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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다렸거늘 (이사야 5장 1-7절)

by 【고동엽】 2022. 9. 24.

내가 기다렸거늘  (이사야 5장 1-7절)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적지 않는 시간을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데에 보냅니다.
차가 신호등에 걸리면 파란불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산 후에 계산대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외출할 때 아내가 또 다시 화장대 앞에서 소위 '마지막 5분'의 손질을 하면서 시간을 끌 때에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하고,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면 대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기다리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그저 시간만 흘러가면 되는, 지루하기는 해도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 기다림일 뿐이지만, 보다 깊은 의미가 부여되는 기다림이 있는데 그것이 곧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경우입니다.
  아내가 분만실에 들어갔을 때 밖에서 남편이 기다리는 것이나 자식이 대학교에 지원해 놓고 그 결과를 함께 기다리는 시간은, 앞서 나온 아내의 외출 준비나 자식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한 기다림 역시 바로 그런 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2절과 4절 및 7절에 보면 "바랐더니," "기다렸거늘," "바라셨더니"라는 말들이 나타납니다.
  비록 우리나라말 성경에는 조금씩 다르게 번역해 두었지만 원어 성경에 의하면 이 세 동사가 원래는 다 꼭 같은 말, '기다리다(wait)'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이 단어를 그냥 '기다리다'라고만 번역하지 않고 두 군데에서는 '바라다'라고 번역한 이유는, 이 기다림이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기대가 포함된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들에서도 역시 이 단어를 그냥 'wait'라고만 번역하지 아니하고 'look for' 즉 '기대하다, 바라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본문의 문맥을 보면 그분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바라셨더니, 여호와께서 기다리셨거늘'이라는 말씀들은 하나님께서도 '무엇'인가를 기대하시며 기다리시는 '시간'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며, 그것을 위해 기다려주시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완벽하게 베풀어 주신 후에 교회생활을 통한 열매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본문 1절부터 2상반절에 "1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a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내가"라는 말은 이사야 선지자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며 "나의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은 나중에 7절에서 밝혀 주고 있는 대로 '이스라엘'을 뜻하는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들은 마치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을 가꾸는 것처럼 실로 완벽하고도 지극히 정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2절에 나오는 말씀은 당시 포도원을 제일 처음 만들 때에 주인이 준비하는 과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대 땅은 돌이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우선 "땅을 파서 돌을 제하는" 작업이 제일 먼저 이루어졌고, 그렇게 가려낸 돌들은 포도원 가장자리에 쌓아서 담장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그처럼 정지작업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물론 그 해에 당장 제대로 된 열매를 얻을 수는 없었고 약 2, 3년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기다리는 동안 포도원의 나머지 시설들을 만들었습니다.
  "망대" 즉 원두막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장차 포도열매가 제대로 열리게 되었을 때에 망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술틀"은 포도즙을 짜는 기구로서,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통 같은 것이었는데, 위층은 포도를 모아 담아서 발로 밟는 데 사용되었고 아래층은 그렇게 위층으로부터 흘러내리는 포도즙을 모으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온 정성과 힘을 다해 이처럼 포도원을 가꾼 것은 물론 단 한 가지 기대, 곧 포도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2하반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 "2b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3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라고 밝히고 있는 대로입니다.

  물론 '참 포도나무'에서 '들포도'가 맺힐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시적으로 표현하는 말로서, 참 포도나무에서 단 포도가 열리지 아니하고 마치 들포도처럼 작고 시어서 먹을 수 없는 포도가 맺혔다는 뜻입니다.
  그때 포도원 주인의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온갖 노력과 고생을 다하고 게다가 몇 년을 기다려서 이제 겨우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때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애써서 포도원에서 키우지 않아도 그저 들에서도 얻을 수 있는 야생포도, 아무 상품 가치도 없고 먹지도 못할 포도가 열매랍시고 열렸을 때에 그 주인의 심정은 실로 어처구니없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포도원 주인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서 너희들도 내 기분을 한 번 생각해 보아라.'하는 것이 3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너희들이 그런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 사이에서 한번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아라. 이런 경우에 주인의 잘못이냐 아니면 포도나무가 문제이겠느냐?"라고 이스라엘 백성 자신을 배심원으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조리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당당하게 따지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으로서는 밭을 일구어서 좋은 땅을 만들고 좋은 종자를 심고 기타 부대시설을 잘 갖추어 두는 것 이상으로 더 이상 포도원을 위해 할 일이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 주인 앞에서 포도나무들이 아직도 무슨 불평만 하고 있다면 정말 말도 되지 않을 소리일 뿐입니다.
