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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자가 되라 (대상4:9-10)

by 【고동엽】 2022. 9. 18.

존귀한 자가 되라  (대상4:9-10)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생긴 나무는 나무꾼의 눈에 띄어 제대로 크기도 전에 잘려지고 맙니다. 그러나 못생긴 나무는 나무꾼의 눈에 잘 안 띄기 때문에 잘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못생긴 나무가 굵은 나무가 됩니다. 이것은 대기만성을 비유한 말입니다. 못생겨서 산을 지키듯이 사실 못생겨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못생긴 것이 복이 됩니다. 못생긴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됩니다. 못생겼기에 예수 님을 만났을 때 한없이 예수 님을 찾습니다.

성경을 통독하려다가 읽는 것을 포기하고 싶은 몇 번의 고비가 있습니다. 바로 이름이 계속해서 나오는 족보 부분을 읽을 때입니다.
오늘의 본문 역대상도 읽기를 포기하고 싶은 시험에 들게 합니다. 왜냐하면 역대상은 아담 이후 이스라엘 족보가 1장부터 9장까지 아주 지루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한 장도 아니고 무려 아홉 장이나 계속해서 나오게 되는데 보통 인내력이 아니면 이 아홉 장을 다 읽을 수 없습니다. 500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소한 이름들을 읽어 내려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내를 갖고 1, 2, 3장을 넘어서 4장에 가보면 그 중에서 유독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족보에 이름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짧은 인생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야베스입니다.

2000년에 발간되어서 미국에서 1년이 넘게 비소설 부문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점에 가보시면 "야베스의 기도"라는 조그만 책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성경교사인 브루스 윌킨슨 박사가 쓴 책입니다. 미국에서만 출판 1년만에 500만권 이상의 책이 팔려 나갔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하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제목 때문일까?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을 알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한 사람, 그리고 매일 성경을 읽고 강해하는 목회자들에게도 야베스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아주 희소한 이름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책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들었을까요? 그 제목의 부제를 보면 작은 글씨로 이렇게 씌어져 있습니다.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 아마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사 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베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야베스는 모든 형제보다 존귀한 자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베스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야베스는 무엇보다 형제 가운데 존귀한 자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복에 복을 받으니까,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사니까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팔자를 고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9절을 보면 "그는 그 형제들 보다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존귀한 자라는 것은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다른 형제들보다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존귀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권력을 잡고, 공부는 많이 했지만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은 없고, 권력은 없고, 공부는 많이 못했지만 존경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희망 사항이 있다면 돈도 많고, 권세도 있고, 공부도 많이 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존경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이 인정받을 때 성립됩니다. 어떻게 사느냐,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존경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고리대금을 했다든지, 부동산 투기를 했다든지, 마약밀수로 부자가 됐다면 존경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떼돈을 벌어 갑부가 됐다 하더라도 낮과 밤을 주색잡기나 도박으로 보낸다면 존경받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로 벌고 바로 써야 합니다. 권력도 바로 잡고 바로 써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바로 믿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훗날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후배들이나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거나 손가락질을 받거나 욕을 먹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이었다는 칭송은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욕을 먹진 않아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도 형제 가운데 존귀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친척, 친구, 이웃 가운데 업그레이드 된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를 존귀한 자로 키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야베스는 어떻게 존귀한 자가 되었는가?

