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그리스도인 (고린도전서 10:1~1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하다는 말을 꽤나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신령하다는 말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40일 금식을 해야 신령한 줄로 압니다. 또 아주 특별한 체험이 있어야 신령한 줄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큰 능력을 행할 수 있어야 신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중서관에서 펴낸 엣센스 국어사전을 봤더니 ‘풍습으로 섬기는 모든 신’, ‘또는 신통하고 영묘함’이라고 그 뜻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사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으니 산신령 같은 개념으로만 받아 들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여간 많은 사람들이 신령하다는 말을 우리의 이성이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신령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령한 사람이란 신령한 양식을 먹고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신다는 것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신령한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말씀에 충실한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할 경우 그는 육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신령한’이라는 말을 공동번역 성서에서 ‘영적’이라고 번역한 것은 아주 잘한 것 같습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결코 이해하기 어렵거나 그 의미가 모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반드시 신령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쓴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삶의 특징은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방종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령한 삶을 살기 원하면서도 종종 자유와 방종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방종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섬김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방종을 자유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볼 때 방종도 자유와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육적인 쾌락과 자기 만족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방종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그 대답을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쓴 사도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영적으로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방법를 함께 찾아보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신령한 삶을 살기 위해서 신령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신령한 양식은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령한 양식은 매일 규칙적으로 먹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마 6:11)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 10:5) 무슨 말입니까? 광야를 순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령한 양식을 규칙적으로 먹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신령한 양식보다 애굽에서 얻어 먹던 불량 식품을 더 좋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에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다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서...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조상들의 실수를 되풀이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선지자가 말하는 지식과 율법이 다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게 하는 신령한 양식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도 신령한 양식을 받아 먹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양식을 먹고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삶을 살기 위해서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떻습니까? 말 그대로 매사에 무감각하게 마련입니다.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도 똑같습니다. 영적인 일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마련입니다. 바르지 못한 길을 가면서도 별로 감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경우를 가리켜서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딤전 4:2 참고)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신령한 양식을 제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은 방종으로 흘러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우상 숭배, 음행, 그리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는 일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영적인 감각을 회복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는 권고가 아닙니다. 오고 오는 세대 속의 모든 교회들을 향해서 강력하게 촉구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끝으로 성경은 또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삶의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뿌리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으로 무감각한 삶의 뿌리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만만하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없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신령한 삶의 뿌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삶을 살 수 있는 까닭은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신령한 양식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 신령한 양식을 먹고 영적인 감각을 바르게 유지해야 우리가 비로소 신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결코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절망하거나 낙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직 겸손히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것이 신령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령한 삶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고전 10:13)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쁘사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 속에서도 피할 길까지 열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이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삶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자기 입장만 고집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약한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는 것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옛날 어떤 수도사가 있었습니다.사람들이 그를 찾아가서 부탁했습니다. “수도사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대답했습니다.“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새로운 말씀을 들으려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다. 이미 들은 것을 가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수도사는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사슬에 매어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신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령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신령한 양식을 받아 먹어야 합니다!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를 제대로 섭취해서 영적으로 강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감각을 바르게 유지해야 합니다! 허탄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결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 가운데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는 참으로 신령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물을 가져왔나이다! (신명기 26:5~11) (0) | 2022.09.24 |
---|---|
갈 길을 가야 하리라! (누가복음 13:31~35) (0) | 2022.09.24 |
가난한 영혼(복) (마태복음5:1-12) (0) | 2022.09.24 |
애통하는 사람 (복Ⅱ ) (마태복음5:1-4) (0) | 2022.09.24 |
온유한 사람 (복Ⅲ) (마태복음5:1-5) (0) | 2022.09.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