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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의 심판 P1 히9:27, 갈6:7

by 【고동엽】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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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Uf3xGUbK4bQ

죽음 이후의 심판 P1             9:27, 6:7      영어 녹취록       출처,  

Life after Death: Judgment by David Pawson           

 

시작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만약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면, 우리는 이 아침에 기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다보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의심하게 하는 일들이 있고,

앞으로 닥칠 영원한 미래가 우리에게 두려울 때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오늘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믿음으로,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며, 원수들을 그 발아래 모두 밟으실 때까지

계속 다스리심을 믿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인줄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무덤을 정복하시고, 이기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 각자의 무덤도 정복하시고,

사망의 권세 잡은 마귀도 죽이실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장래의 소망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도 들리지 않고,

또 우리 마음에 실감나게 그게 믿어지지도 않을 때도 있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모든 승리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을 넓게 열고,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게 하옵소서.

혹시나 내가 용납하기 싫은 내용이 있더라도, 그 사실을 제가 직면하게 하옵시고,

최악의 상황과 최선의 상황을 동시에 보면서, 우리 자신의 미래를 잘 준비하게 하옵소서.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죽음 이후 시리즈설교를 통해서,

우리 각자가, 죽음 이후에 닥칠 내 미래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하시고,

우리가 영원의 시간 속에서, 천국과 지옥 중에 어디에서 살 것인지를, 지금 미리 생각해 보게 하소서.

 

이런 나의 미래를 생각해보면서, 오늘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도록,

성령님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우리를 도우소서.

오늘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가 얻을 영원한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음도 알게 하소서.

 

오늘 우리 삶에 많은 의문이 있고,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있지만,

그 모든 딜레마 역시, 장차 우리가 얻게 될 은총과 족히 비교될 수 없음을 믿으면서,

현실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가 잘 살뿐 아니라, 잘 죽게 하옵소서.

남은 일생, 우리의 죽음을 잘 준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먼저 겪으시고,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영생의 길을 예비해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은혜에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9:27절에 이렇게 증거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정해진, 두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수첩에 미리 기록해 둘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약속은 분명히 정해져 있는데, 그 날짜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첫 번째 약속은 우리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약속된 날을, 수첩에 미리 기록해 두고서,

그 날을 준비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잘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거의 없죠.

언제 죽을지 모르므로, 다들 자기가 죽을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당장 내일 죽을 사람도, 그 바로 전 날에도 그걸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사실, 자기 죽음의 날을 모르고 산다는 게,

우리에게 오히려 축복이고 은총일 수 있습니다.

늘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 정확한 날짜는 모르는 게 어쩌면 축복입니다.

 

2)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정해진 두 번째 약속은

그것도 마찬가지로 그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9:27

 

모든 사람들은, 첫 번째 약속이 있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런데 두 번째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심판을 모르는 사람, 죽음 밖에 모르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다가.. 때가 되면 죽겠다하며 살죠.

 

사실 오늘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해서, 전혀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막연히 내가 믿으니까, 천국에 갈 거야!’하면서,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심판!> 이 주제는 그리 유쾌한 내용은 아닙니다.

사실 목회자들이 사후 영생에 관한 주제로 설교할 때도,

천국에 대해서, 그 아름답고 신나는 주제로 설교하기 쉽죠.

 

누가 심판에 대해서, 이런 두렵고 생각하기 싫은 주제로, 설교하고 싶어하겠습니까.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양면의 균형을 가지는 것이 좋죠.

결국 우리 영혼에, 그게 유익한 줄 믿습니다.

 

 

◑심판, 심판의 날의 당위성

 

<심판>과 관련해서,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기 원하는데요.

한 가지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심판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성실히 산 사람과, 제 멋대로 산 사람을 구별해 내는 심판이 만약 없다면,

그게 과연 좋은 것일까요?

 

심판을 받아서 벌을 받아서 안 좋을 사람도 있겠지만,

심판을 받아서 상과 칭찬을 받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상과 보상을 주기 위해서라도, 심판은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불합리하고,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 일들이 많은데,

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 가운데는

악하게 살지만, 잘 사는 사람이 있고,

선하게 살지만, 고통 중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최후 심판이 없다면,

그냥 악인이 이 세상에서 악하고 풍요롭게 살다가,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영원히 그게 묻혀버린다면..

반대로 의인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살다가, 그것으로 영원히 끝나버린다면..

즉 심판이 없다면, 그게 과연 좋은 것이기만 한 것일까요? 아니죠.

