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9:1-15절
사람은 누구든지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얻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성공한 사람, 소원을 성취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움켜잡은 사람들이 아니라 기꺼이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할 줄 아는 사람에게 명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오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교회로부터 당연히 대접을 받고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이것을 포기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처럼 결혼을 해서 아내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권리도 있으나 복음을 위해서 그는 가정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비량하고 복음을 전한 것을 고백합니다. 그가 이러한 당연한 권리를 포기한 것은 복음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하려는 열망이었습니다.(12절)
1. 바울의 신분(1-2절)
바울은 1절에 자신을 자유자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자유자란 노예가 아닌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 노예를 부릴 수 있는 귀족 계층에 속한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신앙적으로도 누구의 가르침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교훈과 진리의 스승으로 구속받을 것이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종은 한 주인만 섬기면 되지만 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과 육체에 고난을 감수했고 수많은 위험을 당했던 것입니다. 할 수없이 종이 된 것은 자랑일 수도 없고 본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종의 길을 가는 바울은 교만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고린도사람들에게 분명한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서 자신의 사도직을 말합니다. 그는 자유자가 가지는 권리를 넘어서 사도로써 특권을 가지고 있다, 는 것입니다. 사도는 당시 교회에 절대적인 권한과 영광을 가지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위임된 말씀을 교회와 성도들에게 명령하고 교회로부터 자신들의 필요를 요구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조금이라도 장애가 될까 봐 이런 사도의 특권도 포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가 자신의 사도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두 가지 사실을 예로 듭니다. 그 첫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을 들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다메섹 사건은 남들이 모르는 주관적인 그런 체험이 아니고 그를 사도를 부르신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사도의 자격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 부활을 증명하는 것인데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고 그 부르심의 소리를 귀로 들었고 자신은 그 앞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죽었던 잊을 수 없는 회심사건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고린도 교회를 들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전도와 가르침의 결과로 생긴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지 않았고 사명자로 세우지 않았다면 고린도 교회가 세워질 수 있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위해서 그대가 손해를 많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일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려하고, 내 권리를 다 찾는 사람은 사명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 손해를 보고 포기를 하는 그런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끼칠 수가 있습니다. 초는 녹아야 빛을 내고 기름은 타야 열을 냅니다. 소금이 그대로 있으면 발에 밝힌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은 포기하지 않고 녹지 않는 신자는 사람들의 발길에 차인다는 말입니다. 설탕은 녹을 때 가장 단맛이 납니다.
가끔 교인들은 비판하는 사람들을 들어보면 ‘믿는 사람들이
더 하더라’ 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권리나 이익에 민감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복음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차라리 상대에게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지 말든지 상대가 나를 안다면 그때는 예수님 까닭에 하고 싶은 말도 참고,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말고, 아무리 급하거나 어려워도 상대방을 속이거나 손해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상대를 우습게 생각하거나 함부로 하면 모든 욕은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신자라면 성도라면 예수님을 본받고 본문에 바울을 본받아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기꺼이 포기하고 양보하는 생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2. 바울이 포기한 것들
⑴ 먹고 마시는 권리(4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고전9:4)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로부터 당연히 대접을 받고 부양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선교활동을 위해서 고린도 교회로부터 아무것도 받지도 않았고 요구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가난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미숙하고 어리기에 바울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전도를 했던 것입니다(고전4:12절)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이런 바울의 태도를 보고 바울이 부양을 받을 수없는 스스로의 신분을 알기 때문이라고 음해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람이 얼마나 간사하고 못 되었는가 를 보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물질적인 후원을 받았으면 바울을 욕심의 사람으로 비난을 했을 것이고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을 때는 바울의 사도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신분문제를 들고 나온 것을 보면 사람이 마음을 한번 잘못 먹게 되면 어떻게 해도 관계는 바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아주 불행한 사람이입니다,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만 봅니다.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그 자체가 불행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양면이 있는데 항상 어두운 곳을 보고 말하며 부정적인 것을 들추어 비판해서 일이 안 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⑵ 결혼에 대한 권리(5절)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고전9:5)
