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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성도는 종말론적으로 산다 막1장14-20

by 【고동엽】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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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jrEy1YmjjgQ

◈성숙한 성도는 종말론적으로 산다            막1장14-20        2004.09.26.설교스크랩, 출처

◑도입/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님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1980년대 유행했던 대표적인 ccm이 ‘예수 사랑해요’ 라는 곡이었습니다.

지금도 즐겨 부릅니다. 저도 이 곡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저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고민할 때, 이것은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기가, 어렵다고 생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마치 요즘 우리 시대에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처럼

당시 예수님도 그런 부류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이 될 때는

제가 굉장히 당혹스럽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생각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예수 사랑해요’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저들이 예수님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어보셨지만,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물어본 것이 아니고

우여곡절을 겪고 많이 넘어지고 실패해 보고,

그러고 나서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셨을 때

그 때 비로소 베드로가 책임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교훈은 <종말론적인 기반 위에> 세워졌습니다.

 

(또는 영생의 관점에서, 가르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길게는 50년만 바라볼 줄 밖에 모르는 청중들에게는,

또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까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이, 항상 엇박자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종말론적 믿음’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글을 보면 ‘때가 급하다’ 이런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관점을 우리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믿음>은, 다음 네 가지 분야에서 발견되어 집니다.

 

▲1. 첫째는 예수님의 <가족관>입니다.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독신으로 사셨고 아주 종말론적인 가족관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누가 나의 모친이요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냐

누구든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니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심지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 없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급진적인 사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볼 수 있는 것처럼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을 쫓기 위해서 자기 아버지를 버려두었다 그랬습니다.

 

주님은 결코 불효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인정, 혈연, 이런 것을 끊을 줄 모르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의 자격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2.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의 종말론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물질관>입니다.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셨죠,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는

남에게 빌린 나귀를 타고 입성 하셨죠,

그리고 돌아가신 다음에 남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거의 무소유의 삶을 사셨고, 물욕의 위험에 대해서 늘 경계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한 어부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쫓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3. 세 번째는 예수님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뒤집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혁명가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혁명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회 개혁가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운동을 한다든가, 저항을 한다든가,

대모를 한다든가.. 그런 정치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세상에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고, 세상의 질서를 대체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는,

우리는 구만리 장천에 있는 하늘을 생각하기 전에

세상의 질서와 반대되고, 세상의 질서를 대체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을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역설적인 진리를 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고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자는 잃고, 자기 목숨을 버리면 찾고

이제 배부른 자는 나중에 주리고, 지금 주린 자는 나중에 배부르리라’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세상 질서가 바뀌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질서의 변화는, 이런 전쟁이나 혁명같은

인위적인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질서가 사람이 만든 질서를 대체하는 날이 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4. 네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종교 사회의 제도에 대해서

종말론적인 그런 관점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 이스라엘 종교 제도 속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제도 속에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제도권의 성직자가 아니셨어요.

 

제사장도 아니고, 서기관도 아니고, 율법사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자칭) 랍비 출신이었고

예수님이 스카우트하신 모든 제자들도 제도권 밖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도권 안에서 일하시지 않고, 그 영역 밖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그러므로 교회는 너무 교권주의라든가 종교적인 이득권이라든가

제도라든가 이런 것에 연연하게 되면 그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은 좋지만, 너무 조직과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에 매여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중세 타락했던 교회 모습으로 가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가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제도권 밖에서 새로운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이후로 부흥운동이 잃어 날 때 마다

그 부흥운동은 항상 제도권 밖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그런 결과를 낳습니다.

 

요한웨슬리의 부흥운동도 그랬죠, 오순절 운동도 그랬죠,

그리고 요즘의 성령운동도 제도권, 교단, 이런 영역 밖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관점을 볼 수 있고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성경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예수님이 왜 이런 식으로 사셨는가를

그제야 비로소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종말론적 신앙관>위에서, 말씀하시고, 생활하셨던 것입니다.

 

 

◑종말은 하루아침에 닥치므로,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부딪치는 질문은

예수님은 종말이 임박할 것이라고 가르치셨는데,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래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천년 전의 예수님은 ‘내가 곧 오리라. I'm coming soon’

예수님의 시간관념이 우리의 시간관념과는 달라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이천년은 긴 세월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종말이 임박하다고 전제하시고 이 모든 것을 가르치셨는데

우리가 결과적으로 봤을 때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으니

그 예수님의 (종말론적) 교훈이 과연 유효하냐? 우리가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느냐?

