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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란, 주님 앞에 설 날을 소망하는 삶 요일3:17, 계1:11~12

by 【고동엽】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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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이란, 주님 앞에 설 날을 소망하는 삶        요일3:17, 계1:11~12      설교 녹취

 

◑지금 한국 교회는, ‘천국의 소망’을 상실했습니다.

 

▶‘소망’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소망 중에 가장 큰 소망은,

 

천국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그 소망,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스데반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내가 하늘을 보니 주님이 서 계신다.’

 

 

 

뭐 목회 성공했다고.. 이런 소망을 다 갖는 것은 아니에요.

 

설교 잘 한다고.. 다 천국 소망을 품고 사는 것은 아니에요.

 

 

 

천국 소망을 품고 살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갈 수도 있어요.

 

장차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천국 생활을 하며, 천국 소망을 품고 삽니다.

 

 

 

교인들 중에도, 천국에 갈 사람이 절반뿐일 수도 있어요.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열 명 중에 다섯이에요.

 

열 처녀 중에, 다섯 명만 잔치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못 들어갔잖아요.

 

 

 

또 두 사람이 함께 맷돌 갈다가, 한 사람만 들림 받았잖아요.

 

둘 중에 하나 꼴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님이 일어나게 하신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앉아계시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게 하신 사람입니다.

 

그러니 행복하고, 진정 성공한 사람이지요.

 

우리의 관점이, 그런 분을 성공한 분으로 여기지 않는 게 문제지요.

 

 

 

▶바울의 눈에는 하늘이 보여요.

 

그의 눈에는, 세상이 잘 안보여요.

 

 

 

그래서 늘 천국이 눈에 보이니까, 천국 소망을 갖고 사는 겁니다.

 

사도 바울. 그 분에게 보이는 세상은 ‘배설물이다. 똥이다. 찌꺼기다.’

 

 

 

사실 성경은, 계시록에 보면, 하늘로 끝마쳐요.

 

 

 

‘지금은 이 세상이 너무 좋아요’ 목사부터 그런 말들을 해요.

 

‘집도 좋고, 성공이 좋고, 내가 이룬 왕국이 좋고..’

 

 

 

프랜시스가 그랬나요? 손양원 목사님이 그랬나요? (아무도 안 그랬어요)

 

 

 

이성봉 목사님은, 자기 살던 집도 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큰 집, 큰 자동차, 다 똥이다. 배설물이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저 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

 

이성봉 목사님이 자주 부르셨던 ‘허사가 虛事歌’입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주님의 재림을 얼마나 고대하셨는지요?

 

늘 주님고대가를 부르시면서, 주님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래에 일부 나옴)

 

 

 

그렇다고 세상에 대해서, 세상의 책임을 등한히 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 분들 만큼, 세상에 대해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했는데도.. 궁극적 목표는 천국이에요.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목표와 목적지는

 

모조리 다 이 세상이 되어버렸어요. 세상에서 그저 잘 살자는 것이죠.

 

천국은 따 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아니, 천국이 어서 올까봐 다들 겁내는 눈치입니다. ‘이 세상이 이리도 편한데..’

 

 

 

▶예수님도 성찬식을 하신 다음에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다음에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아버지 집에 거할 것이다.’

 

소망이죠. 소망.

 

이제는 하늘을 바라보아라.

 

 

 

계시록 마지막에도 ‘내가 속히 오리라.’

 

사도행전 1장 9절에는 천사가 ‘이렇게 올라가신 대로 다시 오리라.’

 

 

 

성경의 종착역은 하늘이에요.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내세 소망, 천국 소망을 빠뜨리고 하는 것은,

 

자동차로 치면, 차 바퀴 하나를 빼고서 달리는 것입니다.

 

그게 제대로 갈 수 있겠어요?

 

 

 

▶에녹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365세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셨잖아요.

 

 

 

엘리아는 행복해요. 불수레 타고 올라갔잖아요.

 

모세도 행복해요.

 

가나안 땅 못 들어가는 것이 더 낫죠.

 

그는 가나안 땅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에 하나님이 불러서 천국에 갔어요.

 

어쩌면 더 나은 섭리였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온유함이 땅에 있는 사람보다 승하니까

 

천사를 보내서, 그 시신을 천국으로 가져와요.

