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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을 가야 하리라! (누가복음 13:31~35)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여우 같은 인물들이 꼭 있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여우는 매우 교활한 짐승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격이 간교하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서 여우 같다고 합니다. 때문에 예수님도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셨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여우 같은 인물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겉치레를 중시하는 위선자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 당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그 당시뿐 아니라 오늘도 위선적인 종교인들이 꽤나 많이 있습니다.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죄인으로 취급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의외로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헤롯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물론 헤롯도 바리새인들을 불편하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반대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한 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공격하는 일에 있어서는 뜻을 같이 했다는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타락한 종교인들이 흔히 빠지는 길입니다. 평소에는 적대적인 관계이지만 예수님을 반대하고 공격하는 일에 있어서는 한 편이 되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 주위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은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는 우리가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우리도 따라가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은 과연 어떤 길입니까?
예수님은 고난의 길,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오셨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이나 바리새인들이 위협한다고 해서 갈 길을 멈추시겠습니까? 그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정치가들의 권력에 희생되신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종교인들의 모함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눅 13:32) 무슨 말입니까? 이제 곧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헤롯이나 바리새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아마 속으로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셨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 죽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렇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중단하거나 변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 13:3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된 삶이 아니라 저주스러운 삶을 선택했습니다. 생명이 아니라 사망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돌로 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모으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눅 13:35)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게 될 무서운 결과를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범죄한 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그 사랑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그대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그리고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을 다 멸하시면 하나님의 공의는 분명히 나타나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한 인간을 사랑으로 무조건 구원하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겠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찾아볼 수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말입니다. 크고 놀라운 사랑 때문에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실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최후 승리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마지막 날 심판주로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소리 높여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찬송하게 될까요? 그 까닭은 바로 승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 받은 바 구원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도록 주님은 무던히도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도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는데 끝까지 거부하는 자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2000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에 주님이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이제 곧 다시 오실 그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의인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정복하고 승리하신 그 주님을 믿고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사순절 기간에 그 주님을 더욱 열심히 전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죄인에 대하여 무던히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그 복된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돌로 쳐 죽이고 싶어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간절히 호소하는 주님의 그 자비로운 음성을...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리고 우리도 그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그 주님의 복음을 거부한 자들은 참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거듭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망하는 것을 몹시 애통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눅 13:33) 그리고 그 길을 그대로 가셨습니다. 헤롯의 권세로도 그 길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음모로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은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저지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리스도로 가실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 십자가 죽음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 보여 주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야말로 최후 승리의 길이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지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며 그 주님의 사랑과 평화를 널리 전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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