  매일 햇볕이 쬐이지 않고 가끔 구름 속에 숨는다고, 때로는 바람이 좀 센 날이 있다고, 혹 벌레들이 좀 귀찮게 군다는 것이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할 핑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어림도 없습니다.
  포도나무가 좋은 포도원에 심기었고 몇 년을 햇빛과 비와 거름을 먹고 자랐으면 이제는 당연히 열매를 맺을 순서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바로 그런 포도원의 주인이십니다.
  이 주인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 살기에 완벽한 대기와 흙과 물을 조성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포도원,' 곧 교회에 심어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극상품 포도나무'의 종자로 심기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기름진 산'에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늘 말씀의 거름과 성령의 단비로써 우리를 키워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스스로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베풀어 주신 것 외에 더 이상 해 주셔야 할 것이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상을 찡그리고 항상 무언가 모자라는 것만을 잘 생각해 내는, 만성 불만증 환자 같이 하나님을 대하려는 악습이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가 날마다 좋은 일만 생기게 해 주시지 않으실까? 왜 지난 주일에는 내가 그런 인생의 쓴맛을 겪도록 내버려두셨을까? 왜 오늘은 아침부터 몸이 이렇게 피곤할까?"라고, 구름과 바람과 벌레를 두고 불평하는 포도나무처럼,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서 말도 되지 않을 불평들만 날마다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포도나무라면 그런 정도의 변화나 시련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바로 그런 풍상을 견디어 자라면서 끝내는 달디 단 포도열매를 맺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 세상이라는 생존환경을 조성해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더욱이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독생자까지 구세주로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주실 것 다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숨이 붙어 있고 예수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있다면, 좀 어렵다고 좀 피곤하다고 좀 쪼들린다고 해서 함부로 짜증을 내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처럼 자유로운 사회에서 적어도 먹고 살 양식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자신이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하지 아니하고 교회생활에 충성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 어떤 변명도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는 한 인생에게 주어진 최상의 조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교회를 중심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가장 좋은 밭에 심기어져서 완벽한 온실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교인에게서는 당연히 예배참석의 진보, 기도의 영력, 봉사의 열심, 성도 대접, 헌금의 정성 등, 교회를 통하여 성화되고 있는 신자의 구체적인 열매들이 나타나야 마땅한 것입니다.
  만약 이런 교회를 출입하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고마워할 줄 모르고, 이런 행복한 생활 중에 부분적으로 벌어지는 작은 인생의 비바람을 두고 불평이나 하는 교인은 정말 배은망덕한 인간일 뿐입니다.
  이런 완벽한 포도원 안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으면서도 신자의 삶에서 교회 밖에 심기어져 있는 불신자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과 꼭 같은 정도의 열매만 나온다면, 이 포도원 주인으로서는 그 얼마나 불쾌한 일이 되겠습니까?
  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이미 다 완벽하게 베풀어 주고 계심을 깨닫고 이제 그 주인께서 당연히 받으셔야 할 열매를 이 교회중심의 삶을 통하여 풍성히 맺어 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시면서 더 기다려 주신 후에는 완전히 내버리시는 심판을 준비해 두고 계십니다.

