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렘 벤게메렌
우리는 설교할 때 설교에 대해서만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강의가 끝난 후에는 예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부담감이 있길 바랍니다.
먼저 신약에서 구약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살피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자주 구약으로 설교합니까? 성경에서 구약은 4/5인데도 거의 설교하지 않고 대부분이 신약의 바울서신의 일부만 설교한다. 며칠동안 구약강해 설교법을 들을텐데, 구약을 설교하지 않은 것은 신앙성숙을 위한 좋은 자원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복잡하며 도전이 되는가를 놓친 것이다. 로마서, 빌립보서, 목회서신에서 신학적 원리를 가지고 주로 설교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는 알기 위해, 바울 서신으로부터 믿음의 틀을 얻을 수 있다. 어떻게 교회의 삶을 발전시키는가를 알기 위해 목회서신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의 지혜로운 삶을 위한 답을 어디서 발견하는가? 성경 전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한다. 성경 전체를 알아야 답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의 삶은 아주 복잡하다. 성경 전체가 우리의 복잡한 삶에 적용을 위해 필요하다. 단순한 답을 찾는 것은 거부하며, 삶의 풍성함을 위해 말씀 전체가 우리 삶의 상황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씀드린다. 우리는 쉽고, 단순한 답을 복잡한 세상에서 찾습니다. 나는 쉬운 해결책을 거부하고 복잡한 해결책을 드리고 싶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단순하지 않으며 말씀 자체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천년 이상 동안 쓰여졌으며,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의 복잡한 상황에 적용 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우리 나름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 나름의 정황 속에서 해석한다. 본문 또한 문화적 역사적 정황 속에서 쓰여졌습니다. 본문을 그 본문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현재의 상황에서 다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이 이 상자와 같다고 하자. 예수님도 사도들도 선지자들도 처했던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 이해하기 쉬운 부분만 보는 축약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을 전통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 그리고 다음 세대는 이 전통을 가지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데, 이것은 전통에 전통이 싸여 가는 것이다. 우리가 전달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계시는 전통에 의해 쌓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축소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가치를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보겠다. 마태복음 5장을 보자. 산상수훈에서 말씀을 들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 의하면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시며, 과거의 하나님이 말씀을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말씀을 해석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예수님이 구약을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성경 자체를 공격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 쌓아 놓은 전통을 공격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5:15절을 보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율법의 일점이??획이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대해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모세를 해석해서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으시다. 7장 12절에서 같은 점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모세나 선지자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예수님과 연결해서 들어야 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줄여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네,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비평적인 학자에 의하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이 서로 상반된다고 한다. 예수님과 바울 사이에 서로 긴장이 있을 때, 우리는 바울의 메시지에 더 귀를 기울인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낯서나, 바울의 메시지가 예수님의 메시지보다 익숙하고 자연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바울은 우리의 이성에 더 호소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교육할 때, 말 중심으로 사고하도록 교육받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보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것을 설명하시는 대신에,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지를 주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다고 설명하셨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나 현자 선지자 모두를 종합해서 구약의 메시지를 들려주는데, 구약은 이성에 호소하기도 하지만, 이성의 언어 외에 상상의 세계를 많이 보여준다. 언어들은 해석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미지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호함이다. 랍비들은 구약의 언어를 가지고 나름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다른 해석은 허용하지 않은 체 자신의 것만을 옳은 것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수님은 사실 바울과 포인트가 다르지만 구약과 바울의 교량 역할을 하셨고,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구약 이해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스피커가 여러 개 있으면 다른 소리를 내지만, 실제로는 화모니를 이루어 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효과이다.
사실 바울이 했던 일은 복잡한 구약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합쳐서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던진 물음에 응답해서 나름대로 단순화 시켜 바울 사도 나름의 전통(파라도시스)으로 만들어서 전달한 것이다. 바울이 말한 파라도시스는 전통인데, 파라는 '옆에, 따라서'라는 뜻의 말이다. 사도 바울은 초기 기독교의 모든 질문을 요약해서, 즉 하나님은 누구신가, 교회는 무엇인가, 믿음은 무엇인가를 성경과 함께 풀이해서 나름의 전통을 만들었다. 그것이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라기보다는 나름대로 해석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준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이 구약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이라는 것은 점점 더 확장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해석을 더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무렵에는, 종교개혁의 배경을 보면, 전통이 너무 확장되어 성경과 나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말씀 대신에 전통을 따라 사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종교개혁 때 가장 신나는 일이 '오직 성경'이라는 표어 아래 말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칼벵이나 루터는 말씀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100년 이 지나지 않아서 말씀의 충만함으로부터 다시 교리로 축소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은 것으로 축소되었다. 나는 장로교 교인이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말씀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을 들을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을 들으라고 초대함으로써 강조하셨다.
질문) 바울서신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의 전통이라는 것입니까?
대답) 절대로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고 하나님이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을 믿었다. 본인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시도 동등한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했다. 그는 구약도 하나님이 주신 계시이고, 그 모델을 가지고 그의 신학을 형성했고, 예수님의 말씀도 계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인이 받은 계시도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계시로 전통을 세워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글이 유일한 계시라고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사고는 계시에 더해서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계시라고 자신의 메시지를 이해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계시만을 유일한 계시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자.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지옥에 있고, 부자는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에 있는 것을 본다. 부자는 자신의 친척이 지옥에 오게될까 염려해서 자신의 친척이 그곳에 오지 않도록 누군가가 가서 이야기해 주길 원했다. 16:29을 보면 아브라함은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라"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을 들으라고 도전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계시를 듣지 않았다면, 새로운 계시 역시 주어진다 하더라도 듣지 않으리라 말씀한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계시를 들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계시를 들을 때, 우리의 전통을 떠나서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전통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향을 가지고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가 문제이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때, 전통과 분리해서 들을 수 없다. 우리의 전통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해준다. 만일 장로교 전통에서 자랐다면, 소요리 문답에서 우리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등의 교리를 배운다. 그러나 여기에 위험이 있다. 그것은 너무 많이 들어서 성경 자체의 메시지를 듣자고 할 때, 말씀의 메시지를 줄여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들로만 줄여서 들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서울에 와 있는 내 딸을 예로 들겠다. 뷔페에 갔을 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습니다. 어제 식사 때 접시 위에 옥수수가 있었다. 많은 일본음식, 한국음식, 중국음식이 있어도, 자신이 익숙한 것만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의 견지에서 말씀을 듣지 도전 받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쉽게 유대인을 판단한다. 그들은 왜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했는가하고 비난한다. 여기 예수님은 당시 하나님의 계시였고,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구약의 계시를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 분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옳은 것이다. 즉, 이미 받은 계시를 받아들이지 안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새로운 계시를 듣겠는가? 모세와 예언자의 말씀을 거부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 사람 역시 모세와 예언자의 말씀을 거부할 것이다. 그렇게 단순하다.