그대로 살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적어도 한번은 고민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얻어야 됩니다.

 

▲제가 처음 1986년에 목사가 되기로 결정을 하고

한번은 미국의 타 주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참석을 해서

제 지갑에 있는 돈을 다 헌금바구니에 집어넣은 적도 있습니다.

이 소유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결혼을 하고 처자식이 생기다 보니까, 돈이 조금은 있어야 되겠더라고요.

무소유의 삶을 독신으로는 살 수 있지만, 그것을 처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무소유로 살 것 같으면 무엇 하러 결혼을 합니까?

여러분 제가 월급 받은 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지만

아마 그러면 집에서 안 들여보내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중의 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는 사람은 집이 있어야 되고

자기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 줄만한 적당한 거리에 집이 있어야 됩니다.

현실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독신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은사 중에 독신의 은사라는 것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은 방언을 달라, 예언을 달라, 병 고치는 은사를 달라, 그러지만

독신의 은사를 달라고 구하는 사람은 아직 제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은사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사를 가진 사람은 적어요.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일부 가톨릭 신부님들이 왜 술을 의존하느냐,

고독하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무도 환영해주는 식구가 없습니다.

아내가 없고 자식이 없습니다. 고독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그 모든 (종말론적인) 말씀을 우리가 결국 타협할 수밖에 없느냐?

인간의 현실 속에 적용하기가 불가능한 한계가 있다는 말씀이냐?

 

▲여러분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이 부분에서 여러분이 귀를 쫑긋 기울여서 들으셔야 됩니다.

 

역사의 종말이 언제 올지 아무로 모르지만

우리개인의 삶을 생각을 해 볼 때

개인도 그렇고, 가문도 그렇고, 기업체도 그렇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말씀에,

우리가 타협하지 말고,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주제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느 기업체에 몸을 담았던 분을 만나 뵀는데

그분의 말씀이 국내 유수한, 굉장히 잘 나가던 건설 회사가

한강 다리가 한번 무너지고 나니까, 그때부터 쇠락하기 시작하는데

그야말로 과거의 영광이 어디 갔느냐 할 정도로 쇠락 하더라.. 고 하셨습니다.

 

개인의 인생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다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우리의 삶과 우리의 누리는

하루아침에 그 영광이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이해할 수도 있고,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적용/ 종말론적 신앙으로 살 때, 내가 성숙해 집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거의 다 죽지요.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몇 년 후에 TV 스페셜을 만들면서, 그를 찾아가서 물어봤습니다.

‘당신이 그때 그 사고를 당한 다음에 변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 그랬더니

많은 것이 변했다고 말하면서,

 

‘내가 죽을 뻔 했다가 사니까, 그 이전에 내가 갖고 살던 고민이나 근심이

굉장히 작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어요.

 

사람이 언제든지, 오늘이라도 당장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재물을 잃어버린 다던가

-소원을 이루지 못한 다던가

-사람에게 욕을 먹는 다던가

-자식이 학교에서 공부를 못한 다던가..

이런 문제들은, 아무 문제도 아니더라는 거예요.

 

과거에는 자식이 학교에서 공부 못하는 것이 속상했는데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나고 보니까,

아들이 건강한 것 만해도 감사하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러한 생각의 변화는, 종말론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뻔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보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면서

과거에 마음속에 복잡하게 고민하던 것들이 정리가 되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과거 대통령 선거 때, 양쪽후보의 참모역할을 하던 두 분의 국회의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서로 정치적으로 정적이죠. 앙숙입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다음에, 이 두 사람이 둘 다 각각 법을 어긴 게 드러나서,

비슷한 시기에 둘 다 감옥에 갔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감옥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이 두 사람은, 감옥 안에서 서로 아주 친해졌다고 합니다.

만나면 서로 손을 잡고 안부를 물어본다고 합니다.

 

(사람이 큰 일을 한 번 치르고 나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같은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이 대범해지고, 마음이 넓어지고, 인격이 성숙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희한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많은 갈등, 미움, 시기, 질투, 이런 것이

더 본래적인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영광, 명예.. 이런 것들 다 잃어버리고 나니까

이제는 동지가 되는 겁니다.