1. 비젼(꿈)의 사람이었습니다(10).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시고"(10).
그는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좀 업그레이드된 인생, 남보다 복을 받아서 좀더 높고 넓은 지경에서 살기 원하는 탁월한 비젼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비젼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늘 이렇게 꿈을 꿉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이 "존귀한 자, 큰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초라하고 못나고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라는 칭호와 찬사를 듣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존귀한”이라는 히브리어 카보드는“무거운, 빛나는”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는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왕건을 보면서 한가지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왕릉이 왕건을 어떻게 기릅니까? 한나라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왕건을 어릴 때부터 어떻게 양육합니까? 아들을 존귀한 자로 만들기 위해 먼저 아버지는 아들에게 꿈을 가르칩니다. 무엇보다 비젼을 가르칩니다. 송학이 무너지려는 풍전등화 앞에 꿈만은 잃지 말라고 왕건을 붙잡아 주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꿈이 없는 자는 쓰시지 않습니다. 탁월한 꿈, 비젼이 있는 자는 탁월하게 쓰십니다. 하다 못해 조그마한 헛간을 건축하는 것도 설계도가 있어야 합니다. 설계도가 없으면 구청에서 건축허가를 안 내줍니다. 헛간 하나 지어도 설계도가 있어야 하는데 인생에 인생설계도(꿈, 비젼)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설계도 없는 인생을 위대하게 쓰실 수가 없습니다. 설계도가 분명하고 확실한 인생을 확실하게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에게 인생설계도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꿈과 비젼을 가르쳐 줘야 해요.

자녀에게 어릴적부터 하나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위해 꿈을 꾸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꿈이 없습니다. 애들이 확실한 인생 설계도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지난 학기에 대학생들에게 인생설계도를 그려오라고 숙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꿈이 있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냥 커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면 될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냥 적성에 맞는 일 하나 골라서 하면 될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흐리멍텅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우선 지금이 좋으면 좋은 겁니다. 얼마나 답답한 인생입니까? 얼마나 흐리멍텅한 인생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런 자녀에게 꿈을 가르쳐야 합니다. 비젼을 가르쳐야합니다. 그런 부모가 훌륭한 부모이고 멋진 부모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면 꿈이 생깁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설계도가 그려집니다. 온 땅과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 천지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가르치고 만나게 하면 얼마나 우리 자녀들이 큰 꿈을 꿀 것입니까? "주여!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 라고 꿈을 꾸며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그 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도록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녀들이 야베스처럼 존귀한 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버드는 책200권 기증, 대학세우고1년만에 소천, 동문들 대통령 총장...)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촌놈이었습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자기의 꿈을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그가 파리에 있는 사관학교에 들어갈 때는 그 코르시카 촌놈이 육군소위가 되는 것이 최고의 꿈이었지만 그 꿈이 점점 더 확장됨으로 한 시대를 이끌어나갔던 그런 지도자가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공이 성공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한 자가 다른 일에도 성공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성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자는 성공할 확률이 작습니다. 자꾸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또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비젼은 더 큰 비젼을 낳습니다. 축복은 더 큰 축복을 낳습니다. 사랑은 더 큰사랑을 낳습니다. 믿음은 더 큰 믿음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몸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큰 비젼을 가지고 성공한 자를 보면 과연 사람이 큰 사람이구나 생각하기 전에 저렇게 작은 체구에 어떻게 저렇게 큰 비젼을 가질 수가 있었을까 하고 꿈이 참으로 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커서 크게 된 것이 아니라 비젼이 커서 큰 사람이 된 것입니다.

