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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가난한 영혼(복) (마태복음5:1-12)

by 【고동엽】 2022.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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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영혼(복)  (마태복음5:1-12)

‘도널드 클리프턴’과 ‘톰 래스’가 공동집필한 책 “당신의 물통은 얼마나 채워져 있습니까?” 라는 아주 작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50년 동안 수백만 번의 인터뷰를 통해서 “긍정의 심리학” “강점 심리학” 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습니다. 재미있는 이 연구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 구금되었던 1,000여 명의 미군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미군이 수용되었던 북한군 포로수용소는 다른 전쟁 때보다 포로에 대한 신체적 학대가 매우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북한군 포로수용소 내의 사망률은 자그마치 38%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미군 역사상 최고의 수치였습니다. 사망자 중 절반 이상이 단순히 삶을 포기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적인 도움을 부인하도록 하는” 고도의 심리전술의 결과였습니다. 북한군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네 가지 기본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첫째는 ‘밀고’입니다. 포로들이 동료를 ‘밀고’할 때마다 담배를 주면서도, 밀고 당한 자는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자아비판’입니다. 포로들 10~12명을 한 그룹으로 만들어서 자신들이 소속된 무리 앞에서 ‘자신이 했던 모든 나쁜 짓’과 ‘해야 했지만 하지 못했던 좋은 일’을 고백하게 했습니다.  
세 번째는 ‘국가와 상사에 대한 충성심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긍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모든 요인을 차단’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고향에서 오는 긍정적인 내용의 편지는 전해주지 않고, 부정적인 것만 전해주었습니다. 친척 중 누군가가 죽었다거나, 아내가 재혼을 결심했다거나, 심지어 세금 미납청구서 같은 것들은 바로 전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포로들은 하나님과 국가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까지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포로들은 ‘정신적, 정서적 고립 상태’에 빠져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자인 ‘도널드 클리프턴’은 이 끔찍한 등식의 반대쪽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부정적인 마음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면, 비슷한 강도의 긍정적인 마음은 사람의 정신적, 정서적 상태를 향상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 착안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이 부정적인 마음보다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마침내 ‘물통과 국자 이론’을 완성했습니다. 이 이론의 전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물통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 물통이 흘러넘칠 때, 가장 행복하며 물통이 비어 있을 때 가장 불행하다.’
‘또한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국자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는 국자로 타인의 물통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득 채우거나 퍼낼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물통을 채울 때, 우리 자신의 물통도 채워진다.’
물통을 채우는 다섯 가지 제안은 이렇습니다.
1.물통에서 물이 빠져 나가는 것을 막아라. 2.좋은 면을 더 많이 부각시켜라. 3.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들어라. 4.예상하지 않았을 때, 선물을 줘라. 5.황금률을 뒤집어라.
이 다섯 번째가 중요합니다. “너희가 남에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마태복음7:12) 이 말을 “남이 나에게 바라는 것을 그들에게 해 주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빈 마음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의 8단계 중, 그 첫 번째입니다. 주님은 남에게 도움을 주기 전에, 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마셔야 삽니다. 그러나 본인이 물을 구하지 않으면 물을 마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의 사람은 세 가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나는 부족합니다.’  
헬라어 “가난한 자” 라는 단어는 “프토코스”(πτωχ??)입니다. 이 말의 뜻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밖에는 누구도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인 파탄을 솔직히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무가치한 존재임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사람은 당연히 낮은 자리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마가복음10:45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다음에 기도했던 것처럼 “하늘의 하늘이라도” 모시기에 감당치 못할 그 분이, 스스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오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탄절 카드 그림에서 보는 구유는 주변에 광체가 둘렀고, 하늘에 천군천사들의 찬양하는 모습까지 그려놓았기 때문에 이라 아주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이 세상 그 어느 곳보다 가장 낮은 곳이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30년을 사시고 메시야로서 새 출발을 하실 때,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오셨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마태복음3“13-17)
이 영광의 메시야 임관식이 있은 다음 곧 바로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메시야로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해서는 세상을 섬길 수 없어서, 광야로 나가셨고, 그 곳에서 40일간 금식하였습니다. 이 광야는 베들레헴 마구간의 구유보다 훨씬 더 낮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류의 구세주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는 순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40일 금식기도 했던 광야보다 더 낮고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얼마 전에 삼성 코엑스 오라트리엄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공연을 관람하였습니다. 예수 역을 맡은 가수의 어머니께서 티켓을 주어서 좋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예수 역을 하는 테너 가수는 아주 꽃미남이었습니다. 그 목소리며, 깨끗한 매너하며 누가보아도 흠모할만한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에게 매료되었고, 둘 사이를 로맨스처럼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공연의 예수님처럼, 그렇게  꽃미남이셨다면 스캔들이 만들어질 법도 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상을 성경은 그렇게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그 모습을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아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이사야53:2-3)

그리고 로마서8:3에서는 ‘예수님을 죄 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오셨다 했습니다.  

