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기도의 사람입니까? (누가복음 11:1-13)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强請)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聖靈)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만일, 오늘 예배 후에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10분간 독대(獨對)의 시간을 주시고, 여러분에게 한가지 소원을 예수님께 아뢰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주님께 아뢰시겠습니까?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은 자유 아닙니까? 예배 후에 예수님이 10분간 여러분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한가지 소원을 얘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아뢸 것 같습니까? 새로운 직장입니까? 병을 고쳐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불경기에 좀더 많은 돈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때 그러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신기하게도 "주여!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요청했습니다. 수많은 일들이 많았을 텐데 왜 제자들은 하필이면 기도에 관한 것을 요청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삶 가운데 나타난 기도의 결과들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고,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난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여러분, 사실 예수님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본 것은 기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위대한 설교를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도 보았어요. 병자를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모습을 제자들은 직접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신기하게도 "예수님! 우리에게 설교를 가르쳐 주십시오" "기적을 일으키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병자를 고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죽은 자를 일으키는 방법을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요청하지 아니하고, 대신에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가 예수님의 삶을 지지하는 핵심 요소임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위대한 설교를 하시기 전, 병자를 고치시기 전, 죽은 자를 살리실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후에 위대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기에, 기도가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임을 보았기에, 기적을 구하지 아니하고, 설교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아니하고, 제자들은 나아와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하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하게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도하기는 하되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원한 것을 다 받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생각하는 도깨비 방망이같이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받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에 대해서 기도를 응급 처치 상자 (first-aid kit),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여러분, 건물마다 비치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화기죠. 불이 났을 때 끄는 것, 그 소화기 밑에 보면 뭐라고 써 놨어요? '응급시에만 사용하시오' '비상시에만 사용하시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기도란 무엇인가 하면 응급시에, 내게 위급한 일이 닥쳤을 때만 무릎 꿇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주여!" 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줄다리기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나와 한쪽 줄을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기 싫어하세요. 그런데 내가 응석을 부리며 악착같이 당기면 하나님이 주기 싫어도 "오냐, 내가졌다" 하시며 내어주는 것, 그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증거를 야곱의 얍복강 기도로 얘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그 본문을 잘못 해석한 거예요.
그러나 기도에 대한 가장 잘못된 견해는 기도를 종교적인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왜 하는가? 나의 종교적 의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기도를 종교적인 의무라고 생각하게 되면 아주 심각한 죄와 잘못에 빠지는데, 그것은 바로 죄의식에 빠진다는 거예요. 내가 기도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하나님 앞에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부담이 되어도 하는 수 없이 율법적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기도에 대한 오해입니다. 오늘 저는 이 아침에 여러분의 이러한 오해들을 벗겨 드리기를 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기도에 대해 수없이 가르치셨지만, 오늘 본문이 아마 기도에 대한 가르침 중에 긴 본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본문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셨나요? 저는 예수님이 가르친 내용 가운데, 오늘 기도에 관한 네 가지 사실을 여러분과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기도가 무엇인가를 정의해 주십니다. 두 번째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의 내용을 가르치십니다. 세 번째 우리가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의 태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도의 결과를 가르치셨습니다. 기도의 정의, 기도의 내용, 기도의 태도, 기도의 결과, 이 네 가지를 오늘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해 보겠습니다.
1. 기도의 정의 - 기도는 친밀한 사랑의 대화이다
먼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란 무엇인가? 11장 2절을 다 같이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에요. 예수님은 기도란 무엇인가 부자간의 대화라고 소개해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그 기도는 다름 아닌, 기도는 친밀한 사랑의 대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이해가 가십니까? 기도는 친밀한 사랑의 대화예요.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아버지여!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먼저 아버지여!"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가지고 '아빠'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전혀 잘못된 해석이에요. 그냥 아버지예요. 그러나 친밀감을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는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요, 법조문의 낭독도 아니요, 종교 예식의 일환으로, 거룩하게 드리는 무슨 조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게 아니라, 기도는 친밀한 부자간의 사랑의 대화라고 소개해 주십니다.