 

 

 

세상에서는 거지 생활을 한 나사로도 행복한 사람이죠.

 

아버지 집에 못 갈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세상에, 부흥사 중에, 설교자 중에 못 갈 사람이 많이 있다고

 

마7장에 예수님이 그랬으니까요. 그러니 나사로가 더 행복한 사람이죠.

 

 

 

▶아버지 집을 사모할 수 있는 그 은혜. 오늘 그것을 회복하기 원해요.

 

아버지 집을 사모할 수 있는 그 마음. 그게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죠.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부자 되세요. 성공하세요.’ 그 말 안 했어요.

 

대신에 ‘주님 다시 오십니다. 마라나타. 주님 다시 오십니다.’ 그래서 세상을 뒤집어 놓죠.

 

 

 

경제력이 아니에요. 군사력이 아니에요.

 

로마 제국을 군사력으로 뒤집어 놓지 않았어요.

 

‘주님 다시 오십니다!’ 재림 신앙이었어요.

 

 

 

폴리캅처럼 “주님, 주님” 그러면서 순교하니까

 

그게 확 서머나 도시에 감동을 주었지요.

 

 

 

페르펙추아 여인은 주후 203년에 카르타고에서.

 

젊은 여인이 자기가 낳은 사랑하는 아기를 놓고, 아버지를 두고

 

‘한 병에 두 가지 종류의 꽃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내 몸에 주님이 있는데, 내가 이방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렇게 천국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순교의 재물이 되니까.. 카르타고 도시가 변하죠.

 

그 천국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에게 칭찬을 받지요. 예수님의 칭찬을 받지요.

 

‘너희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구나. 사랑의 수고가 있구나. 소망의 인내가 있구나.

 

(이런 교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믿음의 소문이 온 세상에 퍼져있다.

 

너희 사랑의 수고가 온 세상에 퍼져있다.

 

너희야말로 소망의 인내로 가득하다.’ 살전1장

 

이렇게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보시면, 재림에 대한 신앙. 소망이 가득 나와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지금, 천국에 대한 소망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십 수 년 전에, 제가 어느 목사님과 전화를 걸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국 교회에 가장 큰 문제가 뭡니까?’

 

‘재림 신앙을 상실한 것이죠.’

 

 

 

목사의 설교에도 없고, 그의 삶에도 없죠.

 

 

 

사도요한은 ‘내가 보니..’

 

그의 눈에는 천국만 보여요. 가장 행복한 사람이죠.

 

 

 

돈만 보이고 집만 보이면 불행하죠. 천국을 자꾸 생각해야지요.

 

이렇게 살아 움직이면서도 천국을 생각하고, 꿈을 꾸면서도 천국을 생각하고..

 

밧모 섬의 사도 요한처럼 말입니다. 계1:11~12

 

 

 

▶저는 참 부족한데, 저는 비교적 일찍부터 천국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아버지 김관주 목사께서 제가 어릴 때 순교하셨으니까,

 

또한 위로 제 어머니가 먼저 천국에 가셨으니까,

 

또한 아래로 제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갔으니까,

 

그게 전부 연결이 되요. 그래서 제가 천국을 사랑하게 되었죠.

 

 

 

그 외에도, 제가 사랑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먼저 천국에 가셨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한경직, 이성봉, 박윤선, 이중표 목사님 등

 

그렇게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던 분들. 그분들이 천국에 먼저 가셨으니까,

 

그러니까 저도 자꾸 천국을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내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내 모습이 어떨까?’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런 글도 써보죠. (아래에 나옴)

 

 

 

▶그에 앞서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해요.

 

제가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글을 썼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람, 소망의 사람이에요.

 

하늘에 대한 순수한 진지한 소망을 지니고 산 사람이에요.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던 손양원 목사님,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하늘을 보면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지니면서

 

모든 박해와 고통을 이겨내셨습니다.’

 

 

 

사실 몰트만 교수가 그랬어요.

 

‘천국에 대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세상을 다 이긴다!’

 

그게 없으면, 이 세상 삶이 흔들려요.

 

 

 

바울도 그랬어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당당히 선포했어요.

 

‘우리에게 이생뿐이면 내세가 없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다.

 

이게 (천국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긴다. 사망아, 네 까짓 게 뭐냐?’

