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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성령부흥의 재연 (행 2:1-4)

by 【고동엽】 2022. 9. 30.

평양 성령부흥의 재연   (행 2:1-4)

금년 2007년은 평양에서 영적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07년 평양에서 영적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신 것과 같이 100년 전에 평양에서 아주 강력한 성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탁하신대로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때 본문이 말씀하는 것처럼 그곳에 성령이 아주 강하게 강림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제자들은 아주 전무후무한 성령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얼마나 강하게 임하셨는지 성령이 임하시는 소리가 들렸을 정도이고 그 모습이 불의 혀같이 임하여 온 방에 열기가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에게 일제히 방언이 터지고 각 사람들이 성령의 임함을 눈으로 확인할 정도로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서의 성령의 강한 역사의 불길은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퍼져나가고 사마리아로 퍼져나가고 급기야는 로마로, 구라파로, 구미각국으로 퍼지고 그 성령의 열기는 복음을 싣고 마침내 아시아로 퍼져나가 오늘 우리나라에 까지 전파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사후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성령의 역사는 마침내 기독교가 탄생하게 되고 교회가 탄생하게 되어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대 역사로 발전하여 나가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짧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885년도 이니까 기독교의 역사는 이제 120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결교회의 역사는 이제 꼭 100년이 되었습니다. 그 짧은 역사가운데 1907년에 있었던 평양의 성령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운동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모습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성령강림이 복음을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하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만들었던 것처럼 평양에서 있었던 성령부흥운동은 마침내 이 땅의 교회들을 급성장하게 만들었고 조직을 확대시켰고 한국의 기독교로 하여금 마침내 전국적으로 확대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성장은 마침내 기독교만 부흥시킨 것이 아니고 일제의 거센 압력도 극복해 나가게 하는 한편 6,25의 고난의 시련도 극복하게 하는 힘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때 이렇게 성령의 부흥이 일어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

당시 약소국인 조선은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비극적 상황에 놓여있을 때입니다. 1895년 일제는 한국의 영구식민화를 위해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합방하려고 할 때 민비가 너무 똑똑하고 조리 있게 앞에 나서서 반대를 하니까 방해물로 여긴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통해서 8월20일 날 경복궁 침실에 들어가 민비를 죽이고 그 시체를 썰고 자르고 찢어서 도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신을 녹원으로 끌고 나가 이불을 덮어씌우고 기름을 끼얹고 불로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그 일을 전해들은 백성들이 얼마나 낙심하며 분노했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좌파와 우파가 한창 싸울 때인데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싸움을 그치고 모두 합심해서 민란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같은 해 10월에 일어난 을미의병입니다. 그래서 1895년은 우리민족이 잊을 수 없는 국치의 해입니다.

그러고 나서 10년 후인 1905년 11월에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독립국으로서의 자격이 상실됨을 의미합니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에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러일전쟁을 위하여 노동자들이 강제로 징발 당하였고 1907년에는 한국의 경찰과 군대가 해산되었습니다. 그 일로 한국은 완전히 국권이 일본에게 장악당하여 국가로서의 기능이 정지되었습니다. 그때 한국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이준열사가 만국회의에 가서 할복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일본은 이 일로 잔뜩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고종황제가 밀사를 파견하였다고 트집 잡아 같은 해 7월 고종황제를 마침내 강제로 폐위시켰습니다. 그리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을 이루어 마침내 500년을 이어온 조선왕조는 비극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민족이 얼마나 낙심하고 뜻을 잃고 미래를 잃고 희망을 잃고 꿈을 잃은 채 허망한 마음으로 살아갔겠습니까. 이것이 그 당시의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적 환경이었습니다.

당시 종교적 상황

당시 나라를 잃고 서럽게 울고 있던 백성들에게 오직 희망은 교회뿐이었습니다. 윤동주는 그 뒤에 태어난 사람이지만 그때를 생각하고 “떠오르던 태양이 방금 교회 종탑위세 머물러 있습니다”라는 시를 썼습니다. 여기 떠오르는 태양은 다가오고 있는 독립의 기운을 말하고 교회종탑은 오늘의 희망은 오직 교회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 시대는 교회밖에 기댈 곳이 없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새로운 영적 동력으로 일어서게 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한국교회는 이 같은 국가적 재난과 민족의 고달픈 삶에 힘이 되어 주기에는 아직 영적으로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일어난 것이 평양에서 일어난 성령부흥운동이었습니다.