 

그것보다는, 심판을 받아서, 뭔가 공평하고 공정하게 가려지는 그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정의가 실종되어 뭔가가 정직하게 가려지지 않았지만,

심판이 있어서, 그런 일들도 정직하게 가려지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정직하게 못하게 굴러가는 일들이 많거든요.

또 무고히 억울하게 당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요.

 

무고한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살해를 당하거나,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한다면

심판이 있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전쟁을 일으켜 수십만을 죽인 나폴레옹이나,

나병환자를 위해 목숨을 바친 다미안 신부가.. 똑같은 결말을 맞는다면, 그게 옳은 일일까요?

 

헤롯왕이나 세례요한의 최후가 똑같고,

이세벨 왕비나 모친 마리아의 최후가 똑같고,

히틀러나 알버트 슈바이처의 최후가 궁극적으로 똑같다면,

즉 심판이 없다면.. 그게 과연 다 좋은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본성적으로, 심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고 나면, 죄와 모든 잘못들이 심판을 받는 것이 좋다고..

즉 심판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심판이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심판이, 우리 생각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justice of God.

 

하나님이 선하신 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공의가 없으면, 하나님은 선하시지도 않죠.

 

우리는 좋으신 good 하나님을 찬송하기 좋아하지만,

진짜 좋으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히틀러나 김일성을, 좋으신 하나님이라서 다 용서해 주신다면,

그 하나님은 결코 좋으신 하나님이 되실 수 없죠.

 

하나님이 선하신/좋으신/good 하나님이 되시려면,

반드시 거기에 justice of God 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 justice of God 때문에, 나도 심판 받을 수가 있죠.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이든지/ justice of God 이든지

내가 원한다/원하지 않는다에 관계없이

그게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나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내가 원치 않더라도!

 

그러므로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도 마냥 내가 좋아할 내용만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그걸 좋아하지만요.

진짜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은, 그 양면에 justice of God 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정치지도자나 목회자가 존경받거나/받지 못함은

공평 justice”의 시행에 있습니다.

공평한 지도자는, 반드시 존경받습니다.

 

그런데 공평하지 못하고, 팔이 안으로 굽고,

편애하거나 찍어서 싫어하는 지도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을 봅니다.

그에게 공평 justice”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지도자도 반드시 공평 justice”이 필요한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공평이 필요하실까요.

 

어떤 사람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세요, 이 세상에 얼마나 불의가 많은데, 당신은 그래도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믿으십니까?’

 

저 파슨은, 물론 이 세상에서는 부조리와 부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결국은, 장래에,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이 있음을 믿으므로,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이후의 <최후의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는 그 날이, 반드시 이를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바로 앞에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만약에 심판이 없으면,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 없으면,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즉 조롱당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심은 대로 거두는 날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판만 필요할 뿐 아니라, 심판의 날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 그 날, 막바로 심판하지 않으실까요?

왜 하나님은 심판을, 심판 날까지 저축하셨다가, <백보좌 심판의 날>에 심판을 하실까요?

 

사람은, 죽자마자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재림이 있고, 부활이 있고,

그 다음에 심판의 날이 있습니다.

 

왜 그 날이 있습니까? 그 답은 간단합니다.

정의는 반드시 공개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저 파슨은 생각합니다.

 

여러분, 대개 법정에서 심판은, 공개적으로 합니다. *결혼과 장례도 마찬가지고요

원하면 아무나 법정의 방청석에 가서, 재판을 참관할 수도 있습니다.

 

왜 재판을 공개적으로 하고, 아무나 와서 참관할 수 있게 하지요?

재판이 공정하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비밀스러운 것도 없고, 뭘 숨길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재판 받는 사람은, 혹시 그렇게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을 수도 있으나

재판은 반드시 공개되어져야 합니다. 공평성의 원칙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재국가, 전체주의 국가에서 보면,

재판이 공개적이지 않고, 비밀스럽게 합니다.

그건 뭔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뜻이지요.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의 날을 특별히 정하셔서

최후의 심판을 단행하시는 이유는,

그게 공개되어져야 하며, 공정한 재판이라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리기 위함이라고 봅니다.

 

비록 그렇게 공개되는 것이, 재판받는 당사자에게 부끄럽고 힘든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영국에서 간혹 비공개 재판이 열리는 때가 있는데,

저 파슨은 개인적으로 그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도, 공개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개적인데, 그 이유는 3가지입니다.

 

1) 그래야 심판주이신 하나님,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분으로서 인정되십니다.

심판의 날, 그 심판의 자리에서,

어떤 사람들, 지옥 갈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공평하지 못 하시다고 항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판이 공개적으로 진행될 때, 결국 아무도 항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나 공개적이고, 너무나 공정한 재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천하가 다 참관해서 보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공평하시다고, 인정될 것입니다.

