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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Death 전7:1~4 영어녹취록, 출처 *호스피스 설교 모음
▲“사람이 한 번 죽으면, 어찌 다시 살랴?” 욥14:14
구약성경에서 욥이 물었던 이 질문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묻는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 개념이 좀 특이합니다.
즉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거나,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으로 계속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계속 살아계셔’ 하지만, 자기 기억 속에서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런 기억이나, 영향력으로 계속 남아있는 것도 소중하지만,
지금 우리가 묻는 질문은, “사람이 죽으면, 정말 계속 사느냐?
메모리나 인퓰런스나 그의 업적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내 존재로서 말입니다.
지금도 지구 어디에선가 매초 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1초에 2명 죽는다고도 하고, 1초마다 3명 죽는다고도 합니다.
또 매초에 8명 태어나고, 5명 죽는다는 계산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에도 매일 전 세계에서 20만 명 이상 가량 죽습니다.
작은 도시 인구가 몽땅 다 죽는 것이며, 어쨌거나 많이 죽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운전을 하는 것도, 매일 죽음을 직면하는 일입니다.
순간 아차 잘못하면, 내가 오늘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운전석에 이런 글귀를 붙여놓습니다.
‘주님, 저를 지켜주시고, 제가 운전할 때 제 책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주님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셔야 하지만,
동시에 내가 무책임하게 운전해서, 나의/타인의 소중한 생명을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함을, 상기시켜주는 경구입니다.
*영국에는 이걸 플라스틱으로 인쇄해서, 카 액세서리로 파는 모양입니다.
자동차 사고 말고도, 여러 가지 사고로, 질환으로, 죽음은 우리를 노크합니다.
급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하고, 서서히 오기도 하고
(흡연이 서서히 죽는 자살이라 그러죠. 노환도 마찬가지고요)
예기치 않게 와서 당황하기도 하고, 예상을 하더라도 당황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연로하신 분에게 아무래도 확률적으로 많이 찾아오지만,
그렇다고 젊다고, 죽음을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보면, 제일 안타까운 것은, 거기 입구 안내판(전광판)에
40대, 50대 등 비교적 젊은 분들의 장례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죽는 일에> 종사하는 천사들이,
좀 파업을 일으키거나, 아니면 일손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좀 잠시라도 중단되거나 쉬는 일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해보지만,
그런 일은 과거 역사에도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한 번 죽는 일’이 확실하다면,
그걸 준비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그런데도 실상은, 사람들은 대비하지 않고,
그게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어리석게 삽니다.
예를 들어 캐나다로 이민 가는 사람, 이민이 아니더라도 몇 달 동안의 출장이라도,
사람들은 엄청 준비를 합니다. 책을 사서 읽고요,
짐을 꾸리고, 늘 그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캐나다로 이민 가서, 거기서 남은 일생을 살 사람이,
거기에 대해서, 귀찮다고, 또는 자기는 가기 싫다고,
그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생각을 회피해 버리고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을 까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죽음을 회피하고” 삽니다.
눈으로 쳐다보지 않고, 귀로 듣지 않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 스스로 질문이나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걸 마치 먼 미래의 일로, 절대 자기와는 관련 없는 일로, 회피해 버리는데요..
너무 생각하기 무서우니까, 회피하는 마음은 이해를 하겠는데요..
그래도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결국 닥치게 되고, 한 없이 당황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다들 우물쭈물하다가,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되고 맙니다.
그런 경황없이 떠나는 죽음이, 그 후의 결과가 과연 좋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7:1~4,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너는 결국 죽을 것인데, 살아있을 동안에 그걸 생각해 보는 것이 낫다.
근심이 웃음보다 나으니,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죽음을 생각하되, 어리석은 자는 지금 행복하게 살 궁리만 한다.”
그건 구약이야기라고요? 신약에도 예수님은,
죽음을 대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눅 12:19~20
영국 버킹검 쇼어 지방에서 있었던 한 크리스천의 실화입니다.
