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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하게 하는 직분 (고후 5:18-19)

by 【고동엽】 2022. 9. 30.

화목하게 하는 직분   (고후 5:18-19)

본문을 보면 화목이라는 말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신학적인 용어로 헬라말로 “카탈라게”라는 말인데 원래는 “화해”라는 말입니다. 이 화해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로는 “쌍방 간에 적의가 사라진 관계”를 의미하고 신학적인 의미로는 “범죄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목 제물로 오심” - 18

본문 18절을 보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했습니다. 원래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죄로 인하여 간격이 생겼고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 못하고 제물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스로 제물이 되심으로 이 벽을 허무시고 화해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 그런 제물 되심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목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 됨을 원하시고 협동을 원하시고 화해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 되고 일치를 이루고 화해를 이룰 때 일어나고 발생하고 성취됩니다. 그래서 사탄이 자꾸만 이 하나 됨을 방해하고 나누이게 하고 분열하게 하고 불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할 수 있으면 불화하게 만들고 분열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불화를 일으킬 때는 “이것이 사탄이 나를 조종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탄은 너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나를 통해서도 뜻을 거역하게 하고 방해하게도 합니다. 불화, 갈등, 분열, 나누임 이것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들입니다. 이 요소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가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탄의 조종을 받고 불화를 야기하거나 분열을 이루는 일이 없는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 가정생활을 하면서, 또 교회생활을 하면서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는 일 보다 오히려 평화를 이루고 화해를 이루는 일에 열중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입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평화를 외쳤습니다. 그것이 “Pax Romana”라는 슬로건이었습니다. 그 말은 “로마를 통해서, 로마에 의해서 세계가 평화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정복자의 칼 밑에서 말하지 않고 조용히 순종하는 평화입니다.  그것이 “팍스 로마나” 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힘으로 조용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그 평화를 완벽하게 창칼이 아닌 복음으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막힌 담을 허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이루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화목제물이라고 부릅니다. 화목제물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드려지는 제물을 말합니다. 요일 2장2절을 보면 “그는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화목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침내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화목은 누군가가 나서서 이루어야 가능합니다. 이 화목은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처럼 누군가 나서서 제물 되거나 헌신을 하거나 수고가 있어야 화목도 화해도 이루어집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도 누군가가 나서서 예수님의 희생처럼 희생해야 이루어집니다. 이웃과의 화해도 중재가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국가 간의 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화목의 직분을 주심” - 18

예수님은 자신이 화목제물이 되신 것뿐만 아니고 본문 18절을 보면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많은 일을 하셨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일을 하셨는데 그것이 화해의 사역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여 화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자유스럽게 나아가게 길을 터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화해의 직분”입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화해하게 되었으면 이제는 수평적으로 화해를 이루는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직분입니다. 생각하면 최고의 직분이고 영광의 직분입니다. 이 세상에 보면 중재자라는 역할이 있는데 이 중재자들은 대부분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역량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 중재자라는 자리는 존경받는 자리이고 인정받는 사람이고 하면 할수록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황공하게도 우리에게 그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 화해자의 역할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될수록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내는 일이 하나님과 화해를 더 많이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우냐 하고 칭송했습니다. 그런 뜻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사도된 것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사도직에 대해서 감격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사도직의 근본적인 사명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하는 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다가가게 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들고 또 세상의 많은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냄으로 화해되게 하는 이 전도자가 된 것을 그렇게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에는 십자가를 볼 때 저주의 십자가로 보았습니다. 예수를 사람들을 선동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선동자 내지는 이단자로 보았습니다. 부활은 사람들을 현혹하게 하는 속임수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어느 날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고 경계하던 예수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그 진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진실을 알게 되고 뜻을 알게 된 후에 그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3년 동안 칩거하며 그 십자가와 부활을 되새기며 자신을 추스른 다음 그는 그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여기게 되어 마침내 그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인생을 바쳐 헌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침내 오늘 본문에서 자신이 하는 전도의 직분을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화해시키는 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이 전도 즉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화해된 것처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이 일이 가장 영광된 직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화해가 무엇인지 화목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화해가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관계의 삶을 살아갈 때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화해를 만드는 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직분일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은 반목과 불화와 갈등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 마다 불화와 갈등이 충만하고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사회에도, 국가에도, 개인 간에도 이 불화와 갈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화해 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중재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누군가가 나서서 화목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이 중재를 이루고 화해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도 참 영광된 일입니다.  

