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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행2:1-13)

by 【고동엽】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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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행2:1-13)

오늘 사도신경의 세 번째 명제인 "성령"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성령과 관련해서 회상되는 몇 가지 인상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부흥사, 열광하는 신도들, 방언이나 예언기도, 간증등입니다.

저는 저의 성장과정에서 어느 한 때 성령을 부흥사들의 전유물로 생각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과 연계해서 성령은 인간을 흥분시키는 어떤 신비스러운 물질로 오해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성령 체험을 몹시 열망했습니다. 제가 성령체험을 갈망한 것은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특별한 사람들처럼 대우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날 한때 이해한 성령에 대해서 한편의 글을 쓴다면 상당한 분량이 될 것 같습니다. 성령은 부흥사들의 전유물도 아니며, 인간을 흥분시키거나 자극시키는 신비스러운 물질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신앙을 갖지 아니한 만 못할 정도로 혼미한 상태에 빠지게 되고, 정신적으로 병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성령은 '창조의 영',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서 임마누엘 하시는 힘이요, 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로 고백하게 하고 받아드리며, 그에게 복종해가게 하는 능력이십니다.


우리가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고 할 때 성령은 창조의 영, 생명의 영, 하나님, 그리스도 영으로서, 그 분이 하시는 새 창조의 사역을 믿습니다. 라는 뜻이 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에는 성령이 지향해 가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성령이 지향해 가는 목표는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저는 이 시간 사도신경에서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고 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령은 지금까지 우리가 듣고 이해한 사도신경의 첫 번째 명제 하나님, 그리고 두 번째 명제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적 사건이 되게합니다.

사도신경 첫 번째 명제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인간 세계로 들어오셔서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는 힘이 성령입니다.

로흐만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은 친밀하게 가깝게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놀라움을 일으키고, 기뻐하게 하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타낸다.

하나님은 시작과 마지막의 주이실 뿐 아니라 현재의 주이시며, 하나님은 높이와 깊이의 주이실 뿐 아니라, 나의 영혼의 주이시며, 피조물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내가 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그는 바꿀 수 없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과 교제를 원하시고, 우리 인간을 그의 교제의 상대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의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하고, 그의 창조의 사역에 참여하게 하고, 그의 뜻에 복종해가게 하십니다.

그 다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재적 사건이 되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분명히 지난 역사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지 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에는 여전히 죽음, 질병, 전쟁과 같은 온갖 어두운 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은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워 가신 것으로 끝났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의 사역이 이 역사의 현장에서 계승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사도신경에서는 세 번째 명제인 성령으로 답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시공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을 계속해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가 하늘로 올라가신 후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에는 공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 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전 인류로, 전 피조물로 확대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별을 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계 속으로 새롭게 진군해서 들어오시는 시작이었습니다. 그 일이 주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계승되어지고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창조의 일은 인간의 깊은 내적인 세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은 정처 없이 허공에 떠다니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먼저 인간의 내적 세계에 깊이 관여하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이러한 특성과 관련해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고전3:16) 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진리 영", "사랑의 띠", "자유의 영"이기 때문에 강요가 아닌 자유하는 가운데서 인간을 새로운 가치, 목적,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부활의 희망의 지평 위에 올라서게 합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분명한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이 제 정신이 들고, 진정 인간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기 실현은 성령의 내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의 내재 가운데서 자신의 비참함을 보고, 좌절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계시는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올라서게 되는데서부터 인간의 진정한 자기실현이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새 창조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사건이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 우리를 찾고, 기다리시는 분,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단순히 그렇게 말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그러한 분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학생시절에 전도사님으로부터 들은 감동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남편을 일찍이 여의고, 유복자로 키운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와는 달리 얼굴 형체가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아들이 어린 유아시절이었을 때에는 어머니의 얼굴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자라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아들에게는 그러한 얼굴을 가진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아들이 학교에 가면 아들의 어머니를 본 친구들이 일그러진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놀려댔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울면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동댕이치면서 내일부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 사연을 물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얼굴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다른 친구의 어머니들은 다 예쁜데 어머니는 왜 그렇게 생겼어?"하고 아들은 더욱 슬프게 웁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장롱 서랍에서 앨범을 꺼내 첫장에 있는 젊은 부부의 사진을 아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얘야, 이 사진을 좀 보렴. 이 사진에 있는 여자가 이쁘냐, 미우냐."고 물었습니다.
"엄마, 이 여자 너무 예뻐."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얘야, 이 여자가 바로 나란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엄마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게 미워."
어머니는 아들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면서 지금까지 숨겨왔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내가 너를 뱃속에 배었을 때 그 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시고, 나는 너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세상에 낳았다."