그 믿음의 사람은, 자기 죽음이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음을 알았을 때,
편지를 써서, 자기 친척들을 다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며칠간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고 합니다.
“오셔서, 크리스천이 어떻게 죽는지를 보십시오!”
저 파슨은, 이것은 정말 놀라운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믿음의 사람은, 이런 이벤트를 위해서, 아마 상당한 기간을 준비하고
또한 오래 생각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굿바이를 고하며, 영원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죽음을 대면하기를 극도로 주저합니다.
그래서 주거지역에서는 장례를 치르지 않고, 장례식장에서만 치르기 때문에
그래서 이웃집에 누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은, 주거지역에서 곡소리도 듣기 불가능합니다.
만약 들리면,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과거 영국에서는, 동네에서 곡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동네에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년 사이에, 급속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영국의 주거지역에서는, 장례를 볼 수 없습니다.
검은 상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요, 장례는 식장에 가서 치르고 돌아옵니다.
그래서 더더욱 현대인들은, 죽음을 대면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성경에는 ‘상갓집에 가는 것이 더 복되다’고 말씀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불과 20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한국도 지금 그렇게 되었죠.
▲제가 최근에 한 사회학자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영국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2년 동안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죽음을 앞둔 사람과 그의 주변인들 수 천 명을 만나서, 인터뷰했습니다.
그리고 장례와 관계된 의식, 절차 등을 연구했고, 그는 이렇게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국인들은 오늘날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사람들은 ‘죽었다 died’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대신에 ‘지나갔다/사라졌다 passed away’는 단어를 씁니다.
※외국인과 상대하는 한국인은 이 단어를 꼭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실례를 범하면 안 되니까요.
당신의 어머니가 ‘지나가신’ 것을 애도합니다.. 라고 말해야지 ‘죽은 것을’이라고 말하면, 실례입니다.
말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은, 예의 바른 일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런 언어적 표현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죽음’의 현실을 회피하게 됩니다.
요즘 소설이나 <죽음>을 주제로 다루면, 과거와 달리, 많이 읽혀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죽음을 회피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오늘날의 교회마저도, ‘죽음’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50년 전에는, 교회에 가면, ‘죽음’은 설교자들이 정기적으로 말하던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죽음을 주제로 한 설교는, 거의 듣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신자와 불신자간의 대화가 이렇습니다.
불신자: “자네는 죽음을 생각해 보았나?”
크리스천: “그래”
“자네는 죽은 후에, 계속 살 것을 믿는가?”
“그러하네.”
“그럼 자네는, 죽은 후에, 천국에 갈 것을 믿는가?”
“이제 우리 그만하고, 다른 주제를 얘기하세!”
크리스천 역시도, 세상 불신자처럼
죽음 같은 걸, 생각하거나 대면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죽음이 정복된 것을 기뻐했고,
천국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주제들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설교나 대화 가운데서요.
그런데 오늘 날에는 ‘죽음 공포증’이 온 사회를 휘어잡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이게 그 물결이 교회에 까서 들어와서,
교인들마저도 ‘죽음 공포증’가운데, 눌려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을, 찬송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 편찬되는 찬송가에는, ‘장래의 소망’이나 ‘천국’에 관한 찬송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있어도, 평소에는 부르지도 않습니다.
의례히 장례식 때나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죽음을 회피하는 이유
그럼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왜 “죽음”이란 주제를 대면하기 싫어하는 걸까요?
왜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마음을 닫아버리는 걸까요?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요즘 현실의 삶이 더 편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나 의료기술의 발달로, 오늘날의 삶은 예전보다 훨씬 더 편해졌습니다.
그러니 한마디로 죽기 싫은 거죠.
식사도 옛날 왕들이 먹던 것처럼 먹고, 아니 더 잘 먹고,
옷도, 자동차도, 가전제품도, 옛날 왕보다 더 편하게 지냅니다.
그리고 재산이 있는 사람은, 그걸 다 놓고 떠나기 싫은 것입니다.
