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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사함 받는 것은 (본문 고후5:14-19)
오늘은 사도신경의 "죄 사함" 명제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 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구체적인 표식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다면, "나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든지, 주일에 반드시 예배에 출석하는 것."을 그리스도인 됨의 표식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죄사함 받는 것이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사함 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거기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과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인 입니까?'라고 질문받았을 때, "예, 나는 그리스도인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죄를 사함 받았다. -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초대 교회에서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과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도 교회에서 세례는 그러한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죄를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함 받았다는 표식으로서의 세례입니다.
"죄를 사함받는 것"은 "구원을 받는 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당신은 죄사함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은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죄사함이나 구원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과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힘, 양심, 경험, 인격, 업적에 의하지 않고, 우리 자신밖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어떤 것은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신학자 존 A. 맥케이는, "구원은 오히려 인생의 행로에서 행동하도록 힘을 부여해 주는 벨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거나 길을 걸을 때 우리 허리에 매는 벨트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몸 전체에 균형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구원도 그와 같습니다. 구원을 받아야 인생의 행로를 바르게 걸어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힘있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인생의 행로에서 바른 생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게 합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구원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인간 편에서 도움을 구하는 일이 있게 됩니다.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인생의 행로에서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 다음 도움을 구하는 과정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화해의 길을 마련하셨다는 선언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언이 선언으로만 남아있지 않고, 그 선언이 우리의 "내적 실체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씨앗을 주며, 우리 안에 새로운 나를 세우며,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삶의 현실을 갱신시켜 가는" 경험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곧 "거듭남"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신경의 "나는 죄를 사함 받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와 같은 뜻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새로운 삶으로 전환입니다. 그 전환은 옛 것에서 새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여기서 옛 것은 하나님 없이 살던 삶이며, 새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죄 사함의 문제가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곳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그 비유는 죄와 죄의 현실성, 그리고 새로운 삶이 어떤 것임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둘째 아들에게는 언제나 아버지가 없는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없이 자신의 생을 실현해가고 싶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결단하고 자기 몫을 다 챙겨서 아버지를 떠나 그가 그리던 곳으로 떠나가게 됩니다.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 없이 사는 삶이 자유롭게 느껴졌고, 더 의미있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를 떠난 삶의 결과는 돼지 우리에서 돼지들과 함께 지내는 비참함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그가 갈망하던 자유, 자기 실현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절망, 속박 뿐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몇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먼저 '죄(罪)가 무엇인가' 입니다.
첫째, 이 비유에서 말하는 죄란,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없이 자신의 삶을 실현해 보고자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자신의 욕망대로 어느 기간까지 살 수 있었지만 그러한 삶은 결국 그에게 무거운 노예적인 속박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자신의 자아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실현해 가고자 할 때 그러한 노력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자아 자체가 병들어 있기 때문에 병든 자아가 치유 받음 없이는 진정한 자기 실현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병든 자아가 치유받고 온전한 자아로 세움 받을 수 있는 길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병들고 상처입은 자아를 치유합니다.
둘째, 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희망의 삶을 거부하고 받아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그에게 허락한 둘째 아들로서 책임있게 살아갈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대신 자기 자신이 구상하고 생각한 생의 모험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한 생의 여정에서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가 도달한 곳은 희망이 없는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그 곳에는 죽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사함 받는 (용서) 문제입니다.
