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에 부응하는 특권과 소망과 의무 (빌2:12-18)
옛날 요단강 계곡 경사진 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화창한 날 세 그루의 나무가 모여서 각기 자기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꿈이 있었어. 나는 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거기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 쓰여졌으면 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 큰 봉사를 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찾아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나의 모습을 통해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알게 될 꺼야."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두 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내 꿈이야.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해변으로 끌려 나가서 큰 범선이 되어서 지중해를 내왕하는 사람들을 도와 날라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모험을 하게하고 저 로마의 풍요함을 이 땅에 심어 줄 수 있지 않겠어?" 그 때 세 번째 나무도 늘어진 가지를 쳐들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이 너희들하고는 좀 달라. 나는 여기 그대로 혼자 남아 있고 싶어. 여기서 내 가지를 하늘로 향하여 치켜들고 산을 오르며 나를 보는 사람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여름에 햇볕이 쪼일 때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이 내 그늘 밑에서 쉬어 갈 수 있으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어?"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나무 그루에 도끼가 와 닿았습니다. 그 나무는 높은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언덕에서 끌려 내려 왔습니다. 목수는 그 나무를 받아서 조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의 재목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이 나무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나무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어느 집의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들이 핥으며 비를 맞아 시들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그 나무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낡아빠진 구유가 되다니"하며 한탄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도 잘렸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배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큰 범선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를 싣고 다니는 작은 어선이 되었습니다. 매일 바닥에 비린내 나는 생선을 싣고 다니는 조각배가 된 그 나무는 절망에 가득 차 자기의 신세를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가 바라던 대로 오랫동안 그 언덕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도 역시 베어져서 그 언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목수들의 손에 의해서 그 당시 중한 죄인을 처형하는 기구인 십자가로 만들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되었나?"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하늘에 별 하나가 나타나서 그 말구유 위를 비추고 구유 위에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이 한 아기를 낳아 눕혔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세상의 어느 건축물도 그 구유와 같은 명예를 얻지 못했습니다. 고깃배가 된 두 번째 나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작은 바다에서 고기나 싣고 다니던 이 배는 자신의 삶이 시간 낭비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작은 배에 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를 제단으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이 작은 배는 세상의 어느 큰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십자가 된 나무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세상 어느 교회를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딴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땅의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나무는 믿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 나무는 언덕 기슭에 있던 평범한 나무였지만 너무나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에게 크신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 자신도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나?"하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쓰일 곳이 어딘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삶의 성공이란 이것을 찾아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거기에 바쳐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의 자세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소망과 의무가 무엇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특별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심혈을 기울여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바울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의 많은 학문이 그를 미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기뻐할 조건이 아무 것도 없는데 믿는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그들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감사할 일이 없는데 감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에 속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삶의 차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속이는 자 같으나 참 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10).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역설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다시 났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한 번만 났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다시 났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워진 사람을 그런 경험이 없는 육신의 사람이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유대인의 공회원으로 상당한 지식과 덕을 구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듭나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특별하기 때문에 하나님만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나 세상 권력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다. 베드로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얼마나 사람을 무서워했습니까? 그러나 그가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난 후 하나님 외에는 두려운 이가 없었습니다. 한 번은 유대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그의 일행을 잡아다가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담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바로 살려고 힘씁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눈앞에서 산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특별하기 때문에 하나님만 신뢰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면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평안합니다. 아버지 손에 붙들려 밤길을 가는 어린아이는 주위가 아무리 캄캄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혹시 돌에 걸려 넘어져도 염려될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힘 있는 손이 붙들어 일으켜 주기 때문입니다. 어린애가 아버지 손에 의지했을 때 절대로 안전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에 보내는 편지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과 기쁨은 통하는 말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생각만 해도 기쁩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술을 생각하면 거기에 심취가 됩니다. 연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을 생각만 해도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기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넘치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이 세상도 가고 그 정욕도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소망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소망은 요한일서 3장 2절 이하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때가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사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이지,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불완전하고 부족하지만, 우리가 회개하고,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의 신령한 혈관 속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죽음이 없는 불멸의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그때 우리 속에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유전으로 받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유전은 우리가 버리고, 하나님의 새 유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성결하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풍성한 성품이 새로운 유전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지만 앞으로 완성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봄 동산에 자라나는 꽃나무와 같습니다. 꽃나무가 처음 풀밭에서 싹이 돋아날 때는 다른 풀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저 비슷합니다. 그러나 꽃나무가 자라면 거기에서 꽃이 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믿는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운 꽃으로 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초생달과 같습니다. 초생달은 아주 작고 빛이 희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점점 커져서 보름달이 될 때가 옵니다. 구름 속에 있는 작은 빗방울이 그대로 있을 때 무슨 빛이 납니까? 아무 빛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햇빛을 받게 되면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남색, 보라색의 일곱 가지 색깔의 아름다운 무지개가 됩니다.
사람들은 신문을 사지만 그 마음속에는 신문 속에 담겨있는 새로운 소식과 정보와 뉴스를 사는 셈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것은 안경이지만 마음속에는 더 나은 시력을 사는 셈이고, 많은 돈을 주고 화장품을 사는 여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름다답고 예쁜 외모인 것입니다. 드릴이 많이 팔려도 드릴 자체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구멍을 사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은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연습과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기위해서 힘들고 입에서 단내 나는 훈련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책을 돈을 주고 사지만 마음속에는 그 책속에 담긴 생명의 말씀을 사는 셈입니다. 믿음생활 제대로 하면 이미 우리는 구원을 사는 셈이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혼자서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에게 비췰 때 우리가 그처럼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소망이요, 이 소망이 그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의무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의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이 있고, 소망이 있는 우리가 현재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예배에 참석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성품을 닮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화평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의 사랑과 화평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인 우리를 끝까지 그 손에 쥐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모든 근심과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갈 것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 여러 방향으로 구부러지고, 굽고, 뒤틀린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뒤틀리고, 도덕적으로 비비 꼬여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들과 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나무랄 데 없고, 불순한 것 없고, 흠집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서 빛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본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에서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이 놀라운 사실에 감격하여 주님의 기대와 소원에 어긋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에 살 때 감사 감격하며 하나님의 소원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림절은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 곁을 비켜 가십니다. 12월은 성탄절 크리스마스가 있는 달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심을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은혜를 모르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자꾸 인간의 계산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또 기다림의 자세로 성탄을 준비합시다. 우리가 메시아를 가슴 조이며 기다리고 있고 또 준비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기다림이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출처/서정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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