이래 저래, 우리는 이 세상에 더 오래 눌러 붙어서 살고 싶어 합니다.
신자들이 이웃을 전도하기를 ‘요즘 우리 교회 목사님이
천국에 대해서 시리즈로 설교 하니, 와서 들어보세요’ 라고 초대하면
이웃 사람은 별로 관심 없어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집에 최신 자동차가 두 대있죠.
마당에 수영장에, 각종 운동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집은 너무너무 안락하고, 좋은 가구와 가전제품을 다 구비해 놓고,
정원은 마치 공원처럼 꾸며 놓고, 거기에 새들도 왔다 갔다 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별로 천국에 관심이 없습니다.
천국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너무 현실이 괴로우니까,
마음으로 사모하게 되는 것이 천국이지요. 이런 면이 있습니다.
장애우 자녀를 둔 부모는, 빨리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사실 먹을 것도 변변찮았습니다.
그들과 비교해 보면,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 먹거리도 많고, 오락거리도 많습니다.
그러니 조상들이 천국을 소망하고 기다린 반면,
현대인들은 천국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풍요와 복이, 아이러니하게, 오히려 신앙에 방해가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까먹게 되는 겁니다.
사실 재산이 좀 있는 사람은, 죽기가 정말 아까울 것입니다.
이렇게 다 거대하게 이루어 놓고, 다 남겨두고 빈손으로 떠나기란.. 무척 힘들 것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많이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재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고, 천국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물론 그곳이 안전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영적인 이유도 있다고 봅니다.
물질을 땅에 가득 쌓아두는 사람은, 죽음을 대면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겠지만,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 또한 주님은 섭리로, 우리를 부유하게 하지 않으시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살면서, 늘 천국을 소망하며, 또한 기다리며 살게 되지요!
▲2. 현대인들이 죽음을 회피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은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 세계는,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귀에 들리니까.. 믿어지지만,
내세는, 뭐가 오감으로 확실한 것은 거의 없잖아요. 내세에 대해 믿을 게 성경밖에는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뭐가 증명이 안 되니까.. 또 교육을 무신론적으로 받으니까,
천국과 내세를 믿지 않게 되고.. 그러니까 죽음에 대해,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고, 자기 손에 잡히는 세상이 전부입니다.
다음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교인도 그러합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압니다. 오직 땅의 일만 말하고, 생각하고, 관심가집니다.
한 저널리스트는 말하기를,
‘40년 전부터 영국인들은, 지옥을 믿는 것을 중단했다.
그리고 20년 전부터 영국인들은, 천국을 믿는 것도 중단했다.’
저 파슨은,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여러 가지 교육, 문학, 방송 등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은연중에 믿고 살아가는 거죠.
심지어는 교회까지도, 그런 언급을 거의 안 하니까 말이죠.
한 방송국 조사에 의하면, 영국인들의 65%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35%만 내세의 존재를 믿는다고 응답 했는데요,
*그 중에 그 내세가, 천국이라고 믿는 것은 또 별개이고, 무슬림도 내세를 믿잖아요.
그게 또 자기가 천국을, 지식적으로 믿는다고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죠. 마귀도 그건 믿죠.
▲3. 세 번째 이유는 ‘귀차니즘’입니다.
현대인들은, 약간 귀찮은 것은 무조건 다 싫어하고, 회피해 버립니다.
예를 들면, TV에 해외에서 굶어죽는 아이들 영상이 나오면,
사람들은 보기 싫다며, 그냥 채널을 돌려버립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이지요. 그걸 믿고/안 믿고의 신앙 여부를 떠나서
그걸 생각하기 싫은 것입니다. 자기 현재의 마음만 번민스럽게 하니까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지요.
세상에 즐거운 일도 많고, 재미있고 행복한 사건도 많은데,
왜 우울하게 죽음을 대면해야 하며, 죽음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래서 그들은, 마치 TV 채널을 돌리거나, 아예 꺼버리듯이
교회에서나, 친구들과 대화 가운데서, 죽음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급하게 자기 마음의 채널을 꺼버립니다. 한 마디로 듣기 싫다며 회피해 버립니다.