저는 1년에 몇 번씩 가끔 부흥회나 세미나가 있어서 출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약 3,4일 동안 집을 떠났다가 돌아옵니다. 돌아올 때는 제가 공항에 내리거나 부산역에 도착하면 저희 집사람이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옵니다. 다른 때는 별로 마중을 안 나오다가 며칠 떨어져 있으면 마중을 나옵니다.(저는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그래서 저는 집을 나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차를 타자마다 얘기를 합니다. 불과 3,4일이지만 서로간에 굉장히 궁금한 게 많아요. 저는 모든 것을 듣고 싶어요. 그동안 교회에서 일어난 일, 우리 아이들에게는 있었던 일, 집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집사람은 소소하게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저희 집사람은 제가 다녀온 세미나 얘기를 듣고 싶어해요. 부흥회 얘기를 듣고 싶어해요. 부흥회 가서 무슨 설교를 했으며, 교인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식사는 무엇을 했는지 등등... 이런 대화가 차 내려서도 그치질 않아요.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식탁에서 얘기를 하고, 그 다음에 차를 차려 놓고 대화를 하다가 밤늦게까지 얘기를 하고서야 잠이 듭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어떤 사람이 한 3,4일 떠났다가 집에 돌아오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온다고 합시다. "야~ 이거 정말 오늘 죽었다. 어떻게 또 만나 얘길 하냐?" 얘기하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공항으로 아내가 마중을 나왔는데 입을 꽉 닫습니다. 부인도 마중을 나가보니까 인상이 안 좋거든요. 그래서 아무 얘기 안 합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아무 얘기도 없어요. 아내가 밥을 차려 놨으니 먹습니다. "아~는? 잘 있재?" 그리고 "자자!" 이것으로 끝입니다. 여러분, 이게 부부지간이에요? 원수지간이지. 이런 부부지간은 없는 거예요.
제가 요새 광진이를 유학 보낸 후에, E-Mail로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얼마나 편리한 지 몰라요. 우표 값도 들지 않고, 여기서 타이프를 치면 1초만에 편지가 갑니다. 얼마나 자주 주고받는지. 어제도 저에게 편지가 왔어요. 자기가 내일 학교 대표 농구선수로 뽑혀서 시합을 나가는데 너무 흥분된다는 거예요. 후보가 아니고 주전으로 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광진이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서 다 듣고 있어요. 저도 가정에서 일어난 얘기, 교회 얘기를 저는 다 전하고 있어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이라면 이것이 너무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거예요.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니에요. 하기 싫은 부담이 아니에요. 빨리 만나 얘기하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대화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어요. 기도를 부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는데' 하면서 기도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로 다시 기도에 대해서 깨우치시길 바랍니다. 기도에 대한 생각을 바꾸십시다. 여러분, 기도는 너무나 즐거운 거예요.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 모든 마음을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세상에서의 대화를 생각해 보세요. 내 말을 상대편이 오해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됩니까? 그러나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내 마음이 상처받을 때, 고독을 느낄 때, 외로울 때 주님앞에 나아가십시오.
성도들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저희 집사람이 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때로 고독합니다. 외롭습니다. 누구에게도 얘기하기 힘든 마음의 괴로움들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마음이 힘들 때, 주님 앞에 나아가 보세요. 정말 깊이 하나님 앞에 내 모든 사정을 아뢴 후, 삼십분 혹은 한시간 동안 무릎 꿇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이 세상의 어느 상담가도 나를 상담할 수 없는 것을 세미한 음성으로, 격려의 음성으로, 따뜻한 음성으로, 나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이렇게 나아가야 합니다. "아버지여!" 너무나도 친밀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그 아버지에게 내 모든 일을 아뢸 수밖에 없는 그것이 기도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2. 기도의 내용 - 영(靈)적인 것과 필요한 일상 생활의 것을 위해.
