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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2:1-4)

by 【고동엽】 2022. 9. 24.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2:1-4)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대인관계에서는 어떻게 표현이 되어야 할지를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보면, 있는 자 앞에서는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반면에 없는 자 앞에서는 거만해지기 쉬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지 따뜻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고, 한 사람 한 사람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귀하게 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대문호였던 셰익스피어가 한 번은 식사를 하기 위해서 어느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셰익스피어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빗자루를 들고서 마당을 쓸고 있던 종업원 가운데 한 사람이 쓸던 빗자루를 갑자기 집어던졌습니다. 그리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갑작스러운 광경에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얼떨떨해졌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종업원에게로 다가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내가 식당 문을 들어서면서 실수한 것이 있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내게 좀 가르쳐 주게나."
그러자 식당 종업원은 죄송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제 자신이 너무나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이나 저나 똑같은 남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셨고, 저는 그저 선생님이 지나가는 발자국이나 쓸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제가 저 자신에 대해서 미운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 소리를 들은 셰익스피어는 청년의 어깨를 다독거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네나 나나 실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걸세. 생각해 보게나. 자네는 빗자루를 들고서, 나는 펜대를 들고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 우주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네나 나나 똑같은 것일세."
그 소리를 듣고서 청년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던졌던 빗자루를 다시금 들고서 바닥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상16:7에 보면,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외모적으로 무엇을 갖추었다고 우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는 내 외모를 이 정도 갖추었으니까 특별해야 돼. 다른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비록 우리가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죽어 살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우리가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아름답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의 외모를 보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외모를 갖춘 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웃어른을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젊은 자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외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을 만났습니까? 그러면 더더욱 우리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가 용기를 잃지 않고 힘을 내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야고보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대인관계의 원리입니다.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원리대로 우리의 대인관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취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사도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한 형제된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외모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할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기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영광의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늘의 영광을 다 내버리고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무런 외모도 갖추지를 못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자들에 의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흠모할 만한 외모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친히 이 세상에 오실 때 외모를 갖추고 오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도 인정했던 사실입니다. 마22:15∼16을 읽어봅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람들도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결단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생각해 봅시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에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 곧 사람들에게 종교와 도덕과 철학과 삶과 윤리를 가르치던 랍비였습니다. 외모로 보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를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니고데모야, 너는 거듭나야 한다.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
외모적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니고데모를 향해서 예수님은 신앙의 가장 초보가 되는 중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음장인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대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외모적으로 보면 형편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 배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또 그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흠이 많은 여인이었습니까? 이미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합법적인 남편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남자와 그냥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마리아 여인은 외모적으로 볼 때 얼마나 형편없는 여인이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는 예배 장소에 대해서 나누셨습니다. 신학적인 문제를 나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오히려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는 거듭나라고 말씀하시고, 학식을 갖춘 니고데모를 향해서는 신학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학식을 갖추고 또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외모 그 자체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사람을 거듭나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친히 외모를 취하고 이 땅에 오지 않으셨고, 또 사람을 대할 때도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자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누구라도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우리는 우리가 대하는 사람을 소중하고 귀하게 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건국대학교의 명예교수이신 류태영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36년 전라북도 임실이라는 산골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때 농촌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는, 외모적으로는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굳세게 의지했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구두닦이를 하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집 근처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주일뿐만 아니고 새벽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교회는 보잘 것 없는 소년이지만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은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소년이 잘 되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소년의 마음 속에 꿈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농촌출신이니까 어찌하든지 농촌을 한 번 잘 살게 하는 방법을 공부해야 되겠다. 유학을 가야되겠다." 이런 꿈이 그의 마음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진 농업국인 덴마크로 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자기의 꿈을 영어로 적어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그 편지를 덴마크로 보내기는 해야 되겠는데 누구에게 보내야 될지 몰랐습니다. 그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이왕이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아들이니까 제일 높은 사람에게 보내자!" 그래서 편지봉투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프레드리히 9세 국왕 귀하, 코펜하겐, 덴마크."
편지를 보낸 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돈도 없고 배경도 없습니다. 저의 유일한 배경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저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니 주께서 저로 하여금 유학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세요."