정리해보면 우리는 계시를 줄여서 전통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닫아 두면서도 말씀을 잘 듣고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계시와 우리의 전통 사이의 관계는 무시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진정한 연결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말하고 싶다. 진정한 연결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전통이 말씀에 의해 변화되거나 도전받거나 말씀에 의해 확장되거나 말씀에 일치하도록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말씀과의 관계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로서 진정한 하나님의 해석자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듣고 전할 때, 성도들의 식욕을 없앨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셋째 딸이 어렸을 때, 엄마가 콩을 갈아서 먹이면 뱉었다. 이러한 현상이 성도들에도 일어난다. 어떤 말씀을 좋아하도록 자라왔는데,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일 때 그들은 싫다고 뱉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는 위험이 있다. 성도들에게 아이스크림과 같은 맛있는 것만 주었기에,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2000년대를 살고 있는데, 과거의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의 상황으로 끌고 오는가? 우리가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고, 듣지 않는 것을 멈추고 계속해서 들어야 한다.
남자들은 아내의 말을 선택적으로 듣는 경향이 있다. 아내들은 하루일과를 다 말하고 싶어하지만 남편은 결론만 듣고 싶어한다. 상세한 것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중요한 것만 말해주길 원한다. 모든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옳은 것인가?
남편이 이렇게 중요한 것만 말하라고 한다면 아내의 기분이 좋은가? 아내는 남편이 자신이 하는 말 모두를 잘 들을 때 좋아한다. 나는 아내의 말 모두를 듣는 것을 배웠다. 나는 아내가 위로 가든 아래로 가든 어디든 함께 간다.
여기에 중요한 요점이있다. 아내의 말 모두를 들을 때에야 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시나 우리는 줄여서,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에 중요한 것만을 줄여서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성도를 대할 때도 나타난다. 성도들이 여러 가지 말을 하는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은 의사가 1분 정도만 환자를 대하고, 환자가 아픈 곳을 여러 곳 말하는데 그저 아스피린 하나 주는 것과 같다.
구약을 설교하는 것도,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이다. 또 하나는 우리의 상황을 들어야 한다. 아내와 아이와 이웃을 들어야 한다. 남을 들어야 성숙과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야 남들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현재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없다면, 우리가 3000년 전, 즉 주전 1000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이제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말씀을 들어보겠다. 베드로는 유대인은 모세와 선지자의 유산을 물려받은 후손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새로운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누구인가 즉, 메시야인가 아닌가이다. 베드로의 논쟁은 구약을 믿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임을 믿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그것은 구약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에서, 그는 예언자들의 유산이, 초대교회의 유산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이미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것이나 그들은 그 구원의 의미를 우리와 같이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예언서를 떠난 메시지가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선지서와 맥락을 같이 해서 나온 메시지라고 말한다.
베드로후서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를 보면, 우리가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빛과 같은 역할을 해서 더 확실하게 이해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구약의 메시지는 신약의 메시지와 연결해서 들을 때, 분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20-22은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예언서를 읽을 때 그것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능력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말씀은 여러 상황에서 왔으나 성령은 한 상황에서 왔다. 성령은 모든 시대적 상황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베드로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메시지이나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살아서 우리에게 연결되고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이 연결성은 성령의 능력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으로 과거의 메시지가 현재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을 보자.
사도행전 26:22-23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라고 말씀한다. 결국 그의 메시지는 구약의 메시지와 상반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1:1-2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록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선포할 때, 그것은 새로운 복음이지만, 그것이 이미 예언자들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한다. 사도의 말씀과 같이 구원이나 칭의의 메시지는 구약에서 이미 주어진 것이다. 로마서 3:21을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자, 우리는 하나님께 열려있는가 닫혀있는가? 전통에서 벗어나서 살 수 없음을 말했다. 전통은 믿음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등을 정의해준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전통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도 내려준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통에 둘러싸여 하나님께 닫힌 체 사는 것은 위험하다. 전통 안에서만 교제하는 것은 위험하다. 전통은 정의 자체가 닫힘을 의미한다. 아니면, 매우 느리게 변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문제로까지 확산된다. 노인은 전통에 따라 주장하고 젊은이는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질문한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열린 사람이 되어야 하나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열려 있어야 한다. 그분은 모든 문화를 초월하신 분이다. 그 분께 열려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도 우리의 문화 속에 축소해서 넣는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것이 구약이든 신약이든, 열려 있을 수 없게 된다.
또 하나의 위험이 있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에 열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서로에게 열려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보자. 얼마나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비난하고 상처를 주면서 성경에 열려있다고 말하는가? 우리는 형제 자매를 배척하면서 성경에 열려있다고 말하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을 전통에 닫아 놓고서 그렇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질문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는 말씀의 해석과 어떻게 다른가?
질문 2) 신학이 하나의 전통이라면, 교수님의 신학은 열려있는가?
답)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는 분이다. 다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한다. 나는 네덜란드인인데, 말씀, 이성을 중심으로 합니다. 이성 중심의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관점으로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이 나의 그 관념을 깨고, 더 넓은 관념을 보여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나는 PCA교단 소속이다. 나는 그 교리와 시스템에 충실하나, 그 교리와 시스템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할 때, 충실한다. 내가 먼저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속한 교단의 교리가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개혁주의 전통에 있다면, 그 전통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문자 하나 하나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개혁파 전통에 속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한다. 거의 말씀의 위치에 올라있는 것이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말씀과 동등한 권위에 놓은 적이 없다.
한국인을 정의할 때,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는 사람이 한국인인가? 아니면 정신인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이 가능하다. 이것이 말씀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는 나의 견해이다. 어떤 사람이 전통에 충성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불편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집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보다 크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말씀에 조화한다고 믿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지 않다. 말씀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교리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나는 아니라고 하겠다. 말씀을 먼저 보고, 교리가 말씀에 맞으면, 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겠다.
여러분의 신학적 배경을 동원해서 말씀을 이해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신 분임을 믿으십시오. 나는 삼십대에 하나님을 이해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오십대에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느끼고 있다.
