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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사람 (창 22:1-14)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일까요? 우선, 그는 민족의 조상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오늘날 유대민족의 조상이고, 또 이슬람민족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테러의 밑바닥에는 이 두 민족의 갈등과 싸움으로 야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도 이슬람도 그들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은 적자인 이삭의 후예들이고, 이슬람은 장자인 이스마엘의 후예입니다. 이들이 아브라함 때부터 서로 적대하더니, 지금은 세계의 위기까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전쟁은 이들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바로 이들의 조상으로 추앙 받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또한 믿음의 조상으로도 알려진 인물입니다. 물론 성경의 기록이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도 하나님을 잘 믿었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믿음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언제나 아브라함부터 출발합니다. 성경의 중심이 신앙이고, 신앙의 본질이 믿음인데, 이런 중요한 믿음을 논할 때 아브라함을 빼지 않을 만큼 그는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민족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저는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그를 ‘성숙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여기 ‘성숙하다’는 말에는 물론 육적, 영적 성숙을 모두 포함합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20세는 족히 됩니다. 사람이 이 정도를 살면 알 것 알고, 경험할 것 거의 경험한 나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신앙생활 하면서 본문에 와서야 비로소 그의 신앙이 절정을 이루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그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기록을 통해 성숙한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나타나는 신앙과 삶의 성숙한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본문을 통해 그것을 몇 가지로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소중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입니다. 요즘 우리 문화나 사회의 관점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는 충분히 가능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시험하기 위해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명령 앞에 아브라함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중심입니다. 이런 명령에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그 순종이 성경 전체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건입니다. 여기에서의 ‘순종’은 바꾸어 말하면 ‘반응’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 앞에 반응, 그것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입니다. 신앙과 삶에 이것만큼 성숙한 모습이 없습니다. 영적 성숙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반응을 보이는 것이요, 그것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다는 것이고, 복 받는 길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이런 행동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처음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보여주었던 모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부르시는데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 반응을 갖는데 적어도 7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쩌면 그가 즉각적인 반응을 갖는데는 120년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답답하리만큼 반응이 없었고, 있어도 엉뚱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가라고 했는데 그는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했는데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는 두려움과 공포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와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 전에 같으면, 반응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응을 갖는 것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전에 같은 상황에서 아들을 바치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펄쩍 뛰었을 것입니다. 아마 몰래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이제야 하나님을 제대로 안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실제로 아들을 죽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통해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응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즉각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모습임을 알려줍니다. 성숙은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는 것입니다. 깊은 깨달음을 갖는 것이요, 때론 마음과 몸이 하나님 앞에서 어찌할 수 없어서 부들부들 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모습입니다.
보통 우리 나라 지방의 특징을 말할 때 충청도 사람들이 느리다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느린지 경험했을 것입니다. 느린 것이 나쁘지는 않은데, 좀 답답할 때가 있지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목회 하는 어떤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는데 도대체 성도들의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웃기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웃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모두 집에 가서 웃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반응입니다. 그것도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 반응을 보이십시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행동하십시오.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 즉각적인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놀라운 영향력입니다. 본문은 흐름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맞추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만 크게 부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돋보이는 것이 아들 이삭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들이대어도 이렇게 죽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당시 이삭의 나이가 청소년기는 훨씬 지난 것으로 추정합니다. 적어도 20세 전후의 건실한 청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정도의 나이면 힘으로나, 지식으로나 아버지를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죽겠다고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이삭을 상상해 보십시오.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삭의 순종이 무엇보다도 돋보입니다. 이삭의 순종은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우리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삭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이삭에게서 출발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었고, 결과적으로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인정을 받는 것을 보면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순순히 죽는 자리로 나가게 된 것은, 이들 사이에 뭔가의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영향력’이라고 진단해 보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삭이 아버지에게 생명을 전적으로 맡길 만큼 아버지의 절대적인 영향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영향력입니까? 아들을 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 순순히 순종할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없으면 도저히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향력, 이것이 여기에서 또한 돋보이는 모습입니다. 자기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말과 행동으로 놀라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것을 ‘성숙’이라고 말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곧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감화력을 주는 사람입니다. 존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따라가게 합니다. 절대로 그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22장에 오기까지 이런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삶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창세기 12장에 처음 언급되면서 여기까지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사람과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그리 영향력을 주지 못했습니다. 자기 아내나 함께 사는 가족과 종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고, 애굽 왕이나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들을 보십시오. 애굽 왕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혼쭐나는 것을 봅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이스마엘을 낳았다가 곤욕을 치릅니다. 종이었던 하갈에게 질질 끌려가는 것을 봅니다. 그가 지금까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아무 것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부터 달라집니다. 그는 아들에게, 아내에게,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영향력은 가족을 넘어 민족까지 퍼집니다. 그리고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막강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 우뚝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향력이 곧 성숙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영향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볼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을 좋게 하려면 하나님을 멀리해야 하는 때가 있고, 하나님을 좋게 하려다보면 사람에게 싫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진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곧 그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물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성도에게, 심지어는 믿지 않는 자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나의 영향력이 내가 속한 모든 영역에서 폭넓게 퍼져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감동을 주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존경하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를 놀랍게 평가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그가 가진 믿음이 유감없이 발휘된 현장이 바로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선, 그의 마음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무 기절해도 몇 번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원망이나 불평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 투정을 부릴 수 있습니다. 줄 때는 언제고 이제 데려가신다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과감한 결단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니까 결단을 내립니다. 놀라운 결단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히브리서에 보면 당시 그가 가졌던 믿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이것이 그의 믿음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 이삭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죽으면 다른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믿은 것이 아니라, 이삭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에는 이 순간에 “하나님이 결코 이삭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다”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물론 속은 쓰리고 아프지만 정말 배짱 두둑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아들을 포박하여 죽이려고 칼을 들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늘에서 급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두 번 부르시면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보면서 선언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을 놀라게 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그에게서 보여지는 가장 성숙한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 오기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리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사람입니다. 그 일을 두 번이나 반복한 사람입니다. 아들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실수한 사람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무엇을 생각해도 여기 오기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은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그의 믿음은 확실합니다. 사람이 인정하고, 하나님을 놀라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영적 성숙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떻습니까? 나에게 하나님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믿음이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신앙으로 살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의 중심은 곧 믿음입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믿음,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고, 뭔가를 해보려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크리스천으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영적 성숙의 가장 중요한 잣대는 곧 나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주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때에 너희들의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마지막 때가 되면 믿음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많은데 믿음이 없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지는데 믿음의 모습을 찾기가 힘듭니다. 이런 때에 우리의 관심은 믿음에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즉각적인 반응, 놀라운 영향력, 감동을 주는 믿음, 이것이 아브라함에게서 보여지는 성숙한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우뚝 서기를 다짐하면서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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