 

 

 

죽음은 아버지 집으로 가는 계단이니까

 

부족하지만 십자가를 붙잡고, 그 계단을 올라가서 아버지 집으로 가니까

 

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면, 두려움이 없어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극심한 박해도 이기죠.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이 일제의 모진 박해를 이기신 것도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어요.

 

 

 

‘내가 천국에 가서도 조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겠다.’

 

그것(천국 소망) 없다면, 안 되죠. (못 이기죠.)

 

 

 

손양원 목사님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에 안일에 메이지 않았고, 천국과 내세에만 붙잡혀 있었어요.

 

 

 

이 세상의 재물과 명예,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지금 일부 목사들의 눈에는 재물, 명예, 큰 집, 큰 교회 이런 것들이 보이죠.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고 해요.

 

 

 

평안, 명예, 티끌만큼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고대가’를 불렀어요.

 

 

 

나환자들을 자기 자녀보다 더 뜨겁게 사랑하면서

 

그들의 피고름을 빨아주면서, 그러면서 늘 '고대가'를 불러요.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 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따님 손동희 권사는,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의 신앙을,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가끔 안수 기도를 해달라고 찾아오는 병자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특별히 병 고침을 위한 안수 기도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육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들면 어떻습니까. 병신이면 또 어떻습니까.

 

잠깐의 나그네의 세상에서, 병신으로 살다가 천국에 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다고요.’ 이런 말로 병자들을 돌려보낼 뿐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과 평생을 함께 하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지만

 

그들의 병든 상태를, 나쁘다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을,

 

제 김명혁 목사가 그 분 탄신 100주년 때 주제 강연을 했는데

 

오직 천국만 바라보아요. 한 마디로 ‘천국 소망 신앙’이었어요.

 

 

 

밤에 자다가 옆 집 방앗간에서 방아 찧는 소리만 들려도.

 

혹시나 주님이 오시는가 하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해서

 

이런 설교를 하도 많이 들었어요.

 

 

 

‘(무슨 소리만 나도) 바깥에 나간데요. 하늘을 보신대요. 주님 지금 오십니까?’

 

 

 

너무 단순하죠. 너무 어린 아이 같죠. 그런데 그렇게 사셨어요.

 

‘주님이 오시지 않나?’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고는 했다는 간증을

 

나는 중학교 때,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해서 정말 많이 들었어요.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것뿐이다.

 

세상은 무상하다. 허무하다.’

 

 

 

이성봉 목사님 만큼 전도를 많이 하고, 개척교회를 많이 세우고

 

그만큼 주님의 일을 많이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늘 천국을 바라보셨어요.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최대의 계획이요. 성도의 최대의 소망이다.

 

만물이 고대하는 소망이요. 마귀를 진멸하고,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의 눈물을 씻어주고, 당신의 신부들을 영접하는 주님의 날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 선배들은 이렇게 천국을 사모하고 바라보면서 살았는데요..

 

지금 우리들과 너무 다르잖아요!

 

 

 

 

 

◑나의 천국 소망

 

 

 

제가 작년 8월 31일 날 천국을 바라보면서 썼던 글 하나를, 여러분께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마 우리 선배들이 저에게 천국 신앙의 부스러기를 심어주어서

 

아마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된 것 같아요.

 

 

 

▶내가 앞으로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서, 주님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이 어떨까?

 

 

 

한 번 생각을 해봐요. 사도바울은 늘 그래요. 고린도전서 4장에 봐요.

 

‘지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나.. 그게 아니라, 그 날에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그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지금 사람의 판단, 심지어 내 판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명해 져서 신문에 나고.. 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그것으로 늘 살고 있다고 사도바울이 그래요.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내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면. 내 공로는 설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아버지의 집 앞에 설 수 있다면 내가 어떨까.

 

기뻐 뛰는 모습일까. 소리 지르며 감사 찬양을 드리는 모습일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 했습니다.

 

 

 

소리 없이 흐느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죄송하고 부끄럽고 고마워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는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평생 사는 동안 주님 위해서 산다고 떠들었지만

 

사실은 불순종과 정욕과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했던 것을 되돌아보면서

 

얼굴도 들 수 없고, 입도 열 수 없어서, 그저 고개를 떨구고

 

흐느껴 우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주님의 입에서 토해내지 않으시고

 

한 평생 붙드시며 사랑하셨을까요.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너무 부끄럽고 죄송하고 너무 고마워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는 그 모습이

 

주님 앞에 섰을 때의, 나의 (첫 번째)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인이

 

눈물을 쏟으며 그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셨듯이

 

나도 그런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게 첫 번째 제 모습이에요)

 

 

 

▶그 다음 두 번째 모습이에요. 저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이제는 감사에 무릎을 꿇는 것이에요.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길선주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등 신앙의 선배들 앞에서.