2강
디모데후서 3:14-17은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모든 성경에서 모든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구약이다. 구약이 예수님께로 인도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구약의 능력에 대해 우리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신약만이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약은 신약에 대해 준비를 시켜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약이 있는 한, 구약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런 믿음은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 바울은 "구약을 설교하라, 구약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디모데의 경우에서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도 구약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구약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장성하도록 한다. 16-17절을 보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구약으로 교훈하고 책망함을 통해 성숙함과 의로움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믿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어떻게 기독교인으로서 사느냐를 가르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성경은 우선 구약을 가리킨다. 바로 구약 성경이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인으로서 성장하고 예수님 안에서 성숙하게 지혜 있게 살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는가? 여기에는 단계가 없다. 두 단계니 다섯 단계니 하는 것이 없다. 바울은 프로그램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 자체가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부족한 것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성숙함이다. 성숙함은 무엇인가? 성숙은 삶의 영역을 종합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신학적으로 성숙하나, 우리의 감정이나 상황에 대처하는 반응의 경우 미성숙한 경우가 많다. 미성숙은 비판과 화를 냄에서도 나타난다. 서로 미워하고 서로에게 거칠게 대할 때 미성숙함이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서 두 살 짜리처럼 행하면서 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린이들은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으면 반항한다. 울고 반항한다. 이것은 어린 아이가 하는 짓이다. 내게 가슴이 아프고 짐이 되는 것은 구약의 메시지를 이해하게 하는 것 외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키우는 것이다. 많은 경우 기독교교육을 지식과 능력의 성장으로 본다. 신학교에서 신학적 지식, 해석법, 교회사, 설교, 교회 행정 등의 지식을 배우기를 원한다. 부족한 것은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어떻게 믿음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느냐이다. 우리는 선생으로서 신학교에서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교회에서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가르치고, 교회학교 교사들도 똑같이 행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말씀의 궁극적 목표는 성숙함이다. 그들이 온전해서 하나님의 모든 선한 것을 행하기에 온전함이다. 서양교육의 목적은 나뭇 가지에 머리만 달아두는 것이다. 두뇌 외에 가슴을 보는 것이 부족하다. 그리고 팔 다리 등이 부족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대로 살고 말하고 하는 것이 부족하다. 우리가 너무 자주 지식과 기술을 강조하기에 개인의 존재의 변화, 즉 존재성이 제외되어 있다. 교회의 성도들이 원하는 것은 가슴을 가진 목회자를 원하다. 성도들은 영감을 주어서 어떻게 기독인으로 살 수 있는지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목회자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단지 전통을 전달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교인들이 원하는 삶의 중심이 아닐 수도 있다. 성도들은 우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성도들의 삶은 문화를 전수받음으로 형성된다. 그들은 한국인이면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믿으며 산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것과 그들이 처한 환경은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해준 구약의 메시지를 새롭게 들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준다. 예수님도 비슷한 호소를 하신다. 메시지를 주시면서, 나를 보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에게 배우라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델로 주시면서도 다시 구약과 선지자와 그리고 제자들에게 준 메시지를 들으라고 하신다. 우리가 구약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 바울은 그러므로 구약을 들을 것을 확신을 가지고 들으라고 했다. 여기에 기독교인의 성숙의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것 중의 하난가 지혜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은 지혜의 표상, 상징이었다. 지혜란 무엇인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좋은 도구는 지혜다. 우리가 지혜의 음성에 열려있을 때 모세나 선지자나 현자, 바울의 메시지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지혜의 음성은 비평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를 볼 수 있도록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적 존재인데,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전통이나 문화 등에 규정된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많은 지배를 받는다. 지혜의 음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상자 안에 많은 구멍이 있으며, 그것을 비평적으로 평가해야 함을 가르친다. 진정으로 지혜가 있는 기독인은 문화가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문화의 기독교인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같은 문화의 비기독교인에게서보다 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식탁이 있다고 합시다. 한국인이 먹고 있다. 중국인, 일본인, 유럽인, 미국인이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문화가 다르더라도 더 낳은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이 나의 비전이다. 우리가 성숙한 기독인이라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면, 우리 존재 자체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보다 커지기 때문에 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의 문화를 비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가 속한 문화에 더 비판적이다. 비판적인 정신이 나의 문화 속에 있다.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이 나의 문화 속에 있다. 엄격하고 어느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것을 좋아하나 그렇지 않은 문화에도 적응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를 늘 질문한다. 내 자신의 것인가 하나님의 것인가? 많은 경우 내 자신의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세계화된 기독교인이 되고 싶은데, 이것은 때로는 고통스럽다. 지난해에 한국음식을 먹을 때, 달팽이를 먹어야 하는 고통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성숙의 과정이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고, 저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것은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성숙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질문) 디모데 2:에서 모든에 구약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도 들어가지 않는가?
답) 나의 의도는 사도 바울이 구약을 오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읽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요엘 2장 30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의 말씀을 로마서 10장에서 인용하면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나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을 예수님과 연결해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바울은 구약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진정한 유대인은 기독교인이 될 것을 믿고 있다. 구약은 모세로 시작해서 선지자들이 많은 것을 썼고, 지혜자들이 많은 것을 썼다. 이것은 율법서, 선지서, 성문서로 분류하는 것과 일치한다. 좋은 유대인은 모세로 시작하지만, 동시에 선지서, 지혜서 모두를 받아들인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의 율법서만 받아들였다. 그들은 선지서와 지혜서는 거부했다. 사도 바울은 진정으로 구약을 이해했다면, 구약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신약은 구약의 범주 내에서, 예수님과 연결해서 이해된다고 본다.
질문) 예수님과 연결해서 읽는다면, 구약 자체의 정황을 넘어가서 읽는 것이 아닌가?
답) 두 상황이 있다. 구약 자체의 메시지의 역사적 정황과 신약이 구약을 해석하는 상황이 있다. 구약 자체는 신약 자체가 적용하고 있는 것보다 더 풍성하다. 신약만 가지고 구약을 잃으면 그 풍성함을 잃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은 구약의 상황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신약은 구약의 해석된 의미가 아닌 중요성을 보여준다. 구약의 의미는 그 메시지가 주어진 상황 안에서 해석된 의미이다. 그러나 신약의 의미는 새로운 신약이 처한 상황에서 해석된, 부여된 의미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원래 의미와 신약의 새로운 해석된 의미사이에는 긴장이 있을 수 있다.