그러면 그 기도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은 기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실 뿐 아니라,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2절부터 4절은 소위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 주기도문을 한달 간에 걸쳐서 강의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간단하게 두 개의 선언과 세 개의 요청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한국말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 보면 아주 특별하게 두 부분이 갈라져 있어요. 이 가야산과 백양산 두 줄기 같이 쫙 나눠져 있어요. 처음 두 개의 선언에는 2인칭 단수가 쓰여졌어요. 한국말 성경에는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할 때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고, '나라가 임하옵시며'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로, 2인칭 단수가 쓰였습니다. 그 다음 3절.4절을 보면 1인칭 복수가 쓰여졌어요. 3절 첫 번째, 누구에게? '우리에게' 4절, 누가? '우리가' 4절 마지막에 보세요. 누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가!' 이렇게 주기도문은 두 개의 선언과 세 개의 요청으로 주기도문은 이루어져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먼저 "아버지 하나님이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거룩이 무엇입니까? 따로 세우는 거예요. "하나님! 이 만유에, 이 세상에 당신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너무나도 특별한 분이십니다. 당신은 영광스러운 분이시요, 만유의 주시요, 당신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고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통치가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내 가정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교회 위에 임하시옵소서. 이 죄악 많은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주여! 내가 하나님의 의를 구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러한 영(靈)적인 기도를 하라고 주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나의 잔잔한 소원들을 아뢰기 이전에 참으로 중요한 것,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 일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기도를 해 보셨나요? 찬양하라고 하니까 "할렐루야, 아버지 하나님 찬양합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서론일 뿐이고, 그 다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갑니다. 저는 이런 찬양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마치 월드컵 축구 경기에 가보면 맨 처음 뭐합니까? 옛날에 영화관에서 하던 것 있죠? 애국가, 뉴스. 얼마나 지겨웠어요? 본 뉴스 또 보고, 요새 그게 없어져서 참 다행이죠? 그런데 요즘 국가간에 경기가 있으면 반드시 뭐해요? 애국가가 울려 퍼져요. 권투시합을 해도 애국가를 틀어줍니다. 참 지겨워요.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우리 나라 애국가가 좀 더 짧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왜요? 빨리 본 경기를 보고 싶으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저는 그렇게 기도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요사이 기도를 좀 알고 나니까, 기도 시간의 70%,80%가 주님이 가르치신 이 기도의 두 개의 선언에 머무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쁜지 알아요? 하나님을 높여 드립니다. "하나님! 나 같은 것을 어찌 이렇게 축복하셨습니까?" "하나님! 어찌 날 구원해 주셨습니까!" 내 병이 문제가 아니고, 내 필요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되는가? 세 가지 요청, Request! 세 가지 요청입니다. 먼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되는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두 번째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해야 되고, 마지막으로 유혹으로부터 보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Protection!
일용할 양식에 대해 기도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기도를 깊이 하는 사람들은 혹 잘못 생각해서, 우리가 어떻게 치사하게 일일이 매일매일 먹는 음식을 위해 기도해야 되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필요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치사한 게 아니에요. 수준이 낮은 게 아니에요. 주님의 명령인 줄로 믿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러분, 내 직장을 위해, 내 건강을 위해, 하루의 삶을 위해, 경제적인 필요를 위해, 사업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가 이런 것들을 위해 기도할 때 내 마음을 어떻게 고백하는 거예요? "주님!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오늘 하루 내가 잘나서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날 도와주세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기도를 어릴 때 배웠어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눈을 뜨자마자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하루 건강하게 하나님 영광 위해 잘 살게 해 주세요!" 간단한 기도를 드립니다. 제가 이 기도를 배운 것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침례신학대학교에 권혁봉 교수님이란 분이 계셔요. 아마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책 번역을 우리 나라에서 제일 많이 하신 분일거예요. 그 분은 영어를 얼마나 잘 하시는지, 알아듣고 말하는 건 잘 못하시는데 글로는 그 분을 따라갈 분이 없어요. 영어 독해를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옛날에 '구문론'이란 책이 있는데 그 책을 50번보고, '삼위일체' 책을 20번보고, 또 어떤 책을 20번보고, 이렇게 해서 중앙대학교 영문과에 시험을 봤더니 100점이 나왔다고 하셨어요. 그분은 영어 책을 펴고 파카 만년필로 그냥 번역을 하세요.
언젠가 그 분이 다른 데로 이사를 가게 되어서 직장 때문에 저희 집에 3개월 동안 머물러 계셨어요. 저와 같은 방을 썼는데, 아침 5시면 그분이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두시간 동안 번역을 하세요. 원고지 3,40매를 단숨에 번역을 하세요. 그것도 매일! 보통 성실한 분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번역일하시기 전에, 일어나시자 마자 저의 잠을 깨우세요. 남이 있든 없든, 그 분은 일어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지난밤에 보호하사 잠 잘 자게 하시고 ~~" 찬송을 하세요. 처음에는 굉장히 듣기 싫었어요. 그런데 하루, 이틀, 사흘, 석 달 동안을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중에 깨달았어요. '아! 하루의 삶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구나!' 그 분은 정말 주님을 의지해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주님 앞에 여러분의 필요를 날마다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오늘 하루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운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눈뜨자마자,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 제 삶을 당신께 드립니다. 제 몸을 지켜 주시옵소서! 직장을 위해, 경제적인 여건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 앞에 아뢰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죄사함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왜요? 주님 약속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주님은 이 사실을 베드로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어요.