먼저는 심판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도, 이 심판의 날, 공개적 심판이 필요하죠.

 

 

2) 그리스도도 이 날에, 공개적으로 의로우신 분으로, 인정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죽을 죄를 진 사형수로 죽으셨잖아요.

그러나 이 날에 예수님은, 의롭고 공평하신 분으로, 인정되실 것입니다.

결혼해서 살지만 공개적 결혼식이 필요하듯이, 이런 공개적 심판의 날도 필요한 거죠.

 

 

3) 크리스천들도, 공개적으로 인정되는 날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크리스천들을 매우 불공정하게 대우했습니다.

 

지난 2천년이 지나도록, 크리스천들이 순교하지 않고

10년을 무사히 지나온 적이 없습니다.

2~3년 동안에는 순교가 안 일어났던 적도 있지만, 10년 안에는 반드시 순교가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순교당하신 분들, 핍박당하신 분들도

반드시 심판의 날에, 그들은 올바로 인정되어져야 합니다.

*그 중에는 혹시 자기가 잘못해서 핍박 받았다. 죽었다고 비난 받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서 인정받고, 찬양하는 그 날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그런데 심판이 없고, 공개적인 심판의 날이 없어서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그래서 성경에는 심판의 날을 반드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의 내용을 안 보고, 성경을 읽을 수 없습니다.

 

특히 구약의 선지서에, 심판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등장하지요.

신약에는 서신서에, 심판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심판의 내용이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들을, 자세히 읽고 공부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의 비유를 읽고 공부하시면서

거기 나온 심판을 주의 깊게 보지 않으셨다면, 그건 잘못 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은 다 심판에 관한 주제입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둘이 함께 자라다가, 그 둘이 갈라지는 심판의 날이 결국 오지요.

-양과 염소가 함께 풀을 뜯어 먹으면서 살지만, 그 날이 오기 전에는 똑같지만,

그러나 그 날이 오면, 양과 염소는 반드시 갈라지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이 함께 잔치 날을 기다리지만,

그 심판의 날이 오면, 반드시 나눠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한데 물에 어울려 살지만, 어부가 물고기를 잡은 후에

그물속에서 좋은 물고기와 빈약한 물고기를 골라내는 날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추수의 날에, 낫이 대어질 날이 올 것이고,

그 전에는 둘이 함께 같이 자랐지만, 갈라지고 나눠지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비유 속에 담긴 교훈은

사실상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을 좀 더 상세히 들여다 보면

 

1. 먼저는 재판장입니다.

재판장이 누구십니까?

여러분, 재판장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오늘날 세속 법정에서의 재판결과도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유리한 재판관이 배정되어야 될 터인데요.

자칫 잘못해서 엄한 재판관에게 배정되면, 아주 곤혹을 치를 수도 있습니다.

세상 법정이 그렇다면, 마지막 백보좌 심판은 어떻게 될까요?

누가 내 재판의 판결을 맡게 될까요?

 

보통 사람들은 재판장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정확한 대답은 아닙니다.

나의 영원의 운명이 걸린 이 중차대한 날에, 하나님은 그 재판 판결의 책임을

아들 예수님께 맡기셨습니다. 위임하셨지요.

이 점은, 우리에게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사셨던 분으로서, 우리 인간을 잘 이해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인간에 의해서 재판을 받는다고 해도 말이 됩니다.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100% 완벽한 인성을 지니신, 물론 100% 신성도 동시에 지니셨지만,

그 인간을 이해하시는 분이, 인간으로서 직접 살아보신 분이

우리 재판장이 되시는 것은, 그래도 큰 다행입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17:31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 by that man 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즉 최후의 심판의 재판장은, 하나님이시기 보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은 공생애 33년만 인성을 지니시지 않고, 영원 가운데서 인성을 지니고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재판장 석에 앉으실 때,

인간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앉으실 것입니다.

*물론 신성의 위엄을 지니셨겠지만, 어쨌거나 그나마 우리에겐 다행입니다.

 

그날 우리는, 예수님이 재판장으로 앉으시고,

본디오 빌라도는 피고석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흥미로운 장면이랄까요, 아니면 대단히 두려운 장면일까요?

 

*예수님은, ‘어린 소자/빈자/약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본디오 빌라도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시대 시대마다 예수님을 무시하고, 재판에 넘기고, 핍박했던 사람들은

그 심판의 날에는, 본디오 빌라도처럼 완전히 입장이 뒤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은,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재판 받는 피고는 당연히 우리 인간들입니다.