히브리서 1:1-3을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나 모세, 선지자, 현자, 바울, 예수님,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모세의 말씀도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른 말씀도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특별하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뿐일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의 메시지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떻게 모세나 선지자나 지혜자들을 해석하는지를 도와준다. 구약 해석의 열쇠를 예수님이 쥐고 있으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3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고, 그 본체의 형상이심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이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그것을 전달했으나, 그 자신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는 사람이었다. 선지자나 지혜자 역시 지혜가 있고, 예언을 했으나 그들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사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도 죄가 있었으며, 성숙하지 못했다. 그들도 성숙성을 향해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분은 새로운 권위를 지니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다른 경우보다 더 진실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 안에 진실성이 있으셨기에 다른 사람과는 다른 새로운 구별된 권위를 지니고 있으셨다. 많은 경우 교회는 마르시온적 경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약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 이렇게 둘이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모세와 선지자, 지혜자에게 말씀을 주셨고, 신약의 하나님은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말씀을 주셨다고 믿고 있다. 히브리서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는데, 과거에 그리고 현재에 예수님을 통해서 계속해서 일관적으로 말씀을 주시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씀한다. 초대교회는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모세가 아니라, (이것은 유대인의 주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설교할 때 더 이상, 신약의 하나님, 특히 바울의 하나님으로 구별하여 가르칠 수 없다. 이제는 모세나 선지자나 현자나 그리스도나 바울이 가르친 말씀 전체를 통해서 한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
히브리서 1장 1절부터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사도 바울을 들으면, 사도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설명하는지 들을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이해를 풍성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 서신이나 야고보서를 보면 어느 것이 더 예수님을 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는가? 야고보서가 예수님에 더 가깝다. 그것은 이미지와 은유와 그림을 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문장이나 해석에 중점이 있다. 사도 바울만 설교하면, 이성이나 정신에 호소하는 것이다. 야고보서를 설교하면, 심성에 호소하는 것이 되므로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오직 성경으로'가 강조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의 유산이다. 여기에 의도된 바와 의도되지 않은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성경은 있는 그대로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성경은 명확하기에 평범한 신자들도, 성경을 그들의 언어로 읽을 때,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들은 성경의 명확성과,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의 강조점은 또 있는데, 교육받은 목회자였다. 두 가지를 강조했다. 상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고 그런데도 다른 한편으로 교육받은 목회자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이 너무 중요하기에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해석 능력이 있는 지식이 있는 목회자의 양성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예수님을 대표하고 그렇기에 존재, 즉 성숙한 기독교인의 존재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모델 중에서도 특히 존재와 지식의 모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성경은 예수를 통해 구원을 얻고 성숙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 모든 성도들이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수준에서이다. 그러나 어려운 말씀의 해석, 긴장이 있는 말씀과 말씀의 연결성은 어떠한가? 그것을 모두 이해해야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욥을 이해하고 전도서를 이해하고 아가서를 이해하는가? 목회자, 설교자들의 임무는 말씀의 깊이를 통해서 성도들의 이해 수준을 높여주는 것이다. 얕은 물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깊은 물에까지 이르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몇 해 전에 깔벵이 설교했던 곳에 방문한 적이 있다. 거기를 보면 설교단이 높게 되어있다. 설교자를 보면서 설교를 듣게 되어있다. 설교단 자체가 말씀이 중심임을 보여준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복잡성과 난해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심스런 성경해석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여러분은 신학교 졸업생이다. 신학교에서 교수들이 말씀 공부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신학교에서 진리를 배울 것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많이 배웠을 것이다. 그 목적은 여러분을 좌절시키고, 말씀 연구에의 동기를 앗아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복잡하고 다양하고 풍성하고, 깊이 있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모두 소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성을 좋아하고 복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복잡한 것을 다룰 수 있는 훈련을 받는 것은 우리의 삶이 복잡하고, 그 삶에서 나오는 질문이 복잡한데, 말씀의 복잡성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삶과 연결시킬 때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이를 좋아하는데, 그들은 도전을 좋아하고 어려운 질문을 목회자들에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단순한 대답을 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흥미를 잃고 다른 곳에서, 대학 같은 고상하고 복잡한 대답을 주는 곳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어떻게 지금 사람들의 질문을 다루고 있는가? 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가? 현재는 성경의 복잡성은 다루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한 수준의 질문만 다루고, 단순한 해석만 듣고, 그 해석을 전달한다. 작은 소그룹이 있다고 하자. 그들이 성경해석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고 하자. 거기에서 소그룹 멤버 각자가 서로 다른 해석을 주장하고 있으면, 우리는 각자가 좋은 해석을 가지고 있으므로 즐겁게 모임을 마치자고 한다. 이것은 우리는 성경해석과 몸의 지체됨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성경해석은 2차적 문제로 전락했다. 현대교회는 구도자에 민감하나 성숙함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 단순한 복음만을 이해하기를 원한다.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나의 중요한 관점은 프로그램이 성숙함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숙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온다. 존재의 변화에서 가능하다. 어려운 질문을 할 때 성숙이 가능하다. 질문을 했고, 그 질문에의 해답에 만족한다면, 우리의 성장은 그치고 만다. 프로그램의 문제는 간단한 곧 얻을 수 있는 대답에 머문다는 것이다. 맥도널드의 광고와 같이 신속하게 얻을 수 있는 효과를 교회에 적용하고 있다. 두 단계, 세 단계 정도의 간단한 해답을 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성경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에만 머문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 묻는 것, 사람들의 필요에만 집중하지 성경의 말씀하는 바에는 주의하지 않는다.
성경 본문은 이차적이고, 우리의 상황이 일차적이어서 주객이 전도되어 있다. 하나의 그룹이 성장하는 것에는 관심이 있으나 그 그룹의 멤버의 성숙에는 관심이 없다. 복잡성은 프로그램으로 대치되었다. 알콜 중독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보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십이 단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열두 단계가 중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안다. 그들은 다시 알콜 중독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콜에 의존해서 산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문화에 의존해서 산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에게 사람의 인정을 원하도록 만든다. 인정에 관심을 갖도록 한다. 성숙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독립적으로 말씀을 통해 성숙에 관심을 가질 때 가능하다.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는 말씀에 의미가 존재하는지 묻는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상황에 영향을 받기에 말씀에서 의미 찾기가 어려움을 알고 있다. 모던modern 세계에서는 성경해석에 문제가 없었다. 성경을 단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도 그랬다. 성경해석이 어렵다고 한다면, '무엇이 어려운가, 성경을 읽으라 그러면 성령께서 알려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성경해석은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대학에서 철학이나 인문학을 배우면서 본문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근본적인 것을 묻는다. 대학 시절에 문학작품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는가를 토론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목사님이 생각하는 의미가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다.