이것은 바울이 자신도 결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아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사역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신으로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다른 사도들과 베드로는 아내와 함께 사역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게바를 언급하는 것은 그가 사도들 가운데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고 고린도 교회에서 그를 추종하는 파가 있을 만한 인물이기에 그의 이름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다시금 독신 문제에 대한 원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로마 케토 릭에서는 사제의 독신을 강제하고 이것을 마치 성경의 진리처럼 생각하는 것을 보는데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① 바울은 결혼을 권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본인이 스스로 포기하전에는 누구도 강제하거나 억제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② 전도 사역을 행함에 결혼이 안 된다, 는 원리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본문은 결혼한 다른 사도를 예로 소개합니다. ③ 케토 릭에서 베드로를 초대교황으로 보는데 이것은 그는 아내가 있는 사도로써(막1:30절) 사제의 독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인물입니다. ④ 당시 교회의 기초를 놓았던 사도들이 대부분 결혼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바울처럼 어떤 경우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욱 활발하게 전도를 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모두 바울처럼 사역을 한 것도 아니고 바울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삶을 보편화 시키거나 교리와 하는 것은 성경을 외곡 되게 하는 것입니다
⑶ 일하지 않을 권리(6-7절)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9:6-7)
이 말은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신과 일행들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손수 천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급전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이 확장되고 사역자의 역할이 증대되고 전문성을 띠어감에 따라서 많은 교회들이 바울의 일행을 기도로 물질로 후원하며 그들의 사역에 간접적으로 동참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당연히 선교비나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으나 신생 교회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봉사 정신에서 그 당연한 권리도 포기한 것을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모든 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음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① 병사의 경우입니다 어떤 군인도 스스로의 비용을 쓰면서 군대생활을 하지 않고 그가 속해있는 조직으로 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사도 즉 복음에 전무하는 사역자의 중요한 역할과 보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포도를 심고 가꾸는 농부에 비유됩니다. 포도를 심은 사람은 당연히 그 소출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③ 목자의 경우입니다 목자가 기르는 양떼로 부터 젖을 얻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군사요 천국의 씨를 심는 농부요 양 무리를 양육하는 목자와 같은 자들로써 교회가 그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또 그들의 선교사역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⑷ 구약적인 증거(8-10절)
이것을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바울은 이 문제는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는 사실을 8-10절에 간증합니다.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고전(:8-10)
바울은 앞부분에서 그들을 향해서 일반생활원리에서 실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것이 바울의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주지를 시키고자합니다 본문에 율법이란 모세의 율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르침이 인간의 의견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근거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써 신명기 25장4절을 증거로 내 세웁니다.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25:4)
이 말씀의 뜻은 소를 염려해서 하신 말씀이 주의 일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를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일하는 것은 짐승이라도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주의 사역자들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⑸ 서로 책임질 것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9:11)
기왕에 이 문제가 나왔기 때문에 바울은 확실한 원리와 근거를 가지고 해명하며 가르칩니다. 곤란하고 거북한 문제라고 적당히 슬쩍 넘어가지 않는 것이 바울사도의 가르침 특징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확신에 찬 교사요 선생입니다. 11절은 나는 영적인 것을 너희들에게 주었으니 너희에게 육신적인 것을 요구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점을 말합니다. 이것은 앞부분의 설명의 연장선에서 계속되지만 분명한 것은 사역자는 영적인 것을 교인들은 육신적인 것은 서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영적인 일을 하는 일꾼이 육적인 어려움이나 이것을 위해서 마음과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복음전파에 결코 유익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활에 대한 염려를 하면서 어떻게 신령한 것을 뿌리는 일을 잘할 수 있는가? 하는 반문입니다 바울은 이 당연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신앙이 어리고 또 자신을 오해해서 생활의 방편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악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염려해서 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이런 태도가 원리가 아니므로 오해를 하지 말고 교회는 자신들의 의무와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바울은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더 들어서 이 문제를 매듭 짖고 있습니다.
첫째는 13절의 성전의 제사장은 성전에서 자신의 일만 하면 생활은 다 해결이 되었다 사실과 둘째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마10:10절)을 증거로 들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와 같이 사역자들에 대한 교회의 물질적인 의무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자신의 자비량 전도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모든 사역자에게 보편화 될 수없는 것이라고 주지를 시킴으로 교회는 일하는 사람에 대해서 물질적인 염려 없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다하는 것이 원리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끝맺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 바울의 가르침을 대하면서 바울 같은 사도가 교인들로 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사도 권에 도전을 받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어렵고, 또 못된 인간의 심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던 유대인들, 야고보의 목을 칼로 벤 헤롯의 아들들, 많은 제자들을 죽였던 로마 황제들 그런데 그것이 세상의 대 적자들 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교회에도 그런 죄가 조금씩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선하고 위대한 바울이 교회를 향해서 너희들에게 있는 그 독소를 알아라, 고처라, 뽑아라, 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두 얼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어떤 얼굴로 살아 갈 작정입니까? 주님의 모습을 닮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됩니까? 주여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그의 십자가 아래 쓰러지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권위로 닥아 오는 말씀에 이유 없이 복종하는 신앙 없이 문제는 언제든지 발생하는 것입니다.
출처/조영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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