하루는 제자들을 다 모아 놓고 주님께서 발을 씻기십니다. 세숫대야에 물을 가지고 와서 한 사람, 한 사람 씻기시는데, 다른 제자들은 어리둥절해서 다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역시 베드로답게 베드로 차례가 오니까 "주님, 안됩니다. 제가 주님의 발을 씻겨야지, 주님이 제 발을 씻기다니요!" 그때 주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세요. "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 놀란 베드로가 "그러면 주님, 발뿐 아니라 머리와 모든 걸 다 씻겨 주십시오" 베드로답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뭐예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되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우리 죄를 사함 받은 줄 믿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 모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누가 우리 죄를 사해 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보혈의 피가 내 대신, 내가 지불해야 될 죄값을 다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나서 우리가 죄를 범합니까? 안 범합니까? 범합니다. 그 지은 죄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 주님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밖에 나가서 매일 발을 씻듯이 매일매일 기도로 주님 앞에 죄사함 받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회개요, 그것이 자백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저는 밤에 잘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의 삶을 돌아보며 내가 말로 실수한 것이 있습니까? 제가 화를 낸 적이 있습니까? 내가 생각으로 범죄한 것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 회개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면 얼마나 그 잠자리가 행복한지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면서도 이렇게 자는 사람이 있습디다. "빠드득, 빠드득! 내일 날만 뜨면 보자!" 여러분, 이런 맘을 먹고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겠어요?
우리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님은 한가지 단서를 붙였어요. 4절,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내가 지은 죄는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지은 죄를 용서하지 않는 것! 그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줄 압니까? 마음에 원한이 없는 사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가르쳐 주셨어요.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돈은 요새 돈으로 환산이 되지 않아요. 100억이나 될까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인데 주인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너무 너무 기뻐서 나오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어요. 1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3개월치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이에요. 약 500만원 정도 되겠죠? 그 사람을 만나 "돈을 갚으라!" "없다, 미안하다" "이놈아 당장 갚아!" 그러면서 멱살을 잡고 경찰에 고발해서 유치장에 집어넣었어요. 주인이 다시 그를 불러 책망합니다. "내가 100억이 넘는 너의 빚을 탕감해 주었거늘, 너는 500만원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고 감옥에 넣었느냐? 이 악한 종을 다시 감옥에 집어 넣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런 것을 위해 기도해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옆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연말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가족들 사이에 맺힌 것 다 끊어 버리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어릴 때 섭섭한 것, 누가 손해를 끼친 것 다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서 무엇을 해야 됩니까? 그 다음날 똑같은 죄를 짓고 또 용서받고, 용서 받을 뿐만 아니라 "주여! 내가 내일 아침에는 같은 죄를 반복하여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를 유혹에서 건져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사랑하는 사람간의 친밀한 대화입니다. 지겨운 의무가 아니에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까?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되고, 내 일상생활의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내용들을 기도할 때 어떤 태도로 기도해야 됩니까? 오늘 주님은 이 기도의 태도에 대해서, 5절부터 10절까지 가장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3. 기도의 태도- 담대하게 하라
먼저 주님은 우리가 오해하지 않고, 이 태도를 우리 마음속 깊이 찔러 주시기 위해, 한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어느 날 한 집에 손님이 찾아 왔어요. 전화도 없이, 연락도 없이 왔습니다. 밤 10시쯤 도착했는데 차를 대접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다 보니까 이 사람이 굉장히 지쳐 보여요. 그래서 혹시 하고 물어 봤어요. 10시 반이 지났는데 "혹시 저녁은 드셨습니까?" 물으니까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에요. 대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요.
아! 식사를 안 했구나. 근데 밥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말씀은 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야 돼요. 오늘날 같으면 밤중에라도 삼계탕 끓이고, 야식 파는 집이 있어서 문제가 안되지만, 그러나 그 옛날에는 냉장고도 없었어요. 우리 어릴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날 먹을 음식은 그날 장만하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그 당시엔 밥이 모자라면 어떻게 했습니까? 옆집에서 꾸어 옵니다. 밥이 남으면 가마솥에다 그 밥을 넣어 놔요. 덮어놓으면 밤새 따뜻해집니다. 어머니들께서 서로 밥을 빌려 가는 모습을 어릴 때 가끔 봤어요.