나는 어려운 질문을 한 그룹을 좋아한다. 그들은 내가 성경을 보게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미국의 현대 교회에 너무 영향을 받아서,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미국에서 수입해서 적용하고 있음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프로그램에 집중되어 있는 교회는 환자가 이 치료법, 저 치료법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다. 프로그램 자체는 생명력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현재의 교회는 중세교회와 비슷하다는 비유를 하고 싶다. 중세교회는 그 교회가 처한 상황이나 프로그램이 중요했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차적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포스트 모던 시대에서는 말씀이 종교개혁 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일차적이 되기를 원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교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교회사를 보면서 우리는 사도 바울 시대처럼 말씀을 듣고 복잡한 해석을 하고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듣고 그 후 우리의 처한 상황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포스트모던이 질문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 영향을 받으므로 객관성 있는 본문의 의미를 얻을 수 있는가 해석이 가능한가의 질문을 가지고 본문에 접근해야 한다.
다음 시간에 성경해석상의 이슈를 다루겠다. 복잡하리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 문제가 너무 중요하기에 다루는 것이 기쁘다.
3강
해석학은 긴밀하고 일관적이며 정황적으로 본문으로 1) 읽고 2) 해석하는 예술과 과학으로서 3) 본문에 대한 독자의 인식이 변화되고 또한 겪고 독자가 변화를 경험하는 것을 수반한다. 본문해석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석학하면 규칙들을 적용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기 때문에 과학만 생각한다. 많은 경우 여성이나 2/3세계의 사람들은 예술적으로 해석하는데 재능이 있다. 서양인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데 재능이 있다. 좌뇌는 분석적, 조직적이고,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담당한다. 위뇌는 연결, 관계 맺음, 상상하는 것에 익숙하다. 우리는 그림 그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칠판에 두 사람을 그리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물을 것이다. 권투 장갑을 그리면 싸우고 있음을 알 것이다. 입을 그리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A 와 B가 싸운다라는 문장을 써놓으면 분명하게 두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이해하고 있는것인가? 싸운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육체적인 것인가 아니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태도상의 문제인가? 질문은 이 문장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실제로는 문장 역시 그림만큼 모호한 것이다. 우리는 문장을 좋아한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성경해석학에도 과학적 과정이나 훈련 요소 몇 가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 히브리어, 문법, 구문론, 구약 개론, 해석사 등을 배우는 것이다. 비평학적 이론을 배우고 개관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본문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 본문 비평을 알아야한다. 본문이 처한 정황을 알아야 한다. 지리학, 고고학, 구약 주변 세계의 문화 등을 알아야 한다. 구약, 의미론, 고고학, 지리학을 알아야 한다.
주석을 읽을 때 역시 문제가 있다. 주석자들이 본문 해석할 때, 이런 자료를 사용하여 본문을 해석하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적'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하자. 이 단어의 해석을 위해 많은 자료를 사용한다. 백과사전, 성경사전, 신학사전 등의 여러 가지 자료를 사용해서 그 단어를 연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료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정보를 가지고서 본문을 대할 때, 본문은 제쳐놓고 일할 수 있다. 두 장의 종이에 적대감이라는 단어의 수집 결과를 기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적 중에 혈연관계가 있는 모압, 에돔 사람 등에 대해 연결해서 자료를 모을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의 적 중에 아람인과 같이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연구할 수 있다. 주변 강대국, 앗수르, 이집트 등을 연구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형제이나 어떻게 적이 되었는지를 연구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덟 쪽의 자료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어떻게 본문의 의미를 결정하는가, 어떻게 본문을 해석하느냐가 해석학에서 다루는 쟁점이다.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는 좌뇌, 우뇌 모두를 사용해야 한다. 수집 자료가 본문에 적절해야 하며, 본문의 문법, 구문론 등 본문이 요구하는 것에 적합해야 한다. 예레미야서의 적은 이집트도 아니고, 앗수르가 아니고, 바벨론임을 본문이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자료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정리하면서 과연 본문은 이런 자료에 대해 무어라고 하는지 찾아야 하며, 그것이 맞는 답임을 본문을 통해서 변호할 수 있어야한다. 본문은 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해석 가능성 모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본문이 요구하는 가장 적절한 해석을 찾는 것이 해석자의 역할이다. 본문에 대한 여러 해석 중에 그것을 살펴 연구할 때, 가장 적절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변호사라고 하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기소하고, 다른 사람은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이 때, 변호사로서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증언을 듣고 결정할 수 없다. 좋은 정확한 증인을 찾아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그렇다. 여러 자료와 증거를 듣고 가장 정확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 변호사로서 어떤 증인의 대답을 듣는 것에 대해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성경 해석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가 찾는 것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법을 찾아 해석하다보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전통적인 것과 상반될 수 있으나 이것에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된다. 여러 증거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본문의 그림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한다. 본문이 주는 이십여 개의 자료가 있다고 하자. a, b ,c라는 세 개의, 중요한 본문이 주장하고 있는 요점을 발견했다면 이것이 본문의 중점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23편을 예로 들자.