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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중에 부르는 소망의 노래 (시편 143:1-6)

by 【고동엽】 2022. 8. 26.

 절망중에 부르는 소망의 노래   (시편 143:1-6)


말이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여덞살 짜리 소녀가 유괴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틀만에 소녀가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덞살 짜리 소녀가 비상한 용기를 발휘했다 할까요. 유괴를 당하면 아마도 공포에 질려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 텐데 이 아이는 정신을 차리고 오히려 유괴범들을 당황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얘, 네 아버지와 엄마를 우리가 잘 알아." 그러니깐 "우리 아빠, 엄마 이름 대보세요." 그랬답니다. 그러니까 유괴범들이 당황한 것입니다. 그리고 배고프다고 빵 달라, 우유 달라 하며 챙겨먹을 것 다 먹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유괴범들이 돈을 몇 차례 요구하다가 1차 접촉에 실패를 하고 아무리 보아도 경찰이 추적하는 눈치를 느끼고 광명에서 이 아이를 풀어준 것입니다. 이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데 택시를 하나 불러서 "아저씨, 강남으로 가주세요"라며 압구정동 자기 집으로 거뜬히 찾아왔습니다. 집에 들어가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야단법석입니다. 그러니까 이 애가 하는 말이 "제가 어린앤 줄 아세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나면 이제는 강남으로 보내야 되는가 보다' 이런 생각이 나더라고요. 경찰도 놀라고 유괴범도 놀라고 기자도 놀란 것입니다. 이 아이는 유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이렇게 잘 구출을 받았습니다.

      절망의 노래

     오늘 본문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나이다."
     이 시를 쓴 사람이 다윗이라고 기록을 했는데 시를 읽을 때 여기 표현된 내용보다도 이 시를 쓴 분의 인품과 사상과 신앙과 생애를 함께 보면서 이 시를 봐야 합니다. 우리가 윤동주의 「서시」를 읽을 때에는 윤동주라는 사람의 생애와 사상을 언제나 새기면서 그 시를 보는 것입니다. 윤동주의 서시를 읽으면서 이순신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난중일기를 보면서 을지문덕을 생각해도 안됩니다.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이순신의 생애와 사상을 염두해 두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시를 쓴 다윗을 알지 못하면 시가 말하고 있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고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참담하다는 것은 절망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다윗이 절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참담한 위기를 일생 중에 겪을 때가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참담했으면 이런 시를 쓰겠습니까? 앞부분에도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인간을 쳐다보아도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원수가 내 생명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지 오랜 자 같이 흑암 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동서 사방을 훑어보아도 어제를 보아도 오늘을 보아도 내일을 기약해도 다윗은 참담한 현실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망의 노래

     그러나 이 시가 4절까지만 있다면 절망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5, 6절을 우리 앞에 함께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절망가운데 처하여 있으면서도 5, 6절을 통하여서 소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절망은 패망하는 절망이 아니라 소망스러운 절망입니다. 소망을 향하여 나아가는 절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노래한 이 내용을 잠시 보면 "내가 옛날을 기약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참담한 좌절 가운데 빠질 때에 먼저 하나님 앞에 가져야 되는 신앙고백은 옛날 주님의 행사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고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한다는 고백은 옛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우리가 오늘 좌절에 빠져도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옛날의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주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합니다.
     "주의 모든 행사신 것을 생각한다"
는 것은 주님이 행하신 손길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던 이 말씀을 먼저 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이끌어내신 여호와 하나님이니라."
     모세의 입을 통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을 줄 때마다 이것을 늘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베푼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절망에 처했지만 과거를 살아온 삶의 발자취에는 주님의 은혜의 손길이 넘쳐났던 것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망의 밭에 소망의 나무를