 

 

 

사실 내가 나 된 것은

 

주일 학교 선생님들부터, 이런 분들 때문에

 

내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여기 왔구나.

 

그 분들 앞에 한 분 한 분 앞에 무릎 꿇고 감사의 말을 드리는

 

내 모습을 생각해 보았어요.

 

 

 

신앙의 선배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고 또 표시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내가 지옥의 형벌에 떨어지지 않고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오게 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와 은혜와 사랑 때문이지만

 

둘째는 신앙의 선배들이 나의 몸과 영혼에 심어준

 

회개와 믿음과 눈물과 사랑의 씨앗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모습을 또 생각해보았어요.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해보았어요.

 

저는 또 하나의 저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답게 사랑하시던 어머니를 붙잡고

 

아마 제가 오늘 이렇게 된 것은, 어머니의 사랑의 뜨거운 눈물 때문이라고 생각 하니까요.

 

 

 

제가 열한 살 때 어머니와 이별하고, 아버지와 이별하고,

 

아버지가 순교하시기까지,

 

아마 하늘에 가셔서 까지도, 이 부정한 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셨겠죠.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못 뵌) 어머니도 평생 기도하셨겠죠.

 

 

 

어머니를 붙잡고, 나를 슬프고도 아름답게 사랑하시던 어머니를 붙잡고

 

뜨거운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제 모습을 그려봅니다.

 

손이라도 한 번 꽉 쥐어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에게

 

제 두 팔과 두 손과 온 몸을 안겨드리면서

 

뜨거운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를 바라보시는 나의 아버지 품에

 

힘껏 안겨드리는 그런 모습입니다.

 

 

 

믿음의 길, 충성의 길, 순교의 길을

 

몸으로 보여주신 나의 아버지 품에, 제가 힘껏 안겨서

 

사랑과 존경과 고마움을 속삭여드리는.. 제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내가 너무나 슬프고도 아프게 사랑하던 어린 아들 철원이를 품에 안고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고 속삭이는 모습입니다. (일찍 소천했음)

 

 

 

▶그리고 저는 또 하나의 저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성도들을 만나서

 

너무 너무 반가워하고 행복해하는 저의 모습입니다.

 

 

 

나의 부정한 전도와 목회와 선교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사랑하고 섬기게 된 수 많은 성도들,

 

부정한 나에게 눈물과 기도와 사랑을 쏟아 바친 수많은 성도들.

 

 

 

내가 목회했던 강변 교회의 성도들을 비롯한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 집으로 올라와서

 

다시 만나게 된 수많은 성도들을 만나서, 너무 너무 반가워하는,

 

행복해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부끄러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다가

 

너무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면서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지혜와 권능과 위대하심을, 무릎을 꿇고 두 손 높이 들어

 

찬양하고 또 찬양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2008년 8월 31일. 김명혁 씀.

 

 

 

▶제가 하루 저녁 쓴 것뿐만 아니라,

 

저의 평소 삶의 솔직한 고민은

 

 

 

‘내가 주님 앞에 바로 서야 될 텐데..

 

혹시 내가 전도하다가 버림이 되지는 않을까.

 

내 이름 나타내다가. 내가 잘났다고 나타내다가.

 

마태복음 7장에 나타난 그런 자는 되지 않을까?’입니다.

 

 

 

사실은 제가 그게 상당히 제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 몽둥이로 쳐 주시던지. 조금 더 낮아지고 조금 더 울고, 조금 더 제물 되고

 

그러다가 주님 앞에 가서 조금이라도 더 바로 설 수 없습니까.’

 

아마 그게 이제 나이가 많이 들은 제 마지막 간절한 문제에요.

 

 

 

 

 

◑결론적인 말씀을 드려요. 천국을 사모하고 준비하라고 했어요.

 

그럼 실제적으로, 어떻게 준비할까요?