트리나 폴리스라는 사람이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를 썼습니다. 이 동화는 두 마리의 애벌레가 생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내용입니다. 줄무늬 애벌레와 노란 애벌레는 애벌레로서 인생을 살고 나중에는 아름다운 나비가 됩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이 벌레들이 처음에는 애벌레로서 어두움과 더러운 곳에서 살아가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지만 나중에는 나비가 되어 맑은 공중을 날며 꽃들을 찾아다니며 희망을 주는 나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애벌레는 다시는 애벌레가 아니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나비로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서 공중을 날아다니며 꽃들을 수정시키고 열매를 맺게 하는 아주 중요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이유를 하나씩 주셨습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에 유익을 주어야 한다는 한 가지 사명입니다. 그 유익이 모든 존재들로 하여금 화합하게 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의 벌도 나비도 새들도 모든 곤충들도 모두 그런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창조의 뜻이기도 합니다.  

본문을 보면 오늘 우리에게 그 직분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우리”라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세상 누구라도 하나님과 화목했으면 그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활용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화목을 만드는 화신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이 화평과 화목과 화해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직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좀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좀 더 성숙하지 못하면 그런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고 공동체를 우선하는 정신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화해자로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고 누구를 위해서 화목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내가 온전한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화해를 이루는 방법” - 19

화목을 이루고 화해를 이루는데 어디에 목적을 두고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입니다. 여기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안에서” 라는 의미가 여러 번 나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로서 났으며”(18)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8)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19). 화목이나 화해는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내가 강하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문제를 보면 모두 네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화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않습니다. 그러기에 화해의 모든 기준이 예수이고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의 화해의 기준이 “예수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 안으로 들어갈 때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화해를 말씀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해와 화합과 일치를 위해서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푸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푸셨습니다. 죄와의 문제도 푸셨습니다. 죽음과의 문제도 푸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직분이라면 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이고 영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이 역할을 이룸으로 최고의 영예를 입어야 합니다.

“화목을 강조하는 이유”

그것은 이 갈등과 불화가 이 세상을 파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 불화와 갈등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이 세상을 자기의 뜻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소리 없이 파괴해 나갑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 불화는 모든 건전한 요소들을 마구 파괴합니다. 건강한 영적생활을 파괴합니다. 좋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건전한 정신을 파괴합니다. 이 세상의 화합을 깨고 사정없이 부서지게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으로 하여금 온통 불화와 갈등의 세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파괴되고 교회가 파괴되고 수많은 공동체들이 파괴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별의 별 갈등들이 다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모”라는 모임이 참 많습니다. “노사모”라는 모임도 있습니다. “교사모”도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말입니다. "떡사모"도 있습니다. “떡 볶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입니다. “억사모”도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있기에 이런 모임까지 만들었겠습니까. 이 세상은 갈등과 분열의 세상입니다. 가는 곳 마다 갈등과 분열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갈등은 단순한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이 세상을 사정없이 파괴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건강하던 공동체를 병들게 해서 흩어지게 합니다. 가정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가정의 화합을 깨고 마음들을 불화하게 해서 스스로 흩어지게 만듭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또 영적생활을 파괴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서지게 만듭니다. 가까운 예로 여러분들이 부부싸움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주간에는 주일날 예배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 있어도 찬송도, 기도도 입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그러면 그날 예배는 망치는 것입니다. 불화와 갈등은 이렇게 파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사탄이 인간관계를 자꾸만 부서지게 해서 관계를 악화시키고 불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냥 부서지기만 해도 괜찮습니다. 부서질 때는 아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부부가 싸움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 부부가 방송에 출연했을 때 사회자가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부부싸움 해 보셨지요” “ 예, 해 보았습니다” “그때 이혼하고 싶은 생각 안 났습니까” “그런 생각 안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아무 생각을 안 하셨다는 것입니까.” 그때 이 부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안하긴요, 죽이고 싶었죠.” 이 대목이 문제입니다. 이혼하고 싶은 생각을 훨씬 넘어서 아주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신의 파괴요 영적인 파괴요 정서와 질서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마음으로만 끝나면 괜찮은데 어떤 부부들에게는 그것이 실제상황으로 번져버립니다. 그래서 실제로 증오하고 그래서 마침내는 이혼하고 더 무서운 과정으로 발전해서 나중에는 죽이는 일도 발생하지 않습니까. 이 갈등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이 갈등과 불화가 마침내 이렇게 무서운 불균형을 낳게 합니다. 이 불균형이 결국 이 세상을 망치게 하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화목을 이루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이 불화와 갈등을 치유하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불화를 치유하여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화목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출처/이정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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