"어느 날 너를 안방에 재워놓고 집 앞에 있는 빨래터에 나가 빨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니 바로 네가 누워 있는 우리 집에 불길이 휩싸여 있지 않겠니. 달려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와서 불을 끄고 있었고, 너는 그대로 방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불길을 헤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너를 이불에 싸서 밖으로 뛰어 나오다, 그만 불길에 이렇게 화상을 입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을 다 듣고 난 아들은 그 다음부터 그의 어머니의 얼굴이 하나도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친구들에게 용감하게 훌륭한 어머니를 자랑했습니다. 아들은 일그러진 어머니의 얼굴 모습에서 자기를 극진히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우리의 구세주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게 할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새 창조의 일은 인간의 내면 세계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거기에만 국한되거나,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운동은 인간 밖으로, 전 세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자극하고 이것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마음만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영의 지평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형체가 없는 무 형체의 환영이 아니고, 성육신을 목표로 하는 그의 몸을 창조하는 창조의 영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령이 창조하는 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갈5:19∼21)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 절제" (22∼23)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대조적인 몸이 있습니다. 육적인 몸과 영적인 몸입니다. 육적인 몸은 음행, 호색, 우상숭배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음행, 호색과 같은 것은 관념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몸의 행위입니다.

그 것과 대조되는 영의 몸은 사랑, 희락, 화평의 열매입니다. 열매는 씨앗이 죽어 싹이 나고 그 싹이 줄기가 되고 그 줄기에서 잎이 생겨 꽃이 피고, 그 다음 열매가 됩니다. 열매는 씨앗의 구체적인 형체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몸입니다.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개개인이 지체라고 하면 그 지체가 모인 공동체가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성령이 계시는 장소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의 탄생을 보게 됩니다. 그 몸은 이 세상의 몸과는 달리 사랑, 희락, 화평의 몸입니다. 성령 강림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 세상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지 않는데서 오는 좌절과 실망,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교회의 포로가 아닙니다. 성령은 교회의 부정적인 면과 함께 소멸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그가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하면 성령은 인간의 이기심, 종족주이, 지역적 편파성에 따라 불어가지 않고 그러한 장벽들을 허물고 새로운 관계로 이루어지는 새 백성, 새 사회를 이루어가는 방향으로 불어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편파성과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교회의 모습에 묶여있지 말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가는 그 방향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방항을 따라 가야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희망이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선교입니다.

한편 성령은 이 세상에서 마땅히 구할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우리의 희망과 기쁨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인 교회 가운데 계시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는 주님의 몸으로서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제 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몸으로서 이 세상에서 선교적 사명을 수행해 가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맺어가면서 이 세상의 피조물과 수평적 관계를 이루어 가는 본질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성령은 기독교인의 전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바르게 사용하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창조적 사역은 교회안에 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사역은 언제나 피조물이 압박 받고, 고통당하고 있는 그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시작된군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기쁨, 평화,희망이 있는 반면, 탄식과 고통, 세상을 위한 눈물의 중보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개인화, 교리화, 제도화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개인, 교리, 제도화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지항하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사의 목적 자체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로흐만 교수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비밀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의 상태를 지시한다. 첫째는 율법 아래있는 상태이고, 둘째는 은혜 안에 있는 상태이며, 셋째는 곧 다가오는 더 풍성한 은혜의 상태이다. 첫째는 노예적인 상태이고, 둘째는 봉사하는 삶이고, 셋째는 자유 안에 있는 상태이다. 첫째는 두려워하는 노예의 상태이고, 둘째는 신앙안에 있고, 셋째는 사랑 안에 있는 상태이다. 첫째는 종들의 상태를, 둘째는 자유의 상태를, 셋째는 친구의 상태를 뜻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새 창조로 나타난 것이 거룩한 공교회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그 새 창조 가운데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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