▲4. 사람들은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기가 죽든지, 주변 가족이나 친구가 죽든지.. 죽으면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지요.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거나,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위 4가지 이유 말고, 사람들이 죽음을 대면하기 싫어하는
진짜 근본적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이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영국 크리스천인 Cliff Richard가 최근에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명언입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죽는 것은 좀 두렵습니다.”
죽음은,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지만,
죽는 것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요,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서
미지의 세계이니까, 두려울 수는 있죠. 인간 본능이죠. 솔직한 대답입니다.
물론 그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에, 예수님이 우리 손을 꼭 붙잡고 인도해 주실 것이지만,
그래도 생전 처음 겪는 일인지라, 두렵지 않을 수가 없죠.
▲또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기 전에, 사람들은 먼저 너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으로, 또한 육체적으로.. 정말 측은하리만큼 사람은 약해집니다.
‘말라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죽기 전에 사람들은 바짝 말라서.. 죽습니다.
우리가 요양원에 가면, 정말 연약해진, 마치 갓난아기와 같은
세밀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그런 노인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게 되죠.
‘주여, 젊을 때,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주님을 위해 헌신하게 하소서’
그때는, 섬기고 싶어도 섬기지 못하니까요.
또한 이렇게 약해져서, 앙상한 뼈만 남아서 죽는 것은 그래도 어쩌면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 죽습니다.
암 같은 질병은 진통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편히 죽는 게 아니라, 고통 받으며 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게 되는 거죠.
그런 앙상하게 연약해진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죽음의 경험’은, 아무도 이전에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너무나 생소한, 그래서 걱정되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한 번 죽고 난 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두 번째 또 죽게 되면,
어쩌면 그때는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아요. 자기가 한 번 겪어 보았으니까요.
그러나 그럴 일은 없지요. 어쨌거나 그래서, 사람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인간의 본능이요,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손을 반드시 잡아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자로서, 많은 죽음의 순간을 지켜보았습니다.
진실한 크리스천들은, 두려워하면서 죽지 않더라고요.
너무나 편안히, 마치 잠드는 것처럼,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주님이나 천사들이, 그의 손을 붙잡아 주어서,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편안히 죽을 수 있는 믿음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아마 이 설교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주님이 우리 손을 잡아 주실 것을 확실히 믿어도, 추호의 의심이 없어도,
죽음의 순간이 닥칠 때
모든 크리스천은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나온 일생의 발걸음을 뒤돌아볼 때, 다 회개했더라도
뭔가 후회스런 부분이, 조금은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순간을 얼마 남겨 놓고,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전혀 후회가 없습니다. 제 양심의 아픔이 조금도 없습니다.
제가 다시 태어나도, 지금과 똑같이 살겠습니다.’
이런 자신감 넘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마지막 그 순간이 오면,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가급적 적은 사람이 좋겠지요.
이제 우리가 씨 뿌리는 시간은 끝났고, 우리는 삶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내가 인생의 씨를 잘 뿌렸을까?’하는 두려움이 누구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적 측면도 반드시 있습니다. 두 측면이 둘 다 존재합니다.
‘추수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수고한 나를 위해, 상 주실 것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그런데 사실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없다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덤에서 계속 잠을 자든지, 아니면 유물론자처럼 물질세계가 그것으로 끝이든지 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없으니까,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하등 없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을 회피하고, 죽음을 대면하기 싫어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깊은 내면에, 죽음 이후의 사후 세계를, 자기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유물론자들, 무신론자들,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람들은
희박하지만 소수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기 입으로는 뭐라고 떠들어도,
자기 깊은 내면에, 뭔가 사후 세계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사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요, 미지의 경험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요,
근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요, ‘자기가 살아온 과거’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이 떳떳한 사람은, 죽음이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간 중에, 사실 그걸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life after death
▲먼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몇 가지 잘못된 개념들을 살펴봅니다.