이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들 모두가, 그 백보좌 심판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큰 일을 했던 사람이나, 무명이 소시민이나

왕이나 노예나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이나, 산의 무덤에 묻힌 사람도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한 사람씩 개인이 재판정에 서서 받습니다.

14: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가 교회별로, 나라별로.. 심판을 이렇게 만약 단체로 받는다면,

어쩌면 그 심판이 그렇게 무섭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심판을 각 개인적으로 받는다고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에, 이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수 백~수 천억의 사람들이, 한 명씩 재판을 받는 게, 불가능하다고 보는 거죠.

재판정을 수 천 개를 세워서, 동시에 진행하면 모를까..

 

*그런데 그 때가 되면 4차원, 5차원의 시간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시간은 문제가 안 될 것이고요

하나님은 우리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시는 분이시니, 어떻게 재판이 개인적으로 진행될지는

우리가 걱정 안 해도 될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요.

 

하나님의 심판의 특징이 공평, 정의인데, 단체 심판은 있을 수 없지요.

개인적으로 해야, 심판이 공평하고 정의롭게 되지요.

 

학교나 군대에서는 단체 기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해서, 단체가 한꺼번에 벌을 받았지요.

그때 나머지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해 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에는 그런 것은 없으니, 개인적이며 절대 공의로우시니,

그런 염려는 안 하셔도 될 것입니다.

 

여기 직고한다고 했는데, ‘접 보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말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재판장 앞에서, 직접 대답한다는 뜻입니다. 재판용어로 진술을 하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의 심판의 날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좀 조신해서 사는 것이 좋습니다.

 

3. 세 번째로 재판정에 꼭 등장하는 증거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증거가 없이는,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지요.


1) 그런데 최후의 심판에서 외적 증거는 아무런 역할을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시니까요.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겠지만, 그 외적 행위뿐만 아니라

그 외적 행위를 유발한, 자기 마음 중심의 증거, 그 내면적 동기까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심판이 그만큼 정확하다는 뜻이지요.

 

세상 법정에서는 혹시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법정에선 그게 안 통하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내면적 동기를, 그 증거로 찾으시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범죄하고, 회개한 죄를.. 심판 받느냐?’ 하는데 이견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하나님은 기억도 안 하신다, 심판을 받지 않는 것으로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회개를 했다고..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 회개를,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아주셨느냐.. 하는 것이지요.

 

자기는 회개했다고 주장하겠지만, 하나님이 그걸 받아주시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신 경우는, 어떤 초자연적 증거가 따르겠지요...

 

그러니 회개는 쉽지 않다고 말들을 합니다.

사실상, 죄를 짓고 회개하기 보다는, 관성의 법칙상, 죄를 더 많이 짓기가 쉽지요.

 

그러므로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고 용서 받으면 그만이다는 마귀적인 생각은 버리고,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내가 교회를 지었다. 내가 성가대를 몇 년 봉사했다등의 외적 증거를 제시하겠지만,

재판장은 그런 외적 증거보다, 내면적 증거, 숨은 동기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느니라는 구절도 나오고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살인과 간음의 내적 동기를 보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고서, 최후심판에 각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가 어떤 직분을 받았는지도.. 상관 없고,

주여, 주여했다고 다 구원 받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도, 안 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 마음 중심과 내면적 동기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가 기도하고 찬송을 하더라도, 물론 진심으로 하겠지만,

그러나 혹시 외모로, 습관으로, 직업으로 한다면.. 재판장은 다 골라내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말만 유창하게 하는 것도, 다 골라내실 것입니다.

 

2) 재판장은, 다른 사람의 증언도 필요치 않으십니다.

누가 나를 대신 나서서, 내게 유리한 증언을 해 준다 해도,

그게 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재판장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므로, 그게 필요가 없지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불리한 상황에서

재판장님, 우리 옆집 사람의 말을 좀 들어보십시오.

제가 이웃집 사람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것 다 소용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무슨 증거를 특별히 제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완벽한 증거를 다 갖고 계시니까요.

다른 증언이나, 증인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법조문을 약간 비틀어 해석해서, 빠져나간다든지

법조문을 교묘히 피해 간다든지..

그런 것은 하나도 최후의 심판대에서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증거가 흐릿해서, 심판을 면하게 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 법정은

가장 공평하고, 가장 정직하며, 가장 완벽한 재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서, 영원한 지옥에 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1, 2, 3, 4, 5계명은 물론이요,

6, 7, 8, 9, 10계명을 범하려는 유혹이 올 때, 한 번쯤은 재고할 것입니다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5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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