건국대학교 부총장이었던 유 태영 박사(장로)가 간증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전라도의 조그만 섬에서 중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머슴살이했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는‘내가 언제까지 이 조그만 섬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나도 이 세계를 향해 뜻을 펴리라’고 생각하고 덴마크의 왕에게 덴마크에 가서 농사를 배워 한국의 농촌을 부흥시키고 싶다는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덴마크의 왕이 비행기표까지 사보내고 장학금을 마련해서 그를 초청했습니다. 그는 덴마크의 말 한마디도 몰랐습니다. 그는 7개월 동안에 덴마크 말을 마스터했습니다. 그는 덴마크에서 공부한 후 또 이스라엘에 편지를 내서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지경을 넓힌 사람입니다. 그는 대학의 교수 일뿐만 아니라 부총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유명한 텔레비전의 강사가 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은 영적, 정신적으로 자기의 삶의 지경을 확장해 나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꿈이 사람을 크게 만듭니다. 꿈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꿈이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꿈이 사람을 훌륭하게 만듭니다. 꿈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2. 야베스는 탁월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야베스가 가진 탁월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이었습니다. 야베스는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배경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다 지파의 후예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 중에서도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다지파 중 괜찮은 집안 후손들은 대상 3장에서 소개했습니다. 대상 4장에는 별 볼일 없는 후손들이 소개됩니다. 유다의 아들들 베레스, 헤스론, 갈미, 훌, 소발. 야베스는 소발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뼈대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별 볼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베스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겐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가문의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 운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육체와 삶의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니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붙들고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면 그 모든 환경과 한계적 상황은 능히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계십니까? "나는 너무 없다. 가진 것이 너무 없다. 못 배웠다. 학력도 없다. 더구나 가정도 없고 생긴 것도 별 볼일 없다." 야베스는 그의 출생부터가 고통스러웠던 자입니다. 야베스는 수고로이 나았다는 뜻입니다. 고통, 아픔, 고민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면 김고통, 이고민, 박아픔. 야베스는 어머니의 난산을 통해 세상에 나오면서 선천적으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어로“신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 슬픔, 심한 노동”을 뜻하는 야베스로 지었습니다.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스럽게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혼모 자식, 강간당해서 낳은 자식, 술집여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식입니다. 그 아이를 보는 사람마다 혀를 찰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식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야베스 역시 이런 고통, 이런 저주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인간의 고통, 한계, 저주를 다 함께 안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이란 모든 운명과 난관을 이기는 능력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바로 그 믿음, 그 신앙으로 그는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참으로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말로 팔자를 고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요즘 자녀들은 웬만하면 환경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요. 하지만 인생의 앞날은 누구도 모릅니다. 온실 속에 자란 자녀들에게 언제 어느 때 인생의 큰 시련과 고통이 닥칠지 모릅니다. 그때 이런 믿음이 없는 자녀는 금방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금방 좌절하고 자빠집니다. 참으로 인생이 초라하고 가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야베스의 믿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환경, 상황, 운명, 모든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믿음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자녀가 존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이 넘지 못할 한계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넘지 못할 팔자가 어디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아무리 나쁜 상황, 아무리 저주스런 운명 속에 산다 할지라도 야베스 같은 믿음만 가지고 나가면 모든 한계와 저주의 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르치십시오. 믿음은 강력한 힘입니다. 모든 육체의 한계, 운명의 한계, 고난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존귀한 자가 되게 만듭니다. 믿습니까? 야베스의 형제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이름조차도 기억되지 않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존귀한 즉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링컨은 9세 때에 생모와 사별하고 계모를 맞이한 결손 가정과 가난한 시골 집안으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환경적 장애가 있었지만 오히려 역사상 가장 휼륭한 대통령(지도자)이 되었습니다.

40세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까지 지명되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갑작스러운 척수성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밖에 없는 하반신 불구의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금융회사의 부회장으로 온천에 다니며 요양을 하면서 그의 고향에서 일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오히려 장애의 실의에 빠진 남편의 사기진작을 위해 그리고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욱 활발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아내 엘러너의 적극적인 권면과 내조로 정치계에 투신하여 뉴욕주지사에 당선되었고 재선까지 하였습니다.

1932년 제32대 대통령 선거 때에 미국에 닥친 경제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소망을 제시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제공황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어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의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만일 편안한 평화의 시대에 장애인인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출마했다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오히려 국가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국가원수의 모습에 걸맞지 않는 다고 반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장애를 당하여 온 국민들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었을 때에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에 도전한 그의 모습은 오히려 소망과 용기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확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미국 라이나 화이트 소년 수혈을 잘못 받아 에이즈로 죽음 그 당시 방송 신문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아버지: '네가 이렇게 빨리 가야 한다니 가슴이 아프구나' 아들: '아버지 제게는 소중한 선물을 주셨어요 저는 예수 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인데 나는 조금 빨리 가는 것뿐이에요' 화이트 소년은 참 믿음의 소유자이었습니다. 야베스는 비록 출신환경은 좋지 않았으나 탁월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 그는 확실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병과 사단장 밥 훔쳐먹다 부딪침, 모른다고 하니까 도망감 지금도 못 잡음(롬10:17)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능하신 손이 자기를 도와주어야 자기 인생은 살길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임해야만이 자기의 지경이 높아지고 넓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영육 간에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복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무 곳에서나 가서 아무 신에게 비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복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하고,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복하고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은 물질적인 것이 대부분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은 영적인 것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복은 하늘에 속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신령한 복을 받기 위하여 기도 드린 사람이 있습니다. 야베스입니다. 그는

