성: 이 말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부추기는 무서운 말입니다.
3. 생명 선택의 의미 (하나님 말씀 순종)
- '생명을 선택하라'는 역설: 모든 사람은 살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살기를 원하면서 죽음의 운명을 선택하는 모순적인 삶을 삽니다.
- 진정한 생명 선택: 성경에서 **'생명을 선택하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 버려야 할 것: 생명을 선택했으면, 생명에 방해되는 우상, 불신, 교만, 거짓, 게으름 등을 과감하게 끊고 버려야 합니다 (예: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함).
- 기쁨의 선택: 억지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것 자체를 즐기고 감사함으로 누릴 때 (예: 공부 자체를 즐길 때), 버려야 할 것들이 자연스럽게 멀어집니다.
4.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
-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네 운명을 내가 책임진다"고 약속하십니다.
- 예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잔)을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 운명을 책임지셨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인(양)은 그리스도(목자)를 선택하고 따르며, 그 결과 주님께서 그 운명을 책임지십니다 (요 15:16).
- 결론: 우리는 순간순간 생명과 영생의 길을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며, 이 책임은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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