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본문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강세를 두는 말이 달라질 수 있다. 여호와가 중요한가? 나가 중요한가? 아니면 목자가 중요한가? 우리가 해야할 것은 좌뇌, 우뇌를 사용해서 이것을 해석하는 것이다. 공부한 후에는 본문이 말하는 요지, 그림을 발견해야 한다. 본문을 볼 때, 해석 후 분명한 이미지를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 나온, 본문과 일치하는, 본문을 통해 변호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분명하게 본문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우리가 200자의 본문으로 시작하지만, 대부분 설교할 때는 이것이 세 포인트로 축소된다. 그 많은 단어들을 줄여서 설교했기에 그 설교가 훌륭했다 하더라도 몇 주 후에 사람들은 그 설교를 잊고 만다. 그것은 언어의 이미지에 호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TV에서 이미지를 얻는다. 그 이미지를 좋아한다. 광고 회사가 목표하는 것은 언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이것을 마시면 건강해진다는 말을 주는가?" 우리는 설교할 때, 많은 단어를 줄여서 설교하기 때문에, 설교 내용이 좋고, 적용도 있어서 좋지만, 이미지가 없어서 곧 잊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어떤 좋은 식당에서는 음식 식사가 끝나면 가장 좋은 커피를 준다. 그 커피 향이나 맛이 남게 해서 기억에 남게 하기 때문이다. 그 식당에서는 초도 켜고, 향기도 풍겨서 분위기에 젖게 해서 다음에 또 오도록 한다. 현대의 교회는 예술적인 면, 드라마, 춤을 강조한다. 이미지를 준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는데, 분명한 말씀과의 연관점이 없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정확히 해석하고 설교를 잘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본문이 말하는 그림을 갖기 전에는 그것을 문장화해서는 안된다. 본문의 그림, 이미지가 형성된 후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좌뇌, 우뇌 모두에 호소해야 사람들이 만족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학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인 것이다. 내가 도전하는 것은 이것이다. 여러분은 이 세미나 기간에 예술가로 자신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분명한 가르침을, 세부 포인트를 원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동료 교수 중에 선교사라로 사역했던 사람이 있다. Dr. Rowan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중국선교사였다. 선교사로 가기 전에 선교학자로서 어떤 교수가 가장 영향력을 여러분에게 미쳤는지 질문했다. 학생들은 밴게메런 교수의 가르침이 좋았다고 했다. 그것은 포인트보다 이미지, 그림을 남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사실은 우뇌로 작용한다. 관계성을 원한다. 본문간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본문 접근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보자. 본문에서 시작하나, 저자와 독자로 시작한다. 보수적인 복음주의에서는 본문에서 저자의 의도를 옮겨가는 것을 가르쳤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저자로 가는 것을 해야 하나 거거에서 멈추지 않고 독자로 가야한다. 당시의 본문을 듣고 있던 독자들이 본문에서 어떤 이해를 얻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어떤 연결성을 찾았는지 이해해야 한다.
호세아 본문, 8:11을 보겠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었더니 그 제단이 저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도다")
어떤 연결성을 보는가? 다시 읽어 보겠다. (키히르바)와 (에브라임) 사이의 (ㄹ) 음의 연결성을 볼 수 있는가? 많은 제단이 있다. 그것이 죄를 짓게 한다. 그리고 제단과 죄를 연결시키고 있다, 즉 속죄제를 위한 제단인데, 죄가 가득한 제단이다. 무슨 생각을 저자가 했을 것인가? 독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한 개의 진술이 있고, 다음의 진술이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진술은 두 개의 진술을 연결시키고 있다. 반복이 독자로 하여금 어떤 개념을 형성하게 할 것이다.
4강
본문을 통해서 독자를 보고, 어떻게 그들이 단어를 연결했는지 보는 것이 본문 이해에 중요하다. 본문을 이해하고, 독자를 이해하고, 저자를 이해하는 것이 해석의 중요 열쇠이다. 본문, 저자, 독자를 이해하고 우리의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정황에서 본문으로 넘어간다. 정황으로 본문을 이해하기 때문에 본문을 축소시킨다. 잠언 3: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것을 우리의 정황에 연결시키겠다.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어떻게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지 질문한 후 어떤 말씀이 그것에 적절한지 말씀을 찾는다. 그리고서 9절이 답을 준다고 한다. 9절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재물과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것이 있어야 교회 성장이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자신있게, 주께 바치십시오라고 설교한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성장하고 주께서 축복하실 것이라고 설교한다. 이것은 우리의 정황에서 질문하고 본문에서 답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이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보상하시는지 말씀하는 것이다. 보상은 희생과, 희생은 지혜로운 삶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잠언의 가르침이다. 강조점은 지혜로운 삶이지 하나님으로부터의 보상이 아니다. 본문이 말하는 보상만을 따다가 나의 처한 상황, 교회 성장에 적용한 것이다.
본문을 통해 많은 것을 적용할 수 있다. 아이를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 재물을 받치면, 아이를 얻을 수 있다. 사업을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사업이 번창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글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적용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인가이다. 정황에서 본문의 의미를 찾으면, 본문을 축소시키고, 제한하게 된다. 본문의 의미를 많이 놓치게 된다. 본문은 여러 정황에서 적용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적용 가능한 상황을 제한함으로써 본문을 제한한다. 이 때 본문이 속해 있는 문맥co-text을 놓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서양음식을 먹고 싶어 아내에게 서양음식을 만들라고 했다고 하자. 아내가 토요일에 서양음식을 만들어주겠다고 하면서 대신에 설거지 등의 일을 해달라고 했다고 하자. 화요일에 집에 와서 실망해서 서양 음식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소 한다. 아내가 그것은 조건부였습니다. 그것은 토요일에 하겠다고 했고, 아이를 돌봐주고, 설거지 등을 해 주면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정황은 배고프고 지금 화요일에 서양음식을 먹고 싶다. 토요일까지 기다릴 수 없다. 그래서 당신 서양음식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라고 항의할 것이다. 이것은 남편은 자신의 정황에 유도되고 있고, 아내는 본문에 유도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은 정황이 본문에 맞지 않는데, 본문을 끌어다 쓴다. 우리는 정황에 정말로 맞는 본문을 찾아야 한다.