1).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하였습니다. 야베스는 먼저 기도의 대상자를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정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그것들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역사, 운명, 별들의 운행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담대함과 자부심이 넘칩니다. 모든 한계를 극복하는 능력 있는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모든 절망, 모든 좌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운명과 축복을 창조하는 이십니다. 믿습니까?

430년만에 출애굽,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석방,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이 땅에는 많은 신들이 있고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인간들이 복을 준다고 까지 하는 형편입니다. 시편 기자는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42:8)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하나님을 소개할 때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그러므로 기도는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심이 옳은 것입니다.

2). 영육이 잘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습니다. 영혼도 잘 되고 싶고 육신 적으로도 잘 되고 싶으며 영 육간에 더불어 모든 면에서 잘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영혼에 관하여서는 관심이 없고 육의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어 인간의 본능대로 행동하다가 결국 그대로 죽어가고 맙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복에 복을 더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물질적인 복만은 아니고 영적인 복도 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물질만 가지고는 사람의 마음에 만족이 없고 영적인 욕구가 충족될 때에 만족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먼저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물질적인 복도 받아서 사는 날까지 영 육간에 풍족한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고 하였습니다. 복에 복을 더 하사 지경을 넓혀 달라고 했습니다.

이미 받은 복이 있는데 그 위에 복을 더해달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6을 보면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은혜나 복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받을수록 좋고 더할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저는 뺄셈보다는 더하는 셈을 좋아합니다. 나누는 셈보다는 곱셈을 좋아합니다. 축복과 은혜는 덧셈이 되고, 곱셈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도 덧셈이 되고, 곱셈이 되어야 합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해지고 곱해지기를 바랍니다.(은혜, 복, 사랑, 소망, 믿음, 기도)
야베스는 복에 복을 더 하사 지경을 넓혀 달라고 했습니다. 지경이란 땅의 경계를 말합니다. 경계를 넓혀 달라고 했습니다

3). 평안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목적이 영 육간에 아울러 복을 받는 것이고 영 육간에 아울러 복을 받은 것은 정신적으로 평안하여 근심이나 환난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개인이나 가정이 평안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고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그리고 늘 불안과 공포가 있다면 이 또한 좋은 현상은 아닌 것입니다. 환난을 벗어나고 근심을 해결하는 비결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손이 나를 도와 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 성가가운데 '나의 등뒤에서' 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곡의 가사처럼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는 하나님, 나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시며 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에게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심'이라는 단어는 "메리조"(분리시키다, 나누다)라는 말과 "누우스"(마음)라는 말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근심이란 마음이 둘이나 셋으로 분리되고 나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찰스 스윈돌은「다시 웃자」라는 자신의 저서 속에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근심입니다. 근심이란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는 일에 대한 터무니없는 염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이라는 독소는 서서히 그 효과를 발휘해 기쁨을 부식시킨다는 것입니다. 둘은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는 근심보다 더 심각한 것인데 스트레스가 쌓이면 정신과 육체를 괴롭히고 모든 질병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셋은 두려움(공포)입니다. 이것은 위험이나 불행이나 고통이 있을 때 느끼는 무서운 불안정인데 근심이나 스트레스처럼 기쁨을 빼앗아 가고 사람을 망가트린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근심, 스트레스, 공포는 기쁘게 살고 싶은 사람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원수인 것입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공포증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공포증이 500여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뱀 공포증, 고소 공포증, 어둠 공포증, 개 공포증 등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공포증을 치료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연구되고 있는데 가장 확실한 치료 방법은 공포의 대상을 피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대면하고 바라보는 적극적 방법이 최고라고 합니다. 근심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하여 성경은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길을 보여 줍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했고, 요한 복음 14:1에서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5:7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세 구절 말씀을 합하면 근심을 해결하는 비결은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입을 열어 맡기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야베스에게 어떤 환난과 근심이 있었는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큰 시련을 겪었고, 근심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환난과 근심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응답 받고 근심을 해결한 것입니다. 태산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은 근심도 하나님께 맡기는 순간부터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염려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늘 염려를 가슴속에 넣고 궁상 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톱밥 위에 톱질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결정된 과거, 끝나버린 결과를 놓고 톱질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주님 말씀에 염려한다고 되는 것이 있느냐? 염려한다고 키를 한자나 크게 하겠느냐?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아무 생산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를 주께 맡기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빌4:6,7).
모든 걸 주께 맡기며 기도합니다. 모든 고통, 한계,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기도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능력과 기적을 경험합니다. 존귀한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살길, 우리 자녀의 살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기도, 능력 있는 기도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면 평범한 사람이 100% 이상으로 역사 됩니다.