그 당시에는 음식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날 벌어 그날 먹으니까. 자기 집에 음식이 똑 떨어졌어요. 오늘날에는 영양가가 많은 음식을 섭취할 수 있으니 하루에 두끼 먹어도 됩니다. 다들 배가 나왔으니까 한 사흘 정도 굶는다 해도 안 죽어요. 그러나 옛날 시골로 돌아가 보세요. 영양가 없는 밥, 한끼만 안 먹어도 다리에 힘이 쫙 빠져요. 이 손님에게 밥을 대접해 주지 않으면 (버스 타고 온 것도 아니고 수십 리를 걸어왔을 텐데) 피곤해서 온 이 손님이 밥을 먹지 못하면, 밤새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자지 못할 것을 이 사람은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이웃집에 밥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았어요. 가서 이웃집 대문을 두드립니다. 여러분, 이것도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돼요. 오늘날 같으면 주인 부부가 자는 창문에 가서 노크하면 되겠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거의 방이 하나였어요. 한 방에 부부가 자고, 한 쪽에 아이들이 다 잤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인을 깨우면 누구를 깨워야 돼요? 가족 전체를 다 깨워야 돼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결단을 했습니다. 가서 문을 두드리기로 결심하고 문을 두드립니다.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주인도 일어나고, 부인도 일어나고, 아이도 일어나고. 남의 자는 집 다 깨웠습니다. "불이 났나?" 하고 나와보니까 뭐라고 합니까? "밥 한 그릇만 빌려 다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가르치신 포인트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태도로 기도해야 됨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끈기라고 얘기합니다. 아니요. 그건 잘못된 것 같아요. 우리가 이 포인트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가 8절에 등장합니다. 한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 (强請)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그 무엇으로 인하여 라고 하셨나요? 강청함! 이 단어가 중요해요. 이 '강청함' 이게 무엇인가? 이 단어는 좀 더 쉽게 번역하면 부끄러움이 없는 거예요. 담대한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태도로 기도해야 되는가를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얘들아, 너희가 기도할 때 부끄러움을 버리고, 담대하게 미안한 맘을 버리고 기도하라"고 얘기합니다.
부끄럼이 없는 것은 때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어요. 나쁜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밥을 먹으려고 줄을 쭉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혀 부끄러움도 없이 새치기를 한 후에 무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그런 인간을 두고 뭐라고 하죠? 철면피라고 합니다. 부끄러움이 워낙 없으니까 피부가 쇠로 됐다는 얘기예요. 그런 부끄러움은 나쁜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때로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좋을 때도 있어요.
제가 얼마 전에 신문을 봤더니 IMF가 와서, 회사에서 전무로 있던 사람의 집안이 망했어요. 이 사람이 결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볼펜을 팔기 시작했어요. 이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전무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지하철에 나가서 볼펜 천원 짜리를 소리를 높여 팔다가, 아는 직원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러나 이 가장(家長)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고, 전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 일을 시작했다고 기사에 나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태도가 바로 이러한 거예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담대하게 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아~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그 가족들 다 깨워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아닙니다. 담대하게 가서 두드리는 거예요. "에이, 염치가 있지, 뭐 하나님 말씀 제대로 순종한 것도 없는데, 이것까지 기도할 수 있나!" "벼룩도 낯짝이 있지, 내가 어제 똑같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 앞에 죄 사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오늘 또 기도할 수 있겠나!" 아니요! 주님은 그러한 태도로 기도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부끄러움을 버리고 담대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줄로 믿습니다.
이 담대함이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 한 구절만 읽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 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 아가자
할렐루야! 여러분, 기도할 때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제 지은 죄를 어제 기도했는데 또 용서해 달라고 미안해서 어떻게 하나,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고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도는 아무 데서나 하는 게 아니에요. 성소에 나가서 해야 합니다. 그 성소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 가운데 그 성소에 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가? 내가 잘나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보배 피 흘려주심으로 그 성소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찢어진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당신의 육체를 통해 길을 만드셨어요. 하나님은 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 우리의 음성으로 바로 듣지 않습니다. 예수의 음성을 통해 들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력을 가지고 기도해야 돼요.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가 기도합니다. 주님의 공로로 제가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셔서 9절에 우리가 잘 아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같이 한번 읽어보십시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세 가지 명령을 하셨어요. 이 명령을 주의 깊게 봐야 되는데, 먼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모두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거예요. 더 구체적으론 현재 명령형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계속해서 구하고, 계속해서 찾고, 계속해서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담력을 가지고, 부끄러움을 버리고, 미안함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하시고 찾으시며 두드리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될 기도의 태도예요.
