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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말이 되려면 (창세기 11:1-9 사도행전 2:1-8)

by 【고동엽】 2022. 9. 22.

말이 말이 되려면  (창세기 11:1-9 사도행전 2:1-8)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신약, 사도행전 2:1-8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말과 관계

남녀가 결혼을 하면 서로 맞추어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부부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부부싸움의 이유를 보면 부시의 경제정책이나 한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의견이 갈라져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갓 결혼한 아내가 식사 시간이 되어서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 국시 드세요.” 이 말을 들은 남편: “이것은 국시가 아니라, 국수라고 하는거요.” 아내: “그게 국수예요? 국시지.” 둘은 팽팽하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다가 옆집에 사는 국문학자에게 가서 물어봅니다. 국문학자는 대답합니다. “국시와 국수는 서로 다릅니다.” “국시와 국수가 왜 다르지요?” “국시는 밀가리로 만들고,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밀가리와 밀가루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네,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겨있고, 밀가루는 봉투에 담겨 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통감자를 삶아서 소금과 함께 내놓으며 남편에게 먹으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니, 누가 감자를 소금에 찍어먹어? 설탕에 찍어먹어야지. 빨리 설탕을 가져와.” “아니, 어떤 집에서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어요? 우리 집에서는 항상 소금에 찍어 먹어요.” “그거 이상한 집이네. 우리는 대대로 설탕에 찍어먹는다니까.”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느냐, 소금에 찍어 먹느냐 하는 문제가 양쪽 집안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전통까지 말하게 되자 그 싸움에 돌아가신 조상들까지 합세하여서 큰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급기야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우리 집에서는 통감자를 먹을 때 아무 것도 안 찍고 그냥 먹는데 말입니다. 감자는 그냥 먹는 것도 맛이 참 좋습니다.

사실 국수냐 국시냐의 문제가 아니고, 설탕과 소금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동시에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관계의 문제입니다. 말의 문제는 마음과 관계의 문제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자네, 당신”이라는 표현 때문에 다투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네, 당신”이라는 표현을 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에는 이 말들을 전혀 문제없이 쓰다가 갈등이 생기면 이 단어가 그렇게 사용하기에 까다로운 어려운 단어로 변합니다. 사실 자네, 당신이라는 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눈을 주목하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군요” 응답을 하면서 경청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만 고개를 끄떡이며 “아 그렇군요” 해도 상대방은 진지하지 않은 모습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대화는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며, 상대방의 의견에 깊은 공감을 가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언어 분열

언어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시던 말씀이셨습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원래 사람의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언어가 갈라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마음이 참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얼마 가지 않고 근심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과 방주에 탄 동물들을 제외한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망시켰습니다. 홍수 후에 인류는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문명을 발달시킵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이후에 인간들은 그 은혜를 길이 기억하지도 못하고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래서 겨우 한 일이란 자신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다가 올 재앙을 이겨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심판하셔도 끄떡 없는 높은 성을 쌓자는 것이었습니다. 문명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이겨내자는 것입니다. 이들은 돌대신에 벽돌을 만들고, 진흙 대신 아스팔트 등 새로운 토목 건축 재료를 사용합니다. 이들은 도시와 높은 탑을 건설했는데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게 건축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어떤 자연의 재앙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들의 교만한 시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소로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인간의 죄악이 깊어져서 또 한 번 심판하시는 지경까지 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악이 깊어지지 않게 예방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저 인간들끼리 의사소통이 안되게 하시는 방법으로 이 사건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갑자기 여러 개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대 혼란이 생겼습니다. 공사 중 물을 가져오라 하면 흙을 가져오고, 멀리 치우라고 하면 도리어 더 가까이 가져오고, 의사소통이 안되니 사고도 많이 나고, 인간들 사이에 갈등도 많이 생겨서 도저히 협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의견이 갈라져서 일치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민족들이 서로 갈라지게 되어 성 쌓기가 중단되게 되었습니다. 언어의 혼란으로 인간들은 결코 동일한 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고, 인간들 사이에는 갈등이 끊임없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언어의 능력을 아시기에 언어를 혼란케 하심으로 인간의 교만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