본문이 있을 때, 본문은 범위가 있다. 이 본문의 범위 내에서 보면 그 안에 세부 본문이 있다. 본문을 처음 볼 때, 어디서 본문이 시작하고 끝나는지 발견해야 한다. 본문은 책이다. 책은 시작과 끝이 있다. 어떤 것은 역대기서, 열왕기서, 사무엘서와 같이 두 권이다. 시편의 경우, 같은 시편이라도 다섯 권이 있다. 시편 1편을 1편으로만, 시편 41편을 41편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1편과 41편을 함께 연결해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한 책 안에도 여러 가지 구분이 있다. 때로는 한 장이 본문이 될 수 있고, 여러 장이 합쳐서 한 본문이 될 수 있다. 내가 text라는 말을 쓸 때는 결코 한 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증거 본문proof text를 많이 쓴다. 이것은 의미가 없다. 이사야 66장 10절을 보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본문에서 여러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교회에 적용할 수 있다. 교회와 함께 기뻐하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새 예루살렘으로 말할 수 있다. 유대인과 함께 기뻐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증거본문은 본문을 상황에 던져 넣는 것이다. 본문과 상황이 관련이 없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한국어 성경을 사용해서 연결성cohesion의 표시를 찾아 보라. 식초, 물, 기름을 섞어도 구분이 분명하다. 각각이 응집력이 있는 것이다. 성경도 역시 그렇다. 한 책이지만 각각의 구분이 있지만, 그 부분마다 응집력이 있다. 성경도 한 책이나 여러 부분이 있고, 그것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 12장을 보자. 1절에서 본토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약속하신 땅을 주시는 조건은 떠나라는 것이다. 12:4의 하나님의 명령은 떠나라였고, 가라는 것이었다. 롯도함께 갔다. 갔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6절에서 아브람이 땅을 통과하는 것이 나온다. 가라는 것과 실제로 아브람이 가서 통과하고 있는 것이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아브람이 실제로 움직이는 장면이 잘 나온다.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에 도착해서 세겜으로 갔고, 벧엘로 갔다. 계속된 이동이 나온다. 아브람의 계속된 여행을 잘 보여준다. 가고 있고,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10절에서는 다른 방향이 나타난다. 전환이 있다. 10절에서 새로운 정황이 나온다. 아브람이 계획을 바꾸게 된다. 책의 새로운 구분이 시작되는 것이다. 1-9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계속된 이동이 나오나 이제 그는 더 이상 땅에 있지 않고 이제는 다른 땅에서 움직인다. 아브람의 애굽행은 우거가 목적이었다. 20절에서 재미있는 것은 바로가 아브람을 좇아내는 것이다. 바로는 아브람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도 내보낸다. 그리고 13:1을 보면 12장 20절을 반복하되 새로운 차원을 덧붙인다. 새로운 국면은 모든 것을 가지고 나왔다, 그런데 남방으로 다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면이 바뀐다. 남방이라는 단어는 12:10-20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9절에서는 나온다. 9절, "점점 남장으로 옮겨갔더라"와 13:1, "... 남방으로 올라가니" 사이에 기근 본문이 있다. 식초와 기름과 물과 같이 분명한 구분을 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남방이다. 그러면서 남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각 부분이 응집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각 부분의 독특성을 잃어버린다. a, b, c가 같은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나 각각은 독특한 요점이 있다.
continued
다음으로 논리성coherence를 보자. 내가 넥타이대신에 꽃을 사용하기로 했다고 하자. 그렇게 하고 다니면, 왜 꽃을 가지고 다닙니까? 셔츠에 커피를 쏟았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적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넥타이를 매면 이 때는 논리성이 있는 것이다.
논리성, 본문의 요소들이 서로 이치가 맞는가이다. 창 12:10부터 보자. 그 땅에 기근이 있어서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기근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다. 애굽을 우거하기에 좋은 나라로 소개하고 있다. 11절에서 애굽이 다시나온다. 거기에서 사래에게 말한다. 여기에서 주제subject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제가 기근, 애굽에서 사래로 바뀌고 있다. 12-13절은 대화체인데, 실제로는 혼자 하는 말이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에게 말하는 바는 "내가 죽고 싶지 않다.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내 목숨이 위태하다. 나는 목숨을 보존하고 싶다"는 것이다. 14절은 11절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11절(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과 14절(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은 애굽이라는 단어에 의해 연결성을 띤다. 세 가지 요소, 애굽, 기근, 사래가 있다. 14절에서 두 요소가 합쳐진다. 애굽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사래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한다. 14절은 애굽과 사래가 연결되고 있다. 15절은 같은 주제를 반복하는데, 그러면서 바로라는 새로운 요소를 소개한다. 아브람은 살 뿐 아니라 많은 재물도 얻는다. 양, 소, 나귀, 암소를 얻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 모든 주제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17절에서 새로운 주제가 시작된다. 같은 구분 안에서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래로 인해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다. 18-19절에서 바로가 아브람을 야단치고 있다. 아브람이 무엇을 했는지, 왜 그렇게 했는지 하면서 아브람을 꾸짖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사래와 애굽이라는 단어를 부각시킨다. 바로는 사래에 대한 정직성이 없었으므로 애굽을 떠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아브람은 다시 애굽을 떠난다. 이야기가 시작할 때 아브람이 애굽을 들어오고 있고, 그가 애굽을 떠나는 것이 나온다. 이로써 한 에피소드임을 알 수 있다. 20절, 13장 1절에서 "모든 소유"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단어들이 반복되며, 여러 요소들이 이치에 맞는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마다 특징이 있고, 독립적인 단위이므로 각각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해야 한다. 50명씩의 남녀가 있는 방이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에게 그의 아내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 하자. 그가 그의 아내에 대해 설명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설명이 예쁜 여자를 찾으라 했다면, 그것은 적절한 설명인가?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식으로 본문을 대한다. 어디에나 똑같이 해당되는 말을 한다. 본문의 독특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반면에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고 하자. 키를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많은 여자들이 제외될 것이다. 그리고 옷차림을 말해주었다고 하자. 안경을 썼다는 식의 설명을 했다면, 그 아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응집력은 그 아내가 다른 아내와 구분되는 것과 같이 한 본문 역시 다른 본문과 구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아내는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아내로서 독특성이 있다. 본문을 취할 때, 그 본문의 독특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본문이든 다른 본문이든 똑같은 것을 말할 것 같으면, 그 본문을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그 본문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본문은 나름의 독특성이 있다는 기억해야 한다.
질문) 어떻게 잠언서의 경우 본문을 구분할 수 있는가?
대답) 잠언서의 구조는 1-9장은 하나의 연결된 논의argument를 이루고 10장부터는 짧은 독립적 잠언으로 되어있는다. 그러나 이것 역시 1-9장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본문마다 독특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 자체가 본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잠언 10장 1절의 경우 역시 잠언서 전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본문이 처한 정황이다. 본문의 상황, 본문이 처해 있는 문맥이 중요하다. 본문 주위의 본문을 코텍스트co-text라고 한다. 모든 본문은 본문이 처한 상황, 본문이 처한 문맥이 있다. 책의 문맥을 정확히 이해하면 할수록 본문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다음주에 그 아내를 만난다고 하자. 다음주에 그 때 그대로의 설명을 따라서 찾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황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아내에게 떠나면서 사랑한다고 했다고 하자. 이 말은 무슨 소리인가? 이것은 방금 싸웠지만 그랬더라도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인가? 이 말 역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 그러므로 문맥은 본문 이해에 정확성을 부여해 준다. 문맥이 없이는 본문은 의미가 없다.