“육신이 연약함으로, 율법이 할 수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의 아들을 죄 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다 죄를 정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인간적으로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멸시했고,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흉악한 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그래서 그는 귀족처럼 헤롯 왕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매력은 인간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이루어진 성령의 능력에 있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성경에서 많이 만납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형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버지 이삭이 늙어 축복기도를 하실 때, 자기를 형 에서로 변장해서 대신 축복을 훔쳤습니다. 이로 인하여 에서의 분노를 피하여 도망갔다가 다행히 20년 만에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년 전의 일에 대한 죄책감과 염려 때문에 종들을 앞서 보내어 형의 동태를 살피고 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 그는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이 동생야곱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어, 그 밤에 종들과 짐승의 떼들과 가족들을 다 앞서 보내고 홀로 얍복강 나루에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그 날 밤 야곱은 하나님께 얻어맞아 엉덩이뼈가 어긋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밤새 씨름할 때 그가 드린 기도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축복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놓을 수 없습니다.”
그 날 밤 야곱이 구한 것은 물질도, 자식도, 건강도, 미래보장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사실 야곱은 그 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아도 그런대로 잘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내 생명이고 내 소망이며 내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2.그래서 두 번째 하는 말입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알게 되는 것 하나는 사람들의 ‘교만’은 부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신앙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난하면 겸손하고, 부자들이 교만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잇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결코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겸손하여 도움을 간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잘할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도하려고 하지 않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부럽지 않게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열심히 기도하며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복은 자신의 오만을 버리고 허심탄회하게 도움을 청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코 자신의 약점을 두러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있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아무런 도움이 필요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입니다.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종 한 사람과 아버지의 나귀를 찾으러 갔다가 그 나귀의 있는 곳을 분디 위하여 우연히 사무엘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에게 기스의 아들 사울이 온다고 예고해 주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라 하셨습니다. 졸지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울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왕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되어 마음이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에게 기름을 부어주신 사무엘 선지자를 무시하였습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교만하게 일하다가 결국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간구하면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도움을 요청하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목사로서 설교를 할 때, 비교적 목소리가 조용하면서 힘이 있을 때가 좋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하다가 힘이 빠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대나무는 꽃이 피고나면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난추도 그런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힘이 없으면 힘이 없는 표현이 되어야 하는데 그 힘이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점점 더 소리를 크게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 목소리가 커지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할 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실 목회에서 상당히 좋아하는 일이 심방입니다. 성도여러분들을 직접 찾아가서 함께 예배하고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만큼 더 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서 여러분들을 직접 찾아가는 일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여러분들이 저를 도와주셔야하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의 심방이 꼭 필요한 때는 불러주십시오. 만사를 뒤로 하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부목사님들의 심방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주십시오.
가난한 마음의 사람은 절대로 혼자 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기도의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음을 알기에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3.그리고 세 번째 말을 잊지 않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다윗의 기도가 이것입니다.
다윗은 아주 버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시 영광을 회복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죄를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세리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바리세인처럼 거만을 떨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선행은 온 교회에 떠벌이면서 자신의 죄는 철저히 은폐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개 부모와 자식간에 가지는 일상적인 생각은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최선의 수고를 다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식은 자식대로 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건너지 못할 갭이 있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섭섭하고 자녀는 자녀대로 억울합니다. 모든 것을 해 주었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말 한마디 때문에 자녀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앙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워보면서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까지 그 마음을 풀어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식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지만 부모의 마음을 얼마나 소홀하였는지는 자신이 늙고 힘이 없어 자식의 도움이 간절할 때가 되기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많이 때늦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는 죽을 때까지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줄 아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솔직히 “내가 먼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한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 말 한마디 때문에 자식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상처를 준 것을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귀한자식을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부담을 주고 어렵게 하는 때가 많습니다. 부부가 서로 함께 살면서 허물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무례히 행하는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도 남에게는 그렇게  친절하면서도 정작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귀한 사람에게 퉁명스럽고 무례하고, 억지를 씀으로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한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려고 하는데 아빠가 말했습니다. 너는 어떻게 다 큰 것이 설거지도 하지 않고 학교를 가려고 하냐? 아빠는 아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단순히 그 일을 딸이 해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빠의 명령을 따라 접시를 닦았습니다. 분이 풀리지 않아 접시를 접시가 깨져라 하고 마구 다루었습니다. 학교를 가는 아이를 아빠가 차에 태워 함께 갔지만 아이는 풀리지 않는 분으로 아빠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학교 앞에서 내려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아빠가 사무실에 와서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아이가 왜 그렇게 화를 내었을까? 기도해보니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자신이 무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얘야, 오늘 점심시간에 함께 식사를 하면 어떻겠니?” 그래서 함께 자리를 같이 하여 아빠가 입을 열었습니다. “얘야, 오늘 아침 아빠가 너에게 한 일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너에게 아빠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시간에 너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만 슬프게 만들었구나. 내가 잘못했다. 아빠를 용서해다오.”
아이는 “아빠를 포옹하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물론 용서해 드릴게요. 아빠 사랑해요.”
아내에게 이 말 한 마디가 필요합니다.
남편에게 이 말 한 마디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에게 이 말 한마디가 필요합니다.
부모에게 이 말 한 마디가 필요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세 마디 말을 통하여 마음속에 임하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최이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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