이렇게 혼란한 인간의 언어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순절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그의 제자들도 모두 도망하고, 군중들도 흩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허무하게 끝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40일 간을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워 주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120명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기도 하기를 열흘째, 갑자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꽃과 같은 모양이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나타나면서 순식간에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제자들이 방언으로 설교할 때에 각각 다른 지방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 나라 말로 알아 듣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당시의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 중에는 여러 외국 지역에서 오순절을 맞이하여 순례를 온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혈통은 유대인이지만 이미 몇 백년 동안 외국 생활을 하면서 히브리어보다는 그 나라 말을 더 익숙하게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지방 출신으로서 외국어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사도들이 유창한 외국어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유대인들이 모두 자신들이 거주하는 나라의 말로 사도들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 지방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리비야,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 이 모든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놀랄만한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방언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주셔서 마음을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새 언어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요약하면 첫째로 인간의 말이 사람을 향한 진정한 말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말을 의사소통 가능한 말로 재창조해 주셨습니다.

오순절 사건은 바벨탑 사건을 갈라진 인간의 언어를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어로 창조해 주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새 언어를 가지고 모든 민족이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언어의 혼란으로 인간들은 결코 동일한 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고, 인간들 사이에는 갈등이 끊임없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성령께서 오시니까 이 언어의 부정적 요소가 해결되었습니다. 언어는 곧 의식이요 정신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영이 일치를 하니까 언어의 부정적 면이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가 그것 자체로 자동적으로 의사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뒤에 있는 정신이 일치할 때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주는 경험인 것입니다. 언어와 그 배후의 정신은 함께 의사소통에 기여를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오셔야 의사소통이 됩니다. 사도행전의 방언 사건은 의사소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이웃과 더욱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신앙의 상투어로만 무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인들은 자기들끼리만 교제하고 사회와 격리된 문화를 가지고 신앙인의 언어가 자기들끼리의 암호 내지는 은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인간의 현실과 자꾸 멀어져만 가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복음은 세상 언어와 너무 떨어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다른 종류의 방언이 나옵니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은 그 뜻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이었습니다. 오순절 방언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했는데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역작용을 낳았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방언을 함으로써 의사소통에 방해를 받고, 대화의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이들은 방언이 제일이다 다른 은사가 더 낫다 하면서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의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세상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단절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잘 알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복음이 잘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성령의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일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말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말이 되게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오셔야 간접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직접적으로 변화합니다. 성령께서 오시기 전의 지식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더라’ 라면 성령께서 오신 후의 지식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 알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직접’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성경이 이해가 안되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전에는 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확신이 갑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

성령은 중보자이십니다. 인간의 일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사람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세번째 성령의 은혜는 사람의 생명을 회복시키십니다.

사람은 숨을 쉬어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영’으로 옮긴 히브리 낱말은 본디 ‘바람, 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의 숨을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었을 때,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물은 숨을 쉬어야 살아있는 생명체이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숨을 쉬어야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네번째 성령은 교회를 만드셨고, 성령은 교회를 통해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믿는 자들은 세례와 더불어 성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믿고 세례를 받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이 활동하신 결과입니다(고전12:3). 또 어떤 때는 기도를 하며 안수를 할 때 성령을 받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은 본인이 성령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도 모두 포함해서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부모 사랑이 사랑인줄 모르고 삽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이가 ‘우리 부모님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얼마나 더 좋아집니까? 하나님께서도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성령의 은사로 하나님의 사랑 더욱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방언을 하고, 병든 사람이 낫게 되고, 귀신을 제압하고,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부르심을 경험하고 나서는 신앙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성령께서는 숱한 ‘성령의 은사’ 가운데 스스로를 드러내십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으셔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신비한 은사를 꼭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방언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병낫게 하는 은사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신비한 경험을 한번 쯤은 꼭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지탱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여러가지 은사를 통해 교회가 자라고 꼴을 갖추고 든든하게 하십니다. 온 교회가 성령의 은사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든든히 서가기를 바랍니다.


출처/박병욱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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