  5절 이하 7절에 기록하기를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7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극상품 포도나무"였지만, 그 열매는 들포도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 '들포도'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원래 '악취'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들의 생활 속에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선한 일, 충성스러운 섬김의 열매는 끝내 열리지 않고, 그 대신에 남을 짓밟는 "포악"과 그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의 "부르짖음"들, 즉 그저 자기만 먹고 살겠다고 싸우고 밀치고 하는 따위의, 불신사회에서 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악취의 열매들뿐이었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인생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참된 삶의 열매를 끝내 맺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도 언제까지나 기다리실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로 5절에서 "이제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시던 도우심을 거두시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울타리'와 '담'은 평소에는 포도나무에게 별로 큰 도움이 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있을 때에는 그 고마움을 모르다가도, 일단 없어지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요긴한 것이었는지를 포도나무는 그제야 알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는 울타리나 담을 인하여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다른 사소한 것들만 가지고 불평만 일삼다가, 일단 그것들이 없어지게 되면 포도나무는 모든 야생동물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남은 순서란 "걷어 먹힘"을 당하고 "짓밟히게" 되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6하반절에서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고 기록된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벌레 한두 마리 가지고 불평하던 포도나무는 그보다도 그 자신에게 시절을 따라서 내려 주시던 비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며 얼마나 고마운 것이었는지를 그때 가서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보호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너무나도 무심하게, 너무나도 감사하지 아니하고 지내는 것들이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한번 거두어들이시면 단번에 우리 인생이 절단 나게 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주위에 당연히 있는 듯한 이 가족, 국가라는 '울타리'와 '담'들을 하나님께서 한번 슬쩍 헐어버리시기만 하면, 우리에게 매일 공짜로 공급되고 있는 이 공기와 '비'들을 만약 하나님께서 공급 중단이라도 하시면, 제 아무리 저 혼자 잘 살고 있는 듯한 인생들도 당장 끝장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선한 열매, 의로운 열매가 맺히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보호의 은혜를 조금만 거두어 가심으로써 우리를 혼내시고 정신 차리도록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벌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6상반절에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가지치기라든지 나무뿌리 부근의 흙을 돋우는 것은 포도나무로서는 귀찮은 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사실 포도나무를 살리는 요긴한 작업이며, 그 작업이 중단될 때 그 남은 순서는 자명한 것입니다.
  그 포도원은 엉겅퀴와 가시나무만 무성한 황무지의 땅이 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손길이 포도나무에게는 귀찮게만 여겨졌을지라도, 일단 그 손길이 멈추고 나면 그것이야말로 포도나무로서는 망하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포도원 주인이 이미 그 포도나무를 완전히 포기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에 찔림을 받고 깨어짐을 당하고 가루가 되는 그 순간들이야말로 여러분의 인격이 좋은 흙이 되도록 경작을 받고 있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교역자들이 여러분에게 심방을 오고 전화를 하면서 "예배에 참석하세요. 헌금생활하세요. 교회봉사에 자원해 주세요."라고 일견 여러분들을 귀찮게 만드는 것 같은 때야말로 여러분의 생활에 하나님의 괭이가 파들어 가서 열매를 잘 맺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은혜의 시기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주일예배를 통하여 정지작업을 받지 못하면 그 빼먹은 주일 하루 동안만 해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겠습니까?
  여러분이 번 것을 하나님 앞에서 헌금의 열매로 바치지 않으면 그 돈들이 지금쯤 어떤 유흥업소에서 무슨 죄악의 향락을 위해 쓰이고 있을지 상상해 보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교회와 교역자 때문에 시달림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것에서 자유하게 되면, 여러분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가위와 호미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남은 순서는 오직 엉겅퀴와 가시덤불만으로 뒤엉킨 인생이 되는 순서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들이 그저 부담이라고, 시달림이라고만 생각하십니까?
  "에이, 내가 목사 설교가 주는 부담감만 없으면, 교회 전도사들이 날 귀찮게 만드는 일만 없으면 정말 자유로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아직도 드십니까?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는 생각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 귀찮고 신앙생활 지겹다면서 뛰쳐나가면 그 길이야말로 인생 황무지로 직행하는 길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회를 통하여 경작해 주시는 손길을 마다하면 그것이야말로 인생 끝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좋을 것이라고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이미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증거이며,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열매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이 길어지면 일단 그 돌보심의 은총을 일시 중단하시는 징계로써 우리를 정신 차리도록 해주십니다.
  그러니 사실상 그 징계의 기간 역시 은혜의 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필요조차 느끼지 않으실 정도가 되면 그 인생에게 남은 순서라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버림 받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매 없는 신앙생활을 할 때 영원한 심판에는 빠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지금 따끔한 징계를 통하여 깨우쳐 주시면서 또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 앞에, 더 이상 늦기 전에 자신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포도원 주인께 보여 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 두고 망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까지도 저와 여러분이 아직도 죽지 않고, 지금까지도 교회생활하며 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저 의미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며 무한정 기다리실 분은 또한 결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선한 열매, 의로운 열매, 정말 예수 잘 믿는 열매를 좀 맺어 보라고 기대하시는 가운데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집세나 전기세 등의 납입금을 지불할 때 매달 정해진 마감일이 있고 물론 그 마감일을 넘기면 원칙적으로는 벌금이 부과됩니다.