1) ‘죽음’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은, 사람의 생각에서 일어날 뿐이지, 죽음이라는 실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이 자녀들 위로 떠돌든지,
어떤 ‘기억, 업적’으로 살아서 영원히 기억되든지, 새가 되어 날아가든지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지 몰라도,
사람의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죠. *영혼불멸설 같은 것입니다.
영혼이 죽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혼이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는 것이지,
뭐 세상에서 혼백이나, 영의 존재로 계속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2)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유물론이죠. 물질세계만 믿으며, 영적인 세계를 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질세계는 손에 잡히고, 눈에 보여서 확실히 믿겠지만,
사후 세계는 아무 증거가 없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들도 ‘천국이나 지옥’이란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만,
그들이 말하는 ‘천국이나 지옥’은, 현실세계에서의 천국이나 지옥이지,
죽음 이후의 천국이나 지옥 개념이 아닙니다.
3) 윤회설, 또는 환생론인데요.
사람이 죽으면, 뭔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한 ‘전생’도 믿습니다.
이 윤회설은, 동양에서 믿어왔지만,
이제는 서구에서도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인정하기 싫은 불신자들이, 자기를 합리화하기 좋은 이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동물보호주의자 가운데
일부는 이런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물을 보호합니다.
그 동물이, 환생한 자기 죽은 어머니나, 친한 친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잘못 살면, 나중에 동물로 태어날까봐 두려워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좋은 곳으로 간다’는 막연한 생각.. 비성경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이 갖는 무의식적이며, 비성경적인 생각은
“사람은 죽으면, 다 좋은 곳으로 간다”는 추정입니다.
이건 아쉽게도, 성경적이 아닙니다.
영국의 공동묘지에 가보면, 묘비에 다 그렇게 좋은 말만 적어놓았습니다.
뭔가 좋은 세상으로 떠났다는 것이지요.
천국을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도, 다 어딘가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묘비의 글만 읽어보면, 그들은 모두 의인인 것 같습니다.
죄인은 어디 한 사람도 안 보이는데,
아마 멀리 다른 곳에 따로 묻어둔 것 같습니다. *농담이죠.
“평화롭게 쉬고 있다”
묘비에 그렇게 좋은 말로 적혀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정말 실제로 평화롭게 쉬고 있을까요?
그런 사람의 바램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덕담을 서로 주고 받습니다.
“좋은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저 파슨은, 그런 묘비의 글이나, 사람들의 덕담이
우리에게 잘못된 신학을 심어줄까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그런 잘못된 개념들을 계속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학습되겠지요.
그게 마치 진리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해서, 뭔가 성경적으로 가르쳐 주려고 하면,
그들은 이렇게 대꾸합니다.
‘사후세계에 대해서, 확실히 모르기는,
당신이나 저나,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둘 다 모호하게 알뿐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신앙과 신념대로 믿으십시오.
저는 제 방식대로 믿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좀 저를 내버려두시죠.’
▲그런데 그런 자기 방식대로 믿는 사람들의, 그 믿음의 근거를 따져보면
두 가지 토대를 근거로 해서 믿는데요, 그건 과학과 자기 감정입니다.
과학을 토대로, 사후세계를 믿는 것은, 가장 위험한 접근법입니다.
왜냐면 과학은, 오직 이 현실세계만 다룰 뿐, 사후세계는 전혀
과학이 다루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감정을, 다시 말해 자기 느낌을 믿는 사람은,
그것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
사람은 자기에게 이로운 대로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받아들여서 믿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믿는 게 아니라요.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란 주제에 대해서,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진리이며,
그 주제에 대해서,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정확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칩니까?
▲1. 죽음은 실제입니다.
성경은 죽음이란 주제를, 아주 심각하게, 중요하게 다룹니다.
성경은 ‘죽음’ ‘죽는다’는 말을 빈번하게 쓰는 것을, 거리끼지 않습니다.