교인들도 보잘 것 없는 소년의 꿈을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더불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낸지 40일 만에 답장이 왔습니다. 덴마크 국왕의 보좌관이 쓴 편지였습니다. 자기 나라에 와서 공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편지에는 비행기표까지 함께 넣어왔습니다. 시골뜨기 소년이 하나님의 은혜로 유학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덴마크로 갔습니다. 거기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는 더 배울 것이 없게 되자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또 편지를 썼습니다.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그는 키부츠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그 뒤 그는 귀국해서 건국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농촌전문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명예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머슴의 아들이었습니다. 시골뜨기였습니다. 구두를 닦으면서 고학을 하던 소년이었습니다. 외모적으로는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소년이 어떻게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겼겠습니까? 교회가 그를 따뜻하게 사랑으로 품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온 교우들이 진정 어린 마음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놀라운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외모를 보고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족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그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바라보며 그를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도 야고보는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2∼3절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방문객이 찾아왔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새신자 두 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손에 금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옛날에는 남자나 여자나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요즘에 사용되는 도장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금가락지를 끼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유한 사람입니다. 신분과 지체가 높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또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외모를 갖출 때로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더러운 옷을 입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가 입은 옷은 단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옷을 입고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옷은 땀에 젖었을 것입니다. 또 그는 밤에 잠을 잘 때도 그 옷을 입고 때로는 땅바닥에 누워서 잠을 잤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옷에는 먼지도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옷은 더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도 야고보가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올 때 왜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와서 으스대느냐? 좀 검소하게 옷을 차려입고 와야지!" 이것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면서 더러운 옷을 입고 왔느냐? 단정하게 빨아 입고 와야지!" 이것을 지금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자로 사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가난하게 사는 것이 무슨 허물입니까? 부자가 되어서 외모를 갖추는 것이나, 가난하기에 형편이 되지 못해 외모를 갖추지 못한 것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3절에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봅니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옛날에는 회당에도 의자들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바닥에 앉아서 책상다리를 하고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더러는 뒤에 서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안내하는 사람들이 얼른 의자를 내주면서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습니다. 친절을 베풀어준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당연히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도 똑같은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내하는 자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의자도 내주지 않고 또 의자에 앉은 자가 발을 올려놓는 발등상 조차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방석도 준비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경멸스러운 어투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거기 섰든지 발등상 아래 앉아서 예배를 드리든지 알아서 하시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으면 가난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 외모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대우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 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외모에 구분 없이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마음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모에 따라서 사랑과 친절을 구별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라함 링컨이 하루는 집무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누구를 만나야 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급히 나오다가 꼭 챙겨야 될 서류 하나를 빼놓고 왔습니다. 백악관 앞에 있는 안내실을 지나갈 때 그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내실에서 근무하는 수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급히 나오다 보니까 서류 하나를 빼놓고 왔는데, 자네는 젊으니까 얼른 가서 가져올 수 있을걸세. 내 책상 위에 보면 노란 봉투 하나가 있으니 그것을 좀 가져다 주게나."
그래서 수위가 명령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수위가 돌아와 보니까 놀랍게도 대통령이 수위인 자기 자리에 앉아서 자기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아니 각하께서 이런 하찮은 자리에 앉아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자네가 나를 위해서 대신 일해주는데 내가 자네 자리에 앉아서 대신 자리를 좀 지키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큰 집에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커집니까? 작은 집에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작아집니까? 우리가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자리가 높아진 것이지 사람 자체가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두 똑같은 사랑을 받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한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외모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대우하려고 생각하지 맙시다. 부유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대로 친절히 대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친절히 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할 때 어떤 잘못을 범하는지 살펴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두 가지 잘못이 나옵니다.
첫째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목사만 사랑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장로님도 사랑하시고 권사님도 사랑하시고 처음 나온 새신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남자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배운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충청도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경상도 사람도 역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가대원들도 사랑하시거니와 주일학교 교사들도 역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이처럼 구별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 의자를 내주면서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더러운 옷을 입고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의자도 발등상도 내주지 않고 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그렇게 무시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끼리 서로 사람을 구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둘째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할 때 그 배후에 깔려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 사람과 친해지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래서 그 사람이 내게 이득이 될 것으로 판단되면 그와 친해집니다. 그러나 그가 내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는 눈 아래로 보아버립니다. 그러니 그 생각이 얼마나 악합니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2:9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흑인이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앞에서 안내를 하던 백인 집사들이 못 들어가게 그를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백인교회입니다. 흑인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흑인교회로 찾아가세요."
흑인은 어쩔 수 없이 그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되돌아서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방금 교회로 들어가시는 것 같던데 왜 도로 나왔습니까?"
흑인은 슬픈 듯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랬군요. 실은 나도 백인이 아니라고 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흑인은 눈을 들어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흑인은 그 분이 환상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보고 무시해 버리면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2:13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우리가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 외모를 갖추지 못한 자를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외모 때문에 그 사람을 무시해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무시해 버리고 마실 것입니다.
세상은 각박합니다. 세상은 살벌합니다. 그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우리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원리, 대인관계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의 외모에 따라서 차별대우하지 말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면서 누구든지 소홀히 대하지 말고 따뜻한 마음을 품어서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외모를 보지 마십시다. "이 사람 속에도 예수님의 형상이 있구나! 이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이구나!" 이것만 생각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말고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입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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