4년 전, 저희 집사람이 수술한 것을 여러분은 다 아실 것입니다. 암 진단을 받고 동아대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난 다음에 장인 어른께 전화했어요. 제가 평생 저의 스승이기도 한 장인 어른 앞에 눈물을 보였습니다. 전화하다가 울었어요. 우리 장인어른도 우셨어요. 저희 집사람이 다 회복되고 난 다음에 장인어른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간증을 하십니다. 기도 하셨대요. 어떻게 기도 하셨나 하면, 강의 시간 들어갈 때도 기도하시고, 강의 시간 나오면서 기도하시고,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기도하시고, 차를 타고 가면서도 기도하시고, 식사 하실 때 기도하고, 잠자리 들 때 기도하시고, 자다가 깨면 나와서 기도하시고, 화장실에서도 기도하시고, 계속해서 "주님! 제 딸을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셨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주위에 있는 교수님들이 다 아셨어요. 그 기도의 축복을 얘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통해 당신을 변화시켜 주셨음을 간증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기도의 태도인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찾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 직장과 건강과 일용할 양식과, 죄사함과 유혹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이 모든 기도의 제목들을 계속해서, 담대하게 기도해야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친밀한 사랑의 대화입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요? 영(靈)적인 것과 필요한 일상 생활의 것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태도로요? 담대한 태도로요. 마지막 기도의 결과는 뭡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의 결과를 주님은 말씀합니다. 기도의 결과는 최고 좋은 것입니다.
4. 기도의 결과 - 최고 좋은 것
무슨 말씀이에요?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 사실을 주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얘들아, 아비된 자들아! 너희 중에 너희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하면 독이 가득한 독사를 줄 아비가 있겠느냐? 달걀을 달라고 하면 독이 가득한 전갈을 줄 부모가 있겠느냐? No. Way! 절대 그럴 수 없지 않느냐?"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해요. "너희가 악한 사람으로서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어찌 좋은 것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오늘 누가 복음에는 좋은 것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무엇이라 말씀하셨죠?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聖靈)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여러분, 좋은 것 중의 가장 좋은 게 뭐예요? 성령님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해결되고,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유혹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 해결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늘 좋은 걸 주십니다.
여러분, 어릴 때 기억나시죠? 아이들은 사탕은 좋아하지만 약은 싫어합니다. 약을 안 먹으려고 할 때 부모가 어떻게 합니까? "그래, 니 좋아하는 사탕만 먹어라" 고 가만히 둘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아니요. 코를 잡고 먹이죠. 왜? 코를 잡으면 숨을 입으로 쉬어야 되니까 애가 입을 벌립니다. 그 사이에 먹이면 "으으윽~"하고서 먹는 거예요. 그리고 배신 당했다는 눈초리로 부모를 쳐다봅니다. 애가 울죠? 그래도 부모는 또 약을 먹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아이에게 무엇이 좋은지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시라는 거예요.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결과는 주님께 맡기세요. 그리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보기도의 위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몰라요. 성도들이 가끔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 부탁을 하고 기도합니다. 여기에 지금 앉아 계신 장숙자 집사님 남편 되시는 김길수 성도님, 제가 이전의 예배 시간에 기도 부탁했습니다. 동아대 병원에서 혹이 있어서 열어보니, 임파선 암 1차 진단을 받았습니다. 방법이 없어서 그냥 다시 꿰맸어요. 서울 원자력 병원에 갔습니다. 어제 내려왔어요. 이 집사님이 내려오자마자 저희 집에 전화했어요. "목사님" "왜요?" 장집사님이 "놀라운 일이 생겼어요" "뭡니까?" "아무 이상 없으니 집에 돌아가래요" 할렐루야! 둘 중에 하나일겁니다. 동아대 병원에서 오진했던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사이에 낮게 해 주셨던지. 제가 그 가정을 위해 특별히 마음을 쓰며 기도했던 것은, 장숙자 집사님이 남편 돌아오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습니까? 그런데 이제 겨우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데 그런 시험이 왔어요. "주님, 이 시험 물리쳐 주십시오" 라고 많은 성도들이 기도했습니다. 어제 장숙자 집사님이 저에게, 남편이 "이제 새 인생 사는데 교회에 가서 화장실 청소라도 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슨 얘기예요? 믿음이 자라나신 거예요. 할렐루야! 영이 살아나야 돼요. 성령님께서 동행해 주심을 느낀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으십니까? 그분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기도는 친밀한 대화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한 질문을 던지고 제 설교를 마쳤습니다. 당신은 제자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오늘 저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며 제 설교를 마치고 싶습니다. 당신은 기도의 사람입니까? 남은 세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출처/박정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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