 

 

 

▶1. 물질의 준비.

 

너무 이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 안 돼요.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나를 위해서 다 버린 자는

 

이 세상에서도 저기에서도 복을 받는다.

 

 

 

버리는 것. 떠나는 것입니다.

 

‘네 보물을 여기 쌓아두지 말라. 하늘에 쌓아두라.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

 

이게 천국 가는, 실제적인 준비에요.

 

 

 

그저 아무도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고, 오직 나만 위해서 살면 안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그 부자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버리지요. 배도 버리고 다 버리지요.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지요.

 

천국을 준비할 수 있는 하나는..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시스는 다 버렸어요.

 

한경직 목사님, 장기려 박사님도 다 버렸어요.

 

‘이것을 너무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성경에 버리라고 했으니까요.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사도바울도 ‘내가 재물을 허비한다. 나는 내 몸을 버린다.’

 

‘피까지 버릴 수 있다면 더 좋겠다’고 했지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네 집에 쌓아두지 말라.’

 

이인구 박사님이 그러지요.

 

 

 

또 사도 요한도 그랬어요.

 

‘굶주린 자가 있는데, 도와줄 마음이 없으면 이것은 가짜 사랑이다.’ 요일3:17

 

 

 

▶2. 부르심을 받으면.. 집도 떠나고 버려야 해요.

 

여기 이 세상에 늘 너무 집착해 있는 것도 문제에요.

 

 

 

해외여행은 관광으로 다니는게 아니에요. 관광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그들과 함께 지내고, 중국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고

 

북한에 갈 수 있으면, 가서 그들과 함께 지내고..

 

 

 

여기가 우리 고향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친척집을 떠났듯이, 사도들이 자기 집 다 떠났고,

 

모두가 다 떠나요. 버리고 떠나는 것.

 

그것이 천국을 준비하는 방식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모두 버리고 모두 떠난 사람이에요.

 

재산도, 평안도, 향락도 다,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도 다 모두 버렸어요.

 

청빈과 약함의 삶을 살아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고 말해요.

 

 

 

완전 무소유. 장기려 박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완전 무소유. 버림.

 

그것이 천국을 준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 마지막에는 자기 집 하나 있었어요. 그것을 팔아버렸어요.

 

‘저 가난한 개척교회에 줘라.’

 

그 사모님과 딸들은 조금 싫어했겠지요.

 

 

 

현신애 권사님.

 

하루는 꿈을 꾸어서 천국에 가보았더니, 자기 집은 아무 것도 없더래요.

 

그래서 꿈 깨고나서 다 버렸어요.

 

너무 뭐 율법적으로 할 필요는 없지만, 예수님이 버리라고 했으니까,

 

아브라함부터 버렸으니까요.

 

 

 

모세의 삶, 120년 삶.

 

첫째 40년, 둘째 40년, 셋째 40년. 셋 다 버리는 거예요.

 

첫째 40년은 부모를 버리죠.

 

둘째는 바로 공주와 애굽 궁궐의 영화를 버리죠.

 

셋째 마지막 40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다고도 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을 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건져주셨어요.

 

 

 

이것은 버림과 떠남의 아주 클라이맥스 한 그 삶이에요.

 

그러니까 천국으로 쏙 쏙 올라갔죠. 다 버렸으니까요.

 

가나안도 버리고, 다 버려요.

 

 

 

버릴 수 있다는 것.. 그제야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프란시스가 그랬고, 한경직 목사님이 그랬어요.

 

자신의 학문도, 명예도, 안일도, 부귀도 다 버렸어요.

 

 

 

그래서 한국의 프란시스가 되요. 바보처럼 한 평생을 살아요.

 

재산도 통장도 집도 아무것도 없어요. 집도 없어요.

 

 

 

한경직 목사님도 은퇴하신 이후에,

 

남한산성에서 15평 작은 집 가지고 26년 동안 살아요.

 

민족주의, 국가주의도 버려요.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라고 해요.

 

 

 

장기려 박사님도 다 버려요. 작은 예수가 되요. 집도 없어요. 통장도 없어요.

 

가족도 없어요. 사모님도 어떤 의미로 버렸어요.

 

그러나 그 사랑은 지극하죠.

 

북한에 남겨둔 그 사모님에 대한 사랑의 간절함.