본문을 볼 때, 세 가지 요소를 보아야 한다. 본문의 경계선, 본문의 요소의 연결성, 본문의 처한 문맥을 보아야 한다. 창세기 12장의 문맥은 무엇인가? 모세가 새로운 세대에게 말씀을 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문맥이다. 창세기 12:20을 보자. 여기서 정황을 볼 수 있는가? 연결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본문 정황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에서 왔는가? 출애굽, 레위기, 민수기의 정황은 어디인가? 애굽으로부터 약속으로의 땅까지이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곧 보내셨다. 본문과 독자를 연결해서 보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본문을 주고 있다. 그들은 애굽에 있었다. 바로의 강압을 체험했다. 여기서 강압적인 바로가 사래를 취하는 것을 보았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인들은 바로에 의해 쫓겨났는데, 많은 소유를 가지고 좇겨났다. 여기에 중요한 요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다는 것이다. 수평적인 면에서 바로는 애굽에서 그런 일을 행했지만, 수직적인 면에서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행하신 일은 하나님이 아브람을 위해 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신 일은 똑같다. 모세의 입을 통해 아브람의 이 사건을 들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람에게 행하셨던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에서 신학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브람의 거짓말을 설교한다. "아브람이 바로를 속였다, 반만 진실이었다, 그래서 이런 어려움이 생겼다, 그러면서 문제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는 진실을 말하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에 청중은 귀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아브람의 소유가 증가한 것을 청중들은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본문의 의도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본문의 의도는 창세기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에 포인트가 있다. "약속의 땅에 가면 복 주실 것이다, 복주는 자에게 복주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시겠다"는 약속에 핵심이 있다. 또한 "아브람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에 핵심이 있다.
12장 10절에 기근이 심했다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필요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물을 수 있다. 기근은 축복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학적 질문,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 분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복을 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신학적 긴장을 찾을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아브람의 진실성을 말하나, 하나님의 진실성이 더 문제 아닌가? 심한 기근은 하나님이 아브람을 위해 아무일도 하지 않으심을 말한다. 아브람은 애굽으로의 이주를 결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기근이 심했기에 어쩔 수 없이 애굽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애굽에 이르렀을 때, 바로에 대해 그의 포악함을 들었을 때, 그는 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이 그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의심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아브람의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부재와 아브람의 기대를 분명한 그림으로 설명해 왔다. 좌뇌, 우뇌 모두 사용하고 있다.
17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주께서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신뢰할 만한가에 대한질문에 대답을 얻을 수 있다.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것과 같은 애굽에서 나오는 경험을 했다. 여기에서의 연결성을 볼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그 약속을 지키시는 모습을 아브람과 이스라엘 경험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복이 자동적으로 임할 것을 기대한다.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모든 상황을 바꾸셔서 복을 주실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여기서 가르쳐주는 것은 때로는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 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새로운 상황이 생기기 전에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창세기, 출애굽기 이해의 열쇠를 준다. 반복적으로 비슷한 교훈이 계속된다. 하나님은 사래의 경우 극단적인 경우까지 개입하지 않으셨다. 그 이후에야 아이를 주셨다. 여기에서 인간 중심적인 해석 방식에서 신 중심적 해석으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얻는 소득은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에든 해고를 당했든 상관없이 같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정황 중심의 해석은 본문 자체가 우리가 처한 상황에 국한되게 되지만, 본문 자체의 유도를 받는다면, 본문을 이해하고 우리의 상황을 본다면, 모든 상황이나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연결해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유익이 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해 보자. 우리가 본문을 들을 때, 그 본문은 우리의 이전의 인식을 변화시킨다. 이제까지 아브람이 사래에 대한 거짓말을 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자. 그러나 본문을 다시 읽을 때, 아브람의 거짓말에서 하나님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년 전에 나는 한국인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 지 몰랐다. 한국인을 알고 있었지만, 한국 사회가 어떠할지는 전혀 몰랐다. 여기서 경험을 하면서, 음식점에 가고, 한국인 학생을 만나면서, 한국에 대해 가졌던 인식들이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한국인들은 김치만 먹는다는 인식을 가졌다고 하자. 그러나 곧 한국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된다. 그들은 다른 음식도 먹는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본문에 대해 경직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본문을 대한다. 어떤 사람은 주일학교 때의 그 인식을 가지고 본문을 볼 때가 많이 있다. 친구의 해석, 설교자의 해석에 의해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아무리 좋았던 경험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잊고 본문 자체가 주는 새로운 의미, 진정한 의미에 열려야 한다. 본문이 우리를 도전하도록 열려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에 대해 이미 이해하고 있는가? 한국인에 대해 놀랄 때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가지로 모든 한국인을 묶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개인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한지 34년 되었다. 때때로 나의 아내는 나를 놀라게 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관계는 꽤 지루해 질 것이다. 이것이 내가 본문을 보는 방식이다. 본문을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있다. 본문은 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변화를 싫어하지만, 나는 본문을 대할 때, 본문에 의해 도전받고, 변화받고 계속해서 성장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설교자가 본문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본문을 이해하기를 원하고, 본문에 의해 도전받기를 원한다. 나는 본문에 대해 마지막 해답을 주는 권위자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다. 본문의 해석에 언제나 열려 있고, 도전을 받으면 변화될 수 있고, 본문이 나를 이끄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
늦은 시간가지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한국교회나 많은 교회에서 설교는 계속 일어나지만, 말씀이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슬픔이 있다. 다음시간에는 총체적 해석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질문) 우리의 선이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계속해서 훈련하지 않으면, 그 선이해에 좌우되지 않기 어렵다. 성령의 깨닫게 하는 역사는 무엇인가? 인식의 변화의 주체는 누구이며, 그것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가?
답) 하나님이 우리에게 본문에 대한 해석을 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대한 해석을 주시지 않은 것은 우리로 본문에 대한 해석에의 책무를 맡기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성경해석을 하셨다. 선지자들도 그렇게 했다. 설교할 때마다, 본문의 의미 하나만이라도 발견한다면, 상당할 것이다.
시간과 자료의 부족으로 설교준비에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한 단계 한 단계의 발전을 통해 탁월성에 이를 수 있다.
질문과 답) 도덕적인 이슈를 다루는 것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본문이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느냐입니다. 우리의 잘못은 도덕적 요점을 발견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시느냐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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