옛날의 적이, 이제는 서로 불쌍히 여기고, 친구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공동체가 더 큰 재앙을 당하기 전에

서로 어울리고 같이 사는 법을 배워야지

이대로 서로 죽이고 서로 욕하고 저주하다가는

더 심한 재앙을 통해서, 이 공동체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실 것입니다.

정신 차려야 됩니다.

 

▲어느 부부가 결혼이 거의 이혼의 문턱까지 갔어요. 그래서 남편이 같이 안 살겠다,

그러고 짐을 싸서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호텔에 방을 잡았습니다.

 

하루는 직장에서 퇴근하고 자기 호텔방으로 돌아와 보니까

욕조에 물이 넘치고 있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목욕탕에 들어가 봤더니

하나밖에 없는 딸이 뭘 끊고, 욕조 안에 누워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아버지가 그 딸을 업고 급히 응급실로 달려가면서

제일 먼저 전화한 사람이 아내입니다.

 

이 부부가 병원 복도에서 마주치는데요, 며칠 전 까지만 해도 같이 못 살겠다 그러고

성격이 다르다, 이러던 사람들이

딸이 위기를 당하니까, 할 말을 잃은 채 부둥켜 안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감으로써

이 부부로 하여금 정신 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성격’이니 ‘매력’이니, 하던 말들이

딸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할 때는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것 때문에 서로 마음상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싸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즉,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상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싸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비슷한 예를 수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만

이런 모든 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람이 종말론적인 경험을 해야 정신을 차리고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때 비로소 철이 듭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앙에 적용하면,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예수님 말씀을 들어야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있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가 영원히 이 혜택을 누릴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라.

그 미련한 부자처럼 되지 말아라.’ 하십니다.

 

그 미련한 부자가 추수를 거두어들인 다음에

내가 수확이 많아서 헛간을 더 늘려야 되겠다. 해서 헛간을 늘렸어요.

창고를 늘리고 거기에 곡식을 가득 채우고,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이제 편안히 먹으며 즐기며 살리라’그랬는데

 

예수님은 ‘미련한 사람아,오늘 내가 너의 생명을 취하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게 종말론적인 교훈 이예요.

 

▲젊은이들은 자기가 늘 젊을 줄로 생각하고

건강한 사람은 자기가 늘 건강할 줄로 생각하고

세상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그게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문을 닫으실 지는, 아무도 몰라요.

(대개의 경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일찍 옵니다.

 

사람이 늙는 것, 병드는 것, 문이 닫히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일찍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 가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비교할 수 있느냐면, 물 위에 떠다니는 도토리와 같아서

그 도토리가 물위에 오래 떠 있어도, 그 안을 깨보면 완전히 건조합니다.

왜냐하면 그 껍데기가 하도 단단해서 물이 스며들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그 껍데기,

즉 자존심, 교만, 인간적인 생각, 자기의 의, 이런 것들이 하도 딱딱해서

그 안에 그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가지 못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껍데기를 깨트립니다.

고난을 통해서, 아픔을 통해서 깨져야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갈 수가 있고,

깨져야 그 속에 있는 향유가 흘러나올 수고 있는 겁니다.

 

들어가기 위해서도 깨져야 되고, 나오기 위해서도 깨져야 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기 위해서도 깨져야 되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오기 위해서도 깨져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깨져야 됩니다.

옥합을 깨뜨리니까 거기서 향유가 흘러나온 것처럼

이 옥합처럼 단단한 나의 완악한 마음을 깨뜨려야

내 안에 있는 성령이 향유처럼 흘러나옵니다. 생명력이 그때부터 역사하는 겁니다.

 

이전엔 아무리 애쓰고 성질부리고 해도 이루지 못한 것을

한번 깨지고 나니까 아주 쉽게 용이하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깨어진 틈을 통해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신학은 많은 종류가 있지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하는 신학이고

둘째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잘 가느냐 하는 신학입니다.

 

첫 번째 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합니다.

소원을 이루는 길, 만사형통 하는 길, 복 받는 길,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만 가르치시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복 받는 길을 가르치신 적이 없어요.

 

오히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지,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복을 받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복이 별로 없다고 생각 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까 복이 있는 겁니다. (후략)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4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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