회개운동

2천 년 전 예루살렘이 그런 상태였습니다. 예수님 사후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얼마나 삭막하고 흉흉하였습니까. 사도들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낙심하였고 로마의 압제는 거세어져 갔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새 힘을 주시고 능력을 입혀주셨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의 형편이 가장 열악하고 어려울 때 평양을 중심으로 성령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공허하고 무엇인가 갈급한 마음들로 살아갈 때 성령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1907년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회개운동에서 시작됩니다. 1903년 함경남도 원산 지방에서 남감리교 중국선교회 소속 화이트(M, White)선교사가 한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영적무장을 위해서 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한 주간 동안 특별기도 주간을 설정하고 선교사들이 한곳에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원산에서 선교하던 남감리교 소속 하디(R, A, Hardie)선교사가 자신의 선교실패담을 고백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이 선교에 실패한 것은 기도하지 않아서이고 교만해서 실패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조선인을 볼 때 마치 짐승처럼 바라보았노라고 회개하셨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진솔하고 솔직하게 고백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 하디선교사의 고백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백을 듣고 여기저기서 너도 나도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선교사 수련회는 눈물의 회개하는 수련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간증을 기점으로 회개의 불길이 점화되어 1907년 영적부흥운동으로 불을 댕겼습니다. 그 일후에 하디선교사에게 평양 서울 제물포 등으로부터 부흥회 요청이 있었고 그는 집회 때마다 먼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 같은 회개운동이 번져가다가 마침내 1907년 정월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를 통해서 그 절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

이 성령운동의 시작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기도회와 성경공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중심에는 길선주 목사가 있었습니다. 길선주는 원래 장로였다가 후에 목사가 되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20년간 목회하였습니다. 길선주는 목회에서 새벽기도를 중시하였고 그의 새벽기도운동이 마침내 성령부흥운동을 일으키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디선교사의 회개와 기도회 모임과 길선주의 새벽기도회 운동 그리고 이것이 사경회와 맞물리면서 1907년에 대부흥운동이 절정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회개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성령의 감동이기 때문입니다.  

부흥운동이 끼친 영향

회개와 도덕성 회복

이 참회와 회개의 영적부흥운동은 기독교의 뿌리가 이 땅에 깊숙이 내리도록 하는 작용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개인의 철저한 회개는 가정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가정의 건실화, 가정의 경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개인의 변화와 가정의 변화는 사회를 개조시키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때 회개운동은 마침내 개인적인 죄뿐 아니고 사회적인 죄인 축첩, 도박, 음주, 흡연, 노예제도까지 회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축첩반대운동, 금연운동, 금주운동, 도박근절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와 같은 회개운동은 급기야 각 급 학교로 번져서 숭실, 숭덕, 광성, 숭의학교 학생 2,500여명에게 이르렀고 또 평양신학교에도 번져서 마침내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그 결과 이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평양은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평양은 그때부터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주일에는 불신자들도 가게 문을 열지 못할 만큼 변화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런 평양의 대부흥운동의 결과로 교회가 200% 증가하고 전도소 222%, 세례인 198%, 학습인이 329% 가 증가하여 모두 267.84%의 증가를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흥운동으로 부흥운동기간 동안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3,000명에 이르렀습니다. 그 시점에 교회들은 전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고 중국과 일본 그리고 멕시코에 사는 동포들을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전도와 나라사랑 운동