 

‘우린 천국에서 만난다.’ 세상의 것은 다 버려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한국의 작은 예수. 그는 큰 건물을 보면 사탄이 생각난다고 그랬어요.

 

교회 큰 건물을 봐도 사탄이 생각난다고 그랬어요.

 

자꾸 버리는 사람이 그렇게 되요. 그게 천국과 가깝지요.

 

 

 

1975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밀턴의 <실락원>을 읽어보면, 마귀는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 되어 있다.

 

이것을 읽은 뒤로는 고층 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되었다.

 

마귀를 연상하게 된다.” (그분은 성자기 때문에 그 분의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해요.)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신 진정한 선물인가.”

 

 

 

그러니까 다 버려요. 어떻게 그럴까요?

 

그 분들이 우리의 선배들이에요. 한경직 목사님, 장기려 박사님.

 

 

 

‘아무리 둘러보아도 목사님 같은 목자는 하나도 없어서 슬픕니다.’

 

고훈 목사님이 그런 통곡을 했죠.

 

 

 

어떻게 그분들께는, 그렇게 천국만 보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큰 집을 보면 축복이다. 고층 건물을 보면 축복이다. 그러는데

 

장기려 박사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어요. 천국만 바라보아요.

 

그 분이 8천 명을 무료로 진료를 해 드렸어요.

 

수많은 사람들은 진료를 해요.

 

 

 

그러나 세상에 대한 것 소유는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그럴까요.

 

천국 때문이에요.

 

 

 

▶3. 천국 신앙.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길선주 목사님은 계시록만 강의를 했어요.

 

오직 천국, 천국이에요.

 

한국 교회에 아버지에요. 그래서 비판도 받았죠.

 

그러나 그 분은 옳았어요. 우리가 틀렸죠.

 

 

 

천국 신앙. 천국을 사모하고 준비하는 삶은

 

버림과 떠남의 삶이에요. 우리의 본능과는 정 반대에요.

 

그런데 주님이 그러시니까요.

 

 

 

하늘 영광 떠나서, 이 땅에 연약한 아기로 오셨죠.

 

"하늘의 영광은 가리워졌고 이 세상에 오셨다.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신 하나님.

 

이것은 섬김의 왕으로 오신 주님이시다." (찬양 가사)

 

 

 

본인이 버리셨거든요. 떠났거든요. 떠나고 버리는 것.

 

 

 

저도 그렇게 될 수 없어요.

 

없으나.. 소원을 하기 때문에, 천국은 점점 가까워지기 때문에,

 

천국을 준비해야 되기 때문에, 버려야 되기 때문에,

 

조금 더 나누어야 되기 때문에, 애착하던 것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좋아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우리 선배들, 흔히 로마시대 초대 교회도 다 그런 천국 신앙으로 살았어요,

 

성경 자체가, 그 결론과 종착역은 천국이에요. 천국 신앙이에요.

 

예수님이 천국을 바라보라고 했어요.

 

지금은 천국 신앙이 없어진 때가 아닐까.

 

‘인자가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그랬어요.

 

‘인자가 올 때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랬어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적인 교회에요. 부족한 것이 없어요.

 

서머나 교회만 죽도록 충성하면서 천국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155년 경. 그때 그 감독이 폴리캅이었어요.

 

폴리캅이 서머나에서 순교함으로써 초대교회에 가장 아름다운 재물이 되요.

 

 

 

천국의 소망이 분명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죠. 오히려 죽음을 사모하게 되죠.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처럼.

 

 

 

너무 병적으로 그러라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늘 극단적이 되요.

 

어떨 때는 병적으로 ‘나 잡아 죽이시오.’ 그러고

 

경찰에게 군인에게 가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건 잘못이죠.

 

 

 

폴리캅이 그랬어요. '그렇게는 하지 말라.' 그러나 사모할 수는 있어요.

 

‘나도 재물이 될 수는 없습니까. 내 죄를 조금 속할 수 있는,

 

그래도 재물이 되면, 죄를 조금 속할 수는 없습니까’

 

 

 

'주님에게로 갈 때, 조금 덜 부끄러울 수는 없습니까.'

 

그래서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고 있는데

 

여러분들도 바른 믿음, 용서의 사랑,

 

 

 

천국을 사모하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멋지게 사시다가

 

주님의 칭찬을 받으시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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