이 비유에서 죄의 용서는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둘째 아들은 비참한 삶의 자리에서 비로서 제 정신으로 돌아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절망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합니다. 그 때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자리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가부장적인 엄격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가 보게된 것은 그를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는 자비로운 아버지입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그때 아버지는 그를 거절하지 않고 두 팔을 크게 벌려 그를 끌어 안았습니다.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을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맞아들여 다시, 그의 잃어진 자리에 앉힙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무조건적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지난 날의 모든 그릇된 행적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을 받아드렸습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사함',즉 용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아버지의 아픔, 고뇌,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버지의 용서는 단지 지난 날의 잘못된 행위의 묵인이 아닙니다. 은혜의 선물입니다. 은혜의 선물은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의 용서는 단지 과거의 극복만이 아니라, 창조적인 새로운 삶으로 출발입니다. 둘째 아들에게서 그러한 삶의 새 출발은 자기 자신의 비참함에서, 그렇게 된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게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15:21)
우리 인간은 상처입고 병든 자기 자신과 직접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 책임을 부모, 가정, 사회에 전가시키려 합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자아 발견은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신학자 판넨벌그는 "죄의 고백은 언제나 자신에 대한 고백이며, 책임을 지려는 준비의 표현이다. - 죄의 고백은 자유의 행동으로서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참된 자유는 책임적인 자유이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평생 자기 자신의 자아와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생의 실패, 고난은 모두 다른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죄의 고백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죄의 고백이 없는 삶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악순환으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죄를 사함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관계에서 새로운 창조적 관계를 이루어가는 시금석이 됩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는 가장 가깝고, 또 먼 이웃을 용서해 주는 것을 거부하는 삶은 예수의 사죄의 능력이 역사하는 곳으로부터 이탈되는 삶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로흐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실성과 참됨은 거부하지 않았고, 해서도 안 될 용서와 화해에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용서한다는 것은 이웃의 죄를 잊어버리거나 갈등을 억누르거나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으로 허락하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입니다. 역사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의 해답은 용서입니다. 용서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단절된 역사를 진행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함을 받는 데서 시작해서 사함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고 로흐만은 말했습니다.
저는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그의 재임시 폴란드를 방문해서 이차대전 때 희생된 유대인의 묘지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차대전 후 유럽의 역사가 다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로의 사죄와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유럽의 역사는 계속해서 악순환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사죄와 용서는 역사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습니다.
1898년 미국 시카코의 한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10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난 데이지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술 주정뱅이였습니다. 아버지는 밖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아직 어린 아기인 남동생과 여동생을 방바닥 저쪽 끝까지 발로 차버리거나 어머니에게 행패을 부리는 때가 빈번했습니다.
그 때마다 어린 데이지는 방 한쪽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온 몸을 떨면서 마음 속으로 아버지를 몹시 증오하군 했습니다. 어린 데이지는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기는 절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하군 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는 어머니를 내쫓았습니다. 아이들은 집을 나가는 어머니의 뒷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후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데이지의 형제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데이지 역시 결혼하여 여섯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데이지는 어린 시절 결심대로 아버지 처럼 되지 않을려고 술 한방울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아이들에게서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발견했을 때 크게 놀라며 아이들에 혹독하게 매질을 하거나 욕을 하군 했습니다. 데이지는 아이들의 행동에서 조금이라도 그의 아버지의 모습이 비쳐지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것을 받아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딸 마가렛은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기는 이 다음에 절대로 어머니 처럼 되지 않겠다고 거듭 거듭 결심을 하군했습니다. 마가렛 역시 자라서 결혼을 하여 네 자녀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 역시 그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서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발견하면 용서를 못하고 혹독하게 꾸짓거나 매질을 하군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 마이클이 그 연령의 다른 남자 아이들 처럼 행동하는 것을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마가렛의 아들 마이클은 집을 나가게 되었고 그는 대마초와 환각제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 번씩이나 결혼을 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데이지는 그의 아버지 처럼 되지않겠다고 했지만 그의 가문에서는 계속해서 아버지와 같은 삶이 대물림했습니다. 결국 비 은혜의 사슬은 끊켜지지 않고 계속된 것입니다.
왜 데이지의 가문에서 그러한 비은혜의 사슬이 대물림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용서가 없었었기 때문이라는 답변 외에 다른 답변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죄를 사함 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죄의 용서만이 비 은혜의 사슬을 끓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닙니다. 사회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다른 지방으로 갔을 때 그 곳은 그가 계속해서 잘못된 삶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희생자로서, 유혹자로서 함께 참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유혹의 객체와 주체로서 함께 참여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전체의 삶, 그중에서도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가 죄의 상황에 주저앉아 죄를 숭배하고 죄의 힘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무자비에 대한 사랑의 승리,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남, 죄, 지옥, 죽음의 권세의 극복을 의미합니다.
죄사함은 이러한 것과 관련됩니다. 우리가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을 믿는 다"는 고백은 우리 인간이 죄의 권세 아래 계속 매여 살 수밖에 없도록 우리의 미래가 닫혀져 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의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의 시작은 죄를 사함 받는데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사함을 지향해 가는데서 이루어집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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