‘pass away’이런 표현으로 완곡하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으라’고까지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하면서
죽으면, 오히려 살 것을 가르칩니다. 죽음을 두려워 말라는 것이죠.
예수님도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지 않으셨습니까.
성경은, 죽음을 피해가지 않습니다. 죽음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당신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걸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2. 죽음은 적입니다.
죽음은 사탄 편에 속한 것이고, 이 세상에 침입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망권세와 싸우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사망을, ‘죽음을 가져다주는 마귀’로 보는 것이죠.
그러므로 ‘불신자의 자살 등’ 죽음을 미화하는 것은,
저는 비성경적이라고 봅니다. 일부 소설이나 영화는 미화하기도 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싸워야 하고, 극복해야 될 대상입니다.
죽이는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자살하든지, 아니면 남을 살인하든지.. 하지요. 죽음의 마귀가 씌인 것입니다.
▲3.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인데요,
그래서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지만,
그런데 육체도 나중에 부활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요.
그리고 악인/죄인도 부활합니다. ☞악인의 부활
그들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단어 자체가 ‘육체의 부활’을 함의합니다.
‘영혼만의 부활’은, ‘부활’이란 말을 아예 쓰지 않죠. 영혼 불멸 이런 표현을 쓰죠.
그래서 ‘죽으면 끝’인줄 알고, 뭐 자살하고 그러는데요,
그게 끝이 아닌 줄 알면, 자살을 크게 후회할 것입니다.
‘죽은 자(무덤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5참조.
▲4. 죽음은, 두 운명 중 하나입니다.
죽은 후에, 모든 사람이 똑같은 한 길로만 가지 않습니다.
죽으면 두 길로 나눠지는데,
*무서운 천사(마귀)가 데리러 오느냐, 선한 천사가 데리러 오느냐..
사람은 둘 중에 한 길로 택해져서 가게 됩니다.
죽으면 모든 사람이 한 곳으로 똑같이 가게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누구를 믿었으며, 어떻게 믿음대로 살았는지에 따라서
그 두 운명의 길이 선택되어 집니다.
▲5. 그리고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최후 심판> 관련글 모음
*죽은 후에 즉시 예비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
진짜 심판은, 즉 백보좌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집니다.
이 시점에 관한 것은, 3차원의 세계를 벗어나는 영역이므로
그게 언제인지는,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죽은 후에는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6. 사망의 독침은 죄라고 했습니다. 고전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바꾸어 말하면 ‘죄는 사람의 독침’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살기 때문에, 그 죄가 독침처럼 자꾸 우리를 찌르지요.
그래서 그 독이 치사량에 이르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항상 맞진 않지만, 일반적으로 맞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게 뭐 생전 해보지 못한 경험도 아니고, 이별이 두려운 이유도 아니고,
근본적 이유는, 자기 죄 때문이고, 자기가 치를 죄값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며, 십자가의 대속을 믿어야 하며
사망을 정복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망의 마귀를 정복하셨고,
그리하여 부활로, 그 승리를 친히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건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지나간다/사라진다 passed away’는 성경적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세상도 지나가고, 예언도 지나가되, 주의 말씀은 영원히 있느니라’
그 말은, 정말 ‘사라져 없어져버린다’는 뜻인데
사람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에 반드시 살아서 있게 됩니다.
미국 의회 담임목사였던 피터 마샬이, 젊어서 병으로 죽다 살아났습니다.
그의 책에서 간증하기를,
이제 마샬이 집을 떠나서 병원으로 가면, 다시 살아서 돌아오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남편 피터 마샬은, 비교적 젊은 나이의 남겨진 아내에게
이렇게 최후의 작별 인사를 건넸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봅시다”
자기가 ‘자고’(죽었다가) 다시 일어난다는 표현이지요.
참으로 성경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살아 돌아왔고, 나중에 미국 상원의회 담임목사까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왜냐면 예수님이 다 정복하셨으니까요.
죽음의 두려움은, 사실은 심판의 두려움입니다.
그 날에 담대할 수 있도록, 날마다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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