그리고 이 운동은 마침내 나라사랑의 정신을 일으켜 독립운동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때 성령운동으로부터 힘을 입은 한국의 기독교는 마침내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시련의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한국의 기독교가 비로소 민족교회로 발전하게 됩니다. 민비의 시해로 교회들이 연합해서 합동으로 추모예배를 드리고 고종이 환어할 때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도로가에 모여 시위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때 기독교는 민족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민비시해가 있던 해인 1895년에서 1905년까지 10년 동안 530여명의 신자밖에 없었던 기독교가 126,057명으로 증가하고 성서공회는 144,657권의 성서를 찍어내게 됩니다. 그때 특히 교회가 발전한 곳은 평양지방이었고 또 정주 같은 곳에서는 2만 명의 신자가 증가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정주의 인구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영적부흥운동과 교회들이 민족과 아픔을 함께 하는 민족교회화 하면서 급기야 3,1운동에 교회들이 모두 가담하게 됩니다. 속에서 영적각성운동과 기도운동 그리고 회개운동을 통해서 주어진 영적인 힘과 도덕적인 힘이 축적되어 있다가 그 힘이 마침내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3,1절 때 저항운동으로 폭발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대거 3,1운동에 가담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3,1절과 신사참배 강요문제는 우리 기독교에게는 힘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단합하게 하는 참 중요한 사건입니다. 3,1운동은 우리민족과 기독교에 상당한 저항운동을 만들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운동은 신앙인들로 하여금 신앙의 연단과 항거를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 일로 우리나라 지성인들에게 기독교는 상당한 영향을 끼쳐주었습니다. 그때 백락준 같은 분은 “이 시대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해서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 결과 3,1운동에 길선주를 비롯해서 다수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었던 이재명이 1909년에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고, 전국여성들이 반지를 빼서 바쳐 국채를 갚자는 탈환회 운동이 일어났고,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물산장려운동 등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들은 대부분 당시 기독교인들을 주축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12년에 일제가 날조하여 기독교인을 탄압한 105인 사건에서 700명이 체포되었는데 그중 기독교인이 600명이었고 투옥된 사람이 123명이었는데 전부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중 16명이 기독교이었고 그중 목사가 13명이었고 평신도가 3명이었습니다. 또한 시위자중 체포된 주동자 및 참가자가 불교인이 220명이고 유교인이 345명이고 기독교인이 5천명이었습니다. 3,1운동이 끝난 후 중국 상해에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8명중 7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때가 한국의 기독교 역사상 기독교 발전이 가장 눈부시게 나타났을 때이고 그리고 우리민족 앞에 가장 빛나게 나타났던 때입니다. 또한 한국의 기독교가 당시 나라를 잃고 꿈을 잃고 미래를 잃고 살아가던 우리 민족에게 소망을 주고 희망을 주었던 때입니다.

오늘 현재 우리나라는 역사상 가장 안정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은 세계 10위권입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은 나라에서 모든 에너지 97%를 해외에 의존하는 나라에서 자동차 홍수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언뜻 보면 풍요로움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좀 깊숙이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심각하게 영적으로 빈곤과 고갈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도 외형은 늘어났지만 내면으로 들여다보면 영적인 빈곤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내부적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가정들이 교회들이 각 개인들이 얼마나 갈등하고 분열을 일으키고 불필요한 일에 힘을 소진하고 있습니까.  단체에 갈등이 일어나고 분열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평안해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이것은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외부의 압력이나 수난이 도전해 와 보십시오. 어디라고 서로 불필요한 일로 갈등하고 분열하고 그러겠습니까.  

그것은 그만큼 평안해서 기도하지 않아서 내적으로 축적된 영적인 힘이 소진되고 그 자리에 인간적인 마음들이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나 나라나 풍성하고 넉넉하기는 한데 내적으로는 심각하게 영적 빈곤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빈곤하게 되면 불필요한 일에 마음을 쏟기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시대는 외화내빈의 시대입니다. 모두가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내면의 상태는 모두 빈곤합니다.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자꾸만 갈등이 일어나고 불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평양대부흥운동이 100년 전에 있었지만 이 운동이 오늘에 다시 재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2천 년 전의 다락방의 성령강림을 우리는 또 다시 오늘 여기에서 재연시켜야 합니다. 평양에서 있었던 그 부흥의 바람이 오늘도 이 땅에서 재연되어야 하고 다시 한 번 불어야 합니다. 강한 바람이 한번 불고 가면 먼지와 탁한 공기를 쓸어가듯이 강한 비바람이 지나가면 공중의 미세먼지와 탁해진 공기를 말끔히 씻어내듯이 이 땅에 성령의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힘을 통해서 제 2의 도약을 맞이하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 길만이 오늘 다시 기독교가 재탄생하고 그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힘으로 이 나라를 새롭게 일구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사순절의 기간에 많이 기도하고 성령의 강한 내주하심을 힘입어 우리의 신앙이 새로 거듭나고 능력을 힘입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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