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을 가져왔나이다! (신명기 26:5~11)
일찍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 다만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하셨던 그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으시고 지키셨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애굽 땅에서 신음하던 히브리 노예들을 구출하게 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셨습니다. 40년이라는 제법 긴 시간 동안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몸에 밴 노예 근성을 씻어 버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이 눈앞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요단 강 동쪽 기슭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는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설교의 한 부분입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까? 이삭, 야곱, 요셉의 삶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기근 때문에 내려갔던 애굽에서의 삶도 파란만장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게 되면서부터 그들은 심한 학대를 받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아들을 낳으면 나일 강에 던져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 소망도 없다고 탄식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 강한 팔로 건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받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몹시 가슴이 두군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두려운 마음도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어떤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오랜 세월 세상에서 방황하다 뒤늦게 은혜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대체로 삶에 기쁨이 넘치게 마련입니다. 또 범사에 감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느 정도 두려운 느낌도 갖게 마련입니다. 이왕이면 뭐든지 잘 하고 싶지만 모르는 것이 많아서 답답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아마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때 그 심정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새롭게 펼쳐질 세계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묘한 기분이었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백성들에게 모세가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신 26:1) 무슨 말입니까? 눈앞에 보이는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굳게 맺은 약속도 쉽게 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어코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은 과연 어떤 땅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땅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 까닭에 목축과 농사에 아주 적합한 땅입니다. 이제 그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행복한 백성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셨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이 무엇을 훈련받았습니까? 믿음의 사람들로 훈련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그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들로 훈련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땅에서 살기에 합당한 믿음의 사람들로 훈련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모세가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신 26:2)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맏물은 첫 열매를 말합니다. 가장 귀한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귀한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맏물을 드리는 것에는 아주 중요한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맏물을 드리는 것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맏물을 드리는 것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신앙 고백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온전한 감사의 뜻이 맏물을 드리는 것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맏물을 드리는 것에는 솔직히 우리가 부족한 존재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맏물을 드리면서 뭐라고 고백하라고 합니까?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신 26:5~6) 그렇습니다! 스스로 무력한 존재였고 아무 소망도 없었다고 고백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하지 못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근심과 걱정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것 같으면 주님께 매달려 기도합니다. 그러나 뭔가 좀 잘 되면 어떻습니까? 내가 능력이 있어서 그렇고 내가 지혜가 있어서 그렇다고 금새 으시대지 않습니까?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너무 쉽게 잊습니다. 맏물을 드리는 것에는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끝으로, 맏물을 드리는 것에는 받은 바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함께 나누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복은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레위인과 그들 가운데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레위인과 객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기업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머지 열한 지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 거류하는 객들 역시 땅의 소출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어지는 12절 말씀을 보면 함께 나눌 대상이 고아와 과부로까지 확대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약자들의 고통과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얻은 열매들은 어떤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신 복입니다. 때문에 모두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나누기 위해서 맏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약속의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이제 내가 주님이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맏물을 드리는 심정으로 주님께 경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받은 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까닭은 그 주님의 은혜를 가난하고 약한 이웃과 함께 나누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은 바 그 크고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아직까지 어둠 속을 방황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욱 든든하게 세워가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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