  하지만 마감일을 넘기고서도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기간을 조금 더 연장시켜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grace period'라고 합니다.
  '연장 기간'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문자 그대로 '은혜의 기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기다려 주시는 시간은 하나님께는 용서해 주시는 기간이요 인내해 주시는 기간이지만,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진짜 '은혜의 기간'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너그러운 남편이라도 언젠가는 폭발하고, 아무리 세입자에게 'grace period'를 주는 주인일지라도 그 기간마저 넘기면 벌금을 부과할 것이며 그래도 안 되면 결국 법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 역시 무한정 기다리시는 분은 결코 아닙니다.
  은혜의 기간 동안 기다려 주시고 그래도 열매가 없으면 약간의 징계를 주시면서 또 기다려 주십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에도 변화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이제 그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정말 무서운 것으로 바뀌고 맙니다.
  바로 히브리서 10장 13절의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라는 기다림, 곧 자기 원수들을 심판하시려고 벼르시는, 실로 무서운 기다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다림은 의미와 목적이 있는 기다림입니다.
  농부가 기다리는 시간은 달력만 넘기는 것이 될 수 없으며 반드시 곡식이 맺히고 영글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수험생이 기다리는 시간은 합격이나 불합격이냐 간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기다림입니다.
  더욱이 우리 하나님께서는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는' 주인이십니다.
  그처럼 모든 시공계의 흐름에 기한을 정해 놓으시고 그 모든 범사를 그 기한 내에 어떤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니, 당신께서 지으신 각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기한'을 정해 놓으시고 그 인생을 통하여 어떤 열매를 얻고자 하시는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계신 포도원 주인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예수 믿게 하신 이후 지금까지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 주시는 동안 우리 자신은 도대체 어떤 열매들을 맺고 있는지를 한번 스스로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볕 쬐고 바람 즐기고 물만 빨아들이면서도 그저 키만 자라고 잎만 무성하거나,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아무 쓸모없는 신 것들만 내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게 정말 믿음의 참 열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이 함께 맛보기에 달콤한 진짜 열매가 내 가정에 내 사업에 내 교회생활 속에서 정말 열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를 통하여 늘 거저먹기만 하고 있습니까?

  항상 교역자의 가슴에 답답한 안타까움만 주고 주위 성도들에게 걱정거리만 되는, '신 맛'만 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교역자가 심방 오는 것을 노골적으로 귀찮게 여기고 무슨 직분 좀 맡기려 하면 아주 점잖게(?) 사양만 하는 교인, 전도회 모임에는 일 년 내내 얼굴도 보이지 않고 남들은 힘써 특별헌금할 때에 혼자 얌전히(?) 빠지는 교인, 정말 목사가 느끼기에도 '신 맛' '떫은 맛'만 나는 교인인데 하물며 포도원 주인께는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염치없는 포도나무들을 하나님께서 참 어지간히 기다려 주셨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포도나무는 포도열매가 없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
  그 잎사귀나 줄기만 가지고서는 아무 재료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열매가 없으면 우리는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쓸모가 없습니다.
  그저 '찍혀 불에 던지우는' 순서만 남아 있을 뿐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은 그저 무의미하게 기다리시는 분도 아니며 무작정 기다리시는 분도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려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며, 그 은혜와 징계를 통해서 기다려 주시는 기한과 완전히 버리시는 때 역시 분명히 정해 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곁을 흘러가는 이 시공계의 흐름은 하나님 당신께서 만드신 인생이 하나님 당신께서 베풀어주신 환경 속에서 당연히 맺어야 마땅할 열매를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계시는 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도 이처럼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 다 베풀어 주신 후에 기다려 주시며, 아직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더 기다려 주시는 이 하나님께 자신의 신앙생활의 열매를 교회를 통하여 생산해 냄으로써 이 포도원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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