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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앉은 사람들 (마5:1-3)

by 【고동엽】 2022. 9. 21.

산에 앉은 사람들  (마5:1-3)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올때에 어떤 마음으로 나아오셨습니까?
하나님께 제사적 행위를 드리기위함입니까?
신약 시대에 와서 드리는 예배는 구약시대처럼 어떤 의식에 중심이 있지 않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제사나 예배나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그 만남속에 드림으로서의 찬양과 헌금이 있고 받음으로서의 말씀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함으로서의 기념의 의식인 성찬도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만남을 준비했고 만남을 위해서 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는 도구가 있습니다. 바로 '말씀' 입니다.
요한복음서에선 제일 처음 소개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육체나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logos' 즉 '말씀' 이었던 것입니다.
육체로 예수님을 안 자는 예수님을 바로 안 자가 아닙니다. 그의 삶과 그의 도우심을 받음으로 알게된 앎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의 얼굴의 형상도 삶의 기억도 다 잊어버리되 오직 말씀이 관계의 끈이 된 사람들은 다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관계했고 치유도 받았지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제자였던 가룟유다도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볼 수 없어 그를 배반하고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만 유지하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대속의 죽음을 위해 몸을 입고 오실 뿐이었지 사람들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은 오직 '말씀'뿐이었습니다.

2000년전 유대땅 산에 앉은 사람을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말씀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어떤 전달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들은 축복을 누렸습니다. 참으로 보배로운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전달되는 그 감격의 현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능력의 말씀의 현장에서도 말씀이 생명이 되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은 모두에게 나타난것 같지가 않습니다.
랍비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못한 자들에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는 공평하고 유일한 도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간혹 선지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셨지만 그것은 그의 말씀을 남겨 주시기 위함이셨지 항상 사람에게 보이시진 않으셨습니다.
그가 남겨주신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은 오늘도 그를 만나셔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무리를 보시고 ..."
예수님은 따르는 많은 무리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무리들은 어떤 무리들일까요?
그리고 그 무리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은 400년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회개를 촉구하며 메시야를 준비케하는 세례요한의 외침 가운데 오신 예수님앞에 선 무리들의 마음은 강팍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실로 마음이 어두운 자들이었습니다. 목자잃은 양과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강팍한 시대일수록 말씀은 생명수처럼 소중한 것입니다만 사람들의 귀는 필요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단 다른것을 더 바라고 기대합니다. 그것이 바로 물질이고 출세이며 성공이고 건강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는 생각 보다는 나의 영광을 위한 전능자의 도우심만을 구할 뿐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다가 안된다 싶으면 어느 순간엔가 내가 언제 하나님을 믿었느냐는 마음으로 돌아서버리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에 그를 따랐던 무리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무리중에 적지 않은 수가 과거 예수님이 계신곳을 찾아다녔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을 응시해 보십시오.
말씀 하시기에 앞서 무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속의 생각을 궤뚫어 보시는 그 예수님을 먼저 우리는 바라보아야 하고 그 주님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는 마음으로 주님앞에 앉아있는 자들이야말로 축복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지금껏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가진 목사로서 거의 단 한번도 말씀을 소홀히 준비해전한 적이 없습니다. 수요일 저녁 단 5-6분 정도 나와서 듣는 말씀을 위해 하루 온종일 묵상하고 준비한다는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 힘든 일이었겠지만 7,8년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받는 자들은 어떠 했는지 몰라도 전하는 저 자신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준비될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지난 주일밤 지산교회에 설교하러 갔었는데 며칠전 한 형제가 제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께로부터 들었던 두번의 메세지는 너무 큰 감동으로 남아있고 행복합니다"
여러분께 똑같이 같은 음성으로 전한 비슷한 메세지들이었을텐데 차이는 '사모함'이 아니었을까요?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여러분의 자세가 내 영혼을 살찌우기 위한 사모함으로, 생명을 호흡하는 마음으로 나온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산에 선 사람들>
주님은 산 위에서 말씀을 전하실때에 두 부류의 영혼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 부류는 말씀을 듣고자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힘이 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꼭 많은 사람이 있어서 메신저에게 힘이 되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은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참으로 소중한 자들입니다.
산상보훈이 전달됨에 있어 이 메세지를 듣는 대상을 많은 무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짧은 이 한절의 말씀 속에서 중요한 한 문장은 "제자들이 나오온지라" 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나아와 들을 준비가 되자 전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무리에게 흘러 가버리는 말씀이라할지라도 사모하는 제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전달될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동시에 이런 마음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보다는 병낫기만을 바라고 떡먹기만을 바라는 잿밥에 눈이 먼 어리석은 무리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어 말씀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어떤 강팍한 영혼도 변화를 이루는 말씀앞에서 성령이 그 영혼을 어루만지면 말씀 앞에서 거꾸러지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시키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입니다.
여러분이 한 영혼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해 보십시오.
한 1년을 기도하고 그를 예배당에 초청해서 말씀이 그를 사로잡아 달라고 맡겨 보십시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져서 복음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고 말해도 제가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직 예수믿지 않은 영혼 한 사람이 남을때까지 여전히 복음은 능력이며 그 사람은 복음앞에서 정복되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이 전해지는 곳>
주님은 무리들을 산으로 인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자세히 알수는 없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산으로 인도한 것은 말씀을 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어쩌면 말씀을 꼭 들어야 할 사람들만을 골라 내려는 의도인지도 모릅니다.
사사기 7장에 나오는 기드온의 3백명 군사들은 3만명에서 관심없고 지혜없는 자를 다 빼내고 난 숫자이듯 산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말씀에 관심없는 사람들은 떠났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그래도 은혜의 원칙은 있습니다.
'열심히 찾는 자가 만나는 원칙' 인 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여 참고 최선을 다해 노력함이 있으며 온갖 희생을 다 감수할 수 없었던 자에게 하나님은 찾아가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대개는 사모하는 자들이 열심도 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별개입니다.
말씀을 좋아하는 자만 되지 마십시오.
생명의 말씀에서 은혜를 받기 위해 준비하며 노력하고 희생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적셔주는 은혜란 감동을 통해 회개하게 하고 변화까지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변화를 수반케하지 못하는 은혜는 느낌과 감동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곳이 산이었다는 건 특별한 깨달음을 줍니다.
'산' 은 거룩한 곳으로서의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특히 호렙산,시내산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예배당에 나오는 것은 거룩한 산에 오르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갈수록 주일날 황금시간때인 오전 11시에 예배드리러 예배당에 가는 일이 힘들어질 것입니다. 주 5일 근무제가 뿌리내려지면 더더욱 힘들어지는건 당연합니다.
시간이 없을때에는 거룩한 산에 예배하러 올라가는 일이 쉬었는데 시간이 많아지면 더욱 힘들어지는 것이 간사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산에 오르기 위한 준비자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이 바뀐다고 하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변화되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은혜의 현장은 '산' 입니다.

