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3:21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어느 선교사님은 여러해 동안 수많은열정 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읍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읍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되었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군악대들의 예포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읍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맞이하였읍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을 갔다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을 받는데, 큰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를 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느끼면서 정신없이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내 아들아!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 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아멘이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창조자라고 묘사된 것은 주후 61년에 발생한 지진의 재해를 로마 정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복구한 것에 대해 시민들 스스로 자만에 빠져 있을 수 있었기에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심을 새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상태에 대한 착각에서 헤어 나오라고 책망하십니다. 자신들은 부자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신앙 생활을 분명히 하라고 권면하시며 즉시 회개하고 계속적인 열심을 내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입에서 토하여 내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소아시아에서 라오디게아보다 더 번창한 도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라오디게아 교회보다 더 빈곤한 교회도 없었습니다. 죽어 있다고 책망 받은 사데 교회조차도 라오디게아 교회보다는 영적으로 부요했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들의 금전적 부요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여기서 '불로 연단한 금'은 참 신앙을 의미합니다(벧전 1:7). 재물이 많다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로는 행복을 사거나 건강, 또는 영혼의 안식처를 살 수가 없습니다. 재물은 다만 삶을 좀더 풍성하게 해줄 뿐입니다. 따라서 재물로만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또한 특산품인 옷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흰옷을 사서 입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권고합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수치의 극치를 나타내는 표현이며 '흰옷'은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인격을 의미합니다. 즉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의 죄를 가릴 수 있는 영적인 옷을 구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 영혼의 수치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이 육체를 장식한다고 하는 것처럼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라오디게아의 또 한 가지 자랑은 그곳에서 유명한 안약이 생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오히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즉 라오디게아 교회는 눈을 밝히는 안약을 자랑하면서도 그들의 영적 빈곤과 벌거벗은 수치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맹인이었고 깜깜한 어두움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비록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상태라 해도 그리스도께서 피로 세우신 교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스도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치 아니하며 열심이 없고 미지근한 교회를 토하여 내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책망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호소의 말씀으로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린다'고 하셨습니다(20절). 그는 성도가 마음의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비록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나지만 하나님은 떠나버린 죄인을 찾으시고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지킨 성도에게 주는 상급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한 성도에게는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길 시험은 부에 대한 자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긴 자에게 주는 약속은 영광의 보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은 그의 왕적 지위를 시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음으로 왕적인 지위를 누리시는 것처럼 승리자에게도 그와 동일하게 권세를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계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나라와 제사장'(바실레이안, 히에레이스)은 문자적으로 '나라, 곧 제사장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제사장들의 집합체를 가리키며. 그리스도인들의 왕됨과 제사장됨을 시사합니다.
(계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나라'는 메시야적 통치의 축복을 말합니다.
옛날에 어떤 부자가 돈은 많이 있었으나 자식도 없고 별로 웃어볼 만한 일이 없어 하루는 말을 타고 여행을 가는 도중에 앞을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옷은 남루하여 산에 안개 두른 듯 했는데 즐거운 듯이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그대는 무엇이 그렇게 기뻐서 춤을 추는가?'한즉 이 거지가 대답하기를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하등동물로 짓지 않고 사람으로 지은 것이요, 둘째 내가 다행히 한 다리만 절므로 동서남북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기 때문이요, 세 째 지금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 없으나 내가 죽으면 하나님 품에 안기울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좋아서 춤을 춘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우리의 소망은 하늘 보좌에 있는 것입니다
(계 2:26.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것처럼 세상 끝에 그리스도인들도 그 권세에 참여함을 시사합니다
저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 자신만을 원합니다.” 이러한 심령이 그리스도의 권세에 동참할 줄 믿습니다.
(계 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나라'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할 집합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가리킵니다(1:6; 20:6).
'제사장을 삼으셨다'는 말은 옛 언약 하에서 특별히 선택된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제 새 언약 하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개인이 직접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며, 섬기고 찬양함을 시사합니다.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의 '땅'은 종말론적 성취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온전히 왕 노릇할 것을 의미함은 물론 현재에 그리스도인이 왕 노릇하는 것도 내포합니다(Johnson).
'왕 노릇하리로다'(바실류슈신)은 미래형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릴 것을 기대하면서 구원받는 자들이 함께 그 통치의 기쁨을 누릴 것을 대망하는 것을 나타내며(2:26,27; 20:4; 22:5) 현재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왕적 통치를 나타냅니다.
어떤 유명한 백작이 자기 집안의 좋은 배경과 화려한 귀족 출신의 신분을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맨발로 거리를 향해 뛰쳐나갔을 때. 묻습니다. “네 야망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랬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내 야망은 다만 한 분.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젠돌프 백작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개인이 직접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며 왕 노릇 할 줄 믿습니다.
(계 20:4-6)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한 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든 당하지 않았든 간에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권을 가지고 천년 동안 통치할 것을 시사합니다.
'살아서'(에제산)는 육체적인 부활을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로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통치할 것을 시사합니다.
나치스당 거두인 '히틀러'의 심장 역할을 한 '괴링'이 범법자로 사형을 선고받는 시간 직전에 그의 부인이 면회를 왔는데 감옥에서 예수를 알게 된 '괴링'이 성경책을 들고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 이름이 요한계시록 중 어디 기록되어 있는지 알아야 하겠다'고 하며 부인에게 집에 돌아가거든 어린 딸과 함께 교회에 나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괴링'은 감옥 안에서 회개하고 사형받기 직전, 이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새로운 생명을 산출해 냅니다.
(눅 22: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나라'(바실레이아)는 국가의 구성 요소인 영토적인 개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통치적인 개념 즉 왕권(kingship)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영토적인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통치적인 왕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물론 이 왕건은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온 하늘나라의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그 날에는 하늘나라에서 예수와 함께하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이 잔치는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해방과 구원의 유월절 축제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제자들은 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보상으로 받게 됩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자녀'로서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성도의 권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가족 관계에 들어가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권세도 동시에 가진 신분입니다.
(딤후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 '왕 노릇함'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하며 현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누리게되는 왕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권리를 회복하고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보좌에'(엔 토 드로노)는 단순히 보좌에 앉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명예와 권세를 주시며 참여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시사합니다(Plummer). 이렇게 그리스도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적인 통치를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암에 걸려 앓고 있던 한 자매를 심방한 목사님이 오히려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33살 먹은 자매인데, 위암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 둘을 남겨두고 죽음 앞에서 씨름하고 있는 자매를 방문해서 여러 가지 말씀으로 권면해주려고 했는데 그 자매는 “목사님 제 병을 낫게 해달라고 주님 앞에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죽을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까요. 주님은 이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존귀한 분이시며.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것을 사람 앞에서 증거할 수 있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부끄럼 없이 주님의 보좌 앞에 설 수 있게 되기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생명을 얻은 자는 하나님 보좌 앞에 설 뿐만 아니라 자리에 함께 합니다.
(삼하 9:13)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합니다.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마 하신 소망의 약속 믿고 인내하는 모두가 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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