     시편 137편 5, 6절에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치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네 혀가 네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모든 은혜를 잊지 않아야만 오늘의 참담함에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참담함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의 출발점이 오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보면 참담한 것 밖에 없지만 지난날에 주님이 베풀어 주셨던 그 은혜를 붙잡고 우리가 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절망의 밭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나무를 심으라는 것입니다. 그 나무가 바로 소망의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거기에 연결시켜야 합니다. 지금 내가 망하게 됐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주셨던 그 섭리의 나무를 거기에다 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나무는 우리의 절망의 영양분을 먹고 더 건강하게 자랍니다. 우리가 힘들 때에 하나님의 손길을 제외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거기에 연결을 시켜야 합니다. 다윗처럼 "내가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그렇지만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여호와께서 내게 행하신 모든 것을 생각하나이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6절이 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라는 것은 상당히 시적입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편다는 것은 두 가지 신앙고백입니다.
     첫째는 절대 신뢰의 서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는 하나님 앞에 항복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이제는 하나님을 주로 섬기겠습니다 라는 항복의 선언입니다.
     둘째로 손을 편다는 것은 빈손을 말합니다. 미국에 「다이 브로커」라는 운동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빈손으로 가자는 운동입니다. 우리나라의 「유산 안남기기」그런 것과 같은 운동입니다. 손을 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맹세입니다. 이게 바로 다윗이 시적으로 하나님 앞에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당신을 나의 주로 섬기겠습니다. 당신을 절대 신뢰하며 절대 충성하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기도와 서원이 절망 가운데서 일어나야 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우리는 이제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윗을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인가? 성경에 그를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보고 이새의 집으로 가라. 거기서 내가 왕을 선택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고 이새의 집에 몇째 아들을 왕으로 택하여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을 안 하시고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 아들 중에 한 왕을 예언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갔습니다. 그 집에 가보니 아들이 여덟 명입니다. 큰 아들부터 보게 되었는데 사무엘이 그 집 큰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주 준수합니다. 이 아들이 선지자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입니다.
     다윗은 어느 정도 잘난 사람인지 모르지만 성경에 그 용모가 뛰어나다는 표현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윗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을 생각도 안 했습니다. 지금 집안에 있는 아들들을 보니까 다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기름을 붓고 싶을 정도로 다 자격이 되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런 말씀 주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집에 있는 일곱 명의 아들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새를 보고 아들이 더 있느냐? 내 저 들판에 양을 지키는 막내가 있습니다. 그를 데리고 사무엘 앞에 섰을 때 "이가 그니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삼상16:12)." 그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중심이 좋아야

     얼굴 잘 생긴 사람들은 감사하고 살아야 됩니다. 얼굴 잘 생긴 사람이 이 가운데도 더러 계십니다. 얼굴이 잘 생기면 첫인상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게 보통 복입니까? 그러니까 감사하고 살아야 됩니다. 얼굴 잘생긴 것은 첫인상에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두 번 만나 보고 세 번 만나 보고 함께 사귀어 보고 함께 일해 보면 얼굴은 도움이 안됩니다.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아십니까? 중심이 도움이 됩니다. 그 사람 인상도 좋았는데 참 속도 좋네. 그 사람 처음에 별로였는데 만나볼수록 참 속이 좋네. 진짜 진국이네. 정말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오. 저 사람에게 저런 숨은 장점이 있었구나.
     여러분, 결혼을 할 때는 외모를 반드시 중시해야 됩니다. 그것을 중시 안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어떤 여성이 우리 남편은 나만 제일 예쁜 여자로 생각하고 산다며 아무리 예쁜 여자가 지나가도 눈을 저절로 감는다 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남자입니까? 남자가 아닙니다. 여러분, 외모는 한번 만날 때 첫인상에 도움을 주는 것 그 이상 아닙니다. 계속 좋으려면 속이 좋아야 됩니다. 속이 안좋은 사람은 별 볼일 없습니다. 볼수록 자유스럽고 부담없는 사람과 같이 부부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여기 부부로 오래 사신 분들이 계시지만 365일, 10년, 20년 용모 따져가면서 그렇게 살았습니까? 살아보니까 속밖에 없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마음이 합해져야 됩니다. 마음이 이런 다윗을 알고 이 시를 봐야 됩니다. 다윗을 모르면 다윗의 시를 모르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을 죽인 전과가 있는 사람입니다. 간음한 사람입니다. 자기 부하의 한 가정을 하루 아침에 파괴시킨 가정파괴범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무엇을 우리 앞에 가르쳐줍니까? 다윗은 큰 범죄에 빠지는 순간에도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넘어진 직후에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느냐. 향하지 않느냐, 그 차이 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살인과 간음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중심의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다윗의 회개기도를 보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1-12)."
라고 했습니다. 이 회개 기도를 보면 자기는 이미 넘어졌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지는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장난치다가 아버지가 아끼는 도자기를 깼습니다. 이 개구쟁이 아들이 만지다가 이것을 깼다고 큰일났다 하지만 이 아들의 마음 한 가운데 내가 아버지께 벌을 받겠지만 이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신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맺는 말

     다윗은 평소에도 모든 경우에 다윗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점을 다윗에게서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노숙자들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우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내 인생이 이게 무슨 꼴이냐 그것이겠죠. 여러분, 그 절망의 사람들. 술잔을 기울이면서 그 지하도 바닥에 앉아서 울고있는 그런 자리에 떨어져 있어도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26억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중심이 하나님을 향할 줄 모르면 그것을 우리가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예수를 믿어갈수록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외형가지고 한번은 호감주지만 영원히 호감을 주는 것은 중심입니다. 외모도 좋지만 속도 좋다는 소리를 듣기 바랍니다. 외모는 좋은데 속은 별로다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외형이 아닙니다. 외형도 아닌데 속도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외모가 출중했던 형님들을 택하지 않고 중심을 보고 다윗을 택했습니다. 그와 같은 중심을 가진 다윗은 절망에서도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에게 소망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을 안 겪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밭에 하나님의 섭리의 나무를 심고 우리의 중심이 여호와를 향하여 변함없이 주를 사모해야 합니다. 거기에 소망의 노래가 있고 소망의 삶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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