성도들이 걱정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물질, 자녀걱정입니다. 그러면서 막 염려만 합니다. 왜 염려하세요? 염려, 근심, 걱정한다고 자녀 키가 큽니까? 성적이 달라집니까? 운명이 바꾸어집니까? 염려해 가지고 된다면 저도 늘 염려만 하고 살겠습니다. 늘 새벽마다 일어나 염려만 하겠습니다. 교회에도 염려하는 기관을 많이 만들겠습니다.

예를 들면 염려위원회, 염려 선교회 그러나 염려해서 되는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마귀만 틈타고, 불 신앙만 생기고 시험만 듭니다. 육체에 병만 찾아옵니다. 하지만 기도하면 존귀한 자가 됩니다. 팔자를 고치게 됩니다. 영광스런 인생이 됩니다. 걸작 인생이 됩니다. 우리의 지경이 넓어지고 모든 환란과 근심에서 벗어나 존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내 손안에 쥐고 있으면 내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현금이나 보석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내가 지키고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만 은행에 맡기면 그 날부터 은행이 책임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말씀하신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는 말씀의 뜻은 믿고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 하셨더라"로 끝납니다. 드라마나 영화로 치면 해피엔딩인 것입니다. 잠언 10:22을 보면 "여호화께서 복을 주심으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복을 주시고 근심은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나를 괴롭히고 근심과 걱정을 주지만 하나님은 내게서 근심을 물리치시고 기쁨과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근심, 걱정의 반대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심을 털어 버리고 기쁨과 평안을 주안에서 누립시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기쁨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을 네게 주노라 행복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행복 행복 행복 행복을 네게 주노라"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영적으로는 신령한 은혜와 육 적으로는 건강과 물질을 받고 정신적으로 평안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줄 믿습니다.

주여! 저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시옵소서. 주여! 저의 지경이 넓어지게 하시옵소서. 주여! 저에게 환란과 근심이 물러나게 하시고 평안한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며 모든 것을 응답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기구한 운명을 이기고 참으로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과연 야베스의 강점은 불우한 환경에서 기도하고 기구한 팔자를 고쳐 가장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야베스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천하였던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그를 존귀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존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더 이상 비천한 자들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벧전2:9). 내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렇게 바뀌어졌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옛날의 내가 아닙니다. 존귀한 자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존귀한 자가 되었으면 어떻다는 것입니까? 비천하였던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존귀한 자로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존귀하게 된 우리는 어떠냐는 것입니다. 존귀하게 되기 이전의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셨다면 이미 존귀하게 된 우리의 기도를 안 들으시겠냐는 것입니다. 결론은 반드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내 운명을 바꾸어 주십니다.

그래서 존귀한 인생답게 살게 하십니다. 나의 과거가 어떠하였던 간에, 나의 신분과 출신이 어떠하였던 간에, 나의 가문과 조상이 어떤 사람들이었던 간에 그것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 전부터 나를 위해 예비해 놓은 그 복을 구하십시오.

야베스와 같이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하십시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는 존귀한 자처럼 하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은혜가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성도 님들에게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원영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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