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2:28-34
우리가 날마다 숨쉬고 활동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매일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방향 없는 변화입니다. 그 앞에 우리들은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변화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믿었던 과학자의 생명연구가 이기적인 명예욕 때문에 물거품이 되는가하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생각지 않았던 배신을 느끼고 돌아서서 울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인간사들이 마치 럭비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까요? 자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여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는 노래를<소리>라고 했습니다. 혹은<가락>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 어르신들은<소리>라고만 하면 그 안에 창(唱)도 있고, 판소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트로트, 재즈, 락앤롤,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테크노, 힙합, 이게 정말 노래인가 싶을 정도의 도무지 이해가 잘 안가는 그런 장르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르신들께 죄송하지만 가끔씩은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그러나 흘깃 흘깃 들어보면 한 가지는 분명히 귀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모든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떠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됩니다.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향방 없이 변하고, 빨리 변한다할지라도 이 사랑 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의 원천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 데일리 뉴스지>에 예방의학 전문가인[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가 이런 연구를 보도한바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강식품, 규칙적인 운동, 담배, 술, 과로, 과식, 수면 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창조적인 힘이 있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은 때때로 상상을 뛰어넘기도 하고 가끔은 상식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하버드대학교>심리학 교수팀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인도의 빈민가에서 사랑의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도와주는 모습을 찍은 기록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학생들의<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을 검사하고, 일주일 후 같은 학생들에게<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기록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저항력을 조사했답니다. 그랬더니 테레사 수녀의 영화를 본 뒤에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의 수치가 훨씬 높게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도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리 시끄럽습니까? 결국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먼저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아예 사랑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둘째는 사랑이 있긴 있는데 병들어서 문제입니다. 또 사랑에 거짓이 문제입니다. 사랑에 속았습니다.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게 합니다.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못합니다. 또 하나는 문제는 사랑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분명히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느끼질 못하고 그래서 사랑을 주지도 못하는 사랑의 의사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단절됩니다. 결국 이것은 불신의 문제입니다. 분명히 그는 사랑하고 있고 나는 사랑 받고 있으면서 내가 그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 되고, 사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감격 없는 사랑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관심의 단계>입니다. 사실은 관심도 대단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쥐를 키우는데 있어서 우유병만 빨려서 키운 쥐는 평균 600일을 살고, 그릇에 우유를 부어놓고 사람이 손으로 우유를 직접 먹이며 사랑의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서 키운 쥐는 훨씬 더 오래 사는데 평균 950일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에 대해 거저 관심만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헌신의 단계>입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을 바쳐 사랑합니다. 그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고 그를 위해서 시간을 구별하여 둡니다. 마지막 셋째는<희생의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른 응답이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내가 됩니다. 이 사랑에 이르면 무슨 일이든지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랑이 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사랑이 됩니다.
어느 날[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을 아주 싫어하던 한 부인이 처칠에게 이렇게 거친 말을 했습니다.“윈스턴, 만일 당신이 나의 남편이었다면 나는 당신의 차 속에 양잿물을 넣었을 것이오.”이 말을 들은 윈스턴이 얼마나 멋있게 받아 넘겼던지 참 감동적입니다.“부인, 만일 당신이 나의 아내였다면, 나는 그 양잿물을 마셨을 것입니다.”나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희생하며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이런 힘을 가진 능력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아직도 그저 막연한<관심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헌신의 단계>,<희생의 단계>까지 와 있는 수준 높은 사랑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장 강한 사랑의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먼저가 아닙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인간에게는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할 일(Something to Do)이 있어야 인간은 행복하고,
둘째는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사랑할 대상(Something to Love)이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랑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큰 불행이라고 말합니다만 그 보다 더 큰 불행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내 사랑을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나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그 사랑의 첫 번째 대상이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이 이 사랑의 시작을 말합니다. 2006년도 교회의 표어를<하나님 사랑, 교회 봉사, 이웃 섬김>이라고 정했는데 오늘 새해 첫 주일에 그 첫 번째인 하나님 사랑에 대한 말씀으로 한 해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욕심과 자기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불법과 비리에라도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입니다.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그러자 예수님께서?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사랑에 대한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을 확인하시고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06년도 새해가 밝았습니다. 첫 걸음을 어떻게 내 딛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매사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신앙의 출발을 어디로부터 출발하느냐가 한 해를 성공적으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가름합니다. 부디 오늘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는 이 첫걸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결심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신앙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철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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