<입으로 전달되는 말씀>
주님이 사람들을 산으로 데려가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란 점입니다.
사람들이 거하는 평지는 말씀이 입으로 전달되기에 힘든 시끄러운 소음이 있는곳입니다. 그러나 산은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또한 지형적으로 소리가 잘 전달될 수 있는 곳입니다.
지금의 터키에 있는 에베소의 로마 원형 경기장을 보니 15000명 이상이 수용되는 곳인데 무대에서 내는 목소리가 끝까지 잘 전달됨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산을 지형적으로 잘 이용한 곳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완만하게 경사진 산에 앉게 하고 조금 낮은 곳에서 소리가 모아질 수 있는 곳에 앉아 말씀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말씀은 전달의 도구가 소리요 글입니다.
그 소리와 글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처음 전달되는 소리가 주는 감동은 가장 확실하고 생동적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대로 역사하셔서 깨닫게 하시는 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기록된 메세지만큼 분명하고 정확한건 없습니다.
문장 자체가 완벽하고 깔끔합니다.
그런데 왜 소리가 중요합니까?
그 시간과 장소적 의미 그리고 듣는 청중이라는 현장이 있고 없고의 차이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다 말하는 메신저와 감동케하는 성령입니다.
같은 메세지라도 전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법입니다.
동일한 사람이 전하는 메세지여도 전하는 메신저에게 감동이 남아 있을때에만 그의 메세지이지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글일뿐이며 소리일 뿐 감동은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감동적 설교를 처음 책으로 편찬하려고 출판 허락을 요구할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시간 성령께서 내려주신 은혜의 불과 번개까지 담을 수 있다면 마음껏 책을 편찬하시오"
요즘 교회를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설교문과 동영상의 현장 설교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2/3이상의 은혜의 방편이 다 빠진 허깨비같은 말씀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입으로 전달되는 말씀을 직접 들으십시오.
성령께서 감동케 하시는 역사를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산에 선 사람들의 은혜를 항상 사모하며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임종학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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